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린 시절 ¶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싸우기도 했으나[2] 결국 펠레란 칭호가 굳어져버렸다.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기야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어린 시절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노하우를 모두 주었다. 축구 선수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었다.
1.2 1958년 월드컵과 이후의 리그 ¶
- 브라질 대표팀에는 축구팀에 꼭 필요한 팀 닥터, 마사지사, 물리치료사 외에 치과의사가 같이 동행했는데 그 이유는 브라질의 열악한 위생환경상 충치를 앓는 선수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태클에 부러졌습니다! / 뼈가?! / 이빨이... - 앞에서 소개한 IQ테스트에서 최고 기록은 114였다고 한다.[10]
- 이 사람이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비센테 페올라인데 큰 덩치에 안 맞게 귀신을 매우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이 많은 사람이라 경기 도중에 꾸벅꾸벅 졸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면 중앙 미드필더였던 지지[11]가 감독을 대신하여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지지는 은퇴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70년 월드컵에 페루 대표팀의 감독으로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페올라는 펠레와 가힌샤를 공존시키고 최대의 활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4-2-4 진형을 고안해냈다. 이것이 축구 역사에서 최초로 나온 포백 수비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응? 퐁텐이 골을 넣었네? 그럼 난 해트트릭을 하면 되지!!"
결국 브라질은 펠레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프랑스를 5대 2로 꺾고 결승에 올라가게 된다. 이것 역시 월드컵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이다.
"응? 이거 닷새전에 일어났던 일 아닌가?? 괜찮아. 그럼 또 골 넣으면 돼."
여기서도 펠레는 2골을 넣었고 스웨덴을 5대 2로 이겨서 브라질은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했다.
- 10대의 나이에 월드컵을 뛰었던 선수들을 대라면 리오넬 메시, 사무엘 에투, 마이클 오웬 등을 댈 수 있다. 하지만 10대의 나이에 팀의 주역으로 월드컵을 우승 시킨 선수라면 펠레가 유일하다. 펠레만큼의 비중은 아니지만 1982년 월드컵에서 인터 밀란의 레전드 수비수 쥐세페 베르고미도 10대의 나이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었다.
1959년에 리그에서 준우승한 산투스의 아름다운 성적표. 골득실이 20이상 차이가 나는데 준우승하는 것도 힘들겠다.
1.3 1962년 월드컵과 이후의 리그 ¶
펠레가 리그에서 이런 골도 넣고하니 아주 사기충천한 채로 1962년 월드컵에 나간 브라질 대표팀. 1958년 월드컵 멤버들이 그대로 나온 상황에서 펠레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으니 두려울게 무엇이었으랴...
1962년 우승 당시 브라질의 포메이션. 중앙수비수 바뀌고, 펠레 대신 아마리우두 들어간거 빼면 차이가 거의 없다. 라이트백의 D.산투스도 1958년 월드컵 우승 멤버로 1954년 월드컵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베테랑이었다.
1.4 1966년 월드컵, 시련의 절정 ¶
- 사실 당시 에이스 공격수에 대한 보호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누군가 한 명이 경기에 빠지면 선수 교체가 없던 시절엔 상대팀은 10명이 싸워야 하니까 전력에도 손실을 입게 된다. 게다가 그 한 명이 (펠레와 같은)에이스라면 그야말로 1명을 내보내는 값으로 팀 전력은 물론이고 심리적인 효과까지 더해 2명을 내보내는 듯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안 그런 수비수들도 많았지만.. 그래서 몸이 약한 축구 선수들은 자주 부상을 입곤 했다. 1958년 월드컵에서 잠깐 소개했던 쥐스트 퐁텐의 경우도 수비수들의 악질적인 태클에 시달리다 결국 28살의 나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또한 잉글랜드 리그 역대 최다골의 주인공인 딕시 딘도 한쪽 고환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펠레는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5 1970년 월드컵. 황제에 등극하다 ¶
당시 브라질 팀 포메이션. 여기에서 펠레는 토스탕의 위치에서 살짝 밑으로 내려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서 현재 FC 바르셀로나의 전술이나 선수들의 역할 등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1.6 이후 그리고 평가 ¶
1977년, 축구를 그만둘 때. 펠레가 울자 동료 카를로스 알베르토가 위로하는 장면이다.
