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드렁니
“한 1년 정도 교정을 하면 튀어나온 앞니가 정상으로 되돌아갈 겁니다.”
큰애를 데리고 정기 검진을 받으러 치과엘 갔더니 난데없이 치아 교정 얘기가 나왔다. 아이의 앞니가 튀어나와서 그대로 두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머니 앞니가 튀어나왔잖아요. 얘가 어머니 이빨을 그대로 빼다 박았네요” 한다.
“그렇다면 제 이빨이 뻐드렁니라는 건가요?”
‘뻐드렁니’라는 내 말에 뭐가 그리 우스운지 의사와 간호사들이 키득키득 웃어댔다.
나는 내 이빨이 튀어나온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인가? 물론 심하게 뒤틀린 상태가 아니라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까 가끔씩, 내가 웃지 않고 가만 있으면 “왜, 삐쳤어?” 하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뻐드렁니 때문에 입이 튀어나와 마치 골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비로소 나는 그 동안 억울하게 받았던 오해의 원인을 찾은 것 같아 신기하고 놀라웠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뻐드렁니가 아이한테 그대로 유전되었다는 것이었다. 우성인자도 아닌 열성인자가, 두드러진 특징도 아닌데 아이한테 이어졌다는 게 한편으로는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러면서 정말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단지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그대로 나의 유전자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자식의 눈에 보이는 행동은 얼마나 정확하게 유전될 것인가.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겠구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
동기창,「추경산수도」, 비단에 수묵담채, 143.1×59.4㎝,
명대,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 소장
명明의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그린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를 보면, 그가 스승으로 여겼던 원元의 예찬倪瓚1301∼74의 화풍에 상당히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생존 시기가 200년 정도 차이가 나니 살아 생전에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말하자면 동기창은 예찬의 위패제자位牌弟子인 셈이다. 그렇지만 동기창의 작품에는 예찬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위아래로 긴 화면에 전경의 나무와 중경의 넓은 강물, 그리고 후경의 산과 언덕으로 이어지는 삼단 구도가 예찬 작품의 특징이다. 동기창의 작품은 이런 예찬의 구도를 충실히 답습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볏단을 세워놓은 것 같은 후경의 산과 언덕이 좀더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과, 사선으로 표현된 언덕 때문에 예찬의 작품보다 동적이라는 점이다.
아이의 이빨이 내 이빨을 닮았어도 단지 닮았을 뿐이지 똑같지 않듯, 동기창의 작품이 예찬의 화풍을 바탕으로 했더라도 동기창의 작품과 예찬의 작품은 전혀 별개이다. 예찬의 작품이 ‘전통’이라면 동기창의 작품은 ‘혁신’이다. 전통은 이렇게 시대에 따라 새로운 옷을 갈아 입는다. 그러면서 되살아난다.
예찬,「용슬재도(容膝齋圖)」, 종이에 먹, 74.7×35.5㎝,
14세기,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예찬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평탄할 것만 같은 그의 생애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중년 무렵부터였다. 한족漢族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예찬은 몽고족이 세운 원의 지배하에서 20여 년간 유랑생활을 하며 살았다. 원이 망하고 명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이미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다. 결국 그도 홀로 방랑하다가 병을 얻어 친척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약간은 오만했을 뿐 아니라 결벽증까지 심했던 예찬은 손님들이 왔다 가면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박박 문질러 닦게 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으로 비쳐서 후대의 많은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동기창은 상업 도시로 새롭게 부상한 화정華亭에서 태어났다. 명 말기의 혼란기에 예부상서라는 높은 관직을 지낸 그는 서화 감상과 수집은 물론 그 자신이 직접 창작을 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선종禪宗의 이론을 빌려 회화 양식의 변천사를 남북종론南北宗論으로 정리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남북종론은 예술사가로서의 그의 탁월성을 입증한 동시에 신분에 따라 화가를 구분하는 편협함 때문에 후대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채색화를 그린 궁중 화원을 북종화가로 구분하고 출신 배경이 훌륭한 관리들을 남종화가로 인정하는 것 등이다. 암암리에 북종화를 무시하는 견해였다. 아마 그 자신이 높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했으리라. 물론 자신은 남종화가의 대열에 서 있었다.
그런 불합리성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그의 이론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양화를 구분하는 하나의 척도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남종 문인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릿길을 여행해야 한다萬卷書 萬里行”고 말했다. 독서와 여행을 통해 자기 수양과 영감을 얻으라는 말인데 단순하게 내뱉은 이 말이 후대의 화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선사했는지 동기창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던진 이 화두가 평범한 후배들에게 얼마나 단단한 올가미가 될지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자신을 남종화의 줄기 속에 포함시킨 동기창이 예찬을 만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예찬 너머에는 동원董源?∼962과 거연巨然약 10세기이 있었고 그 너머 남종화의 발원지에는 왕유王維699∼759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기창은 왕유, 동원, 거연에서 예찬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몸체를 따라 깊은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찬 옆에는 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왕몽王蒙과 같은 대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모두 동기창의 위패스승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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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이님! 지가 이빨이 못났걸랑요...아랫니가 오밀조밀 보여서 한개쯤 빼버리고 싶은 충동이 많은데...글쎄 제 딸아이가 닮았어요..ㅎㅎㅎ..나쁜것은 왜 닮는지...^^*
그러게 유전자는 못숨기나봐염.....ㅎㅎ 저두 이가 별루지만 건강해서 치과에 안가니까 행복해염~그런 이유로 치과는 가지마세여 이의 수명이 단축된답니다~아이는 교정해주면 되셌지여~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