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율법과 예수님,
&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마태복음 5:17-45
최근 오늘날의 큰믿음교회가 존재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에 관한 글들이 카페에 연거푸 올라왔습니다. 먼저, 지난 9월 28일 “아로새김”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회원님이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한 권이면 다 끝납니더~”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큰믿음교회 청년부에 다니고 있는 자매입니다^^!
이번 부산중보집회 중에 있었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중보집회 이틀 째 낮 집회를 마친 후 쉬는 시간에 읽으려고 중보치유학교에서 추천했던 책 세 권중 천국의 도서관에는 없는 두 권을 사러 부산 큰믿음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기독교서점을 찾았습니다.
2층에 위치한 서점은 강대상을 비롯하여 교회에 필요한 모든 물품이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기독교백화점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T. L 오스본의 ‘믿음으로 질병을 치유하라’는 책이 있는지 여쭤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색을 하시더니 ‘없네요.’ 하시며 ‘또 한 권은 뭐예요?’ 하셨습니다. ‘찰스 프란시스 헌터의 ‘치유의 방법’이라는 책은 있어요?’ 하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색하시더니 ‘절판됐네요.’ 하시며 ‘그런데 치유 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하며 물으셔서 어머니께서 ‘아~ 저희 교회 치유전도대성회 준비 전에 읽어보라고 담임목사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에요.’ 했더니 ‘혹시 어느 교회 다니세요?’ 물으셔서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듯이 ‘큰믿음교회 다녀요.’라고 말씀하시자마자 주인분이 ‘아~ 역시’라고 대답을 하셔서 저는 마음속으로 ‘혹시, 이단시비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 염려와 달리 곧 하시는 말씀이 ‘이런 책 읽지 말고 변승우 목사님 책을 읽으세요! 거기에 다 나와 있잖아요! 집회 때는 50%씩 할인해서 팔잖아요. 변승우 목사님 책 굉장히 많이 쓰셨잖아요.’ 하시며 우리에게 말할 틈도 주시지 않고 계속해서 ‘그리고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읽어보셨어요?’ 하셔서 ‘네! 읽었죠!’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꼭 읽으세요! 그거 한 권이면 다 끝납니더~ 꼭 읽으세요!’ 하시더니 서점을 완전히 나서기까지 ‘꼭 읽으세요!’ 하며 재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희는 너무나 기뻐서 부산지교회에 계신 몇 분께 이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부산집회도 너무 좋았고, 이번 일을 통해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큰믿음교회와 변승우 목사님을 지지하는 분들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편이 많아요!! 힘내세요!”
이틀 뒤인 9월 30일 이번에는 다른 회원님이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한권이면 정말 끝납니다.”라는 글을 카페에 올렸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함께 영혼들을 섬기는 일을 했었어요. 굉장히 인격적이시고 사랑도 많으시고, 겸손이 몸에 배어 있는 좋은 분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분이세요. 통합교단이시구요. 제가 담임목사님 이야기나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르르 떠시기까지 하시며 말을 못하게 역정을 내시기도 하셨던 분이거든요.
그 해가 다가는 11월,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기도로 준비하며 나에게 올인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연스럽게 그 목사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된 시간이 4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전도에 대한 부담으로 기도하던 지난달 갑자기 그 목사님이 떠올라서 안부전화를 드렸고 다시 영혼들을 섬기는 일을 하며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이 진리로 깨어나 구원에 이르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에 비교될 만큼 큰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한 목자가 진리로 눈을 뜨는 것은 그 목자를 통하여 구원할 수만 아니 수천 명이 달려있기에 얼마나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인지요.
목사님에게 담임목사님 책을 읽게 해드리고 싶어서. 어느 날 자연스럽게 ‘다림줄’을 내밀었더니 받아 가시더라고요. 그리고 메시지가 왔어요. 다음에 만날 때 좋은 책 몇 권 더 빌려줄 수 있냐고요. 너무 기뻐 OK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와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와 김성욱 기자의 책 ‘이때라!’를 드렸습니다.
한 주가 지나가고 다시 메시지가 왔어요. 책 더 빌려줄 수 없냐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일주일에 3권 정도씩 빌려줄 수 있냐고요. 제 영이 얼마나 기쁜지 제 입에서는 ‘주님 감사해요.’ 소리가 절로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그토록 읽게 해드리고 싶었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본과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 그리고 다른 분의 책을 하나 끼워서드렸습니다.
그런데 9월 28일 토요일 예언전도시간에 메시지가 왔어요. 책 드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요. ‘권사님,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저 주시면 안 돼요.’ 하구요. ‘옳다구나! 드디어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구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제 영이 뛰기 시작했어요. 안된다고 했을까요. 오우 NO~ 아닙니다. ‘목사님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했습니다.
사랑하는 담임목사님, 힘내세요. 여기저기 곳곳에서 목회자들도 영혼들도 깨어나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주님이 일하고 계시는 증거들이 보입니다. 저는 목사님 책을 계속 적으로 그 목사님께 빌려드리고 빌려드릴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통해 구원받을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읽어보셨지요? 아직도 안 읽으신 분들이 있다면 꼭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두 간증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증보판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라는 설교가 들어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그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그런 사람들만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와 신앙’ 정윤석 기자와 정바울 목사, 권성수 교수, 이인규 권사가 율법주의 이단이라고 저를 공격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어거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그들이 말하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법적인 의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실생활에서 나타나게 되는 의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서 회중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전혀 전하지 않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사도들로부터 빗나가 있는가! ‘율법주의’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시도이다. ‘바리새주의’는 외형적이고 사소한 종교적 의무에 몰두하는 것이다. 복음에 광채를 더하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들을 가르치는 것은 율법주의도 바리새주의도 아니고 명백한 사도적 기독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마 5:20), 이는 그리스도인의 의는 율법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율법의 영역이 실제 행위를 넘어서 말에까지, 그리고 말을 넘어서 마음의 생각과 동기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인간의 전통에 외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정신과 마음으로 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또한, 강해설교자들과 특히 장로교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교본처럼 사용하는 뛰어난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즈 역시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그들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찰해야 할 가장 중대한 점들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성결관과 성화관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관은 어떠합니까? 우리 주님은 여기서 기독교인의 의, 곧 가장 작은 기독교인의 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주님의 분석에 비추어서 검토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에 나오는 저의 해석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 강금성 선배님을 다시 만나고,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가 전에는 잘 읽지 않았던 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저의 해석의 결론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 과정의 해석들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라는 설교를 할 때 다음과 같은 목차로 설교했습니다.
1. 율법의 도덕법은 폐해지지 않았으며 폐해질 수도 없습니다.
2. 율법의 도덕법은 폐해지지 않았으므로 지켜야 합니다.
3. 우리는 율법의 도덕법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지키면 안 됩니다.
4. 우리는 율법의 도덕법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바꾸어 말해서 무엇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일까요?
