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사로 일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많은 재계지도자와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사관에서 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들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비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대기업에 대해 두가지면에서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첫째는 창업자들이 아주 상이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엄격한 규율, 권위에 대한 존경, 권한의 중앙집중, 계급화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아마도 한국사회의 유교전통에 기인했을 터였다.
나는 한국에 머물던 초기 많은 재벌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이같은 접촉은 더욱 빈번해졌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은 재계의 두드러진 몇몇 대기업 총수들이 정부정책, 국방계획, 대미관계등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19세기 미국을 세계강국으로 발돋움시킨 미 업계의 대실업가와 같은 격이었다.
주요인물들중 한사람은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총수였던 이병철(李秉喆·87년 11월19일 작고)씨였다. 나는 그가 한국 성공담의 중심인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러면에서 그는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총수였던 정주영(鄭周永·현 명예회장)씨와 대비됐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골프를 즐기면서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병철씨에게는 조용하고 금욕적이며, 위엄있는 기풍이 있었다. 또 일본 와세다(早稱田)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예술과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색적인 면도 있었다. 두 재계 지도자는 서로 확연히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조직을 완전 장악, 엄격한 시간관리를 통해 참모진들조차 놀랄 정도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나는 삼성그룹의 이병철씨가 여러면에서 한국재벌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상징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 교제해보기로 했다. 말년까지 그는 각 개별 근로자들과 개인적이면서도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삼성 근로자들은 삼성가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주택과 학교, 의료서비스, 스포츠팀을 포함한 여가활동등을 제공받았고, 대개는 종신고용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이병철씨는 특히 그의 관리직 인력들이 『삼성정신』을 갖추고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들을 위한 엄격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업무를 보다 도덕적으로 이끌고, 또 핵심 경영층에 헌신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기업은 이병철씨 가족 개인의 문제일뿐 아니라 삼성가족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는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재벌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우리 대사관의 한국인 참모들과 선배들은 한국의 공업화 및 현대화를 궤도에 훌륭히 올려놓는데 기여한 이같은 특징들을 이병철씨와 삼성이 가장 잘 구현했다고 말했다.
부임한지 불과 4개월 남짓한 1981년 11월30일, 동료 외교관과 정부지도자들에 대한 공식방문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당시, 나는 대사관의 몇몇 직원, 아내와 함께 이병철씨로부터 점심식사 초대를 받고는 이에 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료들은 이 초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신라의 맨 위층에 있는 이병철씨의 스위트 룸으로 갔다. 재무관과 공보관을 대동했다. 조용하고 품위있는 만남이었다. 나의 아내가 그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커다란 커피테이블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대사관 참사관들은 계급순으로(한국에서는 근무연수에 따라 결정됨) 우리옆에 앉았으며 삼성쪽 사람들은 우리 맞은편에 자리했다. 잠시동안 서로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서구적 스타일의 매력적인 테이블이 마련돼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는 깔끔하게 준비된 최고급 성찬이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하면 이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이병철씨를 대접할수 있을까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이병철씨는 테이블로 가서 아내 세니와 나에게 예쁘게 포장한 두개의 상자를 건네주며 풀어보도록 했다.
물론 우리는 상자를 열어봤다. 그때 대사관 동료들은 내 얼굴이 마치 핏기가 없어진듯 하얗게 변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보석으로 장식됐고 정교하게 세공된 금시계였다.
문제는 그 당시 미 행정부 참모들이 레이건 대통령 영부인앞으로 온 일본인 친구의 선물?부주의하게 받았다고 공격받고 있는 시점이라는데 있었다. 우리는 외교관이 받을 수 있거나, 받아서는 안되는 것에 대해 미 법률이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주시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화 65달러가 선물로서 상한선이었다. 그 이상의 물건을 받으려면 미국 관리들은 국무성의 사전승인을 받아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물은 미 정부에 귀속될 상황이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전통적 한국관습이 미 정부관리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이같은 문화적 딜레마에 빠진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분명히 하건데 나는 나를 초대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대사관 참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대사가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약간의 망설임후에 나는 품위있고 고상한 이병철씨에게 조용히 나의 곤란한 처지를 설명하고는 당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어떻게 고마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삼성은 시계로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태원의 상점에서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사람과 외국인 모두를 위한 다양한 가격대의 시계가 있습니다. 회장님, 제 아내와 제가 부탁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이 시계를 미 정부 국고에 들어가게 하지 말고, 대신 우리가 삼성시계 공장을 견학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생산라인에서 나온 시계 하나를 선물로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병철씨는 아주 훌륭한 통역인을 항상 대동하고 있었다.
나의 제안은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후에 나는 미국 대사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공장을 방문하고자 한다는데 이병철씨가 무척 기뻐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소 긴박했던 순간을 능숙하게 처리한 나의 솜씨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병철씨와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긍정적인 관계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이일화와 관련된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훌륭한 가정주부였던 나의 아내 세니는 대만 일본 한국등에서 수차례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식사초대를 받았을 때 조그만 선물을 받는 풍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또 맛이 기막힌 커피케이크를 만드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관저에서 이 커피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인사표시로 이병철씨에게 전했다. 얼마되지 않아 삼성의 한 직원이 전화해서는 이병철씨가 자신이 먹어본 것중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다며 요리법을 알 수 없겠느냐고 했다고 전해왔다. 세니는 우리 가족의 비밀요리법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이병철씨가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기쁘다며 가끔 이 케이크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경기 용인의 호암박물관을 방문해 이병철씨와 자리를 함께 했을 때에도 그를 위한 케이크가 준비됐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병철씨가 과학자 참모진들을 동원, 연구소에서 요리법을 알아내기 위해 케이크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업은 잘 진척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는 이병철씨로부터 공손한 시달림을 받게 됐다. 그들은 친한 친구사이가 됐다. 그러나 이병철씨는 여전히 요리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둘 사이의 편지를 오가게 한 계기가 됐다.
1년쯤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이병철씨의 한 손자가 관저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워커대사 부인, 당신의 관저를 방문해 커피케이크의 요리법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세니는 요리법을 알려줄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젊은이는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할아버지께서 알고 싶어하십니다』라고 말했고, 세니는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당신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 요리법을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라고 응답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 대화가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1983년 2월2일 이병철씨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나의 요청에 따라 내 손자가 당신이 좋다면 어떤 주제라도 좋으니 용인의 삼성인력개발원을 방문해 교육생들에게 강의를 해주셨으면 하는 편지를 당신에게 보냈습니다…맛있는 케이크에 거듭 감사드리며 대사께도 안부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3월14일 용인 인력개발원에 가서 거의 4시간동안 미국사회와 관습에 대해 강의했다.
