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마태 28,16-20
2021.5.30.; 삼위일체 대축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당부를 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코린 13,13).
그래서 우리는 이 세 분 하느님의 이름을 모두 담은 성호경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⒉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은 가장 쉽고
제일 짧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마음껏 숨쉬는 공기가 무한정 그리고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에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면서 지내는가 하면 꼭 마셔야 하는 물도 공기만큼은 아니어도 비교적
값싸고 손쉽게 마실 수 있지만 평소에는 거의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고
있는 것처럼, 성호경에서 날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부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도 평소에는 거의 그 의미와 역할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지냅니다.
⒊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공식 설명은 이렇습니다.
“삼위는 곧 하느님이시다. 세 분의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3항). 표현이 철학적이어서 이 어려운 설명은
본시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라 역할로
구분합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성령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자를 본받아
성부께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인도자이십니다. 훨씬 더 쉽습니다.
⒋ 성령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더 쉬워집니다.
성부만을 하느님으로 알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적인 권능으로
인정하지 못했고 거짓 예언자의 소행으로 치부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답답하셨는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⒌ 제자들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을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그분이 하느님만 일으키실 수 있는 기적들을 눈앞에서 수없이
일으키셔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실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선입견도 있었고, 뛰어난 예언자이신가 보다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으며,
게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신적인 권능을 발휘하시지도 않고 너무도 힘없이
최후를 맞이하셨기에 실망감도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수시로 그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어
발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서는 도저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비로소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받드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일단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보여주신 언행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제자들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⒍ 그러다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백스무 명 가량이 성모 마리아 주변에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주시자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기운을 받게 되었고 또 그 기운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 베드로가 보여준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입니다. 그는 그 전에 비겁했고 소심했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담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이 서슬퍼런 어조로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할 때에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하며 대꾸할 정도로 용기가 우러났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용기에다가,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새록새록 상기되어
그 말씀의 진리성을 깨닫게 된 것도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⒎ 그런데 어려워진 것은 고대교회 시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그리스 문화권에로 널리 전하여 성부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성자는 물론 성령의 역할을 자꾸 성부 하느님께
종속시키려는 이단 시도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들에 대항하다보니,
예수님께서 지니신 인성과 신성을 공식화시키고, 성령도 하느님이심을 신앙고백문에
포함시키느라 설명도 어려워졌고, 그 바람에 신자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⒏ 하지만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이끌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고
깨우쳐주시며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부나 성자의 업적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신자 개개인들에게는 소중한 일상적인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갈등과
소망과 꿈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작지만 끈질긴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도 간단히 성호를 그으면서 퇴치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생겨나는 기도의 필요에 있어서도 역시 간단히 성호를 긋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화살기도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좋고 나쁜
기회를 선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 성령이십니다.
⒐ 교우 여러분,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호경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