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86/200213]조정래의 ‘대장경’을 읽다
나는 조정래 작가를 ‘한국韓國의 문호文豪’라고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레오 톨스토이를 ‘대문호’라고 하듯이. 물론 나의 생각과 다른 분들도 많겠지만 말이다. 엊그제 조정래 선생이 32세에 썼다는 처녀 장편소설 <대장경>(2010년 재판)을 통독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등을 집필하기 한참 전이기에,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역시 그만의 구성構成, 그만의 문체文體, 그만의 주제의식主題意識이 뚜렷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1011년 처음 시작하여 1086년 75년에 걸쳐 완성한 팔공산 부인사의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 불행히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초조대장경을 결집할 때 누락된 것을 대각국사 의천이 모아 만든 ‘속장경續藏經’조차 전란으로 소실되자, 1236년 허수아비 임금 고종은 군부실세 최우의 ‘조종’에 의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편찬을 수기守其스님에게 지시한다. 하지만, 수기스님은 불법佛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정치술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오직 백성들의 순수한 나라사랑과 불심佛心을 이끌어내 16년만인 1251년에 세계역사에 찬연히 남을 기록유산인 ‘고려대장경’을 만들어냈다(국보 32호). 8천여장의 판각板刻 앞뒤에 빼곡이 새겨진 5300여만자. 서체도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일정하고 오탈자도 거의 없다는 불가사의한 팔만대장경.
그 대장경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보관해온 해인사 장경판전 藏經板殿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되었고, 2007년 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한때 ‘문화선진국’이었던 한국을 빛내고 있다. 소프트웨어인 대장경, 하드웨어인 장경판전이 “세계유산 2관왕’이 된 것이다. 고려는 당시 목판과 금속활자를 통틀어, 세계 어느 나라의 추종追從도 불허한 ‘인쇄문화의 왕국’이었다. 모두 아시리라.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공인받은 사실을. 우리가 중고교시절 최초라고 배웠던 구텐베르크의 ‘성서 42행’보다 78년이 앞선다는 사실을. 문헌만 남아있다면 금속활자 역사는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고금상정예문’은 1234년에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호 조정래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언제나 그렇듯 확실하고 예리하다. 대장경 제작을 총지휘하여 역사에 남은 이름 수기스님과 성도 없는 미천한 출신의 대목 근필(장경판전을 혼자 완성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천재 소년서예가, 글자 한 자를 새길 때마다 절 한번씩 했다는 무수한 무명의 각수刻手들의 생각과 아픔과 고통을, 소설가답게 고스란히 그려냈다. 나는 작가가 한없이 고마웠다. 풍상의 세월이 1천년을 흘렀다해도 이렇게라도 살려내야 할 사람은 살려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所任이 아니겠는가. ‘미투’로 엉망이 되어버린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서 1980년 광주항쟁의 이름없는 열사 200여명을 일일이 초혼招魂하여 운문韻文으로나마 천추의 한恨을 풀어주었듯이.
절의 전각들은 모두 목조이기에 화마에 ‘쥐약’일 것은 뻔한 이치. 해인사에 일곱 번의 큰 불이 있었다는데, 어찌 장경판전은 번번이 살아남았을까? 탁본한 ‘반야심경’ 한 장을 5천원에 구입, 아버지께 선물로 드리니 무척 기뻐하셨던 일도 생각났다. 한때, 화재에 대비해 장경판전을 옮겨야 한다고 의견이 분분하여, 영국의 문화재전문가에 자문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 사람, 3개월여를 혼자서 맹렬히 관찰하더니 ”이 자리에서 조금만 옮겨도 금세 훼손될 것“이라고 하여, 현재의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던가. 토함산의 석굴암이 ‘과학科學 그 자체’이듯, 장경판전도 빈틈없는 과학이라는 전문가의 결론은 조상들의 슬기에 대해 새삼 놀라게 한다. 건물의 방향을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약간 틀게해 너무 강한 볕이 들지 않게 했다는 것, 지붕 처마의 길이도 햇별의 길이를 정확히 따져 지었다는 것, 건물의 앞뒤와 위아래 창의 크기를 달리해 바람이 건물 안을 고루 돌아나가게 했다는 것, 판각이 썩지 않게 산벚나무를 3년동안 바닷물에 담그고 그늘에서 말려 나무가 뒤틀리지 않게 했다는 것, 숯과 소금 그리고 모래와 횟가루가 섞인 바닥이 장마철에 습기를 빨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 등등등등, 온도계와 습도계커녕 변변한 과학기구 하나 없었던 시절의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았을까? 이것이 과학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호는 고려의 당시 핍진한 현실을 그리고 있으므로, 소설에는 당연히 있을 턱이 없지만, 팔만대장경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문화영웅’이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8월 공군 제10전투 비행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지리산 토벌대에 쫓기는 빨치산 900여명이 가야산으로 달아났으니 폭격하라”는 명령을(그것도 미군의), 폭격지점이 천년 사찰인 해인사인 것을 알고는 비행기 기수를 돌리며 폭격을 거부했다. 전시에 명령불복종은 총살도 불사할 항명죄인 것을. 호출을 당한 김 대령은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하는데, 팔만대장경은 이 두 개를 합해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나는 전쟁으로 이것을 도저히 불태울 수는 없었다” 당시 나이 30세. 1954년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 장군이 되었다. 이 장군을 기리는 기념비가 해인사 입구에 있다. 2002년 세운 기념비 첫 문구와 마지막 시구詩句를 보아라. 가슴이 찡하다못해 울컥하는 그 무엇이 있다.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 (중략) 호국하온 민족혼인 고려팔만 대장경판/국난 중에 호국하고 재난에도 호민했네/6·25의 위기 맞아 김장군이 지켰으니/호국장군 아깝게도 서른네 살 젊은 나이/순국으로 산화하니 짧은 시간 굵게 살다/가야산이 변함없듯 동해바다 고갈되고/백두산이 마멸되나 위대하신 그 이름은/이 나라와 함께하여 영원토록 빛나리라”
우리가 그를 기리 기억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김 장군은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창안했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야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문호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문화보물인 팔만대장경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어 뿌듯하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