이병철씨와의 관계는 우리 부부가 소중히 간직한 기억중 하나였다. 우리 자녀와 배우자들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그들을 용인의 정원과 호암박물관으로 자주 데려갔다. 가끔 이병철씨는 그곳 영빈관에서 즐거운 점심을 대접하곤 했다.
그는 또 우리에게 안양 골프클럽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외교임무를 수행하는데 아내가 정말 잘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병철씨는 몇몇 중요한 합작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인 방문객들과 우리 부부를 위해 특별히 골프스케줄을 예약해줬기 때문이다.
세니는 열렬한 골프광이었다. 이병철씨는 1984년 11월24일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편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안양골프클럽을 칭찬해주신데 대해서도 사의를 표합니다. 저는 건강을 생각해 정기적으로 골프를 치고 있습니다.
골프는 아주 훌륭한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골프는 일상생활의 한부분으로, 스포츠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저희 골프코스를 자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훌륭한 케이크에 대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대사께도 안부전해주시기 바랍니다…」
1985년 8월 이병철씨는 새롭게 한국식으로 갓 완성한 자신의 서울집 집들이에 우리 부부를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폴 클리블랜드 주한 미 대사관 공사 부부, 윌리엄 리브시 한미연합사 사령관 부부, 잭 그레고리 한미연합사 참모장 부부도 포함됐다. 이 초대가 모두 워커대사 부인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당시 이병철씨의 참모진이 알게됐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오랜 여행뒤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됐을 때 이병철씨는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파티를 열어주기를 원했다. 그 초대도 내 아내를 통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 한국을 건설한 품위있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창업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파티는 많은 친구들과 음악, 좋은 음식으로 훌륭히 치러졌다. 이병철씨는 우리 부부를 위해 따뜻한 인사의 말을 전했다. 우리는 그의 우정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삼성의 이병철씨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미래는 정말로 밝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때 내가 만약 약간 질투심이 있는 남자였다면 멋진 이병철씨와 내 아내사이에 오간 편지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농담 한마디를 했다. 그때 아내 세니는 마이크앞으로 나가 한국말로 약간의 감사의 뜻을 표한 뒤 봉투를 꺼내 이병철씨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병철씨가 그렇게 알고 싶어했으면서 결국 알아내지 못한 요리법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내는 이병철씨가 워커가족에게 매우 존경스러운 친구이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커피케이크의 요리법을 선물로 드린다며 말을 맺었다. 많은 웃음과 감사의 말이 뒤따랐다.
우리는 그때 이병철씨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며, 이미 안면이 있는 셋째아들 이건희(李健熙)씨가 뒤를 이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지도자와 한번 더 함께 할 기회를 가졌다.
1987년 우리는 캐롤 캠벨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와 부인 아이리스를 수행해 한국에 왔다. 이병철씨는 세니와 나를 보고는 기쁨을 표하면서 점심을 대접했다. 우리는 그가 위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보고 즐거움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우리는 세니와의 편지왕래에 대한 농담을 건넸다.
주지사 부부는 이같은 친분관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후에 이것이 이병철씨가 손님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알았다. 이건희씨도 거기에 있었고, 우리의 값진 친분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이병철씨는 1987년 11월 우리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뒤 얼마안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뒤 서재에 앉아 이병철씨가 보내온 훌륭한 풍경화를 바라보곤 한다. 그 그림은 내가 은퇴한뒤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게되자 이병철씨가 보내준 것이었다. 나는 그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감사한다. 나는 한국과 미국인이 서로의 예술, 음악, 의식, 문화적 전통등에 대해 이해를 표시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삼성은 아직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삼성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이병철씨였다. 동·서양의 정치인들로부터 한국 재벌에 대한 무책임한 비난의 소리를 들을때마다 나는 단단하면서도 인간적인 손으로 한국을 현대사회로 이끈 거인을 생각한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일밖에 모른 '산업지도자'/15년전 우정어린 저녁초대이후 '일벌레'와 교제기회/알래스카 담수화 공장건설때 '모험기업인' 깊은 인상/現 한국 위기도 대우의 창의적 대응력으로 극복 믿어
1997년 한해동안 나는 내 친구인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과 두번 자리를 함께 할 기회를 가졌다. 첫번째는 4월20∼25일 김회장과 이경훈(李景勳) 중국지역본사 사장(당시 (주)대우 아메리카 법인 회장)이 「대우모터 2000」행사장에 나를 초대했을 때였다.
외국손님만도 200명이상이 참석한 그 훌륭한 모임은 김회장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웅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과거 「은둔의 나라」라는 전통적 이미지와는 판이한, 세계를 조망하는 새로운 한국적 시각을 구현해냈다.
두번째는 97년 12월2일 다른 재벌지도자처럼 원기왕성한 김회장이 한국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고는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경훈 사장, 손병두(孫炳斗)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과 점심을 함께 했다. 김회장은 당시 온 서울을 휩쓸고 있던 비난여론때문에 격앙되고, 또 분명히 혼란스런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용붕괴가 대부분 재벌지도자에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때 제시했던 조건들에 대해 그는 매우 격한 반응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이 두번의 경우처럼 서로 상반된 만남은 없을 것이다.
4월22일 750명이상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모터 2000에서 나는 축하답사와 함께 김회장의 제안에 따라 축배를 제의할 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이런 행사를 불과 하루전에 통보받았다. 그렇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랫동안 김회장의 경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 그가 나의 특별한 친구,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인상깊은 사람중 한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계각지에서 온 이 모든 손님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갖었다는데 자부심을 느꼈다. 3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들과 함께 김회장의 사업계획, 세심한 주의, 조직력, 리더십등에 대한 존경심을 공감할수 있었다.
점보여객기로 바다를 건너온 우리들은 버스와 기차, 헬기를 타며 브리핑장으로 달려갔고, 현대적 공장을 견학했다. 대접도 잘 받았다. 나는 『4∼5일후 우리가 지쳐버리더라도 우리 모두는 전혀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김회장은 1년에 300일 이상을 이렇게 생활하니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이 약 15년전에 가졌던 경험을 자세히 얘기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지 채 1년이 안된 어느날, 내 아내와 나는 김회장으로부터 자택 저녁초대를 받았다. 김회장과 그의 훌륭한 아내 정희자(鄭禧子·현 대우개발 회장)씨는 한강이남에 자리잡은, 소박하면서 요란하지 않은 한국식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대사 관용차가 너무 커 그 동네의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회장의 비서는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고는 회장께서 대우의 조그만 차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내가 통신이 가능한 대사관 차를 사용해야 한다며 잠시동안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사관 간부와 그날 저녁 일에 대해 특별히 사전협의를 한뒤 김회장의 차가 도착하자 세니와 함께 그의 집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남산터널앞 신세계백화점 네거리에 막 도착했을 때, 택시가 옆을 스치듯 우리차와 부딪쳤다. 김회장의 운전사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다행히 수분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대우 본사에 재빨리 연락했다. 우리는 10분이 안돼 도착한 다른 대우차로 김회장 자택에 가서는 조용하고 우정어린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대우모터 2000에서 김회장이 그 당시 기록적인 시간으로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내가 군산의 훌륭한 신공장을 둘러보기 전 그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격조있는 웃음과 동감의 말이 뒤따랐다.
