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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破落戶)란 말 들어 보셨나요?
파락호(破落戶)는 사전적 의미로는 '난봉이 나서 재산을 몽땅 날려 말아 먹은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래는 일제식민지 시절 안동의 독립애국의 한 양반집 거부, 김성일이란 종가집 종손인 '김용환'에 얽힌 얘깁니다.
이분이 당시에 날이나 날마다 여기저기 전문 노름도박을 일삼았고 노름 막판 '판걸이'로 잃기도 하고 싹쓸이로 따곤 했지요! 또한 자신의 딸 결혼 시집사돈댁에서 보낸 '농사오라 '보낸 혼수비용 까지 노름도박비용으로 날리고 심지어 새로 농살돈이 없어 친정엄마 '헌 농'을 시집에 가져 갔더랍니다.
그러나 노름도박으로 집안재산 망했다던 뒷 얘기는, 일제시대니까 '위장"이였고 실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몰래 전달됬다는 '완전 숨겨진 비밀'로 전해 왔었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 후손인 종손 김용환선생의 외동딸 '김후옹'님이 남긴 기록이고 이 사실은 현제도 안동역사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답니다.
따라서 이 파락호와 같았던,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고 박해를 받았던, 우리가 몰랐던 어린 박근혜영애가 12.6사태이후 전두환으로 부터 받았던 청와대금고 6억원중
3억원 돌려주고 3억원으로 설립한 '새마음병원 에 얽힌 선행'뒷 이야기를 옮겨 봅니다. 애국의 페친 여러분, 좀 긴 얘기지만 설 명절 밥상머리에서 이 사실도 함께 `얘기 하셨으면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설명절 되세요!
************아 래(펌글) ************
파락호(破落戶) / 박근혜 바보
파락호(破落戶) #파락호란 사전적 의미는 '행세하는 집안자손으로 태어나 난봉이나 결딴난 사람'을 일컫는 말임
한자어로 ‘파락호破落戶’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반집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합니다. 요즘 말로는 '인간쓰레기'쯤 될 듯!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의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 했다고 합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원도 다 팔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 사주곤 했다고 합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없어지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 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 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고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자기 가족에게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 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 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로 발표합니다.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 고 김용환 선생의 외동딸 김후옹님의 글 -
박정희 대통령 통치 자금의 숨겨진 이야기.. 펌글
♡ 박근혜 바보 ♡
이 나라에서 이런 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한 말은 동생들과 생활비로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본인 입으로 선행을 알리기 싫어서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말을 안 한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있겠나?
우리가 언론에 속아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바로 잡읍시다. 박근혜를 비난하고 잘못 판단하시면 하나님과 그분에게 잘못한 것입니다. 이런 분 만난 적 있나요??
430만 명을 무료로 치료해 주신 분...
돈없는 사람 무료로 수술해주고 치료해 주었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은 1976 년부터 1987년까지 새마음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430만 명의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 10. 26 사태 이후 청와대 금고 속에 있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자금 9억 5천 만 원 중에 전두환으로부터 6억 원을 받고, 20대 후반의 나이에 청와대에서 눈물로 보따리를 싸고 나와서는 새마음 병원을 경영한 것이다.
☆ 모전 여전인가?
육영수 여사의 피를 이어받은 박근혜.
☆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시에 MB캠프에서는 부동산 전문가답게 그 돈으로 부동산을 구입했다면 아파트가 수십 채가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답게 박근혜를 공격했지만 박근혜는 그 돈으로 새마음병원을 경영하여 민초들을 구했다.
☆ 그래도 그들은 아직도 할 말이 있는지 "그 돈으로 뭐했느냐?" 고 그리도 끈질기게 공격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모두 보고 들었다.
☆ 그때 한나라당 경선 유세때 홍준표 의원이 "조의금에 세금 내는 것 봤느냐" 고 하여 그들을 잠 재운 것도 지나고 나니 우습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가난을 우리나라에서 몰아내고 민족 중흥에 끼친 지대한 공헌으로 따진다면 조의금 치고는 작은 편이 아닌가?
☆ 그리도 공격을 받았건만 끝내 본인 입으로는 새마음병원의 선행을 밝히지도 않았다.
☆ 경선 끝나고 알고보니 문제된 6 억 원으로 새마음병원을 경영했다고...
☆ 과연 박근혜 다운 모습이다.
<주간 조선- 1988 년 11 월 13 일 대담>
■ 새마음병원은 명지학원으로 넘어 갔지요.
☆ "87 년 10 월에 넘겼습니다.
1976 년 12 월 성결교 서울 신학대학 건물을 구입해서 야간 병원으로 시작했어요.
경로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주로 노인 분들에게는 무료로 치료해 줬고, 일반에겐 실비만 받았어요. 헌혈 본부도 처음 이곳에 개설했습니다.
☆ 1987 년 10 월 명지학원에 넘길 때까지 무료로 치료해준 사람을 따져보니까 4백 30만 명이나 됐어요. 무료 진료 액을 수가로 환산하면 1 백 억원이 넘었구요.
