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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기도] ② Comtemplative Prayer by Thomas Merton
토머스 머튼(1915-1968) 지음 / 박정순 역 VII
관조 기도가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수도원 갈등의 한 요인이 된다고 보기 시작한 초기 베네딕트 회의의 한 사람은 St. Gregory였습니다. 그의 "대화(Dialogues) 라는 문서에서 성 베네딕트는 완전한 기도의 카리스마적 모델이며, 그의 기도와 예언적 통찰력을 가지고 수도사들을 인도하고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흑암의 세력에 대하여 보호해온, 수도사 사회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고 있는 동안 수도원 교회에 서서 그의 영적 아들들의 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성 베네딕트의 죽음은 물론 성 그레고리와 그를 본받은 베네딕트 회의 전통에 의해서 아주 깊은 절대적인 중요성을 주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현대 베네딕트 회의 당국에서 성스러운 목요일에 일어난다고 믿고 있으며 좌우간 전통적으로 전 생애를 예배의식에 바친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건이라 간주하고 있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이 일어나서 기도를 노래하기 전에, 밤중에 탑에 있는 방에서 습관적으로 하는 단독 묵상 기도를 할 때, 그에게 주신 베네딕트의 비전(vision)이 더욱 더 중요한 사건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 베네딕트는 단독 수도원 기도의 전형과 모델을 보여주었고 이것은 또 상징적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수도원 전통에 대해서 친숙한 자는, 수도원 기도 생활에는 성스러운 모범이 없으며 밤에 산 위에서 혼자 하신 그리스도의 기도를 본받은 필연적 단독 관조의 요소는 포함되고 있지 않는 다는 것을 당장 알게 됩니다. 성 그레고리는 말하자면 수도사의 카리스마적 아버지요 기도하는 사람의 한 성상(ikon)을 창작하여 성 베네딕트의 초상화를 넓고 이상적인 필법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애를 생각 하였을 때 " Morelia in Job"에서 잘 표현했듯이 그는 그 자신이 단독 관조를 하고 싶은 그의 마음의 소망과, 그의 시간과 정력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으로서 활발한 자선 사업에 받치고 싶은 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였습니다. 오래 전에 Dom Cuthbert Butler 가 지적한 것 같이, 그레고리의 활동과 관조 사이의 갈등에 대한 처리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그의 이론의 가장 근본적인 면의 하나입니다. 그것으로 그 다음 시대의 베네딕트 회의의 생존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관조자와 활발하게 사는 성직자들, 세속의 목회자들과 종교적인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성 그레고리의 가르침은 보다 적지 않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활발한 생활을 예기 한데로 묘사한 후 그레고리는, 베네딕트의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어 서양 수도원 전통에서 거의 인용구가 된 관조 생활의 고전적 정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다시 인용해야 하겠습니다.
관조 기도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유지 하는 것이며 외부의 활동으로 부터 휴식하고 다만 창조자의 욕구에 충실해야 한다. 마음은 지금 아무 일에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 이며 모든 관심사를 차 버리고 창조자의 얼굴을 봄으로 흥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타락하기 쉬운 육신의 부담의 슬픔을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그리고 하늘의 시민들과 교제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천사의 합창단과 합하고자 하는 이 모든 욕구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원한 결백함을 즐거워하는 것을 벌서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관조의 정의를 영적 성질의 것이라 할지라도, 활동을 배제하는 것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것 같이 보인다(seems)" 라는 말을 써서 활동을 제외하였습니다. 사실 관조는 활동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더 설명이나 조건이 없이는 위에 인용한 St Basil의 긴 규칙의 본문과 대조 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개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 둘은 조정할 가능성이 있으나 이는 서로 반대가 된다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의 활동적 관념이며 이는 일을 신성하게 합니다. 다른 관조 개념은 기도를 더 깊이 하나님의 신비성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외부의 활동으로부터 휴식하고 다만 창조주의 욕구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이에 동의하든지 안 하든 간에 수도원 전통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때로 제 이의 개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Basilian 의
"일하며 하는 기도(Prayer with work)"라는 개념을 참되고 정말 실행할 수 있는 개인의 관조 법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해결법이 선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사실상 활발한 생활의 또 다른 면으로 관조를 낮추어 "기도와 함께 하는 활동 (Activity-with-prayer)"을 관조와 동의어 취급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이는 성 그레고리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레고리에게는 관조 생활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수 없는 천국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도사에게 주어 졌고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의하여 하늘의 결백함을 어느 정도 기대하면서 시작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세상에 존재하기에 적절한 활동적 삶은 관조를 위하여 불리 운 자라 할지라도 항상 배려를 요구 합니다. 첫째로 성 그레고리에 의하면 관조 생활은 이론상 활동적 생활보다 우수하고 보다 좋으며 가능 한한 활동보다 택할 만하나 때때로 활동이 관조를 대신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명 하셨으므로 둘은 다 사실상 자선사업에서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목사의 생활이든 관조하는 수도사이든 어떤 땅 위에 소명이든 쌍방이 필연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 주장 사이의 갈등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들의 개인적 사명감에 따라 요구되는 균형을 이르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사는 그의 생활에서 기도와 묵상의 필요성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이론상 관조 하는 수도사는 활동보다 관조를 정당하게 할 수 있을 때는 택해야 하며 활동을 위하여 관조를 떠날 때는 엄격한 의무의 요구가 있을 때입니다. 그레고리는 그것이 의무의 문제에서 제기 되었다 할지라도 관조자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고뇌와 갈등의 의식을 격려 하였습니다. 관조자는 주교의 직무를 받아 자선 사업을 할 의무가 있을지 모르나 절대로 그런 직무를 찾아서는 안 되며 사실 이를 두려워해야 하며 모든 합법적이고 합리적 방법으로 피해야 합니다. 이 원칙은 모든 동정심에서 나왔으나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 모든 "세속의 실업에도 적용됩니다.
이 활동과 관조에 대한 문제의 처리는 이것을 해결하기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 그레고리는 특별한 환경에서 자기가 경험한 결과를 우리에게 단순히 알려주고 있으며 이 일에 대하여 최종의 결정을 내리려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에 그를 아주 중요하게 인정하였습니다.
수도사의 사명은 그가 수도원에 체류하여 기도하고 그가 가끔 경험하듯이 수도원에서 부름을 받으면 교회 사무에 종사 합니다. 그가 울며 애도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주 진심으로 행합니다.
