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브 몽땅과 피아프가 부르는 '파리의 하늘밑(Sous les ciel de Paris)'
*앵발리드와 동 성당
< 콩코르드 광장 >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광장은 규모 뿐만 아니라 조형양식이나 역사적 의미에 있어서도 유럽에서 가장 손꼽히고 있는 장소입니다. 전체적으로 8각형의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콩코르드 광장은 사방이 탁 트인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에 이르는 광대한 지평이 펼쳐지며, 동쪽으로는 도시 속에 푸른 녹지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튈르리 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 콩코드 광장,뒤의 오벨리스크 자리에 키요틴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세느 강 너머로 국회의사당과 앵발리드 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마들렌 성당이 시야에 들어오는 그야말로 사방 경관이 일품입니다.
콩코르드 광장 일대는 18세기 중엽만 하더라도 튈르리 궁전(튈르리 궁전은 파리 코뮌 사태 때 불타 없어져 버렸고 지금은 공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쪽에 위치한 늪지대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루이 15세가 중병에서 회복되고 난 후에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여기에다 대규모 광장을 짓기로 하고 1755년부터 20년 후 1775년에 완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이 광장의 이름은 루이 15세 광장이었습니다.
루이 16세 때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콩코르드 광장은 혁명의 광장으로 바뀝니다. 현재 오벨리스크가 세워져있는 자리에 단두대(기요틴)가 세워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려져 나갔습니다.
기요틴은 흔히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기요틴은 공개적인 처형의 방법을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 기요틴에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목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기요틴에 올려 놓았던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생쥐스트 등도 기요틴에 목을 들이 밀고 이슬처럼 사라진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793년 1월 23일 오전 10시, 단두대에 올라 선 루이 16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국민들이여! 나는 아무 죄없이 죽는다” 국왕의 처형 이후 혁명은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듯이 브레이크 없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갑니다.
*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 취미라고는 사냥과 열쇠 만드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던 아둔했던 국왕, 심성은 착했으나 혁명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깨닫고 헤쳐 가기에는 전혀 그런 스케일의 그릇이 못됐던 인물이었죠. 마찬가지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도 비슷한 수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도 시대의 흐름을 간파할 줄 몰랐던 인물이었기에 왕조(로마노프)의 몰락은 물론 자신도 가족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겁니다.
* 기요틴 이야기
기요틴은 죄수의 목을 순간적으로 자르는 형구(刑具)의 하나입니다. 4미터가 넘는 높은 두 기둥과 가운데의 들보로 이루어졌으며 사선으로 된 칼날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면서 사형수의 목을 댕강 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요틴을 흔히 프랑스 혁명의 광기의 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광장에서 사람의 목을 신속하게 절단하고 그 잘려진 머리를 높이 쳐들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는 이른바 공포정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기요틴은 오히려 죄수의 죽음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최대한도의 빠른 시간에 단축시켜 준다는 지극히 인간애가 넘치는 발상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외과의사 기요틴은 1789년 의회 연설을 통해 범죄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기요틴 사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기요틴이라는 이름은 기요틴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요틴을 사용하자고 말한 사람의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애초에는 많은 의원들이 반대하였으나 기요틴을 사용하면 처형에 소요되는 시간과 경비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안이 통과되면서 기요틴 사용은 혁명이 진행된 지 3년 후인 179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요틴도 혁명의 와중의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기요틴의 발명은 혁명 당시 파리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앙투완 루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다양한 외과기구를 발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으나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람의 목을 단숨에 자르는 기요틴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기요틴은 의회를 통과한 후 콩코르드르 광장에 설치한 후 혁명기간 동안 2천 5백여명의 사형수들의 목을 잘랐습니다.
기요틴은 애초에 개발자인 앙투안 루이의 이름을 따서 루이제트라 불리웠습니다. 일반인들은 과부제조기 혹은 국가의 면도날 등으로 부르다가 기요틴의 국민의회에서 행한 연설 때문에 기요틴으로 굳어졌습니다. 한편 기요틴의 후손들은 이 기계의 이름을 바꾸어달라고 줄창 요구를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기요틴에 의한 마지막 처형은 1939년 9월에 있었고 이후 1981년 9월 프랑스에서 사형제도가 법으로 금지되면서 기요틴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기요틴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프랑스에서 사용되었다는 얘기입니다.
< 에펠탑 >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는 만국박람회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각국이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전되어 가는 자국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박람회를 개최합니다.
1850년대에는 영국이 그 선두에 나섰고, 1880년대에는 프랑스가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미국이 그 뒤를 이어 받았습니다.
에펠탑( Tour Eiffel )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에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 때 세워졌습니다. 부지는 세느 강 옆의 샹 드 마르스 공원이었습니다. 에펠탑은 디종 출신의 교량엔지니어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를 맡았습니다. 1887년부터 1889년까지 2년 2개월 동안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공을 보았습니다.
에펠탑의 용도가 불투명하여 박람회가 끝나면 원래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그 무렵에 발명된 무선 전신전화의 안테나 송신탑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행히 해체의 운명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에펠탑 건립 당시 반대의견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심미주의자들은 파리의 품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섰고, 에펠탑 건립 후에도 파리시민들의 냉랭한 분위기는 가실 줄을 몰랐는데, 시인 폴 베를렌은 에펠탑을 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길을 멀리 돌아다녔고, 문학가 모파상은 에펠 탐을 보기 싫어서 매일 에펠 탑 안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에펠탑에는 높이가 다른 3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제1전망대, 제2전망대, 제3전망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제3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지는 파리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최근 파리의 조명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밤의 에펠탑 풍경은 더욱 경이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합니다.