한국 사람은 대부분 김회장의 이야기를 잘 안다.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는 재벌 지도자로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50년 한국전쟁때 그는 가족을 잃었지만(학교선생님이었던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결국 연세대에서 학업을 마칠수 있었다.
이것은 높은 교육을 받은 동료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를 그에게 확신시켜 준 계기가 됐다. 김회장은 이를 계속 수행해나갔다. 김회장은 경영과 기업활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영문제목)라고 이름붙?책속에 담았다. 그 책은 89년 한국어로 출판됐고, 92년 영어로 다시 나왔으며 이후 많은 언어로 번역돼 200만부이상 팔려나갔다.
최근 몇달동안 몇몇 대재벌 지도자들에 대한 극심한 비판의 소리가 있었다. 특히 그당시 몇몇 총수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기업자산의 일부를 능력이 부족한 아들이나 친척들에게 빼돌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김회장은 아니었다. 그의 생활습관은 단순했다. 일, 일, 또 일뿐이었다.
그는 하루 24시간중 4∼5시간만 자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족 영지(領地)를 만들지 않았다. 새로운 사업분야로 대우가 급속히 팽창해나가던 초기시절, 비평가와 경쟁업체들은 김회장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편애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었던 김회장의 아버지가 한국의 대통령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대한조선공사(대우중공업 옥포조선소 전신)와 이어 부실해진 옥포조선소를 김회장에게 인수토록 요청한 것은 상상력으로 충만해있고, 「할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지도자들중 김회장이 가장 설득력있고 성공적인 경영수완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현대 공업사회에 진입하는 한국의 이 일벌레 지도자를 관찰하고 교제할 기회를 자주 가질수 있었다.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던 97∼98년 겨울 한국이 「동아시아 붕괴」에 대한 세계각국의 주된 걱정거리로 떠올랐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김회장을 의지하게 됐다.
그리고 한국이 이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다른 대기업들처럼 대우도 신용한도를 넘어 대출을 하는 위험스런 관행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폴란드에서부터 모로코, 중국,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국제규범을 적절히 수행해나가는 대우그룹 초기의 창의적 대응을 줄곧 지켜봐왔다.
그래서 그들은 대우의 구조조정과 적응력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표시해왔다. 나는 대우같은 그룹이 있다면 한국은 결국 현 위기를 극복할수 있으리라는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같이 했다.
15년도 더 지난 어느날, 나는 대한항공편을 이용,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김회장은 내 자리 복도건너편에 앉았다. 우리는 간간히 대화를 나눴다. 김회장은 서류와 보고서를 살펴보고는 미국 비즈니스 잡지에 흠뻑 빠져들었다. 알레스카 앵커리지를 2시간남짓 남겨놓았을 때, 김회장은 담요를 머리위까지 끌어올리고는 잠이 들었다.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올때까지 김회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 승무원에게 걱정스런 말투로 이 신사분이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김회장은 아무 문제없으며, 가끔 이럴때가 있다고 그 승무원은 대답했다. 김회장은 유일하게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요구받지 않을 정도로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했고, 몇시간후 그는 똑바로 앉아 바로 일을 재개했다.
김회장이 연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때 아내와 나도 참석했다. 김회장과 그의 아내 정회장은 우리가 참석한데 대해 감사했다. 우리도 또한 83년 12월7일 서울 힐튼호텔의 화려한 개업식에 초대받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니는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으면서 우아함마저 갖추고 있는 정회장과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회장의 부인은 지금 이경숙(李慶淑)씨가 총장으로 있는 숙명여대를 졸업했다. 나의 옛 제자이며 총명한 여성이었던 이경숙 박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김회장 부부를 방문했을 때 이박사와 고려대 부총장인 그녀의 남편 최영상(崔永翔) 박사도 가끔 자리를 같이 했다.
한국에서 여행하는 동안 나는 김회장 및 대우그룹과 관계된 흥분과 모험을 경험할 많은 기회가 있었다. 미국회사와 계약관계상, 또 옥포에 초대받은 미국 방문객들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때문에 아내와 나는 종종 조선소를 찾았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 프루드호에만(灣)이 목적지인, 해상에 떠있는 거대한 담수(淡水)화공장 건설과정을 지켜보았다.
한국에서의 가장 광대하고 복잡한 사업중 하나로, 규모가 2억2,500만달러인 이 프로젝트는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 완성돼야 했다. 왜냐하면 북알래스카로 통하는 얼어붙은 해역이 1년중 인도되기로 예정된 단 2주동안만 수로가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김회장의 지휘아래 작업을 진행시킨 대우는 예정된 날짜에 정확히 해상(海上) 공장을 예인선에 견인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인도할수 있었다. 88년 프루드호에만을 방문한 우리는 미국 석유전문가들이 대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석유가 매장돼 있는 지역으로 담수를 어떻게 펌프질해 내느냐에 그들의 석유·가스 생산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김회장은 항상 유능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원을 자신의 참모나 감독직으로 뽑아왔다. 이들 간부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과 노하우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대우가 82년 12월 12척의 컨테이너 선박 건조를 위해 미 최대 화물선박회사인 「유에스 라인스(U.S. Lines)」와 5억7,000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할때 이같은 대우의 능력을 잘 관찰할수 있었다. 그때 체결된 계약은 상업용 선박수주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후 얼마안돼 그 미국회사는 심각한 경영상의 애로로 계약관계를 취소해야만 했다. 대우가 첫번째 배를 이미 건조한 뒤였다. 대우로서는 커다란 위기였다. 그러나 다른 거래선과의 거래에 성공함으로써 이를 극복했다. 98년 대우는 세계 최고 선박회사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다.