1.7 비판 ¶
2 이야기거리 ¶
- 1970년대 4-3-3 전법을 개발했다.
- 1969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테」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는 펠레가 심판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와 주심이 경찰에 보호를 받아야 했고,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펠레를 다시 경기에 투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e'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유럽의 많은 스포츠 클럽은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56]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투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명예 KBE 작위를 수여받았다. 현재 축구계는 물론 스포츠에 관련된 인물 중 유일한 KBE 작위 수여자이다.[57]
- 2002년 FIFA 월드컵 의 준비요원으로 발탁된 펠레는 그 월드컵의 주제가를 부른 미국의 여가수 아나스타샤와 같이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이때 펠레는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훔쳐봤다. 2003년 초에 아나스타샤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받은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사람들은 이를 펠레의 저주 중 최악의 사건이라 칭하고 있다.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펠레가 어렸을 적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오오 아버지 오오. 물론 그는 지금도 담배를 피지 않는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멍석말이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는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다고 한다.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설명이 必要韓紙?? 하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으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제법 잘 했다고 한다.[58]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군대라면 어떨까?? - 2002년 FIFA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헛소리를 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두 획이나 그어버린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거기에 자기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안자랑.
3 펠레에 관한 어록 ¶
-돈딩유
-영국 선데이 타임즈(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타르치시오 부르니치(1970년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
-페렌츠 푸스카스
-요한 크루이프
-루이즈 펠리페 스콜라리(유로 2004 당시 신성이었던 웨인 루니에 대한 평 중에서)
-프란츠 베켄바우어
-프란츠 베켄바우어(2002년 월드컵 가이드 북)
-호베르투 히벨리누
-쥐스트 퐁텐
-지게 팔링(1958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
-코스타 페레이라(1962년 인터컨티넨탈 컵 당시 벤피카의 골키퍼)
브라질 기자가 살다냐(前 브라질 감독)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바비 찰튼
-마리우 자갈루(프란츠 베켄바우어와 함께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선수이자 감독)
-마리우 자갈루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1978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감독)
-토스탕(1970년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60]
-카를로스 아우베르투(역대 최강이라 꼽히는 1970년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이자 브라질 역대 최고의 오른쪽 수비수)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에우제비우
-지안니 리베라(1969년 발롱도흐 위너)
-지쿠
-지쿠
-미셸 플라티니
-호마리우
-호마리우
-닉 혼비(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피버 피치' 중에서)
-무하마드 알리(펠레의 은퇴식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고)
-마이클 조던(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당시 축구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마이클 조던(IOC 선정 20세기 스포츠 영웅에서 펠레에 이어 2위에 선정된 후)
-로날드 레이건
-앤디 워홀
펠레는 묶어두기가 무척 힘들었고 (could not be contained) 17살의 나이에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단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브라질 대표로 뛰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팀들과 대전하면서 날라다닌 것이 반증해 주지 않을까요?
예선에서 저는 잉글랜드 대표로서 브라질과의 경기에 출장했지만 다음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었죠. 브라질과 우린 0-0으로 비기고, 골에 목이 말랐던 브라질은 한 번 펠레에게 기회를 주는 모험을 합니다...그 뒤로 펠레는 뒤돌아 볼틈 없이 승승장구 했죠.
이번 달 442에서 호마리우는 자신이 펠레 다음으로 축구사의 2번째로 위대한 선수라고 자평하더군요. 네, 호마리우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전 그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플라티니, 찰튼, 베스트,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푸스카쓰, 찰스 등등을 꼽자면요.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엔 펠레 뒤로 마라도나를 No.2로 꼽을 수 있겠고, 호마리우는 아마 20위 안 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 롭슨(포포투 2005년 8월호)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2] 펠레의 원래 이름인 에지송(=Edison)은 아버지 돈딩유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돈딩유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그와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에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을 부르는 주위 사람들과 싸운 것이다. 덧붙여 돈딩유는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에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에지송이 되었다.
