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35) - 추문의 폭로
1890-1900년에는 기업의 횡포가 심했고, 노동자의 저항도 심하였다. 정치분야에서는 위스콘신 주의 지사로 선출된 라플레트는 철도회사의 횡포에 전면으로 맞섰다. 개혁주의자들은 위신콘신 주를 ‘혁신주의 실습실’이라고 하면서 주목했다. .혁신 정책은 예비 선거제, 주민 발의제, 주민 투표제, 산업재해보상법, 누진상속세 등등이었다. 이와 같은 혁신 정책은 언론을 통해서 표혀하였다. 호응하는 잡지들이 나타났다.
혁신주의 깃발은 내건 잡지는 매클루어가 창간한 매클루어스 였다. 1893년 6월호를 창간호로 한 잡지로 주로 추문을 폭로하는 잡지였다. 인기가 있어서 전성기에는 50만 부나 발행했다. 폭로를 주로하는 잡지의 발행부수는 거의 200만 부나 되었다.
헨리 데마레스트 로이드는 1881년부터 스탠다드 석유 회사를 공공의 적으로 정하고, 집충 취재하여 기사를 만들었다. 그 기사를 모아서 ‘부와 민주체제의 대립’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다. 최초의 추문 폭로의 책이었다.
1907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들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
“발 밑의 거름을 휘젖느라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번연의(천로역경의 저자) 거름갈퀴를 든 사나이”에 비유했다., 사실 그들은 추문폭로의 재주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쓰지도 못하는 언론인, 이라고 했다. 이들을 추문 폭로자라고 했다.
추문 폭로자는 심층적이고, 깊은 울림이 있지만 대안은 대단히 빈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이 추문 폭로자의 한계였다.
미국에서 일간지가 가장 많이 발행되었던 해는 추문 폭로 저널리즘이 정점이었던 1909년이었다. 일간지의 수가 2600개나 되었다. 이후로는 점차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