이 중 3, 4번 대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1, 2대지는 예수님이 온전케 하려 오신 율법과 선지자가 단지 도덕법이거나 심지어는 율법도 아니고 구약 성경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해석입니다. 지난 주 저는 양용의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본문을 재해석하므로 그 동안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성취자이십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중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말은 교회 내의 율법폐기론자들 또는 기독교를 비난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주된 강조점은 하반절의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긍정적인 면에 있습니다.
제가 한 첫 번째 실수는 이 구절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를 구약성경으로 이해하지 않고, 율법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것, 선지자는 이 율법을 범하고 사는 백성들을 꾸짖고 율법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역할을 한 사람들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루고 있는 것이 단지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적 어구(참조. 마카베우스2서 15:9, 행 24:14, 롬 3:21)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태는 11장 13절에서 동일한 어구를 (역순으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즉 ‘예언하다’라는 말과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뿐 아니라 율법도 ‘예수님께서 이루어 가시려는 것’을 내다보는 예언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구절(17절)의 키는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게 하다”(‘플로레사이’)라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의 해석은 어렵기로 유명하며,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다음은 그중 중요한 것들입니다.
1) 예수님이 가르침을 통해 율법의 진정한 의미, 정신, 의도, 혹은 기본적 원리들을 온전하게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해석으로 다수의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나 존 스토트,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유명한 성경교사인 찰스 프라이스도 이 해석을 지지하고 있고 그래서 저도 과거에는 이 해석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양용의 교수님도 이 해석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고 부분적으로는 선택하고 있습니다.
2) 율법의 요구들을 행하거나, 순종하거나, 혹은 실행하다. 또는 율법에 말하여진 바를 행함으로써 실현시키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3) 율법의 영속적인 유효성을 확증하거나, 세우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4) ‘가득히 채우다.’ 곧, 구약성경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거나 성취하다.
이것들 중 어느 한 해석이 본 절의 온전케 하려 오셨다는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넷째 해석이 아래의 이유들을 볼 때에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⓵ 70인역에서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에 사용된 ‘플레로사이’는 시종일관 히브리어 ‘말레’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레는(끝까지) ‘가득히 채우다’,(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다’, 혹은 ‘완결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⓶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의 각 용례마다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성경의 성취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구절에서도 동일한 의미, 곧 [성경을] ‘성취하다’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⓷ ‘선지자들’이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의 직접 목적어로 나타난다는 점 역시 이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예언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⓸ 마태복음의 줄거리가 구약성경에 계시된 메시아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선지서들 뿐 아니라 율법까지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성취하신 메시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⓹ 무엇보다도 17절 바로 뒤에 나오는 18절 말씀이 결정적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다음 대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구절은 율법을 지켜야 할 계명으로 보지 않고 마태복음 11장 13절에서와 같이 이루어져야 할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온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을 단순히 율법의 바른 이해를 주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취이십니다. 단지 구약의 몇몇 본문들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정도가 아니라, 구약 전체에 의해 증언된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넷째 해석이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넷째 해석과 함께 첫째와 둘째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실제로 율법의 원래 의도와 정신 그리고 근본 원리를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고, 구약의 약속된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이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성취는 율법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성경구절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31-4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구절 안에 나오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계율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들을 초월하셨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17)라고 하심으로 그런 가능성을 일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약 성취에 율법을 초월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폐하는 것과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폐하는 것은 율법의 의도와 정신과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율법의 목표를 철폐하고 말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취는 율법의 의도와 정신과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율법의 ‘성취’와 ‘폐함’ 모두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 한다는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 결과는 판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예언의 성취와 계명의 의미를 드러내는 두 가지 모든 면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신 것입니다.
2. 율법은 주님 재림 때까지 폐해지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과거에 저는 여기에 나오는 “율법”을 도덕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의식법까지 포함한 모세의 율법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 전체를 가리킵니다. 마태의 관심은 이제 구약성경 전체로부터 모세의 율법으로 좁혀지고 있는데, 이 초점은 마태복음 5장 끝까지 유지됩니다(참조. 19, 21-48절). 여기에 나오는 ‘일점일획’이라는 표현은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하는 율법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율법의 가장 작은 세부사항까지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루리라”(‘기네스따이’)라는 동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다’의 지시 대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먼저 “이루리라”라는 동사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여기에 사용된 동사 ‘기네스따이’는 자주 ‘일어나다’, ‘발생하다’, 또는 ‘실현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이것은 단순히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야 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율법의 상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다’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가 무엇을 지시하느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견해들이 있습니다.
1) 율법의 요구들을 가리킨다.
2) 실현되어야 할 사건(들)을 가리킨다.
이중 둘째 가능성의 경우 ‘다’가 가리키는 사건이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습니다.
⓵ 이 시대의 끝을 가리킨다.
⓶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또는 부활을 가리킨다.
⓷ 예수님의 전 생애를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해석들 중 마지막 것 곧 ‘실현되어야 할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전 생애’가 가장 적절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마태복음의 줄거리와 가장 잘 조화됩니다. 마태복음의 줄거리는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그리고 가르침과 능력 있는 사역들을 통하여(즉,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하여) 구약성경 전체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고 새 시대의 막을 여셨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해석은 전후 문맥과도 잘 들어맞습니다. 특히 17절과 잘 들어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에서 주님은 구약성경 전체(율법이나 선지자)가 예수님의 전 생애의 사건들에 의해 성취되고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그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에도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구약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편, 구약성경에 예표 되거나 예언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들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 두 가지의 특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약속이나 예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이상근 박사님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천지가 없어지고 인간들이 심판 받기까지 구약의 예언이 계속 성취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 구약시대에 지켜야 할 율법과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이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18절과 접속사 ‘그러므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8절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18절에서 주님은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9절의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된다”고 하신 주님의 경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버리고”라는 단어는 성경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삼상 15:26)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나 계명에 ‘불순종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계명을 ‘제쳐두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19절의 해석에 대한 열쇠는 그 안에 나오는 “이 계명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⓵ ‘예수님의 명령들’,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21-48절의 ‘대조적 교훈들’
⓶ 18절에서 언급된 ‘율법’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계명’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주된 의미와 지시대명사 ‘이’가 붙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계명들’은 18절의 ‘율법’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명령들’ 즉 21-48절의 ‘대조적 교훈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구속사의 시간 선상에서 19절에 나오는 ‘계명들’의 지시 대상은 성취이후 시기에 속하지만, 17-18절에 나오는 ‘율법’의 지시 대상은 명백히 성취이전 시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구분을 양용의 교수님이 도표로 그려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17-18절에 나오는 ‘율법’(‘노모스’)이 19절에서는 ‘계명들’(‘엔톨라이’)로 바뀐 어휘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지시 대상의 변화를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단어를 바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들’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율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성취된 율법’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취된 율법’이란 옛 율법이 내다보았던 ‘새 율법’이고, 예수님의 초림에 의해 이미 성취된, 그리고 그분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그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메시아적 율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과 구분은 정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 보기’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메시아적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즉 율법의 모든 계율들, 심지어는 가장 작거나 가장 덜 중요한(참조. ‘가장 작은 것들 중 하나’) 계율까지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성취된 의미로(참조. 5:21-48; 7:12; 11:28-30; 15:19-20; 19:7-9; 22:36-40) 지켜야 합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19절에 충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 곧, ‘메시아적 율법’의 가장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항들까지도 순종하느냐 아니면 제쳐두느냐가 하늘나라에서 사람들의 지위를 판가름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귀족은 순종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판의 날에 이르러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읽었느냐에 대하여 심문당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행하였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훌륭하게 열변을 토했느냐 보다는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적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진실로 ‘메시아적 율법’을 작은 것까지 철저히 지키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원히 큰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상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바와 같이, 양용의 교수님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기점으로 구분되는, 구약시대의 백성들이 지켰던 율법인 옛 율법과 제자들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인 새 율법, 성취된 율법, 메시아적 율법을 구분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과 구분이 제가 과거에 설교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존재를 확인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설명과 유사한 개념을 바울의 글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18절과 더불어 19절은 17절에 언급된 율법폐지론을 경계하게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 없는 자라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로 정죄될 위험성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됩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시대의 유대인처럼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율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절에 의하면 그것은 지극히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이후 구절들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시면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입니다(21-48절). 그러므로 결단하고 주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기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4. 천국에 들어가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교량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앞 절들(17-19절)을 결론 맺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따라오는 대조적 교훈들(21-48절)을 도입해줍니다.