우리는 성 그레고리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는 St. Bernard가 12세기에 같은 질문에 대하여 유사한 결론에 달하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었던 성 그레고리는 수도사뿐 아니라 목사들(주교들)을 위하여 글을 썼으나 성 베르나르는 거위 전적으로 수도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VIII
St. Bernard에 의하면 수도원 생활에서 3가지 소명을 발견 합니다. 나사로의 회개의 소명, 마르다의 활동과 수도원 가사에 헌신하는 종의 소명, 그리고 관조자 마리아의 소명입니다. 성 베르나르가 말하기를 마리아는 가장 좋은 역할을 맡았으며 마르다를 부러워할 것도 없고 마르다가 수고를 나누자고 부탁하지 않는 한 관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성 베르나르의 숨은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마리아가 마르다를 시기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사실 대다수는 마리아의 역할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이며 같은 집에서 일가를 이르고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성 베르나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보충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참된 수도원의 완전성은 무엇 보다 회개, 활동적 일꾼(특히 영혼의 보호 아래서) 그리고 관조자. 이 세 가지 소명이 보다 화합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 베르나르가 영혼의 보호를 말할 때 수도원 밖에서의 사도의 일 보다는 다른 수도사를 지지하고 지도하는 임무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에는 목사와 사도의 일꾼이 심각하게 필요하였습니다.
성 베르나르에게 관조 생활은 수도사로서 정상적인 것이며 언제나 욕구되고 항상 택해야 하지만 필요에 따라 활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조는 항상 요구되고 더 좋아해야 합니다. 활동을 찾아서는 안 되나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결국 온전한 수도원 생활은 한 사람 안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스가 화합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은 베르나르 자신 같은 대수도원장일 것입니다.
물론 성 그레고리나 성 베리나르가 항상 관조를 이런 무제의 견지에서 관여하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참으로 다량의 활동이 요구됨으로 그들의 관조기도의 침묵을 위한 갈망을 그들은 열렬히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관조는 그들의 사도사역 생활에 알려져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실로 우리는 그들의 관조 경험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신비한 은혜를 주심으로서 확실히 더 깊고 더 풍부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쨌든 관조가 문제의 부분이나 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 혹은 상상적 활동에 대한 반대이며 관조가 외부 활동으로부터 떠난다는 우선권을 명백히 하였을 때 즉시 일어납니다. 나는 현세대의 관조와 예배의식 사이의 갈등을 수도사 교부들에 의하여 길게 또는 심각하게 쓴 문장을 한 줄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성 그레고리나 성 베리나르가 여행할 때 외에는 교회에서 예배 의식의 직무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 우리는 아마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관조에서 빠진 것을 한탄하는 것은, 예배 의식에서 빠진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관조에 관하여 그들은 예배 의식 기도를 초월한 그 무엇을 의미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길로 논의를 추구하는 것은 다만 혼란으로 이끌 것이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벌서 충분히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성 베르나르가 공동체를 떠나서 사적 기도를 어느 곳에서 허용할지 생각해 봅시다. 이 문제는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무가치하게 보일 것입니다. 시토수도회 수도사는 관습에 규정된 묵상적 독서와 공부를 수도원에서 할 때 수도원에서 자기 시간을 관조로 보내도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독거에 대한 요소와 다른 형제들로부터의 임시적 분리를 허용할 것 인가 입니다. 성 베르나르는 주저 하였지만 이를 허락 하였습니다. 시토수도회는 아마도 수도원에서 공동 생활하는 것을 항상 가장 강하게 하는 교단입니다. 그러나 시토수도회의 상황에 있어서도 성 베르나르는 말 할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공동된 점이 없고 아무 관계도 없이 대중과 홀로 앉아, 거룩한 사람은 혼자 나마 있고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떠나 홀로 그를 위하여 자신을 보존 합니다.
성 베르나르에 있어 "홀로 혼자와 같이"라는 신 플라톤 파의 topos의 사용은 좀 생소한 일입니다. 이는 물론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서 홀로 기도하신 고전적 복음을 참조한 것으로 지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내적 독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만 비밀리에 마음의 내적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들어오시고 그들 뒤로 문을 닫으십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솔직하게 덫 부처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시간에 특히 편리하게 할 수 있다면 육체로라도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음기도(mental prayer)를 위한 어떤 규정된 시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사가 자발적으로 홀로 기도하고자 할 때를 말합니다. 수도원 전통을 따르면 수도사의 활동은 아주 조그마한 세부까지도 외부의 규칙에 따라서 전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사 자신의 기도의 규칙에 따라 은혜의 영감에 응하여 실제로 규정된 규칙보다 기도 시간을 더 주며 또 이와 같이 규정된 규칙보다 금식과 자기 수양을 하는 일을 더 할 수 있는 어떤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수도사는 은혜의 내적 영감과 순종의 외적 축복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 자신의 내적 관조 생활의 계획은 이 둘을 합한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 드려야 합니다.
성 베르나르와 동 시대 사람이며 Cluny의 대수도원 장이었던 Peter the Venerable 은 고립된 사적 기도를 성 베르나르 보다 덜 주저 하였으며 더 명백하게 격려 하였습니다. Cluny회의 집의 수도사들은 은자가 완전한 독거를 허용 하였을 뿐 아니라 cenobites 는 더욱더 예외로 긴 시간을 공동체로부터 떨어진 경리된 장소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De Miraculis에서 그의 시대에 베네딕트 회의 수도사 한 사람이 한 탑의 높고 외딴 곳에 있는 조금한 채플을 마치 암자(cell) 같이 사용하였으며 그의 기도하는 장소로서 수도원의 다른 어떤 곳 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그곳에 밤낮 남아 있었으며 창조자의 임재 안에서 그의 내적 비전을(vision) 가지고 그는 서서 항상 동반하는 가장 복된 천사와 함께 모든 인간보다 위로 올라간 마음을 가지고 신성한 관조에 열중 하였습니다.
IX.
