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력 없는 중국의 북한 침공설(侵攻說)과 '똥뙈놈' 정서 중국 때문에 통일이 안된다는 분들에게 이민복(대북풍선단장)
중국이 한반도 통일을 반대, 심지어 북한을 점령하려 한다는 분들이 상당하다. 중국이 남북한에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럴 의문을 사기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말하게 된다. 나 개인적 생각이라기보다 국익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북한의 높은 반중 정서 때문이다. 1.국익 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얻는 국익이 북한에 비해 엄청나다. 이런 형편에 북한을 점령하려고 한다는 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아무 것도 없는 북한의 재건에 엄청난 돈은 돈대로 들 뿐 아니라 세계적 욕이란 욕은 다 처먹으며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는 것이다. 또 6·25 전쟁 때처럼 <순치(脣齒) 관계>라는 모택동 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같이 지구촌, 대륙 간 로켓 시대에 시대착오적 생각인 것이다. 오히려 북한 때문에 꽉 막힌 동북 3성이 뻥 뚫려 얻는 이익이 훨씬 커진다. 사실 한반도가 통일되어 중국을 칠까, 러시아를 칠까, 일본을 칠까. 주변국들은 너무 큰 나라들이며 또 그들도 위협받을 걱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2.북한의 반중(反中) 정서 중국이 나서면 북한은 꼼짝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한은 역사적으로 중국이 하자는 대로 마냥 따르지 않았다. 스스로 주체의 나라라고 표방하는 때부터이다. 북한과 중국이 가장 나쁜 관계였던 시절은 1960년 후반 '문화대혁명' 때이다. 압록강, 두만강 국경 지대에서 자극적인 선전물을 붙이고 강뚝 쌓기 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6·25 전쟁 때 전사한 중국 지원군 묘를 풀더미 속에 방치하였다. 중국 쪽에서는 북한과 연관되면 '조선 특무'라고 몰아붙이치며 학대하였다. 1969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최용건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여 상층부끼리는 화해를 한다고 하였으나 아래 정서는 그렇지 않았다. 중·소, 중·베트남 분쟁에서도 상층부는 중국 편을 들었지만 아래 정서는 소련 편이었다. '똥뙈놈'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 민심이었고 반대로 소련에 대해서는 뭔가 위대하고 높은 과학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숭배하였다. 중국이 G2국으로 성장하여 요즘은 제품과 기술력에 대한 비하는 현저히 사라졌지만 아직도 '똥뙈놈'이란 정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북한 상층부는 중국과 누구보다 밀접했고 그 영향을 복사하듯 주고 받은 것도 사실이다. '천리마 운동'과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과 '3대 혁명', '홍위병'과 '3대혁명 소조'가 대표적 증거이다. 1978년 중국의 개혁 개방 노선 역시 북한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등소평과 김일성의 각별한 친분이 그 영향을 보다 크게 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발표 1년 후인 1979년 12월, 심천 지대처럼 남포시를 국제 개방 도시화를 교시하였다. 이것은 필자가 1979년 남포 대학 연구소 재직시 직접 경험한 것이다. 북한의 내적 변화는 1983년 '인민소비품 생산운동'과 해외 '합영법' 제정으로 나타난다. 변화의 움직임은 1984년 김일성의 소련, 동구권 방문 계기도 있다. 특히 벌가리아(불가리아) 방문에서 받은 소문이 항간에서 회자되었다. 벌가리아는 남새(채소)를 팔아 전자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소문은 말을 보태기 마련이어서 세계적 수준이라고 한 것이다. 김정일은 과학자 대회를 열고 "과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하였다. 그 동안 예술인들에게 앉혔던 꽃방석을 과학자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다. 김정일은 연설에서 남조선의 전자 산업이 발전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이는 선진국 것을 모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공화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모든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 내용의 90%는 '과학 탐정과 훔치기'로 돌아섰다고도 하였다. 이런 변화의 분위기는 1985년에 '박철 사건'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박철은 북한 제일의 과학자인 이승기 박사의 사위이다. 이 사건에는 정무원 강성산 총리, 중앙당 과학 담당 비서 김환, 농업담당 비서 서관희과 관련되었으며 사건 논의를 위해 전국 협동농장 기사장들이 평양 인민 대학습당에 모였었다. '박철 사건'의 주 내용은 '농장 포전 개인 관리 책임제'이다. 이는 농장원과 간부에 이르기까지 포전을 개인별로 맡겨 관리, 즉 고질적인 사회주의 병폐인 건달을 없애자는 취지 이다. 이는 중국식 개인농에는 못 미치지만 북한 역사상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 모든 변화가 중국 개혁개방 성과의 여파였다. 하지만 1986년 1차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중국식 따라 하기를 접는다. 김일성의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위하여' 논문이 그 증거이다. 개혁 개방이 아니라 더 더욱 국영화, 폐쇄로 나가는 논문이다. 공산국에서 군중 시위는 중국에서 재채기라면 북한에서는 독감으로 느낀 것이다. '박철 사건' 관련자 모두를 좌천시키고 <인테리들이 문제>라며 몇 달간 사상 비판으로 들들 볶는다. 변화는 냉각기에 접어들었고 이를 더 꽁꽁 얼어붙게 만든 국제적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바로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와 동구권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개혁 개방은 곧 죽음으로 간주하였고 35년 지난 지금까지 지속된다. 중국은 이와 반대로 간다. 등소평은 비록 2차 천안문 사태를 유혈 진압하면서도 '남방 순회'로 개혁 개방을 적극 내민다. 그 결과 중국은 G2 국가로 우뚝 섰고 북한은 평화시 대량 아사하는 나라로 된다. 북한의 김 부자는 국내외적으로 권력에 위협받을 만한 환경이 아닐 때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개혁 개방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권력 유지에 위협을 느끼자 즉시 개혁 개방을 중단한다. 중국과 북한의 이러한 상반된 행동의 원인은 뭘까. 공산권에서 등소평, 고르바초프 등 지도자들은 거짓말로 세워진 권위가 아니다. 하지만 북한 김 부자 권력은 거짓말로 세운 권위이다. 개방하면 그 거짓이 들통날 것이고 이는 곧 망하는 길이다. 이 원인과 본질을 모르면 대화하여 공존 공영하자고 한다. 이 공존 공영은 아름다운 자연 속의 무지개와 같다. 하지만 이 무지개는 절대 손으로 잡을 수 없다. 그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헛발짓은 이젠 그만해야 한다. 중국과의 문제는 한·미·일 동맹을 유지하며 균형 잡아 나가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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