90년 11월 미 매서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대학원과정을 밟던 김회장의 장남이 자동차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있던 김회장 부부에게 즉시 연락을 취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이때가 김회장이 일손을 잠깐 멈춘 유일한 경우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회장은 우리가 보냈던 편지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당신의 따뜻한 위로편지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입니다. 슬픔이란 확실히 서로 나눌때 보다 잘 극복될수 있습니다」 90년 12월11일의 이 편지는 나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 세니가 그해 2월 세상을 떠났을 때, 김회장 부부는 나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경제위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98년 한국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가를 위해 다시 희생하고 있는 이때, 재벌과 그 총수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국내에서나 외국에서나 이들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세계의 재정 전문가들은 이들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몇몇 재벌에게는 국제적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리스크를 모험적으로 택한 것이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굳건한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김회장은 「스스로 일어선 나라」 한국을 돕는 산업지도자로서 아직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94년 5월 우리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김회장에게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 기회를 빌어 그것은 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혀둔다. 그 명예학위에 대한 인사말을 쓰는 것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몫중 하나였다.
나는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몇몇 귀절은 다시 인용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모험적이고 빈틈없는 이 한국의 지도자를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앤드류 카네기와 같은 반열의 인사로 만든 것은 교육과 박애, 공공서비스 기관에 대한 그의 헌신적 노력덕택입니다. 김회장은 성공의 과실을 개인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기초과학의 연구활동에 투자했습니다. 또 병원과 의료연구시설을 세우고, 도서관과 고등교육기관을 설립·지원해왔습니다. 자선재단을 통해 김회장과 그의 다재다능한 부인은 문화·미술활동을 지원해왔으며, 한국 그리고 인간경험에 대한 기여로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데 한 몫을 해왔습니다」
김회장 가족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특히 나에게는 매우 뿌듯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김회장이 오랫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오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이었다.<번역=황유석 기자>
美 대사의 한국생활
全 대통령과 한동안 냉각기/부임 첫해 각료방문 마치자 개각 "날 싫어하는구나" 생각/대천서 주말휴가때 귀경요청 거부로 서먹한 관계 계속/각계인사들 무리한 요구많아 "내정 不간섭" 설득 애먹어
1981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나에게 주한 미대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후, 축하전화와 편지가 아내와 내앞으로 많이 전달됐다. 많은 친구들은 내가 앞으로 한국에서 경험하게 될 즐거운 시간들에 대해 얘기했다. 품위있고 유능한 참모진들이 생길 것이고, 또 여가생활과 여행의 기회도 있을 터였다. 어떤 친구들은 일은 별로 많지 않은, 고위관료의 목가적인 생활을 그리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해당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미대사관저에서 윌리엄 포터 대사와 함께 지내왔으며, 필립 하비브 대사 재임중 그가 부여받은 여러 일들을 지켜봐왔다. 그것은 유복하게 목가적인 생활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와 나는 앞으로 한국의 서울에서 닥칠 일이나 분규, 여러 보람있는 일등에 대해 완전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어 신문이나 코리아 타임스, 코리아 헤럴드같은 영자신문에는 미 대사가 리본을 자르고, 한손에 유리잔을 든채 외교 리셉션이나 국제무역회의에 참석하고, 군사모임에서 연설하는 사진등이 자주 실렸다. 이런 사진을 통해 내릴수 있는 결론은 대사 생활이란 정말로 하나의 커다란 이해당사자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미 대사생활 5년반을 마친 지금 나는 그것이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할수 있다.
언론에서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외교서류에 담겨있는 내용은 전체 이야기와 동떨어질 때가 가끔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몸짓으로도 많은 것을 얘기하는 국제관계를 이를 통해 다루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에 의한 것이었다. 그럴때 대사는 개인적인 인상을 전달해 본국 정부의 이해를 돕고, 다양한 주요인물의 전기(傳記)나 경력등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 놓는다. 그러나 공식서류를 통해 이같은 인상과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종종 언론에서 그려지는 사회생활은 많은 정보가 오가는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대사가 『XX 장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느냐?』고 얘기했을 때, 나는 그 정보에 대해 모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나라 정부나 해임된 장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 내 아내와 나는 오후에 두 모임을 참석해야 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행사장에서 참석자들과 인사조차 나누기도 힘들때가 있었다. 거기에는 카메라 기자가 항상 있어서 다음날 신문에 사진이 실렸다. 우리는 15분간 머무르다 조용히 빠져나와서는 다음 행사장으로 갔다. 그 다음에 시간에 맞춰 대사관저로 돌아와서는 멀리 지방에서 온 손님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이었다.
서울에서의 미국 대사관과 대사는 한국에서 중심적이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몇몇 외교관 동료들이 이런 점을 매우 부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힘든 일이라는 것도 그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81년 주한미군은 4만명이 넘었다. 대사관은 한반도에 있는 미군기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이 80년대 한국의 절대적인 무역 파트너라는 사실은 활동영역이 다양한 대사관과 관계가 깊었다.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한국의 최고지도자들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임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두드러진 존재였다.
한국의 미 대사관 참모들은 650명이상이 됐다. 사실 나는 이 650명을 책임지는 전문경영인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의 우월적 지위와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라는 존재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한국의 지도자 및 시민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어떤 일을 결정해 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우리는 그럴때마다 한국군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북측 선동가들의 계략에 빠지곤 했다. 솔직히 시인하건데, 전두환(全斗煥) 정부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직접 일을 결정했으면 하고 바랐던 때가 있었다.
한번은 몇몇 한국지도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저녁만찬후 우리 대사관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몇마디 해줄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미대사관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해 그들에게 대략 설명해줬다. 『당신 정부와 일에 대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해당국가의 일이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물공급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서울시장에 연락을 취할수 없었다. 외무부를 통해야만 했다. 우리는 야당지도자나 야권단체를 지원해주는 조직이 아니었다. 김대중(金大中)씨의 지지자들은 자주 미 대사관 참모들이 그의 대의(大義)를 위해 좀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 대사관은 미국인들사이의 언쟁이나, 미국인과 그 한국상대역간 다툼에 치안판사의 역할을 할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한국지사장이 과도한 집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는 미국 회사를 위해서 우리가 중재역을 맡을 수는 없었다. 언론에 대해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미국의 몇몇 인사들조차 한국언론에 실린 수사(修辭)의 수위를 완화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우리는 한국언론을 통제하려고 시도할수 없었다.
미국신문에 보도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했다. 때때로 반대되는 논점을 갖고 있는 워싱턴의 인사들은 미국 언론이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 지긋지긋한, 신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종종 그들의 비판대상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관습을 바꿀수 없었다. 어떤 하원의원은 새벽 3시반에 전화해 한국사람이 개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을 내게 요청하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겠는가?