끝으로 12세기에 또 다른 베네딕트회의 증인의 의견을 살펴봅시다. Peter of Celles 는 중세기에 가장 매력적인 수도원 저자들의 한 사람 입이다. 여기서 다시 성 그레고리와 성 베르나르의 경우와 같이 우리는 수도원의 침묵과 묵상을 더 좋아하였으나 대수도원장뿐만 아니라 주교로 임명된 관조 인격이며 재능이 있고 마음씨가 따뜻하며 지적인 사람과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Peter of Celles 는 활동과 관조 사이의 갈등을 경험 하였으나 이것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이를 당황하게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을 즉시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갈등도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는 감독파(Episcopal) 선정을 거절하기 원하는 Clairvaux의 대수도원 장 인 Henry 를 위하여 진지하고 심각하게 알랙산다III 세 (AlexanderIII) 교왕에게 탄원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교왕에게 아주 솔직하게 이 수도사의 태반을 관조 생활에서 박탈하고 이세상의 폭풍으로 무모하게 던져 넣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감독파의 일은 베드로에게 있어 다만 "세상"일 일뿐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독서와 묵상을 위하여 자기를 받치고 활동이나 사업의 짐을 거절하는 사람은 솔직히 칭찬하고 추천할 만 하다고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경우에 따라 책임과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직무를 직면하면 솔직히 받아 들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경우 그는 근래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친구에게 산란하게 하는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Peter of Celles에 있어 예배의식과 사적 관조는 완전히 조화 되여 나란히 존재합니다. 그는 대수도원장의 바쁜 생활에서 30분의 시간을 짜내어 설교를 구성할 수 있었으며 예배의식 축제의 기쁨 중에 짧은 묵상을 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 겨울의 긴 밤을 wmf깁니다. 이는 독서와 침묵의 관조기도로 그의 마음의 휴식이 되고 새롭게 하는 여가의 더하는 시간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쉬며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관조의 안식일을 묘사하기 좋아합니다. 조용하고 초월적인 활동은 그 순수한 마음 안에서 고행의 수고를 위하여 관조자를 보상합니다. 이 수고는 다른 옛 의미에서 활발한 생활입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훈련, 고해성사, 금욕의 생활입니다. 미덕 없이는 참되고 영원한 관조는 없고 훈련의 수고 없이는 사랑 안에서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행이 사람의 내부를 정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면,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 안에서 쉬고 있을 동안 우리 안에서 사역하신다. 이 휴식 자체가 창조적이며 이 창조주의 일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사역은 평온함에서 다른 모든 나머지 일을 초과 한다. 사실이 휴식은 다른 어느 사역 보다 더 생산적인 것으로 빛난다. 그러므로 우리 관조의 이 활동 혹은 휴식을 만들자. 그리하여 다만 희미하고 간단한 윤곽이라 할지라도 한 모델(하나님 안에 있는 사역과 휴식)을 재생하도록 하자---이들은 그늘진 곳이나 밤이 아니라 낮에 빛 안에서 정의 의 햇빛 안에서 행해질 것이다. 악한 밤에 코고는 사람은 관조의 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Peter of Celles 는 활동과 관조기도를 비교하면서 그것들이 갈등이라기보다는 서로 완전하게 조화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물론 성 그레고리와 모든 라틴 신부들에 의하여 오래 전에 대중화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활동적 기도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관조기도는 하늘로부터 은혜의 복을 주십니다. 둘 다 필요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보좌를 얻지 못합니다.
마음이 그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 기도는 힘들며 (활동적 ) 하나님은 마음에서 멀리 떠나 있다. 불필요한 근심 걱정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을 때 혹 종교적 열정이 식었을 때 그렇지 않으면 육체적 욕구에 열중하였을 때 사람의 마음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 그가 은혜를 물러나게 하고 그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으며 탄원자의 인내를 시도할 때 하나님도 마음에서 멀리 떠나 계시다. 은혜가 속히 왔을 때 그것이 마음에 가득 찼을 때 요구하기 전에 은혜가 거기 벌써 있을 때 우리가 원하는 것 보다 생각 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우리에게 주셨을 때 기도는 열렬하다(관조적).
St. John of Chrysdstom이 이전에 말한 것 같이 "이집트를 떠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역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관조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며 필연적으로 신비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X
베네딕트 시대의 어느 특유한 책들의 간단한 일람을 보면 우리가 예측한 것 같이 기도는 수도원 생활에 아주 중심을 이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거기에서 아무데도 예배 의식과 사적 기도 간의 명백한 갈등이 없습니다. 이 두 부분은 조화된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활동적 생활과 관조 생활 사이의 갈등은 있으며 Peter of Celles 와 같은 저자에 의하여 다소 완전히 해결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현실적이며 대체로 성 베네딕트의 정신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생명은 필연적으로 활동과 휴식,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계발의 요소들을 경비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때로는 무미건조하며 위안이 되지 않는 방식의 기도를, 다른 때에는 만일 그가 충분한 호의를 품으셨다면 거의 아무 노력 없이 사람은 은혜와 빛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과 휴식간의 변천(vicissitude- St Bernard가 쓴 용어 입니다)혹은 변동은 공공과 사적 기도 간의 분할 선을 가로지르며 아주 명백하게 양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래 예배의식 기도는 더 활동적이지만 언제나 관조의 은혜로 계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예배 단체의 신비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공공 예배보다 사적 기도는 본래 더 큰 개인적 자발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으나 뜻하지 않게 더 무미건조하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초기 베네딕트 세대의 교리에 의하면 "공무적 공중 기도"와 "자발적 사적 기도" 간에 대립은 주로 현 시대에 꾸며진 소설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공식 기도를 참된 관조 기도로 간주하던지 혹은 이런 형용사를 사적 기도에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선택하였든 간에 이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까요? 이 어려운 문제의 답은 아마도 반 종교 개혁 시 베네딕트 회의의 기도를 잠시 고려함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고 특히 유효한 훈련으로 마음기도(mental prayer)를 강조한 것이 수도원 개혁운동에서 당시에 인기 있는 것으로 되었고 15세기에 시작 되었으며 Trent 회의 후에 거의 우주적이 되었습니다. 많은 문서 중 한 실례를 들으면: 베네딕트 회의의 대수도원 장이며 스페인의 Monterrat 의 개혁가인 Garcia de Cisnero (1455-1510)는 최초 스페인 신비주의자(Catalan, Raymond Lull을 제외하고) 로 또 St. Theresa와 St. John of Cross의 선배라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는 또 St. Ignatius Loyola 의 선배로서 영적 훈련에 대해서 자주 고려되었습니다. Garcia de Cisnero는 Valladolid에서부터 Monserrat의 개혁을 착수하도록 Ferdinand 와 Isabella 의 명을 따라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의 개혁에 도움이 되며 이를 이행하기 위하여 그는 두 책을 썼으며 둘 다 기도의 안내서입니다. 둘 다 베네딕트 전통을 따른 것 입니다.
그 중 하나는 성무일도 규칙서 (Directory of the Canonical hour)이며 성무일도서의 내용(divine office) 의 이해를 다시 깨우치기 위한 또 수도사가 이것을 열정과 이해를 가지고 노래 부를(chant)수 있도록 시도한 것 입니다. 또 다른 책은 사적 또는 묵상적 기도의 정신을 소생시키는 목표를 삼았습니다. 이는 독서, 묵상, 관조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전통적인 중세기 형식의 기도 생활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적 생활에 대한 많은 독실한 논문을 남겼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며 devotio moderna 에 의하여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Garcia de Cisnero 가 쓴 수도사의 내부 생활에 대한 책은 실제로 영적 훈련이라 불렸습니다. 이는 명백히 성무일도에 대한 다른 책보다 더 많이 인기가 있고 영향을 주었습니다.