여기서 ‘천국’은 마음에 임하는 천국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들어가게 될 나라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가 이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의가 없으면 누구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렵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과 일치하는 것으로 신앙주의를 완전히 차단하는 말씀입니다.
주목할 점은 여기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부인의 치맛자락을 잡고 억지로 교회에 다니며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엄격함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248개의 지켜야 할 계율과 365개의 금지조항으로 이루어진 세세한 규정으로 나누었습니다. 거기에다가 1,521개의 수정조항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므로 회심하기 전의 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9-12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 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빌립보서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래서 존 웨슬리는 본문 20절에 대해 심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심사숙고할 엄숙하고 무게 있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가 어떻게 저들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생각하기에 앞서 현재 우리는 그들의 의의 표준에 도달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낫기는커녕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 안에 지옥에 갈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대강대강 편하게 신앙생활한 사람도 아니고 매우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한 자들인데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요? 캐더린 쿨만이 그 이유를 간단하게 잘 표현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그들의 외면의 생활만이 조건으로 되어 있는 의였다. 그것은 외식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대접의 겉만 닦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존 웨슬리는 신자들에게 “당신의 종교를 마음의 종교가 되게 하시오!”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안(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아침에 깨끗이 씻고 와서 겉보기에는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안이 더러운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겉만 깨끗하게 하지 말고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고 계시는 것은 영혼들의 안전을 위해 사활적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수시로 강조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설교자들이 이 진리에 대해 무지하거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와 반대로 가르치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산상수훈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믿음을 존중히 여기나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갈 5:6)을 존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의 권세와 범죄 행위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다면, 그것은 ‘믿으라. 그러면 거룩하게 됨이 없이도 죄에서 직접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믿음은 성화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거룩한 자가 될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그대는 마음의 평화와 능력을 함께 받을 것이며, 능력을 받아 죄를 극복할 것이며, 그대의 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를 전적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며, 참음으로 선행을 계속하여 영광과 존귀와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크고 작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생활과 말로 가르쳐 천국에서 제일 큰 자라고 부름을 받게 될 것이라’라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 다른 방법으로 그것이 믿음이라거나, 다른 무슨 이름으로 불리거나 간에 우리가 천국이나 영광이나 존귀나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실상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교하면 ‘신율법주의’라고 공격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왜 이들을 무지하다고 하느냐 하면 이런 주장을 하신 원조는 예수님이고 그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신율법주의 이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단이고 성경에 무지한 그들은 정통이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율법주의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격들 때문에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질적 차이에서 발견된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큰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통치적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의는 자기 스스로 이룬 자기 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의라고 특징지어질 수 있다...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큰 의’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그 시발점을 두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그 목표점으로 삼는다. 또한 제자들의 ‘더 큰 의’는 하나님 나라의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요구되는 ‘더 큰 의’는 윤리적 규범들을 자기 스스로 지켜나가는 자기 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로서, 그 통치의 결과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의이다.
그렇다면 제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획득한 자격이나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으로 드러난다.”
저도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본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답했는데, 그것을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야 하며,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교하면 대번에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라고 공격합니다. 실제로 저는 ‘교회와 신앙’ 기자와 정바울목사, 권성수교수, 이인규권사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았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거짓과 억측으로 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두 가지로 공격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간다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주장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그 말 그대로 라면 예수님부터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마 5:20 참조). 그리고 답답한 것은 왜 ‘행위’하면 율법의 행위만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행함입니다. 즉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이며, 이것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참된 믿음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저를 공격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며 불의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했다(롬 3:20). 누가 과연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겠는가? 변 목사가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결국 율법(도덕법)을 지키는 것인데 과연 율법을 다 지키고 구원받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천국에 갈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이것 역시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항상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참 신자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참 신자가 가지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다름 아닌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믿음에 따르는 행함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성화가 아니며, 믿음 역시 성화나 더욱이 완전 성화가 아닙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믿음은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에는 반드시 마음과 삶의 변화가 따르지만 율법의 행위의 경우처럼 항상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화이며 성화 중에서도 완전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같은 수준으로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켜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불완전한 순종을 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어떻게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회개나 믿음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예수님의 의! 바로 그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 명목상의 신자이거나 외식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를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만 덧입혀지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율법의 행위와 동의어가 아니라 바로 회개의 참됨을 보여주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그리고 믿음의 참됨을 입증해 주는 믿음에 따르는 행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시에 그 의가 율법의 행위처럼 완벽한 것이 아니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마태복음 5장 21-48절과 마태복음 5장 17-20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태가 열쇠 단락이라 할 수 있는 17-20절 바로 뒤에 대조적 교훈들을 위치시킨 것은 그 단락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율법 성취와(17절) 더 나은 의(20절)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열쇠단락에서 도출된 결론들이 그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조적 교훈들에 적용하여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21-48절의 대조적 교훈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가 내린 결론들이 타당한지 확인해보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21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해석한 계명들에 대한 정정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양용의 교수님은 이와 다른 색다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여섯 개 모두가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공유하고 있는 도입 형식구는 첫째와 넷째 대조법들에서 그 완전한 형태를 띤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21-22, 33-34절). ‘너희가 들었다’(‘에쿠사테’)는 ‘너희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그러나 그릇된 방법으로 이해하였다’라는 의미로서의 랍비적인 전문적 용법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것을 지칭하는 비전문적 용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회당에서 성경이 보통 해석된 형태(곧, 탈굼 형태)로 읽혀졌으리라는 강한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위의 두 경우 중 어느 쪽을 택한다 해도 ‘너희가 들었던’ 내용에는 성문 율법에 의해 원래 의도되지 않았던 해석적 요소들이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형식구 전반부의 실제적인 비중은 두 번째 동사 ‘[그것이] 말하여졌다’(‘에레떼’)에 주어지고 있다. 사실 형식구 후반부의 동사 ‘내가 말한다’(‘레고’)의 대칭을 이루는 동사는 ‘너희가 들었다’라기보다는 ‘[그것이] 말하여졌다’이다. ‘[그것이] 말하여졌다’가 신적 수동형으로서 그 내용은 시내 산에서 말하여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그것이 주어진 ‘옛 사람들’은 시내 산 세대를 지칭하게 된다. 그렇다면 형식구의 전반부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의역될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 세대에게 말씀하셨던 바를 (회당에서 서기관들의 해석과 더불어) 들었다.’