[3]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에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부른다.
[4] 상대 팀과의 경기에서 태클 때문에 무릎이 부서졌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답게 결국 축구를 다시 시작하여 시청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고, 바우루로 이사하여 펠레가 축구를 배울 수 있게 했다.
[5] 1950년 월드컵 당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던 브라질의 비극. 자세한 내용은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참조
[6]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고 나와있다. 실제로 펠레는 신앙심이 매우 두텁다.
[7] Waldemar de Brito, 1913년 5월 17일 출생 ~ 1979년 2월 21일 사망. 발데마르 데 브리투는 1934년 월드컵에서 뛴 경험이 있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이다.
[8] 참고로 일반적인 유소년 레벨에서 나이 차는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어린 나이에는 신체 발달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9] 당시 펠레의 나이가 17살이었는데 12살 수준의 정신연령(다른 기록에서는 정신 연령이 아니라 사회성 점수라고도 알려져 있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가힌샤는 8살 수준의 정신 연령을 가진게 정설로 되어 있다.
[10] 정확히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지 아니면 자갈루 둘 중 한명이라고 기억합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은 나중에 추가바랍니다.
[11] Didi, 풀 네임은 Waldyr Pereira. 브라질은 물론 역대에서도 손꼽힐만한 실력의 소유자. 체력, 패스, 프리킥 모두 뛰어났으며 공수 밸런스와 전술이해도는 역대급 수준이었다. 3경기 당 한 골에 가까운 득점력은 플러스 옵션.
[12] 이 경기 이전의 4경기에서 9골을 때려박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토탈 13골을 넣어 월드컵 한 대회 13골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13]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이민자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와 더불어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5연패 등 최초 전성기를 이끈 선수이다. 추가로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별명은 나폴레옹.
[14] AC 밀란과 스웨덴을 이끌던 그레-놀-리 트리오의 그 2명이다. 노르달은 이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았다.
[15] 2위는 1998년 월드컵 16강 잉글랜드 VS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나왔던 마이클 오웬의 골이었고, 1위는 팀은 같고 시간과 장소는 다른 경기(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나온 디에고 마라도나의 유명한 오관돌파 골이었다.
[16] 당시에는 최연소 출전 기록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1982년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깨졌다.
[17] 골든볼은 팀 동료 지지.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골든볼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 때에는 기자단 투표로 최우수 선수를 선발했다. 이 투표는 초대 월드컵인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 1957년 시즌에는 17골로 득점왕이었다. 그것도 58년의 반 정도만 뛰고..
[19] 하지만 정작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20]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
[21] 펠레의 부상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선수들이 매우 매너 좋은 플레이를 펼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한다. 펠레는 아직도 그 당시 체코 선수들이었던 요세프 마소푸스트, 라디슬라프 노바크 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22] 펠레가 첫 경기에는 나왔지만 다음 2경기에는 전부 빠진걸로 보아서 부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23] 이런 내홍 속에서 결국 1966년 월드컵 본선에서 브라질을 이끈 감독은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시켰던 비센테 페올라였다.
[24] 4년전인 196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펠레를 앞세운 산투스에 참패했던 그 팀이다.
[25] 이것은 36년 후 2002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부상중이던 팀의 에이스 지네딘 지단을 억지로 내보냈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
[26] 월드컵 우승팀이 다음 대회(4년 후)에 짐을 싸는 경우는 이것 말고도 2002년의 프랑스, 2010년의 이탈리아의 경우가 있다.
[27] 이게 만약 골이 들어갔으면 이것도 월드컵 역대 베스트 골 중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이 골키퍼는 남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자 야신이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한 마수르키에비츠(Ladislao Mazurkiewitz)이다.
[28]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칙이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생각했었다.