16세기의 한 수도원 개혁자가 바로 지나간 과거의 좋고 나쁜 그를 가르칠만한 실례를 회고할 때, 기독교인 기도의 극히 중요하고 확실한 증거를 제 3급(예를 들어 Catherine of Siena같은) 을 포함한 탁발수도 교단(Mendicant order)성자들 가운데서 그리고 또 다소 탁발사도 회의 지도하에 번성한 신비 운동 속에서 발견하였으며, 도미니쿠스의 신학자인 Eckhart나 Tauler같은 사람에 의하여 지도를 받은 Dominican 여자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Rhenish 신비교를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가끔 그렇듯이 신비주의를 의심을 가지고 주시하였음으로 개혁자는 언제나 명백하게 안전한 devotio moderna 로 물러서 있었습니다.
중세기 수도원이 열정을 상실하였을 때 그 마지막 의식을 정확하게 실행하는 것을 중지한 것은 합창 성무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열정 없는 일정으로 타락하였을 것이나 수도원 제도 역사는 수도원 안에 금욕주의와 사적 기도의 정신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성무를 대체로 경건하고 훌륭하게 계속 낭송하였을 것이라 합니다.
직접적이고 긴급한 문제에 직면한 반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에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체로 예배의식의 잘 조직된 구조에서 그들의 영혼은 떠났으나 아직 상당히 잘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개혁자들이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장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어떤 점에서 개혁의 선봉으로 도입시킬 것인가 하고 사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사적 기도와 경건한 영역에 실로 강하고 결정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고로 묵상의 방법을 가르치고 영적 지도를 함으로서 묵상과 근신의 양면을 수도사에게 지도하였습니다.
Devotio moderna 의 모범과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개인의 헌신과 감정적 기도(affective prayer)에 대한 주장은 이러한 노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로 개인적 열정적 기도와 기도 생활에 규칙적 안전한 기초를 제공하는데 항상 의지할 수 있는 형식적 직무적 공공적이라 생각되는 예배의식 기도 사이에 뚜렷한 분리의 개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기초 위에 무엇을 세울 것입니까? 사적, 감정적 신앙감. 이는 예배의식 기도라 할지라도 개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라 묵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옛 전통과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대에 열렬한 수도사는 기도와 관조조차도 그 자신의 요소를 가할 것입니다. 고로 객관적 의식적 예배보다 주관적인 요소를 예배의식에 더 하는 것이 사실상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식 기도에는 객관적 요소가 남아 있으며 이것이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관적 환경에서 진지한 개혁자가 이에 더하기 원하는 더 좋고 열렬한 개인 기도에 장애물이 된다고 간주하게까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진심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의식이 끝이기를 기다린 후 자발적이고 주관적 기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아주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입니다. 끝으로 평신도가 묵상이나 감정적 기도의 헌신에 열중하게 되었을 때 목사가 devotio moderna 의 길을 따라 그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베네딕트회의 수도사들이라도 새로운 경향의 영향을 받아 신비한 영혼의 지도자 혹은 적어도 묵상의 스승이 되려 할 것 입니다.
유명한 예로 Dom Augustine Baker가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베네딕트회의 관조자들의 하나이며 또 많이 토론된 인물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영국 베네딕트 회중 (English Benedictine Congregation)에 의하여 산출된 아마도 그가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Dom Chapman과 평등 하게 된 현 시대에 이르기 까지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존경 받은 유창한 명장이었습니다. Dom Augustine Baker 가 기도의 활동과 관조 방식 사이의 절대적 분열에 반항적 제의 자로 끝나게 된 데는 아주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14세기의 전통에 따른 영국 신비주의자, 다시 말하면 그는 이미 깊이 베어든 개인주의를 제한된 은둔자의 영구적 기질과 함께 완성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는 개혁된 이태리 베네딕트회의 수도원에서 묵상 방법을 습득한 사람입니다. 그 방법이 그를 거의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활동적 거주자(active liver)" 라는 신랄하고 모호한 표현을 만들어 내게 한 그 형제들과의 평생의 갈등을 발견 하였습니다.
끝으로 아마도 결정적인 요인은 관조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 통찰력 없이 그들의 제도를 모두에게 포학하게 강요한 활동적 지도자들이 관조자들에게 끼친 무수한 해에 대하여 St. Theresa 와 St. John of the Cross 가 강한 입장에서 반대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제도의 참된 고민은 보통 기도 생활을 파괴하고 관조 생활을 좌절시키게 하는 "활동적 거주자" 에 의하여 수도원이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Baker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따르기에는 아마 조금 심한 것 갔습니다.
종교의 쇠태는 주로 도리를 벗어난 무질서로부터 생겼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즉 거의 모든 종교 단체에서 활동적 인물들은 종교 상태가 다만 관조를 위하여 설립 되었다 할지라도 관조자들 보다 위에 있는 고위 성직자 직과 영적 목사 직을 소유하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Ruysbroeck, Tauser, St. Theresa같은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일으키신 사람들에 의하여 관조 기도가 복구된 후 까지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종교 안에서 사는 활동적 인물들은 본질 밖으로 그들을 불러낼 것 같은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직분(윗 사람의 직위)을 가질 우려가 없다.
반대로 탁월함과 자유를 사랑하는 타고난 욕구에 이끌려 그들을 바치는데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그 동안 그들의 단 한 가지 동기는 자비와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기 위한 욕구라고 불성실하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서 지배할 길을 야망을 품고 찾기 까지 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한지 경험이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Gregory the Great의 펜으로 쓴 활동과 관조에 대한 옛 전통적 가르침의 배경에서 반 종교개혁 후에 일어난 세밀한 변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Dom Augustine 의 개인적 감수성과 가혹한 경험은 이 새로운 방침에 무엇인가를 기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우리는 현 시대에 익숙한 한 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서 활동과 관조는 한 큰 깊이 갈라진 틈(a great gulf)으로 분리 되었으며 그 사이에는 다리가 없습니다. Dom Augustine에 있어 예배의식과 묵상은 둘 다 깊은 틈의 반대쪽에 있었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간단하고 관조적인 내향성 이였습니다. 예배의식 운동의 주장을 지지한 보통 현 시대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이것이 수도사를 퇴화와 배신으로 거의 갈아 앉게 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정정주의(Quietism)의 가증한 오명을 갖게 합니다.