우리가 20절과 여섯 대조적 교훈들(21-48절) 사이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성문 율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곤 하던 전통적인 서기관적·바리새파적 해석이 형식구 전반부의 부차적 요소일 가능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17-20절 전체에서의 핵심 논점(즉, 율법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님)을 고려해 볼 때, 형식구의 주된 초점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성문 율법 그 자체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형식구 후반부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라는 표현 자체는 랍비 문학에서 평행구들이 발견된다. 하지만 그 형식구가 이끄는 교훈들의 특징적인 권위로 미루어 볼 때, 현 문맥에서의 용법은 독특하다. 우선적으로 이 후반부의 표현은 예수님의 교훈들(‘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을 성문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의 해석이나 이해(‘너희가 들었다’)보다는, 우선적으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성문 율법 자체(‘[그것이] 말하여졌다’)와 대조시킨다. 둘째로, 이 후반부의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들(‘너희’)을 시내 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옛 사람들’)과 대조시킨다.”
사실 저는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이 후반부의 표현은 예수님의 교훈들을 성문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의 해석이나 이해보다는, 우선적으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성문 율법 자체와 대조시킨다. 둘째로, 이 후반부의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시내 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시킨다.”라는 부분이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반감마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양용의 교수님의 책을 다 읽은 후 성경말씀으로 분별하기 위해 본문을 다시 읽을 때, 책을 읽을 때는 그다지 어필되지 않았던 21절과 33절에 나오는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들어왔습니다. 분명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불완전한 가르침 이상의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모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에게 말한 주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의심할 여지없이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용의 교수님의 주장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양용의 교수님이 지적한 대로 예수님이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해석한 것을 바로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메시아적 율법’(그리스도의 율법)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편, 21-48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섯 가지 대조법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부류의 세 대조법에서는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이 해당 계명들을 확증해주는 반면, 둘째 부류의 세 대조법들에서는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이 해당 계명들을 무효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성격이 맞는 것끼리 각각 묶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둘째, 여섯째 대조법
1) 첫째 대조적 교훈 - 살인
마태복음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저는 17절에 기록된 율법의 완성이 율법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그 주된 의미이기는 하나 지엽적으로는 율법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는 것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찰스 피니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원리”라는 책에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영적인 면에 관해서는 심한 무지 가운데 있다. 만약 그들이 주의 율법의 거룩함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들의 성품에 대해서 상당한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의 참 정신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혀 없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마치 우리들이 매우 신비주의적으로 말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뭐라고요? 법은 어디까지나 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말하는 바를 당신들만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그것을 신비화하여, 마치 율법에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굉장한 신비한 의미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그것의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
(1) 분명히 법은 법이다.
(2) 모든 율법에는 의문(儀文, letter)과 정신(spirit)의 요소가 있다.
율법의 명제들에 대한 개괄적인 진술은 그 의문에 있으며, 현실의 모든 상황에 그 율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율법의 참된 취지와 의미는 그 정신이 된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의 참된 의미와 관련해서 전적인 무지 가운데 있다.
예를 들면, 첫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다. 자, 이 계명은 의문과 정신 둘 다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또한 그러하다. 이 계명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다. 또한 이 계명에 담겨있는 율법의 정신은 신자가 매일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룩한 애정을 품고 하나님께 대해 최고의 사랑, 사심 없는 사랑, 보편적이고 영구한 사랑을 나타낼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모든 계명에는 문자와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후 가르침에서 각 계명들의 정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혼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의 악함 때문에 허용하신 것까지도 원래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으로 돌려놓은 해석과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문자만 알았고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자와 목회자 등 종교지도자들은 복음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회개, 믿음, 중생, 구원, 은혜, 견인 등 복음의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하여 문자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 실제적인 의미는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넓은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교회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었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불행히도 교인들 중에는 종교적으로 세뇌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짜로 성경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하여 들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이것은 치유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만 구원과 관련해서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올바른 교회 선택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21절 상)는 계명은 십계명의 제6계명으로 출애굽기 20장 13절과 신명기 5장 1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3 “살인하지 말라!”
신명기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또한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21절 하)는 출애굽기 21장 12절과 레위기 24장 17절 등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1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레위기 24: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구약의 율법은 살인 행위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은 살인 행위의 이면으로 들어가서, 살인을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분노와 그로 말미암은 욕설까지 문제 삼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카’는 아람어로 문자적 의미는 ‘텅 빈’입니다. 그러므로 ‘골빈 놈’에 해당하는 욕설입니다. ‘미련한 놈’(모레)은 그렇게 대단한 욕설이 아닙니다. A. B. 브루스는 두 욕설 사이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라가는 사람의 머리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다. - 어리석은 놈! 모레는 마음과 성격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다. - 나쁜 놈!”
아무리 사소한 욕설이라도 욕설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줍니다. 이렇게 형제에게 화를 내고 증오심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 법정에서는 살인과 동등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분노와 사소한 욕설까지도 하나님께는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가 된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특히, ‘미련한 놈’이라는 욕설에 대한 형벌이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선언(22절)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는 감정 표현과 사소한 욕설까지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를 매우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화를 내는 것을 정죄하신다면, 우리는 형제와 불편한 관계를 가진 상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23-24절).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6:14-15;18:21-35).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 자신이 형제에게 잘못한 상황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제물이 열납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재판의 비유를 첨가하심으로써 재차 강조하셨습니다(25-26절). 만일 우리가 형제와 화해하는 일을 게을리 할 경우, 우리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히브리서 12:14-15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혹 여러분의 마음에 쓴 뿌리가 생겨서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즉각 상대를 찾아가서 화해하십시오. 그래서 마음에 쓴 뿌리를 뽑아버리시기 바랍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과 제물을 드리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존 웨슬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수행할 어떤 의무나 책임을 완수만 하면 혹 다른 면에 있어서 좀 부족할지라도 이를 눈감아 주실 것이라는 망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망상을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무를 수행했다면 다른 것은 못했어도 관계가 없다든지 한두 가지를 이행했으면, 그 전체를 이행한 것이나 다름없이 여기신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할 일을 다 했다고 해서 우리 이웃에게 할 것은 안 해도 괜찮다고 할 수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경계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령 종교적 행사를 완수한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에게 해야 할 선행을 무시했다면 하나님은 이를 용서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사도 도리어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형제와 화해하고 화평해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쉽게 빠져나갈 구멍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주의자들은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의롭다”라는 식의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은 언어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룹니다. 이것은 요한일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일서 3:14-15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분노와 욕설과 미움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할 때 대개는 할 만하니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이 정도면 화낼 만도 해, 이 정도면 욕해도 돼!’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런 생각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화를 내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데 당연히 화는 화를 낼만하니까 내는 거야! 그러므로 화를 낼만한 그때야말로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야!’ 이렇게 생각을 바꾸십시오. 더구나 하나님이 보실 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은 살인입니다. 심판 받을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것을 명심하고 절대로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도록 합시다.
