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15일(성령강림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
마가복음 4:26~29
명품 인생이 되십시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제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에는 씨를 뿌리는 농부의 수고가 나타나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들을 보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 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한적한 시골에 와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아침 일찍 들에 나가 하루 종일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립니다. 농사일이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일이 하나 끝나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일이 농사일입니다. 혹시 몸이라도 아프게 되면 상황은 훨씬 더 나빠집니다. 그래서 많은 농부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생긴 고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린 후에 당연히 있어야 할 농부의 수고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사랑과 애정을 기울여 경작하는 농부의 수고가 생략되었습니다.
또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자연현상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습니다. 적당량의 햇볕과 비가 내려 주어야 하고, 적절한 온도와 바람이 불어 주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서 과일이나 특수작물들을 많이 하시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이런 요소들을 맞추어 줍니다만, 논농사나 밭농사 같은 경우에는 적당한 기후가 필수적입니다.
반대로 씨앗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람이나 태풍, 홍수와 가뭄 등 위협적인 환경이 없어야 합니다. 일 년 농사를 다 지어놓고 하루아침에 수해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외적인 요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위험변수들이 모두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저 땅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처음에는 싹으로, 그 다음에는 이삭으로, 그 다음에는 곡식으로, 이렇게 원론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매우 다양한 비유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3장입니다. 그곳에 보면 천국에 관한 매우 다양한 비유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31절). 또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도 같습니다(33절).
그뿐만 아니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습니다(44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고(45절),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도 같습니다(47절).
이 비유들의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천국이라고 하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밭에 감춰진 보화를 찾기 위해서 찾은 이의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학창시절에 숨바꼭질을 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쉽게 찾지 못하게 하려고 나무 위나 바위 밑에 보물찾기 종이를 꼭꼭 숨겨놓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처럼 밭에 감춰진 보화를 찾기 위해서도 사람들의 많은 노력과 대가가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도 많은 노력과 대가를 지불해야만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우리가 천국이라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 비유들은 ‘천국은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훗날에는 매우 큰 것으로 변해간다’라는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겨자씨는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질 만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자라 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누룩도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가루 서 말에 들어가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점점 커져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열 두 제자라고 하는 아주 작은 겨자씨로 시작하셨지만, 지금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그분의 제자로 자청할 정도로 기독교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씨앗비유도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이 씨앗이 자라 싹이 나고, 이삭이 되어, 급기야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이 비유는 작은 것이 커져 간다는 면에서는 다른 비유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다른 비유들과 비교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초반에 오늘 본문에서는 씨를 뿌리는 농부의 수고가 나타나 있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는 농부의 역할이 아주 제한적으로만 묘사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농부가 아닙니다. 농부는 그저 연극으로 말하자면, 조연배우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우리 인생이 조연배우라는 이야기가 솔직히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래도 사람이 수고하고 애써서 무언가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야 직성이 풀리지 않나요? 맞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고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의 기대치를 저버립니다.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농부가 땀을 흘려 밭을 매고, 물을 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농부는 밤낮 자고 깹니다. 심지어 농부는 그 씨가 나서 어떻게 자라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이 말은 농부가 게으르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농부가 밤낮 자고 깬다는 말은 농부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농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들을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 시간이 흘러갑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사는 동안 씨앗이 자랍니다. 농부는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에 무지합니다. 어떻게 그 씨가 자라나고,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되는지 농부는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농부의 역할이라는 것은 단지 씨앗을 뿌렸을 정도로 지극히 소극적입니다. 또한 씨가 자라나는 과정에 있어서도 농부는 철저히 소외됩니다.
어쩌면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4:13).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외인(外人)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는 꼭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그들에게 그 비유의 참 뜻을 따로 가르쳐 주셔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있어서는 농부보다 훨씬 더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은 ‘땅’입니다.
28절에 보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이 필요 없이, 단순히 땅의 힘만으로도 씨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씨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순전히 ‘땅의 힘’입니다. 여기서 ‘땅의 힘’은 무엇을 말합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셋째 날에 땅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땅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1~12).”
하나님께서 땅에게 주신 사명이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그 사명에 따라 풀과 채소와 나무를 내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씨를 뿌릴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다. 오직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그 씨를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우리 인생의 주연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조연배우입니다. 연극에서 아무리 조연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조연은 단지 조연으로 그쳐야 합니다.
만약 조연이 주연보다 더 사람들의 관심과 조명을 받는다면, 그는 조연의 역할을 망각한 것입니다. 연극에서 조연은 그저 주연배우를 도와 그가 더 연기에 몰입하도록 도와주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씨를 뿌리는 자는 기대감을 가지고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는 씨앗이 잘 자라 풍성한 수확 거두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어떤 일에 희망을 갖는 것, 그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인생의 조연배우는 자신의 본문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그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연이 되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주객이 전도된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사도 바울의 말대로라면, “나 바울이나 아볼로는 조연배우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시다!” 이 말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분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마치 ‘씨를 심은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이 조연이 아닌 주연역할까지 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자, 다시 말해 조연배우가 아니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배우가 되 주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뛰어난 종교 지도자들이 되 주길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종교적 영웅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이와 비슷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들은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뛰어난 종교적 영웅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에는 영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조연배우가 더 많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든지 “아멘”으로 순종하며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래서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이처럼 씨 뿌리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겸손히 수행해야 합니다. 종은 아침 일찍 들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양을 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쉬지도 못하고 주인의 식사를 준비합니다.
또한 주인이 식사할 동안에도 종은 그의 옆에서 수종을 들다가 주인이 모든 식사를 끝낸 후에야 비로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수고를 끝낸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하나님의 부르심이 너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어진 사명에 따라 인생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맨 마지막 부분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9절).”
우리가 씨를 뿌린 후에는 그 씨가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선한 일들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씨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무대의 한 쪽 구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조연배우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고 하찮은 일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씨를 뿌리는 일처럼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씨를 뿌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던 돌킨은 예상보다 집필이 더디게 진행되자, 「니글의 이파리」라는 작은 소설을 하나 썼습니다. 여기서 ‘니글’은 소설에 등장하는 화가의 이름입니다.
소설속의 주인공 니글은 자신이 꼭 그리고 싶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니글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자기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니글은 고작 이파리 하나만 겨우 그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니글은 허망하게 독감에 걸려 죽고 맙니다. 그래서 니글은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니늘은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그 나무는 자신이 평생 꿈꾸며 그리고자 했던 나무였습니다.
니글은 너무나 감탄하며 나무를 감상하다가 무성한 나뭇잎 가운데서 자신이 살아있을 때 그렸던 작은 이파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격하며 외칩니다. “이건 선물이야!”
의미 없어 보였던, 실패작과 같았던 이글의 이파리 하나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파리는 하나님 나라의 나무를 이루는 소중한 자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느냐’와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이 감당하는 일이 많고, 크고, 의미 있다고 거들먹거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매우 적은 일’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적은 일’을 매우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섬기는 적은 일을 하나님 나라에서 아름다운 나무를 구성하는 나뭇잎으로 사용하십니다.
-출처: 정통령, 「부족하지만 나아지고 있습니다」(두란노, 2023);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6월호), 157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논과 밭에 성실히 씨를 뿌린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추수 때에 다시 그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번 부르심은 그에게 씨 뿌리는 고통만큼이나 큰 추수의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차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시 126:5~6).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인생의 고통으로 좌절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망으로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던 선한 일을 결코 멈추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명품 조연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겸손히, 지속적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릴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귀한 초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