그렇게 무료 봉사 위주로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새로운 의료 시설이나 장비를 구입하는 일이 벅차고 힘들었어요.
"능력있는 사람에게 넘기면 더 잘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인데 평소에 잘 아는 유상근 선생이 이사장으로 계신 명지학원에서 인수 의사를 밝혀 왔어요. 그래서 넘기게 된 거죠."
☆ 주로 하루 일과를 보내는 곳은 어딥니까?
"서울 능동에 있는 어린이 회관의 일을 보고 있어요. 70 년 4 월 어머니가 설립한 육영 재단의 이사장 자격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요.
☆ 또 어린이 회관 안에 근화원이라는 한국 전통 양식의 집을 지어 유치원에서 초. 중. 고교생들에게 우리 전통과 생활 예절을 알려주는 사업도 하였답니다.
요즘 아파트 생활을 많이 하는 탓인지 청소년들 가운데 우리의 전통 예절을 모르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1 박 2 일, 또는 3 박 4 일 코스로 이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비망록도 있다던데...
"아버지가 청와대에 들어오신 이후 개인적으로 메모하신 것인데...
언젠가 아버지 전기를 발간 할 때 저본으로 쓰여 지겠지요. 책 발간 계획도 기념 사업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 아까 기념 사업회 발족의 동기를 밝힐 때 '해산 당한 새마음 봉사단' 옛 식구들이 "재기해 보자" 는 얘기를 했다고 했는데...
새마음봉사단이 해체 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80 년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그만하면 짐작하지 않겠어요?그 말씀 만 드리겠습니다."
지금 정치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대중 인기주의의 구호를 외치는 포퓰리즘 (populism)에 빠져 있지만 박근혜는 그 당시 벌써 대중들에게 선행을 베풀었지만 한 마디도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 않고 묵묵히 불리한 경선에 참여하여 패배에 대하여도 아름다운 승복을 한 정치인이다.
자신의 이익에 대해서 결코 앞장서서 나서지 않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
사고 뭉치, 거지 발싸개 같은 싸가지 없는 쓰레기 좀비들이 각종 포털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씹고, 또 씹는 주제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걸 한 번 더 알아보고 바로 일러줄테니 제발 비열한 짓은 이제 그만들 하라.
위에서 언급한 6 억에 관해서 한 번 더 살펴보자. 10. 26 사건 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범행 동기와 범인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수사 과정에 나타난 거액을 처리하면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의 금고에서 나온 돈이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졸지에 고아가 된 박근혜에게 그 돈을 챙겨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박근혜의 입장에서 그 돈을 받은 정황을 보자. 졸지에 고아가 된 27 살의 박근혜는 아무런 실권도 없는 형식적인 퍼스트 레이디 대행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아 경황도 없고,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군복 입은 사람이 전달해주는 봉투를 "웬 돈이냐?" 고 따질 정신이 있었겠나?
청와대에서 곱게 자란 처녀가 그 돈을 받아야 되는 돈인지, 거절해야 되는지 따질 경황이 있었겠느냐 말이다. 1996 년에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 때 판사가 전두환에게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의 금고에서 발견된 9 억 원의 행방을 물었다.
전두환은 9억 원 중 6억은 박근혜가 어려울 것 같아 박근혜에게 주었고, 1억은 합수부 조사 자금으로 썼고, 나머지 2억은 당시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6억을 받은 박근혜는 '아버지 수사에 만전을 기하는데 써 달라’며 3억 원을 전두환에게 도로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3억 원 중 5천만 원을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에 주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그 돈으로 형제들과 먹고 살 궁리를 했을지 몰라도 "공무원의 딸을 유학까지 보내기 힘들다" 는 아버지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박근혜가 시간이 지나고 그 돈의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고는 개인의 사욕보다는 공익에 사용한 것이다.
악의에 찬 무리들이 그 돈을 은마 아파트 값과 비교하며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300 억대라고 발광을 하는데, 겨우 300 억이냐?
강남에다가 땅을 사뒀으면 수 천억도 넘었을 텐데... 비유해도 유치하지 않나?
그리고 그 당시 법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식으로 따지면 18 년을 공직에 근무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댓가의 퇴직금이라고 생각해도 아깝지 않으련만...
이리 꼬고, 저리 비틀고 하는 짓은 너무 야비하고 잔인하다. 그 당시 박근혜는 27 살 아가씨였다. 아버지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자기들 살이라도 발라 줄 것 같던 인간들이 천애 고아가 되자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마주쳐도 외면하는 비정함을 맛 본 박근혜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가?
두 동생과 살아 갈 길이 막막했을 어린 아가씨가 어른들의 감탄고토에 어떻게 처신해야 했을까?
그래도 어머니 육 여사의 따뜻한 피를 이어받아 무료 병원이라도 운영 할 생각을 한 박근혜를 기특하게 보지는 못할 망정 공주 병이라느니, 고생 모르고 살았느니... 하고 욕 하면 천벌을 받는다.
*대통령님!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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