대충 자리가 잡힌지 얼마 안돼 나는 재임기간중 필요로 할만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중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겠다. 첫번째로 내가 신임장을 제정한 한국 정부에는 많은 지부(支部)들이 있었다. 청와대를 포함한, 많은 주요 관리들, 각료등이 그들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내가 방문해야 할 각료급 간부는 26명이었다. 이것은 내각에 대해서뿐 아니라 각료와 주요 간부들에 대한 배경 및 이해관계등을 읽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보고서를 준비하고, 관리들과 약속을 했다. 그후에 대사관 참모중 적절한 사람을 대동해 모임에 나가곤 했다.
만약 통상·산업분야의 장관이라면 재무관이나 상무관을 데리고 갔다. 우리는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그 장관과 상견례를 겸한 공손한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초점이 되고 있는 여러 현안을 특정 장관과 논의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보낼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은 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정말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26번째 각료에 대한 방문을 막 마쳤을 때, 그는 개각을 해버렸다. 내가 한국에 부임한 첫해 나는 50명이상의 각료를 방문했다. 이 모임 하나하나는 모두 수시간이 걸렸다.
또다른 사람들은 외교집단이었다. 몇몇 대사관들은 대사와 한두명의 참모진들만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부(副)대사직마저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거만하게 보였거나, 적절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남미국가에서 우리를 자신들의 동맹국으로 너무 믿은 나머지 특별히 고려해줄 것을 바라기도 했다.
주한미군은 주요한 「고려대상」이었다. 대사관과 미군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나는 리처드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 하비브 대사를 포함, 많은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미군과 원만한 실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미사령관(CINC)과 상시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재임기간중 3명의 주한미군사령관이 있었다.
대사관 산하에 미합동군사지원단(JUSMAG)이 있었다.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고, 대사관 하급기관이었다. 그는 약 60명의 참모진들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휴 퀸 소장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앤은 특별한 친구였다. 우리는 함께 여행했고, 골프를 쳤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애정은 계속될 것이었다. JUSMAG의 책임자는 약간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술적으로는 군인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미 대사밑에 예속돼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4성장군인 미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로서는 어려운 역할이었다.
다른 중요한 사람은 미 경제계였다. 경제인들은 자주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다른 문화와 상이한 경제활동관습때문에 부과된 조건들에 대한 그들의 불평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나는 매달 정기적으로 미 상공회의소(American Chamber of Commerce) 지도자들과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일년에 두번 AMCHAM 회원에게 설명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대부분의 AMCHAM 지도자들은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미 대사와 접촉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사가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야 할 또다른 그룹이 있었다. 한국전역에서 한국의 기독교인과 함께 일하는 선교사들, 미국학자들, 교환연구원, 한국에서 활동중인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에서 미국학교에 다니거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많은 미 학생들은 대사관, 특히 미대사가 자신들에게 유용한 존재이기를 바랐다.
물론, 「비보도」를 전제로 나와 대화하기를 원했던 미 언론과 국제언론단체의 대표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점심을 같이 하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었던 언론그룹이었다. 이들중 몇몇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됐다. AP, UPI,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들은 자주 나의 견해를 듣고싶어 했다.
일본 도쿄(東京)에 주재하고 있는 기자들조차 대사로부터 브리핑을 듣기위해 서울에 오기도 했다. 이 기자들중 몇몇은 매우 치밀한 연구를 해 가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몇몇 사람과 비보도를 전제로 대화를 나눴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약속이 깨지지 않았다.
물론 나의 시간을 뺏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도 있었다. 국회대표단이 그중 하나였다. 국회 휴회기간중 상원 및 하원의원들은 주한미군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드러내기 위해 오기를 원했다. 그들은 또한 80년대까지 한국은 쇼핑의 천국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이태원의 쇼핑거리를 걸어보고 싶어했다. 미 주지사들도 통상사절단을 이끌었다. 내 재임기간중 나는 36명의 미 주지사들을 만났고, 대접했고, 또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정치관계위원회나 국회참모진들은 한국에 와서 대사와 시간을 같이 하며 브리핑을 원했다.
미 정부의 다양한 민간사회는 자주 일의 진행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대표단이나 단원을 대사관에 보냈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007기 격추당시 미 교통안전국(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과 미항공협회(American Airline Association)에서 온 대표단이 있었다. 그런 단체들은 미 대사의 견해를 구했으며, 부대사나 경제·정치 참사관이 만나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다른 대상은 내 아내와 내가 대사로 부임하기 전 25년이상 친분관계를 맺어온 많은 한국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대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나도 지역현상과 한국개발에 대해 그들로부터 매우 솔직하고 직선적인 견해를 들을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중요한 그룹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때가 미 대사생활중 가장 가치있는 유일한 때였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었다. 2,3일 쉬기위해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쉽지 않을만큼 재임기간중 너무나 많은 요구사항이 있었다. 딱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우리 숙소에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손님 한분이 갑자기 서울에 오셔서, 나와 다른 외교관들이 이 중요한 손님을 맞아주기를 전두환 대통령이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는 지금 휴가중이고, 그래서 그럴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의 이 말에 상당히 당황하며, 대통령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며칠간은 그럴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대통령께서 헬기를 보내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대통령과 그 직위를 존중하지만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그당시 나는 그럴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청와대와의 관계는 한동안 냉각기가 계속됐다. 내 아내 그리고 몇몇 한국친구들과 함께 개인적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그당시에 생긴 어색하고 서툴렀던 한 상황이었다. 대사직이라는 신분이 개인생활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번역=황유석 기자>
미 대사가 얼마나 바쁜 직책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사의 서울에서의 전형적 하루 일과를 대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아내와 나는 아침 6시 자명종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는 재빨리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고, 코리아 타임스등 한국의 두 영자신문을 훑어봤다. 종종 우리는 하루늦게 관저로 배달된 미국신문들을 보곤 했는데, 그것은 간밤에 홍콩에서 오거나, 미국에서 직접 배달된 것이었다.
아침 7시는 한국어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때때로 그것은 재미있는 일과였다. 우리 선생인 이경희(여)씨는 내가 한국어와 영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데 자주 웃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이중 몇가지는 서울장안에 퍼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미 대사가 하는 일에 대해 잡담이나 농담을 하기를 좋아했다. 그중 한국친구들이 알고 있는 하나는 「It is a long time since I have seen you」라는 뜻의 한국식 표현인 「오래간만입니다」의 해석방법이었다. 나는 이것을 『나는 오리건주(州) 사람입니다』 혹은 『나는 오리건 출신입니다』로 말하기도 했다.