2) 둘째 대조적 교훈 - 간음
마태복음 5:27-30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간음하지 말라”(27절)는 십계명 중 제7계명인 출애굽기 20장 14절과 신명기 5장 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4 “간음하지 말라!”
신명기 5:18 “간음하지 말지니라!”
구약의 율법은 간음 행위 자체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취적 교훈은 간음 행위의 이면으로 들어가서, 간음 행위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정욕에 초점을 맞춥니다. 존 스토트가 말한 대로 “살인을 금하는 명령이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포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간음을 금하는 명령은 색욕적인 눈빛이나 상상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제 10계명에 이미 이런 점이 나타나있습니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정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세상 법정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것도 간음이고 유죄 판결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결과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큰 의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간음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에 정욕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의 외적 기준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감정과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항상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욥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은 심지어 참소자인 사탄에게 욥을 이렇게 자랑하셨습니다.
욥기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데 그런 욥이 뭐라고 고백했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31: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욥이 거룩을 위해 이처럼 주도면밀했다’는 것뿐 아니라 ‘욥과 같은 의인에게도 눈 돌리기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눈 돌리기는 모든 남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술 취함이 방탕으로 이어지듯이 여자를 보는 것은 마음의 간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듯이 여자는 촉각, 남자들은 시각을 통해 성적 자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에게는 눈 돌리기가 필요합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왓슨은 눈 돌리기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육욕의 불은 눈에서 불붙기 시작한다. 다윗은 자기 집의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자가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지라’고 하였으며, 그래서 사자들을 보내어 데려와서 자신을 더럽혔다(삼하 11:2).
아아 그러므로 당신의 눈을 조심하라!... 만일 눈이 한번 불붙는다면 죄에 대해서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눈 돌리기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적인 정결함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하여 매우 실제적으로 교훈하신 것이 바로 눈과 마음의 관계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음욕을 품고 보는 것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만약 마음의 간음이 눈의 간음의 결과라면 그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의 발단인 우리의 눈을 다루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행실에 앞서 수치스러운 상상이 일어나며 상상이 불타오르는 것에 앞서 눈의 방종이 일어난다.”
불에 기름을 계속 공급하면서 물을 끼얹어보십시오. 그러면 꺼지기는커녕 더 세게 타오릅니다. 불을 끄려면 물만 붓지 말고 기름을 공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를 보는 것은 정욕의 불에 기름을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눈 돌리기를 하지 않으면서 말씀과 기도로 정욕의 불을 끄려고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눈 돌리기를 해야 합니다.
한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28절)는 가르침도 충격적이지만, 29-30절 말씀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좀 더 긴 무시무시한 경고를 떠오르게 합니다.
마가복음 9:43-49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이 경고는 단순히 엄포가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이것은 우간다라는 한 나라를 변화시킨 존 물린디 목사님의 간증에 잘 나타납니다. 수년 전 저는 존 물린디 목사님이 아이합에서 간증한 것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해 6월 10일 주일설교를 하지 않고 그 간증을 영상으로 전 교인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그날 9,200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참석했는데 회개와 통곡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함께 들었던 간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제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그런 죄인입니다. 저 혼자는 회개도 못합니다. 회개의 은혜를 주세요.’ 제가 그렇게 부르짖을 때 주님의 임재가 제 위에 임했습니다.
설교자로서 때로 설교 도중 주님의 임재가 임할 때가 있습니다. 꼭 그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제 오시는구나'하고 안도했습니다. 그런데 임재가 점점 강해져 제가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강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아주 무거운 임재가 제 위로 내려왔습니다. 몸이 떨리고 땀이 났고 혀가 입안에서 부어올라 더 이상 혀를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몸 안에 있는데 그 몸은 더 이상 제 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밝은 빛이 제 눈을 강타했습니다. 너무 밝아서 볼 수 없었고 눈을 감아도 눈동자를 꿰뚫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떨면서 생각했습니다.
어떤 음성이 제 이름을 세 번 불렀습니다. 제게는 대답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존!’이라고 저를 3번 불렀습니다.
‘내가 창세전에 너를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선택해서 마지막 때에 나를 섬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내가 만약 오늘, 나의 거룩한 신부들을 부르러 온다면 너는 나의 신부들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데려가지 않겠다!’
제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큰 충격이어서 반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데려가지 않겠다!’
‘성경말씀에 주를 기다리는 자에게 주께서 나타나시리니 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살아가야 할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너는 온갖 더러운 것이 너의 삶에 흘러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너는 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자처럼 살고 있다.’
저는 이미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순간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가 없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나는 직업을 포기했고, 선교 나가기 위해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포기했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하나님일 리가 없다. 나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시다니! 나의 신학과 가르침과 다른 이런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이 고린도전서 6장 9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분이 말했습니다.
‘너의 삶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외형만 다듬으며 많은 것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다. 내가 중심을 재어보는 하나님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너는 나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너의 삶에 이런 저런 죄들이 있는데 어떻게 나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겠는가?’
그분이 죄를 나열할 때 저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 죄를 말할 때만은 내 마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나는 한 번도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너의 삶이 간음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야! 이건 아니지.’ 내가 마음으로 거부하자 음성이 잠시 멈추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정직하다. 그런데 너는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느냐? 네가 네 마음조차 모르니 내가 보여주겠다. 이 날을 기억하느냐? 이 시간 이 장소를?’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저 자신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택시를 타고 앉아서 다른 승객이 타기를 기다리다가 창밖 한 여자를 보며 온갖 더러운 상상을 했습니다. 그게 떠오르자 저는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거슬려 죄를 지었습니다.’
‘너는 죄를 짓지 않았다! 너는 죄 가운데 살고 있다! 너는 낮부터 밤까지 그런 상상을 하며 살고 있다. 밤에 침대에서도 그런 죄를 즐기고 있다. 나는 너의 모든 순간을 알고 있다! 나는 너의 생각을 알고 있다.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설교단에 나를 섬기려고 서 있는 그 사람도 벌거벗기는 상상을 한다. 여자를 정욕의 눈으로 보는 자는 이미 간음을 한 것이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그리고 내 상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죄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그 죄를 보지 못하기에 죄 가운데도 편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이다!’”