이 과장된 분할의 결과는 양측에서 다양한 혼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다시 한 번 그 문제는 거짓이며 Benedictine 가족의 수도사들의 참된 소명은 관조 대 활동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두 사이에 고대의 잘 조화된 조직적인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Peter of Celles 가 인용한 것을 반복하면 두 자매는 서로 다른 자매가 없이는 하나님의 보좌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대답은 예배의식 만으로 혹은 묵상 단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다양한 측면의 기도 생활에서 이 모든 것들이 적당하게 강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이 강조는 사람에 따라 개인적 소명에 따라 달을 것 입니다. 이는 대수도원 장 교부의 직무이며 각기 다른 영혼을 식별하고 하 나 하 나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뜻하시는 길에 따라 격려합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며 신중한 조절을 할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수도원 단체는 모든 영혼과 모든 기도의 방법이 꽃피게 될 것 입니다.
여기서 수도사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며 어느 정도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XI
마음의 기도(the prayer of the heart)의 의미에서 묵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음의 기도에서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신원의 가장 깊은 근원을 찾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신비의 교리에 대해서 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직접적인 실존의 이해,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의 개인적 경험,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믿음을 얻기 위하여 찾습니다. 내적 확실성은 정화에 달렸습니다. 어두운 밤은 우리의 가장 깊은 의지를 교정합니다. 믿음의 밤의 고요함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단순함과 성실함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단순한 배려로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회상을 배웁니다. 회상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하나님의 단순한 임재, 그의 말씀의 개인적 이해, 그의 뜻의 지식, 그를 청종하고 복종하는 능력을 동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깊은 관심사 밖에 좋은 것들을 위해 기원하는 것보다 활씬 많은 무엇을 말합니다.
우리의 욕구와 기도는 St. Augustine 의 말씀을 요약한 것 이어야 합니다. Noverim te, noverim me. 내가 주님을 알고자 합니다. 나 자신도 알고자 합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자신과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기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지식을 알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 안에서 쉬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기 원하며 온 몸을 다하여 그에게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의 인자하신 뜻을 알고자 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기 원합니다. 이것들이 묵상과 마음 기도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기도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하여 여기서 지금 우리를 위한 말씀의 깊은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한 좋아하는 시편을 서서히 지혜롭게 사랑의 낭송으로 오래 끌 수도 있습니다.
수도사 교부의 언어에 있어 모든 기도, 낭독, 묵상, 수도사 생활의 활동은 마음의 순수함,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겸손한 항복,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입장을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목적을 둡니다. 이것은 힘든 진실 안에서 인생의 어려운 요구가 우리에게 올 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우리 자체의 모든 현혹하는 형상과 우리들 자신의 모든 능력을 과장하여 평가한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순수함은 새로운 영적 신분과 상관 됩니다.ㅡ하나님의 뜻에 따른 진실의 상황에서 인정된 "자아"ㅡ마음의 순수함은 "오래된 사람 (old man)"의 복잡하고 아마도 조금 평판이 나뿐 변덕과는 대조적으로 새 사람(new man) 의 계발된 자각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이 높은 관점에서 자아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아는 새로운 통찰력에게 지시를 받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한 마디가 나 자체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뜻도 없는 말씀을 한마디라도 하실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나는 나의 인생의 뜻이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의도하신 뜻이라는 것이 확실한가? 하나님께서는 사건, 풍습, 일과, 법, 제도, 사회에서 생기는 타인과의 충돌을 통한 외부로부터 오는 나의 생존의 의미를 강조하시는가? 나는 그와 같이 그의 은혜로 그의 진리를 반영하며 또 내 개인적 입장에서, 내가 그의 말씀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하는 한 뜻을 내부로부터 창조 하도록 불리었는가? 나의 참된 신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자유와 그에 대한 내 응답 속에 숨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자유를 온전한 책임과 확실성을 가지고 사랑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만 외부의 세력으로 나에게 강요한 형태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는 시인된 사회적 패턴에 따라 나의 생애를 형성할 뿐 아니라, 나의 형제의 개인적 현실에 나의 사랑을 향하게 하고 또 가끔 간파 할 수 없는 신비와 적나라한 하나님의 뜻을 포옹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내가 나의 무의미한 첫 경험으로부터 오는 공포를 피하고자 하면 나는 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묵상을 함으로서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안쪽에 있는 내심을 통찰하며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그에 대한 나의 절대적 의존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찾습니다. 그러나 이 통찰은 확실성이 믿을 만해야 합니다. 이는 나에 의하여 진실하게 생활을 이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합니다. 차례로 이는 나의 인생과 나의 목적에 대한 나의 모든 개념의 확실성을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과 나의 목적은 내가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부분의 역할을 하는 나의 행위의 어떤 외적 표준에 따라 단지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한, 허위요 불확실한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이는 한 역할을 배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때로 묵상의 방법과 과정은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종교적 역할을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인을 닮는 다는 관념은, 만일 단지 이것이 외부적이라면 흉내 내는 것으로 타락 할 수 있습니다.
묵상으로 우주의 질서를 조사하며 이 질서에 자리 잡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묵상은 a Weltanschauung (우주와 인생의 철학적 견해)의 통제를 얻는 것보다 더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한 묵상은 우주의 질서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감수 하지만 이는 심각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실 그러한 묵상은 기독교의 가장 깊은 진실과 접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생에 큰 위기가 왔을 때 포기하거나 무관심하게나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우리의 무에 직접적 대결이 요구되었을 때 회피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섭리의 교령, 사건들과 우주 안의 법의 다른 표명에 냉철한 수락 대신에, 우리는 자신을 적나라하고 공포의 중심으로 가져오게 할 경우 우리의 무에서 아무 설명도 이론도 없이 완전히 그의 섭리의 돌봄에 의뢰하며 그의 은혜, 자비와 믿음의 빛의 은사가 긴박하게 필요로 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혼자 서서 있습니다.
은혜, 자비, 믿음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소유물 즉 우리가 행동을 바르게 하기만 하면 마치 정당하게 우리의 노력으로 얻고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묵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끝임 없이 새롭게 하는 은사 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은혜의 생활은 순간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인적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묵상의 은혜는 ("마음의 기도"의 의미로) 또 특별한 은사입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았을 때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영원히 있다라는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타고난 은사의 자율적 사용을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완전히 자주적이며 자결할 수 있는 태도를 사용하고 정당한 것처럼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은 결코 아닙니다. 기도의 은사는 다른 은혜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의 은사이며 우리가 그것들의 기원과 종말을 단지 하나님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한 우리의 존재와 인생의 아주 깊은 곳은 의미심장하며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타고난 능력을 완전히 자주적인 방식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 같이 보일 때 마치 우리 개인의 자부심(ego)이 우리 자신의 행동들의 순수한 근원이며 종말인 것 같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착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행동이 아무리 자발적인 것 같이 보여도 영적 의미와 신빈성이 결핍합니다.