에펠탑은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위험한 공간 역할도 했습니다. 이미 1905년에 에펠탑의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경주가 열렸으며, 1923년에는 그 계단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경기도 열렸습니다.
1945년에는 2층과 3층 사이에 뚫려 있는 사다리꼴의 빈 공간을 소형 비행기를 타고 통과하는 묘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그러다가 에펠탑이 크게 망가지거나 무너지면 어떻하려구). 또한 에펠탑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벌이는 모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어떤 젊은 노동자가 호기를 부리면서 에펠탑 2층의 들보를 평균대 삼아 뛰다가 떨어져 애인이 보는 앞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1912년에는 실험용 날개를 달고 에펠탑에서 점프를 시도했던 새의 모습을 한 남자가 날개가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추락사 하기도 했습니다.
< 로댕 미술관 >
* 로댕의 걸작품 지옥문 앞에서
19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1908년부터 1917년 사망할 때까지 현재의 미술관인 비롱 저택에서 거주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국가 소유의 이 저택에서 작업을 한 대가로 사후 그는 그의 작품들을 국가에 헌납했고, 그때 헌납한 작품들이 현재 이 저택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그냥 옛날 어느 귀족의 저택에 들어와 있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죠. 그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 지옥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각품과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정원 산책도 관람객들에게 안겨주는 또 하나의 호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 앵발리드 건물, 돔 성당 >
* 나폴레옹이 안치되어 있는 돔 성당
앵발리드와 돔 성당은 함께 붙어 있습니다.
* 앵발리드 건물
루이 14세의 명으로 4,000여명의 군인들을 위한 요양소를 짓기로 결정하고 1676년에 최초의 군 병원이면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요양소가 완성되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앵발리드입니다.
이 건물은 나중에 파리 군사령부의 본부 역할을 했으며 병기고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때는 무기가 필요한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기 전에 먼저 이곳으로 쳐들어와 2만 8천 정의 무기를 탈취하게 됩니다. 이 건물은 현재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군사 박물관은 석기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오십 만점에 이르는 방대한 전시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1814년 퐁텐블로에서 흔들었던 이별의 깃발을 포함하여, 이후 엘바 섬에서의 유배지 생활과 100일 천하, 워털루 전쟁에 관한 자료, 그리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의 최후를 맞이했던 방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 돔 성당
나폴레옹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성당입니다.
* 나폴레옹 관
프랑스 정부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후 나폴레옹의 유해와 그의 유물들을 돔 성당에 안치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1840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황제의 묘를 열어 시신을 확인한 후 프랑스로 운구하였으나 관과 지하의 기념실을 짓는데 무려 20년이 지난 후 1861년에야 최종적으로 안치됩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죽은 지 20년 만에 시신이 돌아 왔고, 현재의 돔 성당 지하실에 안치된 것은 또 20년이 흐른 후인 셈입니다.
* 나폴레옹의 마지막 생애, 세인트 헬레나 섬
* 세인트 헬레나 섬
수행 장병 10여명과 함께 나폴레옹이 도착한 센트 헬레나 섬은 남대서양 외딴 섬입니다. 이 섬의 영국인 관리자 허드슨 로우 총독은 그에게 프랑스 황제 대우는 차치하고 마치 수용소의 포로라도 다루듯이 매우 퉁명스럽고 거칠었다고 합니다.
* 나폴레옹이 거처하였던 롱 우드 하우스
나폴레옹을 감시하는 행동반경은 겨우 12 마일로 한정된 데다 삼엄한 경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1816년부터는 아예 섬 마을의 영국인들과의 접촉을 차단했습니다. 그는 3년 후 고독과 우울로 식음을 거르다 21년 5월5일 운명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사인을 위암으로 밝혔습니다.
최근에 들어와 영국정부측이 비소(砒素)로 독살했다는 끔직한 루머가 프랑스 전역에 나돌았으나 치밀한 연구 결과 독살설은 사실 무근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3세로 즉위(1852)하면서 전 황제의 유언에 따라 세느 강 가까이 이장(1840)했다가 그 뒤 현재의 돔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帝政) 시대의 번영과 풍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집권 초기 1868년에 황제 암살사건이 오페라 극장에서 발생하자 정부는 기존의 건물을 헐어버리고 프랑스의 영광을 과시할 수 있는 새로운 오페라 극장 건설을 추진하게 됩니다.
* 가르니에 극장 안에서
이 때 설계 공모전에서 채택된 설계는 국립 미술학교 출신인 당시 35세였던 샤를 가르니에의 작품이었습니다. 당시 공모전 경쟁은 치열해서 무려 17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1862년에 공사에 착공했으나 중간에 보불전쟁이 터지는 등으로 인해 1875년 1월 5일에야 완공을 보게 됩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고전주의에서 바로크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 걸작품입니다. 당시 공사를 시작할 때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이 극장은 무슨 양식의 건물입니까?”하고 묻자 가르니에는 “나폴레옹 3세의 양식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네요.
그만큼 독특한 양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장식은 오페라(현재는 주로 발레) 공연을 보지 않아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극장입니다. 입장료를 받고 내부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과 더불어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손꼽힙니다.
모두 2천3백석의 객석을 갖고 있는데 1989년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완공되면서 지금은 주로 발레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가르니에 극장은 오페라 극장이 아니라 발레 극장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오페라 극장의 주역이 되어야 할 나폴레옹 3세는 이 극장의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삼촌인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는 등 어린 시절을 해외에서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1848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하고 삼촌의 전력을 귀감으로 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20년 가까이 프랑스를 지배합니다. 그러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 참패하면서 제위에서 물러나 영국에서 망명생활 중 1873년에 영국의 켄트 주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페라 극장이 그 이전에 완공되었더라도 참석은 어려웠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