베드로후서 2: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베드로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12절에 의하면 이들은 멸망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평신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 의하면 목회자들을 의미합니다. 존 물린디 목사님의 간증이 보여주듯이 설사 목회자라 할지라도 눈과 마음으로 계속 간음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음심을 심상히 여기면 안 됩니다. 남자들에게는 필수인 눈 돌리기를 잘하므로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3) 여섯째 대조적 교훈 – 원수사랑
마태복음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저는 지난 주 말씀드린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이 구절에 대한 양용의 교수님의 해석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제가 받은 충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그 부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43상절)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부가적 구절(‘네 원수를 미워하여라’)은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인용구가 아닐뿐더러 구약성경의 가르침의 요약으로 간주되기도 어렵다. 이 부가적 구절은 아마도 신명기 7:2-5, 23:3-6, 30:7 등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그릇 추론된, 하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해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1QS1.3-4, 9-11; 9.21-22). 구약의 율법은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대상을 원수에게까지 확대하도록 요구하신다. 이러한 요구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의 기준을 훨씬 더 뛰어넘고 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음의 내적 태도와 관심이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랑은 제자가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자에 대해서까지도 그의 최선의 삶을 진정으로 그리고 간절히 열망하는 자세, 그리고 그러한 열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44절). 이처럼 중심으로부터 갈망하는 원수 사랑만이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이다.
과연 인간이 어떻게 이 정도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제자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하신다(45, 48절). 원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모든 제자들의 특성인 내적 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는 자기 노력의 결과인 자기 의가 아니며,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이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는 그 어떤 깨어진 관계도 허용되지 않으며,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은 완전함이 기대될 뿐이다(48절 참조. 레 11:44-45, 신 18:13).”
이 해석과 함께 나에게 매우 새롭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16-21에 따르면 ‘제자가 되는 것’(21절)은 ‘완전하여지는 것’을 요구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곧 5:20의 ‘더 큰 의’는 다름 아닌 5:48에서 진술된 ‘완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동일한 완전함이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는(즉, 제자가 되고자 하는)부자 청년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요구되고 있는 완전함은, 5:48에서와 마찬가지로(참조. 5:43-47), 레위기 19:18의 사랑의 계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21절,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참조. 19b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처럼 ‘완전’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을 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충격이었고, 아주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되자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근거로 다음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① 본문 44-45절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수년 전 마크 듀퐁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회 다섯째 날 낮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나의 음성은 안다고 하셨어요. 아주 어린 새끼 양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성숙하고 장성한 양이 내 음성을 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신약의 헬라어에는 자녀에 대해서 사용하는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먼저, ‘테크논’입니다. 이것은 그 집에 태어난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라 불림을 받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린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또, 자녀를 뜻하는 단어가 있는데 ‘휘오스’입니다. 휘오스는 그 가정에 탄생한 모든 자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자녀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여러분의 삶을 드렸을 때 성령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즉각적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자녀들은 부모님의 속성을 그 안에 다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기까지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10년, 15년, 20년, 30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데 아직도 목사님이 와서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할 그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는 곳곳마다 그곳을 마구 지저분하게 합니다. 자기 뜻이 안 이뤄지면 울기를 잘해요. 그리고 냄새가 지독하게 나요.
그들도 하나님께 속했을까요? 예. 그들도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무릇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휘오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도 ‘휘오스’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나오는 것처럼, 저는 본문 45절도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숙한 신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45절에 나오는 ‘아들’은 ‘휘오스’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성숙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크 듀퐁 목사님의 주장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틀린 주장입니다. 제가 직접 ‘테크논’의 용례를 찾아본 결과, 항상 어린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무관하게 사용된 곳이 많았습니다. 다른 구절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습니다. 마크 듀퐁 목사님이 제시한 요한일서 3장 1절 자체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여기에 나오는 ‘자녀’(테크논)라는 말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를 어린 자녀라고 착각한 것 같은데 이 단어는 연령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릴 뿐 아니라 나이가 많은 모든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그 증거로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주사” 또는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말하므로 자녀 안에 자신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이며 노 사도인 사도 요한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였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는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휘오스’라는 단어의 용례도 살펴보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휘오스’ 역시 장성한 아들이 아니라 아기나 어린아이를 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성구들에서도 ‘테크논’이 아닌 ‘휘오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가복음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요한계시록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처럼 ‘휘오스’는 장성한 아들이 아니라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아이를 가리킬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크 듀퐁 목사님이 설교 중 말한 그런 구분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했지만, 본문 44-45절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구절에 사용된 “아들” 역시 ‘휘오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숙한 아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이라야 구원받고 거듭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럼 이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문맥에 의해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20절에서 말씀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사람이라야 진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진의입니다. 참으로 충격 아닙니까?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와 핍박자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반감이 느껴져서 ‘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나?’ 라고 반문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수사랑은 마땅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1:26-27).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16).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 3:5). 그리고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요일 3:8-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분”입니다(4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아버지를 본받아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받으므로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롬 13:8).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라고 사랑의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빚진 만큼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사랑은 의외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할 뿐 아니라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러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② 본문에 나오는 ‘완전’(48절)이 완전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은 놀랍게도 존 웨슬리나 우리가 늘상 생각해왔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완전입니다. 주님은 지금 완전 성화를 논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외식하는 자들과 반대되는 진실한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에 관해 설명하고 계십니다(20절). 그러므로 실제로 이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완전입니다.
제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마십시오. 저는 완전 성화를 부정하거나 완전 성화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 성화는 존재합니다.
고린도후서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에베소서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처럼 성경에 의하면 완전 성화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완전’은 이런 완전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완전이라면 우리들 대부분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완전은 수준에 있어서의 완전이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의 완전입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완전케 되거나 성숙한 신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영적인 청년과 아이들은 물론 갓난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견해는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지지해줍니다.
마태복음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잘 주의해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분명히 수준에 있어서의 완전이 아니라 이웃과 원수,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우리를 사랑하는 자와 형제들에 반대되는 원수와 박해하는 자 등 사랑의 범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범위에 있어서의 완전입니다. 이것은 다른 계명들을 해석한 것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7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생각해봅시다. 그것도 일종의 범위에 대한 거룩입니다. 즉 행동뿐 아니라 눈과 상상과 마음의 거룩입니다. 결코 하나님만큼 거룩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처럼 스랍천사들마저 압도하는 거룩입니다. 인간으로서 누가 그처럼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마치 그와 같이 원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수준이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의 완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즉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완전한 수준이 아니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하고 사랑 안에서 성장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되시라고, 저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말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생명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데도 찍어내는 도끼에 은은한 향기를 내품는 백단목과 같다.”
썬다 싱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장님이 손을 더듬으며 길을 걸어온다면 눈뜬 사람은 그가 부딪히지 않도록 길을 비켜주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장님이 자기에게 갑자기 부딪혀왔다면 성을 내는 대신에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님이 부딪힌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속상해한다면 그것은 그가 장님보다 더욱 눈이 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상식과 동정심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 도무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우리를 진리를 따르는 까닭에 박해한다면 성을 내는 일이 없이 그를 용서하고 사랑으로써 그를 위해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다.(마 5:44-45)”
이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해보이지만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합니다! 시간관계상 다 인용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썬다 싱뿐 아니라 찰스 피니, 오랄 로버츠, 케네스 해긴, 마틴 루터 킹, 손양원, 윈 형제, “시베리아의 불꽃”의 저자 아놀드 로제... 등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삶을 실제로 살았고 그것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릭 조이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영적 승리들 가운데 하나는 원수를 친구로 만든 것들인데, 그렇게 함으로 어둠에 거하던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갑시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승리의 간증들을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2) 셋째, 넷째, 다섯째 대조법.