한국어수업중 종종 전화가 걸려와 방해가 됐다. 대사관 당직간부가 아침일찍 전화해 워싱턴으로부터 온 중요한 전문(電文)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는 보통 아침 8시15분에 사무실에 도착해 부(副)대사나 경제·정치 참사관과 회의를 가졌다. 대사관 직원들은 방문객들이 논의하려는 안건과,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사관에 얼마나 기대하는가 등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내 책상에는 그날의 하루일정 목록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 목록을 기밀로 분류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대사의 얼마남지 않는 빈 시간을 끊임없이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시간에도 보고서를 구술하고, 직원들과 회의를 가져야 했다.
그날의 일과표에 따라 나는 주요인사들을 예방(禮訪)하거나 회의를 가졌다. 때때로 오전중 나는 매 15분 혹은 20분마다 진료약속이 있는 의사나 치과의사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중간중간 나는 방문객과 논의해야 할 안건, 그리고 필요하다면 취해야 할 조치등에 대한 메모를 비서에게 구술했다.
어느날 나는 「한국방적공업협동조합」(Spinners and Weavers Association of Korea·SWAK)이 초청한 「미스 미국 목화아가씨」를 만나게 돼 매우 기뻤다. 그녀는 아주 매력적이고 지적인 젊은 숙녀였다. 나는 내 사무실에서 그녀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한국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듣는데 아주 행복했다.
그녀는 3, 4일간 지방에 머물렀고, 비무장지대(DMZ)를 찾기도 했다. 나는 미국 주요 업체들의 실무 간부진과 회담을 갖곤 했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사업전망에 대해 논의했다. 이 모임은 나에게는 중요했다. 내 재무관이 그 자리에 참석하면 우리는 미 사업가가 한국에서 부닥칠수 있는 여러 세세한 어려움을 들을수 있었다. 가끔 우리는 도움과 충고를 줬다.
점심시간때는 한국사람 및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현안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듣고, 토의할 기회를 가졌다. 종종 미국에서 온 이익집단과 점심을 같이 할 때도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칠때까지 나는 하루의 첫 반쪽을 정말 엄청나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날수 있었다.
가끔 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대개 오후도 바쁘기는 아침과 같았다. 한반도에는 수십개의 군기지가 있었다. 미 대사와 미군사령관으로서는 우리가 미국의 한 일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미 대사관은 주한미군 및 한국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한미군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저녁시간에 내 아내와 나는 외교행사장에 참석하거나, 친구들 혹은 다른 외교·군사간부들을 초대하곤 했다.
항상 리셉션과 만찬이 있었고, 2주에 한번꼴로 나는 만찬에서 연설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모든 그룹의 사람들은 미 대사가 자신들을 위해 연설해줄 것을 요구하고 또 기대했다. 나는 「태평양 군통신·전자협회」(Armed Forces Communications and Electronic Association of the Pacific Region·AFCEA)의 지역회의에서 가진 연설이 얼마나 길고 어려운 작업이었던가를 회상했다. 대한적십자사와 같은 여러 다양한 한국조직들이 나를 초대했다.
내가 선호하는 그룹중 하나는 「한미협회」였고, 나는 회장을 맡고 있는 송인상(宋仁相)씨의 요청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참모진들로부터 자료를 받아서는 직접 연설문을 썼다. 연설이 한국그룹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대개 잘못 인용되지 않도록 연설이 올바르게 번역됐는지를 꼼꼼이 확인해야 했다. 많은 준비가 있어야함은 물론이었다. 특별히 중요한 연설을 할 때는 우리는 며칠전 미리 연설복사본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 안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1주에 2번,더 많을수도 있지만, 나는 관저에서 점심이나 만찬을 주재했다.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또한 벅찬 시간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특히 나에게 의미있었다. 예를들어 매년 성탄절때면 나는 「한국 예일대 동창회」를 위해 연말 만찬을 주재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당시 예일대 동창회의 회장이었던 이홍구(李洪九)씨가 나중에 총리가 됐고, 집권당의 지도자(신한국당 대표위원)까지 됐다. 우리가 한국을 떠날때 나는 행정참모에게 내 아내와 내가 서울에서의 재임기간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영접했는지 계산해 보라고 요청했다. 4만명이 넘었다.
바쁜 주중(週中) 일과동안 밤 11시 이전에는 우리는 거의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토요일 대사관은 정오에 문을 닫는다. 한국친구들과 그외 여러사람들은 우리가 토요일밤에는 자유로워서 외출하거나 파티를 열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개 그런 밤을 환영했다. 가끔 우리는 주말을 이용, 멀리 나갈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대천해수욕장에 가거나, 거기서 속리산까지 가는 것을 좋아했다.
전형적인 하루일과의 또다른 일면은 오고가는 전문들을 관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전문은 특히 토요일 오전에 가장 많았다. 한국의 토요일 오전은 미국에서는 금요일 밤이었다. 국무부나 상무부 관리들, 여타 다른 정부기관들은 대개 금요일날 업무를 끝내기를 바랐다.
결국 오후 늦게 그러니까 한국으로서는 토요일 새벽 3, 4시쯤 그들은 대사가 해야 할 이것, 저것을 전문으로 보냈다. 때때로 특별한 이슈에 대해서는 그들은 즉답을 원했다. 이것은 매 토요일날 오전이면 주중의 다른 날보다 전달돼 오는 전문이 2배가량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끔 워싱턴은 대략 몇시간후에 대답을 받기를 원했다. 워싱턴의 외교정책 담당자들은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내가 사무실에 도착했을때 정기적으로 내가 검토해야 할 메시지가 20∼30건 정도 됐다. 하루를 끝낼때까지 대사관의 많은 참모진들은 보고서를 기안해 전문을 보냈다. 우리 대사관은 1년에 1만5,000건이상의 전문을 보냈다. 대사관을 나가는 모든 전문은, 그것이 비록 대사관 살림살이와 같은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내 서명이 필요했다.
내 동료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거나, 민감한 내용의 메시지를 내가 확실히 검토할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나는 내 서명을 거쳐 나가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중요하고 민감한 전문에서는 나는 보통 미리 초안을 보고, 제안을 해 수정했다. 전송되는 전문들은 대개 오후 4시반에서 5시반사이에 대사관 통신실에서 보내졌다.