[29] 사실 이런 최고의 시합에서 일방적으로 브라질이 승리한 것은 준결승에서 있었던 서독과의 혈전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는 서독을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4대 3으로 간신히 승리하고 올라왔는데 종료 직전에 서독이 동점골을 넣어 1대 1로 연장에 갔다. 거기서 서독의 역전골→이탈리아의 동점골→이탈리아의 재역전골→서독의 재동점골→이탈리아의 결승골이라는 패턴으로 연장 30분간 무려 5골이 터진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역대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는 경기이며 이 경기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축구팬들도 여럿이라고 한다.
[30] 브라질에서의 기록은 656경기 643골
[31] 브라질 역대 A매치 골 수 1위
[32] 펠레의 후배 중 한 명인 호모씨가 1000골을 넘겼으니 어쩌니 하고 있긴 한데 사실상 망언인 게 이 양반은 정규리그는 300골이 겨우 넘고 국대는 70골 좀 넘어서 400골이 안 된다. 사실 대단하긴 한데... 친선경기는 물론 유소년이랑 아마츄어까지 더해서 1000골이니.
[33] 가힌샤, 니우통 산투스 등이 소속되어 있던 히우 지 자네이루 주 소속의 강팀 보타포구가 아니다. 상파울루 주 리그에도 같은 이름의 팀이 있다.
[34] 이 기록 역시 말도 안되는 기록인데 브라질 후배 호나우두의 통산 해트트릭 횟수가 24회다.
[35] 그 밑으로 월드컵을 2회 우승한 선수들은 축구 역사를 통틀어 쥐세페 메아차로 대표되는 1930년대의 이탈리아 선수들, 가힌샤와 지지로 대표되는 1950년대 후반의 브라질 선수들, 그리고 호나우두와 카푸, 아르헨티나의 파사레야를 합쳐서 총 20명이다.
[36] 상파울루 주 리그이다. 산투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
[37] 인터컨티넨탈 컵은 1960년 처음 시작되었고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15전 8승 7패로 비등비등했고, 굳이 따지자면 남미가 조금 앞섰다. 즉, 8승이 남미쪽.
[38] 유럽팀과의 통산 친선경기 전적은 130경기 144골이다. 팀의 성적은 130경기에서 90승 20무 20패.
[39] 푸스카슈는 한국 나이로 30대 후반에도 레알에서 30골 넘게 찍으며 결국 40까지 해먹고 최전방에서 살짝 내려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디 스테파뇨 역시 30대 중반까지 20골 넘게 찍으며 펄펄 날아다닌 양반들이긴 하다.
[40] 호나우두(1976년생)와 비디치(1981년생), 로빈 판 페르시(1983년생)를 놓고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1] 1959년 산투스의 유럽 투어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산투스의 경기를 앞두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후원을 등에 업은 채 2주간 리그를 중단하고 산투스와의 경기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산투스를 5대 3으로 이기는데 성공하는데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펠레가 있을 때에는 단 한번도 산투스와 경기를 다시 치르지 않았다.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가 산투스와 4번 경기를 치러 3승 1패로 우위를 점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42] 1972년 6월 2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시합이다. 이 경기에서도 당시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김호와 이차만이 펠레 한 번 막아보려고 모든 것을 쏟다 못해 거친 플레이를 선보였고, 관중석에서 우리가 펠레보러 왔지 너 수비하는거 보러왔냐라는 식의 격한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43]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11번이었던 호베르투 히벨리누가 펠레의 밑에서 공미의 롤을 수행할때는 4-3-3, 왼쪽 측면으로 올라가 윙포워드로 활약할 때는 4-2-4로 변형되었다.
[44] 노장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70년 월드컵에서 그의 스피드는 선수들 중 가장 빠른 축에 속해 있었다. 부상 이후에 스피드가 줄었음에도 말이다.