1) 셋째 대조적 교훈 – 이혼
마태복음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자기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증서를 써주라”(31절)는 것은 신명기 24장 1절에 대한 자유로운 의역입니다.
신명기 24:1-2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신명기 24장 1절은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서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한 경우 이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은 이혼뿐 아니라 이혼한 여인의 재혼까지도 허용합니다.
그런데 이혼의 허용조건인 ‘수치 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 당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수치 되는 일’을 성적 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에 힐렐 학파는 남편의 어떤 불평 원인이든지 이것에 해당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식을 잘못한다거나, 음식을 태운다거나, 심지어 아내가 예쁘지 않거나, 더 아름다운 여자에게 반해 있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면, 이러한 것들도 수치가 되었으며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후자가 더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예외 규정인 “음행의 경우를 제외하고”(32절 상)는 당시 유행한 힐렐 학파의 예외 규정보다 훨씬 더 엄격합니다. 또한 버림받은 여인과 결혼하는 자는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32절 하)라는 선언 역시 이혼한 여인의 재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신명기 24장 1-2절보다 훨씬 더 엄격합니다. 이에 대해 존 웨슬리는 “같은 논리로 비록 이혼을 하였을지라도 이혼한 여자가 살아있는 한, 남자가 재혼을 하면 역시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여자가 간음을 한 이유 때문에 이혼을 했다면 재혼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고 지적하실 뿐 아니라 무고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이혼한 여자 대부분이 재혼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쉬 납득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나오는 “간음하게 함이요”라는 표현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하므로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19장 4-9절은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에 좀 더 많은 빛을 던져줍니다. 19장 8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실상 구약의 이혼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창세기 2장 24절에 계시된 결혼의 첫 번째 원리(‘그러므로 남자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로 돌아갈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신명기 24장의 이혼 규정을 반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 율법에는 각각에게 적절한 기능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을 진술하는 기능을 하고, 신명기 24장 1-4절은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써 그 이상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조치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아적 성취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주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첫 번째 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옛 시대를 위한 조치가 그들에게 더 이상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혼한 남자의 재혼뿐 아니라 심지어 이혼 당한 여자의 재혼까지도 간음으로 보셨을까요? 그 이유를 존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그가 만드시고 사람이 깨트려서는 안 되는 독점적이고 영속하는 결합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혹은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된 불순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필연적인 추론을 끌어내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률이 보는 바로는 이혼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의 혹은 그녀의 첫 번째 배우자와 결혼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급증하고 있는 이혼과 재혼이 많은 경우 하나님 앞에서는 간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읽고 특히 남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은 이혼의 이유에 몰두했으나 예수님은 결혼 제도에 몰두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모세의 규정을 명령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한 양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가볍게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중대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 모든 재혼을 간음이라고 생각하셨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심지어 부정한 아내인 이스라엘을 다시 돌이키려고 하셨습니다(렘 2:1, 3:1, 4:1, 호 2:1-23).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하고 이혼은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넷째 대조적 교훈 - 맹세
마태복음 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3절은 구약으로부터의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 주제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들을 요약해놓은 것입니다(‘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레 19:22, '주님께 한 너의 맹세를 지켜라’ 민 30:2, 신 23:21-23). 구약에서는 맹세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때로는 명령되기도 했습니다(예. 출 22:7-10, 민 5:19-22). 다만 거짓 맹세는 금지되었는데, 이러한 금지는 정직과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헌터는 “사람들이 흔히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맹세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도 “맹세는 사실상 우리 자신의 부정직에 대한 애처로운 고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본문에서 맹세를 전격적으로 금지하시고 온전한 정직을 요구하셨습니다. 34-3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구약성경이나 당대 유대교 문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대의 유대교의 가르침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까지도 초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월은 구약의 맹세 관련 규정들을 반박하거나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맹세 관련 규정들은 옛 시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큰 의는 절대적 진실성 그 자체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맹세 관련 규정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으며 무효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대조법의 진정한 초점은 맹세에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맹세에 관한 구약 규정들의 궁극적 목적(곧, 무조건적 진실)을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절대적 진실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예수님은 실제로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며 완전케 하러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에서 제기 될 수 있는 두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 의문들과 답을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로, 만약 맹세가 금지되었다면, 왜 하나님 자신은 성경에서 맹세를 사용하셨는가? 예를 들면 왜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창 22:16-17, 히 6:13-18)라고 말씀하셨는가?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맹세의 목적은 그의 진실성을 강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기’(민 23:19)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끌어내어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대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인간의 수준까지 낮추시게 했던 잘못은 그에게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다.
둘째로, 만약 맹세가 금지되었다면 이 금지명령은 절대적인가?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진술서에 거짓이 없음을 선서하는 것이나 법정에서 선서하며 증거 사실을 진술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재세례파의 교도들은 6세기에 이러한 태도를 취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퀘이커 교도들도 여전히 그렇게 행한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숭고한 바람은 칭찬할 만하지만 누구나 그들의 해석이 지나치게 문자적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예수님 자신도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말하면서 그에게 맹세시켰을 때 대답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고 마태는 나중에 기록했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라고 고백하셨다. 예수님께서 그의 가르침으로 강조하셨던 것은 정직한 사람들은 맹세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약 외적인 권세에 의해 맹세하도록 요구를 받더라도 그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중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존 웨슬리의 글에서 몇 가지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글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맹세의 남용을 경계하는 교훈 중에 거짓 맹세와 또는 일상담화에서 하는 맹세는 금하셨으나 법관 앞에서 하는 맹세는 문제 삼지 않으신 것”이라는 지적과 가장 마지막에 제시한 “히브리서 기자도 엄숙한 맹세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보다 위대한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맹세는 사람들의 모든 논쟁을 끝내고 확증을 지어줍니다.’(히 6:16)하였는데 만일에 그가 섬기는 주님이 맹세를 전면 금하였다면 그런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은 눈여겨 볼만 합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책”에 나오는 보너 주교시절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이 선서하기를 거부한 것, 메리 여왕 시기에 몇몇 순교자들이 선서하기를 거부한 것,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선서와 약속이 요구될 때 많은 군인들이 맹세하지 않고 제대한 것, 그리고 조지 폭스가 판사의 질문에 “나는 평생 한 번도 선서를 한 일이 없으며 계약이나 약속도 한 일이 없소이다.”하고 대답한 것은 그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지나친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신앙고백을 하고 믿는다고 다 참 제자가 아닙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므로 그 말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 제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 중의 하나가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무디어져 거짓말하는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나도 사과하지 않고 계속 다른 주제로 공격하는 목사들 역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정직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의 정체와 운명을 보여주는 말씀이 성경 안에 굉장히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14:1-5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러분,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명심하시고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섯째 대조적 교훈 – 보복