따라서 첫째로 우리의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력 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슬픔에 잠기거나 혹은 낙심시키는 경험이 되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는 모든 기쁨과 모든 생명의 근원과 직접 접촉하게 됨으로 깊은 평온과 즐거움이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의 묵상이 결코 시작 되지 않는가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아마 우리는 이것을 결코 진실하고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의 중심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가장 깊은 진실로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상상 중에 단지 마음으로 혹은 잘해야 욕망을 가지고 분리된 객관적 견해에서 종교적 진실을 생각하면서 묵상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과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신원의 자리의 깊은 인식 속에 잠길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발견"하기 위하여 찾음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발견하고" 우리 내심의 본질의 인식을 회복하면 우리 외부, 일상의 자신은 한 큰 범위에서 하나의 가면이며 위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참된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자신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직접 의뢰하는 중심에서 어둑한 곳 그리고 무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재 존재는 이 인정에 의뢰됨으로 이것 없이 묵상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자기모순 입니다. 이는 발 없이 걸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장을 인정하는 능력 조차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를 마음대로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을 때에 회한을 틀림없이 일으키는 인공적 기술과 우리의 무의 느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이는 맹렬함의 결과이며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에 대한 영원한 기질, 진실에 대한 배려, 감수성, 유순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묵상을 배우는 것은 습관적 굳은 마음, 무감각 및 단순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만 하거나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요구에 저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친 마음으로 부터 차차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계속해서 명백히 관심이 없고 차갑고 또 이런 방법으로 묵상을 시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 하다면 적어도 이 냉담함은 그 자체가 우리의 필요성과 무력함에 표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기도하기 위한 동기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아마도 아무런 뜻 없이 우리는 정해진 일과에 빠져 들어가고 또 진지한 욕망을 가지고 우리는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의 자발성을 어떤 방법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우리는 또한 반성해야 합니다. 이 기다림 자체가 우리에게 겸손의 수업이 될 것 입니다.
XII
기독교인 생활의 수난열 (a cult of suffering) 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 기도 생활에 있어 자제와 희생이 절대로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기도 생활이 우리의 심령을 변형 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우리를 만든 다면 기도는 다른 더 영적인 수준에서 우리 자신이 살고 자유롭기 위하여 우리 존재의 어떤 수준에서 우리가 죽는, 마음의 깊은 변화인 회심이 동반해야 합니다.
St. Aelred of Rievaul 은 Yorkshire에서 운둔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여동생에게 묵상과 금욕주의의 친밀한 관계를 명백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로 요구 된다: 마음의 사랑과 열매 맺는 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달콤한 영적 경험 안에서 덕과 사랑의 실습을 해야 한다. 덕의 훈련은 생활의 일정한 방식, 금식, 철야기도, 근육 운동, 독서, 기도, 빈곤 또 기타 그러한 것들
로 되어있다. 우리의 사랑은 건전한 묵상에 의하여 키워진다. 예수의 달콤한 사랑이 그대의 마음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과거의 회상, 현실의 일들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일에 대한 관심: 이 세 겹의 묵상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욕구를 통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적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하는 직무를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그가 사회적 부정과 빈곤한 상태로 자신의 몸을 막기거나 혹은 타인에게 그러한 것을 격려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분별 있고 물질적인 것들은 악하다고 하는 마니교도( Manichean)의 보이는 창조에 대한 격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과도의 걱정 근심에서 분리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의 좋은 것들을 사용할 수 있고 또 좀 더 높은 종말을 위하여 그것들 없이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랑을 위하여 모든 창조된 것들을 사용하고 또는 희생시키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 바울의 말씀에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아미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아미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6-10) 라 하셨습니다.
사순절(Lent) 첫 주일 미사에서 교회에서 노래하는 이 장엄한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금욕주의 생활이 우리를 역설적 영역과 명백한 모순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묵상 생활은 우리의 자제하려는 욕구 때문에 또 우리의 욕구가 일정한 범위 안에 나마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정지 되어 이 역설적 상태에서 육성되고 있습니다. 금욕주의는 우리를 역설로 넘겨주며 또 묵상은 역설과 싸웁니다. 싸움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관조 안에서의 영적 사랑의 신성한 평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설적 상태에서 은혜의 특별한 도움 없이, 또 언제나 새롭게 하는 자제가 없이는 살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금식의 실행은 개인적 묵상에서 울어 나오는 일을 실천 하겠다는 동기 없이는 적당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우리의 자유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야 하며 또 기독교 사랑이 변형 시키는 능력에 따라 활기를 띠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스스로 가한 희생은 아마도 시늉 즉 참된 내적 의미가 없는 상징적 표시로 보입니다. 이런 형식의 정신에서 이루어진 희생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근심을 몰아내기 위하여 행한 외적 일과의 단순한 행위가 될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의 배려는 우리가 지켜야 할 또 이를 과장하여 어떻게 하든지 참기 어려운 것 같이 보이거나 혹은 사실보다 더 영웅적인 것 같이 보이려 만든 무의미한 고난을 선택할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행한 희생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순교를 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일부를 하찮은 희생에 받치는 것 보다,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완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성실하고 더 종교적입니다.
성숙하고 관대한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 내적 기도의 시험의 하나로 알려져도 무리가 아닙니다. 기도와 희생은 같이 일합니다. 희생이 없으면 결국 기도도 없이 끝나고 역으로 기도가 없으면 결국 희생도 없이 끝납니다. 희생이 유치한 자기 극화일 때 기도는 또 거짓이고 가극 같은 자기 선전 혹은 감상적 자기연민의 자기 반성이 됩니다. 성숙한 사랑과 합한 심각하고 겸손한 기도는 희생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습관적 정신으로 무의식중에 자발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와 희생의 결합은 우리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 안에 서 쉽게 평가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이 일의 진전을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XIII
지금 다음에 계속되는 문장을 이해하려면 독자는 영적 생명의 내적 깊이는 신비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거의 과학적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으며 그런 이유로 교회의 교부나 신비주의 박사(Mystical Doctors)의 시적, 상징적 언어를 제외하고는 신학조차도 이 제목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John Tauler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결합적이고 신비한 지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흑암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본질적 빛이다. 이는 이해할 수 없고 고독한 사막이라 부른다. 아무도 이것을 통해 그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며 또는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표적이 없음으로 이것을 위한 어떤 경계표를 보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 흑암 이라면 결코 창조된 지능을 비추지 못하며 결코 자연히 이해할 수도 없는 한 빛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없음으로 이는 "황폐하다"라고 불린다. 그곳으로 가려면, 사람은 그 자체 위로 모든 이해력과 지식을 넘어서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그것들의 참되고 필연적인 강물로부터, 시내물의 바로 근원으로부터 마실 수 있다. 이곳의 물은 모든 시내 물이 그 근원에서 신선함과 순결함을 잊어 버리기 전에 달콤한 것 같이, 달콤하고, 신선하고 순결하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결합적 지식은 백성의 물질적 지식이 아니고 크게 다르며 또 하나님을 홀로 알고 하나님 안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보이는 창조된 자아가 아는 지식을 초월한 종류의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수동적 정화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 저서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알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비울 때까지 자아는 일종의 비움과 뚜렷한 파괴를 경험합니다.