재임기간중 몇몇 주요 전문들을 보면, 대사관이 정책입안과 정책조직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대사는 주요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때때로 매우 짧은 시간내에 어려운 문제를 다뤄야 했다. 물론 급박할때는 모든 사람은 대사에게 명확한 분석과 안정적인 일처리 및 의사결정 능력등을 요구했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책임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강연했다. 나는 미 외교사와 외교정책에 관한 서적, 그리고 내 동료가 쓴 몇몇 자료를 검토했다. 그러나 나는 정책을 계통화시키는 과정에서 대사가 할수 있는 임무에 대한 그들의 이해정도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를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결정과정에서 주요 인사와의 직접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그 서적들은 전혀 분석하지 않았다. 대사와 워싱턴의 정책 결정권자사이의 친밀한 실무관계, 혹은 주재국의 개인 상호간 관계의 역동성에 대해 그 필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미군사령관과 나는 북한관계에서의 민감한 사안에서는 워싱턴으로부터의 지침이 필요했다. 나는 국무부에 전문을 띄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완전하고 또한 즉각적인 지침을 바란다』고 전했다. 그것은 최고위층에 전달됐다.
거기서 나온 즉각적인 회신은 나보고 워싱턴에 와서 상담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돌아갔을 때 그곳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무부는 중요한 안건에 대한 정책에 대해 나에게 초안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나는 거기서 지침이 필요하다고 내가 한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보았다.
즉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받아볼 지침을 내가 직접 작성토록 했다. 나는 내가 마치 톰 클랜시(미 소설가·「작전센터」등 한반도 소재 소설 다수)의 소설속의 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대사와 중요 상담자들은 주재국 사회의 현 상황과 미묘한 차이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경제계와 정부, 학계에서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서(情緖)를 알아내야 했다. 정확한 분석을 워싱턴에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친밀한 접촉을 통해 알아낸 정보와 통찰력 있는 분석은 전문을 통해 보고되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다.
정보가 유출돼 정보원에 커다란 당혹감을 줄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정보원의 신분이 노출될 때도 자주 있었다. 대사는 정보원의 신원을 보호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했다. 본국 또는 주재국 정부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은 『대사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냐』는 게임을 하는데 매우 능숙해 있었다.
미 대사의 생활은 결코 예사롭지 않는 몇몇 사안을 빼고는 어느정도 일상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85년 한해동안 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35번 이상 회담을 갖었다. 미국에서 온 고위관리의 방문과 관계된 것도 많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나는 대통령에게 특정정책에 대해 다소 완화된 정책을 취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이같은 회담을 전문을 통해 보고하지 않았다. 국무부 고위관리들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 논의에 대한 정보는 보호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한국의 대통령과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가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몇몇 야당인사들은 이를 통해 내가 한국정부와 너무 밀착해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하나 고려해야 할 사항은 회담이 너무 많이 공개되면 한국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북한의 선전선동을 강화시켜주며 북한의 전략에 빠져들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외무장관, 비서실장 혹은 다른 각료들과의 만남은 내 재임기간중 정말 많이 있었다.
요컨대 미 대사의 전형적인 하루일과는 무엇일까.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방위동맹국이며 미국의 존재가 두드러진 지역인 한국같은 나라에서 사색과 친목을 다지는 편안한 삶은 기대할수 없었다. 끊임없는 활동과 난제(難題)들이 일주일 7일을 꼬박 일하게 하며 대사의 임무를 흥미진진하게 했다.
매일매일 임무를 수행하면서 진정 주재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진정한 만족을 얻을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배울만한 새로운 것들이 있었다. 나의 직책은 매력적인 사람들과 함께 힘들지만 가치있는 일들로 가득찬 시간이었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83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의 한국 국빈방문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일주일이상 한국 신문과 방송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미 대통령 방문에 대한 언론보도는 훌륭했다. 또 여러면에서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내 임기중 있었던 여러 핵심적인 일들중 하나로 여겨질만 했다. 당시 일반인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을 법한 몇가지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겠다.
한국으로 떠나기전 워싱턴에서 대사부임에 따른 준비를 하던중 다른 3개국에서 미 대사로 근무한바 있던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딕시(미국 남부 주(州) 혹은 그 출신의 속칭), 대통령 방문같은 일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빌게. 그것은 대사가 다뤄야 할 일중에서 정말 골치아픈 일이라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방문에 대한 준비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그 충고의 의미를 점차 이해하게 됐다.
일이 모두 끝나고 모든 것이 무난히 마무리된 뒤 내 아내와 나는 대통령 방문은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은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원칙과 중요 우방국에 대한 미국의 확고부동한 결의를 명확히 전달했던 미 대통령을 소개할수 있는 기회를 갖었다는데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특히 냉전이라는 팽팽한 긴장시기에서의 대통령 방문에는 국내건 외국에서건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통신업무와 안보에 관련된 면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 리무진에는 「블랙 박스」를 항상 지니고 다니는 최고위급 비밀요원이 미국의 비상 지휘본부와 상시 연락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전자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미 대통령은 항상 자신의 관용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만약 방문지가 한곳 이상이면 비행기로 똑같은 기능을 가진 리무진을 다른 곳으로 실어날랐다. 그 요원에게는 워싱턴 및 주요 동맹국 지도자들과 대화할수 있는 많은 통신채널이 필요했다. 그러나 외국의 해당국 지도자들은 당연히 공식 방문객들이 주재국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주기를 원했다.
미 대통령에 대한 보안에는 정말 철저한 준비와 조사가 요구됐다. 어떤 때는 주재국에 지나치게 참견하고 나서는 듯한 인상을 받을때도 있었다. 「시크릿 서비스(Secret Service)」(미 재무부산하 특수정보부대)와 여타 비밀요원들은 대통령 방문에 앞서, 한두달전에 미리 몇차례 사전답사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특히 당시가 대한항공 007기 피격사건이 발생한지 두달이 채 안된 시기였고, 또 미얀마 랑군폭탄테러 사건이 터진지 한달밖에 되지 않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기 때문에 미 대통령측으로서는 정말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답사팀은 방문단이 묵을 호텔을 여럿 조사했다. 조선호텔 호텔신라 하얏트호텔 프라자호텔등이 당시 적당한 곳으로 여겨졌다. 방문단에는 16명의 공식 수행원과 110명의 비공식 수행원이 있었다. 비공식 수행원에는 참모진, 취재단, 보안요원, 그리고 통신전문가들이 포함됐다.