마태복음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에는 눈으로 그리고 이에는 이로”(38절)는 출애굽기 21장 24절과 레위기 24장 20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2-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위기 24:19-20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문맥상 이것은 재판관들을 위한 교훈입니다. 이것은 정의를 세우고 복수를 제한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또한 가족의 원한 때문에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면서 재판관처럼 행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법정을 통한 보복을 허용하되 보복의 한계를 엄격히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재판에 의한 징벌의 원리를 그것이 폐하기 위하여 제정된 바로 그것 즉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변명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정반대의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은 보복의 제한에 관한 율법의 규정들을 뛰어넘어, 보복의 권리 자체를 포기하는 무저항의 원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복 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목표하였던 무한한 용서와 원수사랑(여섯째 대조적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저항’ 명령이 구약의 보복 법을 폐했다기보다는, 그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였던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보이므로 완전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요구 자체만으로도 율법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큰 의의 기준은 이 무저항의 원리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내적 감정과 태도까지도 포함합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율법주의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다른 쪽 뺨을 돌려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서, 마음에 불타는 분노가 있고 보복의 칼을 갈고 있다면, 이미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더 큰 의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앞에서 6계명을 다룰 때 살펴보았듯이, 마음에 분노나 증오심을 가지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22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분노심과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용서가 얼마나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용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간 사람들에 대한 충격적인 간증들을 들어보셨지요? 저는 그 간증들이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는 자라야 용서받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12, 14-1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지 않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존 스토트의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징벌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으시며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되고 공정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산상 설교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 그리고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무시무시한 사실에 관한 그분의 모든 가르침은 똑같은 기초 원리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께서 이 대구에서 확언하셨던 것은 비록 이 원리가 법정과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에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는 공정이 아닌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불의를 행하는 개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보복이 아니라 불의의 용납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9절)”
우리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완전히 보복을 부인하고, 악인들에게 복수하려는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원하는 진실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 킹보다 이것을 잘 실천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벤자민 메이스(Benjamin Mays)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고난의 의미를 알았다면 킹이 알았을 것입니다. 집은 폭파당했으며,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아래 13년 동안을 하루하루 살았으며, 공산주의자라는 악의에 찬 고소를 당했으며, 그릇 되이 성실치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같은 흑인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찔림을 당하였으며, 호텔 로비에서 구타를 당했으며, 약 20번이나 투옥되었으며, 때때로 친구들이 그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심히 마음의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전혀 없었고, 그의 영혼 속에는 증오심이 전혀 없었고, 그의 정신 속에는 복수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비폭력과 사랑의 구속하는 능력을 전파하면서 이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윈 형제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는 이 시대에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온갖 고문을 당하고 얻어맞으면서도 저를 핍박한 사람들을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저는 그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이자 저를 정결하게 하고 예수님처럼 만들기 위해 ‘선택하신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을 당할 때는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용서하기를 힘들어하고 용서에 실패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명백히 잘못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상대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용서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십시오. ‘상대방이 분명히 잘못했으므로 용서할 수 없다’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명백하니 그러므로 나는 용서하겠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보다 쉽게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여러분과 함께 대조적인 교훈 여섯 가지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살펴본 대조적인 교훈인 첫째 ‘살인’, 둘째 ‘간음’, 여섯째 ‘원수사랑’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첫째, 둘째, 여섯째)에 대해서 혹은 율법에 대한 서기관적 이해(여섯째)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이들 세 교훈들은 구약성경의 계명들을 단순히 확증하지도 그렇다고 폐지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 문자적 의미는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 계명들을 내면화하고(첫째, 둘째), 강화시키고(첫째, 둘째, 여섯째), 극단화시키고(첫째, 둘째, 여섯째), 확장시킴으로써(여섯째, 그리고 아마도 첫째, 둘째), 그 계명들을 능가하거나 초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펴본 다른 세 대조법(셋째, 넷째, 다섯째)도 구약의 율법과 상충되거나 그것을 폐하는 요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 이면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원래 뜻을 드러내 보여주고, 제자들의 관심을 그 원래 뜻에 집중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율법의 특정한 문자적 규정들을 초월하거나 뛰어넘거나 무효화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런 규정들은 굳은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상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옛 시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옛 시대를 위해 주어졌던 조항들이 우리에게 적절하지도, 의미 있지도,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혼 관계에 있어서의 불변성, 말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진실성,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저항적인 태도로 사랑하는 것일 뿐, 그보다 못한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즉, 완전하신 하늘 아버지에 의해 통치 받는 삶이 요구됩니다(48절).
다시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여섯 대조적 교훈에 대한 지금까지 해석은 다음과 결론들에 도달하게 해줍니다.
첫째, 여섯 대조법들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성취’(17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예시해줍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각 율법 조항들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뜻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것들을 내면화하고, 확장하고, 철저화하고, 능가하고, 초월하고,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함으로써 그것들을 온전케 하였습니다.
둘째,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여섯 대조적 교훈 가운데서 드러난 성취된 형태의 율법을 여전히 지킬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구원파적인 무율법주의는 결코 바른 것이 아닙니다.
셋째, 19절에 나오는 “이 계명들”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메시아적 율법’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여섯 대조적 교훈은 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메시아적 율법의 실례(實例)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여섯 대조적 교훈은, 옛 율법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큰 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더 큰 의가 단순히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마음과 행동으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아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48절).
그러므로 결론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히 본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직 그런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20). 또 그런 자들만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9).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고 나니 개혁주의 신학자 그리샴 매첸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율법을 낮게 보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율법을 높게 보면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된다!”
우리 힘으로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2:28-29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의지하여 원수와 핍박자까지도 사랑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양용의 교수님의 책을 읽고 그것을 주재료로 삼아 이 설교를 하면서 오랜만에 밥 존스 목사님의 사후 체험과 하워드 피트만 목사님의 천국 체험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증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심히 적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때 성령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셨던 김경규 교수님은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라는 책에서 “바리새인보다 못한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가 신학교 학생들에게, ‘예수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이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강력히 반발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 중에 구원 얻을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것이 논지였습니다.
다음의 영국성공회의 위대한 존 라일 주교의 말은 저들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구원 받기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경고합니다. 세상의 신앙기준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신앙이 지금 신앙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신앙보다 깊고 높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적다 하여 당신의 구원의 기준을 낮추시지 않습니다. 노아 때에는 단지 여덟 명만 구원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는 롯과 두 딸만이 구원받았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남겨진 자 오직 칠천 명만 구원받았습니다(롬 11:3-4). 그 당시 이스라엘 인구를 칠백 만으로만 어림잡아도 천 명 중 한 사람 꼴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 결코 넓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도 같은 견해를 갖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누가복음 13:23-28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전에 설명해드린 적이 있는데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47-50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친히 말씀한 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염두에 둘 때, 본문 21-48절 말씀과 같은 말씀들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 말씀이 곧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율법을 온전케 하러 오신 예수님(17절)이 온전케 한 ‘온전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25, 2:1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또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1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전에도 말했지만, 율법은 법입니다. 그리고 법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에 이어 야고보도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이 말씀에 복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