고로 우리가 희생의 길을 추진 할 때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점점 더 정화 작용에 복종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희생은 가끔 우리가 선택 한 것 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묵상에 있어 기도 안에서 건조한 곳을 통하여 우리를 피곤하고 무미건조한 행로로 가게 하는 인내심을 배워야 합니다. 무미건조함은 점점 자주 나타나고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무미건조함은 만일 이것이 심각한 노력과 자제를 동반한 것이라면 거의 기도의 진보의 징후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예언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이스라엘을 광야와 건조한 아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내가 네게 장가 들것이다." 라고 하셨으며 이 약속은 거짓 신의 비밀 숭배를 즐기던 이스라엘은 모든 장대함과 사치를 빼앗길 것이라는 협박으로 계속 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 하여 준 것이 어 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 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 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2:8-13)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에서 이 같은 성경 구절은 영적 위안이 중지되고 생각하기 어려워지며 불가능 하게 까지 되고 상상력은 더 이상 우리의 뜻과 욕구에 복종하지 않는 건조한 기도 안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의 정화에 적용될 것 입니다. 그러한 때에 내적 감각과 느낌은 우리의 영적 노력과 분리되며 우리를 도와주기 보다는 방해합니다. 의식하는 마음은 자율성의 결핍을 인식하기 시작 하고 무의식한 마음은 이것이 가진 숨겨진 힘을 알려지지 않은 불안에서 느끼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미숙한 기도방식에서 분리하는데 필요하며 성숙한 영적 관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느낌과 감각의 "어두운 밤"의 기도 속에 걱정은 때로 날카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적 밤은 우리의 내적 생활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지배를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넘기는 것을 표시합니다. 또 "어둠"의 시간은 사실상 위험과 어려운 선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으로부터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습관적이고 의식적인 방어의 뒤로부터 끌려 내어 집니다. 이 방어는 또 우리가 성장하려면 포기해야 할 한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에게 벌거벗은 것 같이 아무 보호 없이 직면하기에는 너머 큰 무의식적 세력에 대한 보호 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어둠" 속으로 출발한다면 우리는 이 냉혹한 세력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의혹에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모든 구조에 대해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랑, 자기-헌신을 위한 우리의 동기를 새로 평가해야 합니다. 이 순간 정확하게 모든 영적 빛은 어두워지고 모든 가치는 그의 모양과 실체를 잃고 말하자면 우리는 공허감으로 불안하게 남아 있게 됩니다.
이 경험의 가장 결정적인 면은 정확히 하나님 자체를 의심하려는 유혹 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참된 위험이라는 사실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단순하고 원시적 형상으로 그를 접근하기 쉽게 하신 단계를 넘어 우리는 추진합니다. 우리는 형상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헤아릴 수 없는 또 아무 만족할 만한 정신적 표현을 넘어 그의 임재하시는 밤으로 들어갑니다.
그럴 때에는 참된 신학적 믿음에 심각한 기초를 두지 않고는 그가 여태까지 가지고 있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내적 공허를 숨긴 모습과 장식을 보존하기 위한 분명치 않고 가증한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공허함의 진실에 직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성숙한 영적 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모습과 유사한 것들의 영역으로 퇴각 할 것 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으로 자라기 위한 명백한 믿음이 없이는 그는 아마도 존재의 심한 경험에 직면할 수 없습니다. 이 시험 때문에 우리 존재의 중심에 있는 깊은 영적 능력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정화의 불이 믿음의 인간과 우발적인 요소들을 다 태웁니다. 하나님의 이 은총은 저절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호와 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 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 2: 14, 16, 17, 19, 20
XIV
묵상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숙달하게 하기 위한 혹은 가톨릭 신앙의 신비성을 우리 마음에 감동시키기 위한 지적 노력이 아닙니다. 종교적 진실의 개념적 지식은 우리 생활에 명백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중요합니다. 공부는 우리 기도 생활에 있어 필수적 부분을 맡고 있습니다. 영적 생활은 강한 지적 기초를 필요로 합니다. 신학 공부는 묵상 생활에 있어 필요한 수반물 입니다. 그러나 묵상 자체는 공부의 대상이 아니고 또 순수한 지적 활동도 아닙니다. 묵상의 목적은 단지 하나님과 그가 계시하신 진실의 객관적 또는 사색적인 지식을 획득하거나 깊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에 있어 우리는 그가 마치 우리의 세밀한 검사에 따르며 또 명백한 과학적 견해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물체들과 같은, 한 물체인 것 같이 하나님을 알려고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명백한 한계에서 규정되고 경계를 정한 서로 고립된 물체로서, 우리에게 직면한 그가 만드신 모든 물체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 자체를 알고자 찾습니다. 무한한 하나님은 한계가 없고 우리의 마음은 그와 그의 사랑에 한계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미경으로 보는 견본을 알듯이 과학적으로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임재는 사랑의 믿음의 일반적 자각에 의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임재를 우리가 검사실 시험으로 확인하는 것 같이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확인 하겠다고 강조하지 않는 한 영적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존재를 정확한 지식의 대상으로 확인 하고자 하자마자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떠나십니다.
St. John of Cross 의 관조의 "어두운 밤" 이라는 고전적 구절로 돌아가서 우리는 마음에 대한 그의 교리가 가끔 잘못 전해진 것을 봅니다. 어떤 독자에게는 단지 당신이 분별 있고 보이는 물체를 외면하면 당신은 보이지 않는 물체를 보게 된다고 말한 것 같이 들립니다. 이는 신 플라톤 파 철학이고St. John of Cross의 교리가 안입니다. 반대로 그는 이같이 가르칩니다.
사람은(soul) 창조물과 세속적 물질들에 관계되는 부분에 따라 어두움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될 뿐 아니라, 마찬 가지로 합리적이고 높은 하나님과 영적 물질들에 관계 되는 부분에 따라 눈이 멀어지고 어두움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장님이 어두운 믿음을 의지하고 이를 안내자와 빛으로 취하고, 그가 전혀 이해하지도 경험 하지도 느끼지도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것에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은 흑암이며 그의 길을 잃게 할 것임으로, 믿음은 그가 알고 경험하고 느끼고 상상하는 것을 초월한다. 만일 그가 이같이 눈멀고 완전한 흑암 속에 나마 있지 않으면 그는 믿음에서 배운 것, 즉 더 큰 것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 흑암은 다만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해력의 조사와 지배를 피하게 하는 계발을 가져옵니다. "포기하고 전멸 당하고 분리된 사람(soul)안에서 하나님이 뜻하시고 그가 하시는 일을 누가 방해할 수 있습니까?" 이 St. John of Cross 의 가르침은 단지 독특한 형식의 Carmerite영성 이라고 제처 놓을 것이 아닙니다. 이는 Evagrius Ponticus, Cassian 과Gregorius of Nyssa부터 내려가서Gregory the Great를 거처 서양의 Pseudo-Dionysius의 제자에 이루기까지 고대 수도원과 초대 기독교 교부의 전통의 직계입니다.