각 호텔측 실무진들이 자신의 호텔에서 미 대통령을 맞는 영광을 얻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아내와 나는 처음에 대통령 부부에게 편지를 띄워 대사공관에 머물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거절했다. 그러나 랑군사태가 터지고 답사팀에 의해 대부분 호텔의 보안상태에 대한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뒤 레이건 대통령부부는 대사 관저를 거처로 정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관저에 기거해야 할 레이건 대통령의 특수 참모진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아내 세니와 나는 호텔로 자리를 옮길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기밀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일반인들은 미 대통령측이 조선호텔을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앞서 2주동안 조선호텔 20층 전층을 사무실과 통신센터로 바꿨다. 대사관저 지하실에는 일반인이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통신배전반과 전자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또 모든 옷장과 서랍을 비워줘야 했다. 그것들도 모두 당시 철저한 검색을 받았다. 이와같은 것들은 당시 해야했던 일중 몇가지 사소한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또한 미 대통령의 외국방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작업인가를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내 아내와 나에 대한 공식일정을 적어놓은 것이 30쪽이 넘는다는 데에서도 알수 있듯, 미 대통령에 대한 병참술에는 다른 여러 측면이 있었다. 우리 부부의 일정은 11월12일 오전 10시25분 미 대통령 전용기가 도착해서 14일 오전 10시35분 이한(離韓)할 때까지 우리가 어디에 서야하고, 매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가득차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가두(街頭)에는 학생고적대를 비롯, 『로널드와 낸시여사를 환영합니다』『당신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시민단체들, 기쁨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했다. 150만명이상을 헤아렸다. 축제기분으로 가득차고 또 그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참모진들은 환영인파가 정말 인상적일수 있도록 일에 만전을 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전임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터여서 더욱 그랬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는 그날의 환영인파는 두고두고 가장 인상깊은 것이었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방문일정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되돌아갈 때는 군중들이 더 많았다(200만명은 될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그들은 소집된 사람이 아니었다. 방문은 너무나 성공적이었다. 미 대통령은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훌륭히 전달해 한국민들에게 정말 깊은 감동을 주었다.
대통령의 첫번째 공식일정은 불과 도착 2시간후에 예정된 국회연설이었다. 대사관은 국무성 및 백악관과 협의해 국회에서의 대통령 연설문을 준비했다. 내용은 한국어와 영어로 미리 작성됐다. 그러나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레이건 대통령은 내용을 검토한뒤 몇가지 중요한 부분을 수정했다. 몇몇 단락은 삭제하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했다.
원문을 기획하는데 참가한 한사람으로서 나는 레이건 대통령이 첨가한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 그런 의미있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전에서의 미군의 희생때문에 한국민들이 매우 깊이 감사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썼다.
그는 또 한국의 몇가지 업적과 미국이 받은 도움을 연대별로 기술했다. 거기에는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불굴의 희생도 포함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 이후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빚은 모두 갚은 셈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린다』고 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한 이같은 개인적이며 친밀한 발언은 참석한 모든 한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청중중 눈가에 눈물이 맺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우리는 TV를 시청한 모든 국민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북한에 대해 미 대통령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했던 연설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북한지도자들도 이 연설을 분명히 밀착해서 지켜보았을 것이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비무장지대(DMZ)를 경계로 헤어진 이산가족을 돕자는 남한의 캠페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지금 나는 이산가족을 재회하게 하자는 남한의 캠페인에 북한이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산가족의 재회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단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나타냈을 때에는 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과 같이 연설함으로써 한국민의 주요 관심사를 충실히 다뤘다. 『모든 도발자들은 미국민과 한국민이 한 목소리를 내는 단합된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결코 노예가 될수 없으며, 자유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대사관에서 준비한 통역사, 잘생기고 명민했으며 금발의 젊은 해외근무요원이었던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대통령 연설과정에서 빼놓을수 없는 한면이었다. 미국인 대부분은 한국어를 발음하고, 관용적인 표현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스트라우브의 한국어 실력은 완벽했고,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능숙한 솜씨에 경탄했다. 특히 대통령이 연설 원문에서 벗어나 즉흥적으로 말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의 능숙한 일처리는 우리가 진정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고, 또 좋아한다는 것을 전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대통령 연설후 국회 본관 1층 로비인 로턴더홀의 리셉션에서 나의 오랜 친구이면서 전 주미대사이자 외무장관을 지냈던 박동진(朴東鎭)씨가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인 된 채 나와 나란히 자리를 같이 했다.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나에게 『대사, 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했던 두 연설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서울이 수복된뒤 맥아더 장군이 했던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지금 막 들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흐느끼기까지 하며 깊은 격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청와대에서의 공커읓昰?위해 국회를 떠났다. 다음 일정을 준비하기 위한 1시간반정도의 짧은 시간이 있었다. 일정에는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내가 외무부에서 이원경(李源京) 장관 및 박건우(朴健雨) 미주국장과 회담하는 즐거운 자리가 포함돼 있었다.
박국장은 김영삼(金泳三) 정부하에서 미 대사를 지냈다. 슐츠 장관과 이장관과의 관계는 훌륭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정부가 효과적으로 협력할수 없을 만한 외교정책상의 심각한 문제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미 대사관 무역관을 방문하기 위해 한시간정도 시간을 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대사관 참모진 및 한국의 지도급 사회·학계 인사들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인사들중에는 교회에서 활동중인 사람도 있었고, 인권단체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 행사는 청와대에서의 공식 국빈만찬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매 순간순간 철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됐다. 양국 대통령 참모진들은 조용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협조해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게 했다.
한국측 의전담당자들의 일솜씨는 경이로웠다. 나는 한국민들이 의식을 매우 중시하며, 행진 및 좌석배치에 대한 순서에서도 매우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손님들을 편안하게 하기위해 자신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의 국빈만찬은 완벽했다. 양국 대통령의 간단한 공식 연설에 이어 한국의 전통 장인(匠人)들의 짤막한 공연을 통해 매혹적인 한국 뮤지컬과 춤솜씨를 접할수 있었다.
한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 한국은 100년이상 좋은 친구였으며, 한세기동안 우정과 협력관계를 돈독히 해왔습니다. 우리 양국은 지금 다음 세기로 진입하면서 우정과 협력관계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답변연설에서 그가 국회에서 강조했던 몇가지를 다시 언급했다. 그는 대한항공 007편에 탑승했던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과 불과 한달전 발생한 랑군에서의 『사악한 공격』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한국 동맹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협을 인식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 위협적인 도전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데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는 『역사는 자유의 편입니다』라는 즐겨하는 경구를 다시한번 확인한뒤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한미관계의 새로운 시대는 과거보다 더욱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양국 국민에게 힘찬 번영과 새로운 우정, 자신감, 그리고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열렬히 바라던 것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이건 대통령부부와 수행원들의 꽉찬 하루일정이 끝났다. 내 아내와 나로서는 진정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방문은 매우 긍정적인 분위기속에 진행돼 우리는 겪었던 여러 다양한 일들에 대한 인상을 서로 나누며 밤새워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분위기에 대해, 그리고 한국 동맹국들과 미 대통령에 대한 동맹국들의 이해를 돕는데 이번 방문이 거둔 분명한 성공에 대해 아내 세니도 나처럼 흥분된 상태였다.<워커 前 주한 美 대사/번역=황유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