[45] 1958년 월드컵의 펠레와 1970년 월드컵의 펠레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58년에는 다소 빼빼마른 체구였지만 이후의 펠레는 상체가 매우 두꺼워졌다. 격렬한 몸싸움을 가장한 살인적 태클에 견디기 위한 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58년 월드컵에서도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힘으로 볼을 지킬 정도의 몸싸움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46] 공식 프로필에는 171cm, 언론에 따라 173cm로 표기되는 곳도 있다. 어찌됐든 큰 키는 절대 아니다.
[47] 나머지 4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 테오필로 쿠비야스, 베르나르 가니니이다. 이들 중 펠레가 가장 먼저 성공하였다.
[48] 하지만 실제 축구 경기에서 펠레가 주장으로 나선 경우가 많지는 않다.
[49] 이런 이야기는 가려들어야할 필요가 있긴 하다. 특히 펠레가 축구계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해 볼 경우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립서비스라고는 단정짓기도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특히 펠레가 뛰던 시절과 지금 선수들의 장비는 아예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50] 이들은 히우 지 자네이루 리그 소속이다.
[51] 그래도 타카 브라질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탈컵 등 지역 리그를 제외한 공식 경기에서 펠레가 기록한 통산 성적은 51경기 54골이다. 또한 현재 브라질 전국리그의 전신인 타카 브라질에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산투스는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52] 또한, 설사 그렇다 해도 엄연한 리그 기록이며 주 리그의 수준도 낮지 않기 때문에 그냥 딱 브라질 리그가 그렇다는 그 정도의 얘기다.
[53] 남미컵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60년대 역사를 보면 8회에 걸쳐 4강 이상. 3회 우승을 차지했다. 산투스보다 성적이 좋다. 산투스는 같은 기간 동안 4강 이상 진출 횟수가 4회이다.
[54] 대부분의 선수들은 친선경기를 공식 골 기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55] 다만 상술되었듯 레알 마드리드가 2주간 리그를 쉬었다던가, 당시의 컵대회 위상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던가 등도 생각해 보긴 해야 한다.
[56]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
[57] 그 밑의 등급인 CBE, OBE, MBE 등은 영국 축구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많이 들어있다. 대표적으로 CBE+기사 작위로는 알렉스 퍼거슨, 바비 롭슨, 알프 램지(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을 이끈 감독). 순수 CBE에는 빌리 라이트(세계 최초의 센츄리 클럽 가입자로 잉글랜드 출신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수비수). OBE에는 바비 무어(잉글랜드를 넘어 역대에서 손꼽히는 수비수),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앨런 시어러, 아르센 벵거. MBE에는 스티븐 제라드, 페테르 슈마이헬, 헨릭 라르손 등이 있다.
[58] 1964년 1월에 있었던 그레미우와의 경기에서 펠레는 해트트릭을 기록했지만 산투스와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하였고,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다. 여기서 펠레는 2개의 극적인 선방을 기록하며 팀을 브라질 컵 결승으로 이끌었다고..
[59] 돈딩유의 부인, 그러니까 펠레의 어머니이다. 풀네임은 도나 셀레스트 아란테스.
[60] 이전 경기에서는 펠레가 혼자서 다 해먹다 보니 자연스레 제재 및 반칙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인1조로 축구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토스탕이 펠레와 같이 한 조를 짜게 된 것.
[61] 1990년 로마에서 열린 '펠레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친선 경기.
[62] 뒤는 메시에 관한 칭찬. 그 중에서 일부를 따왔다.
첫댓글 전 참고로 마라도나를 더 좋아합니다. 근데 왜 펠레가 축구황제라 불릴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좀 알것 같네요.
(어르신들이 왜 펠레를 축구계의 조던같은 존재라 하시는지 알듯.) 언제 시간나면 1970년 브라질 경기를 한번 받아봐야겠습니다.
엔하위키글인가요?ㅋㅋ 잘봤습니다
엔하위키를 바탕으로 히벨리누님이랑 마테우스님이 내용을 보충했다고나 할까요 ㅋㅋ
그래도 아직 조던이죠 ㅋ 그아조
ㅋㅋ 저도 조던이 더 좋아요
잘봤습니다.. 전 제목만보고 펠레어록 총정리인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