St. John Chrysostom은 하나님의 불가해함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나님으로 부릅시다. 그는 사람의 말하는 모든 능력을 능가하며 모든 죽어야 할 인간의 지능의 지배를 피하시며 천사들이 그를 통찰하지 못하며 치품천사(seraphim)들이 그를 명백히 볼 수 없으며 아기 천사들이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공국 군주나 세력가나 모든 창조물들이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합시다. 다만 아들과 성령만이 그를 아십니다.
St. Gregory of Nyssa는 "신비주의 적 밤" 을 묘사하였습니다.
밤은 어두운 곳을 은신처로 삼으시는 하나님이 게신 암흑 속으로 들어간 모세의 방식을 따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조를 지시한다. 신성한 밤에 둘러싸여서 사람은 그가 숨어계신 흑암을 찾는다. 그녀는 참으로 그녀가 찾고 있는 그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으나, 사랑하는 자는 그녀의 생각의 지배에서 떠난다. …그러므로 수색을 포기함으로서 그녀는 그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녀가 욕망하는 그를 인정한다. 따라서 그 녀는 말하기를 "창조된 모든 것을 벌이고 지식의 도움을 포기하였을 때 믿음만으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믿음의 파악력을 가지고 그가 내 침실에 들어오실 때까지 나는 그를 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방은 이것이 원시 상태로 복구 되었을 때 내재할 수 있는 마음이다.
Evagrius 는 말하기를 ( St. Nilus 에게 돌린 논문에서) "우리 모두에게 보이는 빛이 보이기 위하여 꼭 다른 빛이 필요하지 않는 것 같이 이는 그의 본질이 빛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도 그를 볼 수 있게 하는 빛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대가 기도할 때 그대 자신 안에 아무 변화도 보지 말며 지능의 어떤 감명도 얻지 말라. 그러나 영적에서 영적으로 가라. 그리하면 너는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게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은 포부가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에 이 세상에서 한 형태나 형상을 보려고 찾지 않는다."
Rhineland 의 신비주의로 돌아가서 John Tauler가 대표적인 말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람이 기쁨을 가지고 쉬는 모든 것, 그가 좋은 소유물이라고 보유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자신과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부인함으로 순수하고, 알 수 없고, 신성하며, 신비하고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으로 단순히 사라지는 것 외에는 모다 벌레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Ruysbroeck은:
내적인 사람은 결실하는 사랑 안에서 단순한 응시로 전렴 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가치 이상으로 단순한 방법을 가지고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중개 없이 하나님과 마주친다. 그리고 하나님과 통일됨으로 그의 속으로 단순한 빛이 비친다. 이 단순한 빛 자체는 어둠이며 벌거벗음과 "무"로 나타난다. 이 어둠 속에 그 사람은 싸여 있으며 그는 어이할 바를 모르고 아무 방식 없는 상태로 뛰어든다.
벌거벗음에서 모든 고려해야 할 일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은 사라지고 그는 통보를 받고 단순한 빛이 침투한다. 무에서 그는 하나님의 막대한 사랑의 활동과 그의 신의 결실하는 성향에 감동되어 그가 한 모든 일이 무로 되는 것을 본다. 그는 하나님과 한 영 안에 있다.
마음의 순수한 교리와 형상 없는 관조는 Philokalia 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에게 형태도 형상도 없는 기억으로 증정하는 순결한 마음은 단지 그에게서 오는 감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에 보이지 않게 임재하십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은 그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능력을 주는 지식의 작용으로 그를 잡으려 찾고 그를 영원한 소유물로 보증하려 하는 우리의 조사하는 마음의 거만한 응시로부터 숨어 나마 계십니다. 하나님을 한 물질과 같이 우리 마음대로 압류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잡으려 시도하는 것은 사실 어리석고 불가능 합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지식은 다만 그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는 그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초월해야 할 유사로 그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사도 우리 자체와 같이 초월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알고자 찾기 위하여 우리는 앎의 통상적 행동에 특이한 친숙한 주관적-객관 관계를 잊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그를 아는 대신 그가 우리를 철두철미 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은 그의 소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비례해서 우리는 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묵상 혹은 마음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계속 열어서 그에 의하여 개발되고 그와 우리와의 참다운 관계의 인정으로 가득 차게 하려는 활발한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묵상의 고전적인 형식은 형상과 근심 없는 빈 마음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고로 기독교인 신앙의 상황에서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또는 명백한 과학적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의 지식과 사랑이 우리 바로 존재에 배어들어 가는 것을 인정함으로 그를 알게 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 지식은 역설적으로 우리 정사의 대상으로의 그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의 구원과 인자한 지식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우리 자체의 지식입니다. 그가 우리를 아시는 데 비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존재와 신분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의 진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그의 자비로운 사랑은 우리생명과 존재의 바로 중심인 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하여 그를 압니다.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세주로서 그의 사랑을 받는 것과 보답으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우리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심오한 관계의 깊은 파악과 친밀한 개인적 수락을 내포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없습니다.
묵상의 전체적 목적은 창조물과 창조주, 그리고 죄인과 구세주와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깊어 가는데 있습니다.
모든 형상과 참으로 모든 개념을 넘어서, 형태도 형상도 없는 보지 못한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의 높이로 올라감으로서 신비적 무지의 교리는 물질적 견해로부터 비물질적 견해로 다만 떠나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위에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안에서 확실한 발단된 방법으로 벌서 시작된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은, 보이며 또 물질적인 것과는 다른 실체가 없고 보이지 않는 본질의 지식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볼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하나님에 대한 충분하고 적당한 견해(먼 유사를 제외하고)를 우리에게 줄 수 없다면 형상, 상징과 성례의 신호에 쓰이는 물질조차도 그리고 미술품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 온전히 볼 수 있는 것 같이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영적 물질들에 호의를 가짐으로서 생기는 거절을, 더 이상 받지 않음으로 당연히 확실한 위엄을 회복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형상, 상징, 미술품들은 단지 물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본질의 한정을 인정하기 때문에 확실히 실수의 위험이 적으며, 더 크게 자유롭게 그것들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다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로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늘날 더 위험한 유혹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우상 숭배의 상태로 올리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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