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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 여호 5,9ㄱㄴ.10-12
제2독서 : 2코린 5,17-21
복 음 : 루카 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비유
류해욱 요셉 신부
사순 제4 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소위 ‘탕자의 비유’로 불렸던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에서 보다 중심적인 주제는 탕자의 회심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에
보다 올바른 제목은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루카복음 15장에서 세 비유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비유는 모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잃었던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잃었던 양을 찾은 목자에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비록 당신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잃었던 은전의 비유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한 닢의 은전을 찾기 위해서도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지는
열정을 보이는 여인에게 비유하면서 그 은전을 찾으면
기뻐서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피정의 체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마도 이 비유를 묵상하신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 비유 이야기는 천천히 읽고 깊이 음미해야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고요한 숲속 길을 산책하면서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들꽃의 향기에 취하면서
천천히 걷듯이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천천히 한 낱말씩 읽어나가면서 어떤 낱말이나 구절에 마음이 이끌리면
멈추어 서서 숲의 향기를 음미하듯이 멈추고 음미해야 합니다.
독일 예수회원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회를 했던 빌리 람베르트라는 신부가 쓴
‘오라 그리고 가라’라는 책이 있는데 그 신부님이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이라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었다.” 등등의 대답이랍니다.
정확한 답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입니다.
그를 보신 아버지는 먼저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우리말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대목을 보다 원문으로 옮기면,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입니다.
‘측은한 마음’이나 ‘깊은 연민’이나 모두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곧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등지고 떠났던 삶, 죄의 삶, 타락과 죄의 결과는 소외와 고통이었지요.
소외와 고통을 체험했을 때야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멀리서부터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 우리 모습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돌아온 동생은 반기기는 고사하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지요.
아버지가 나가서 달래자, 큰아들인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착실한 아들이지요.
일 년 내내 아버지를 도와 뼈 빠지게 일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쁘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의무로서 했던 것이고 내면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여기 있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냥 ‘저 아들’이라고 옮겨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정확히 옮기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장 원문에 가깝게 옮겼다는 NRSV 영어 번역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not my brother, but this son of yours”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동생이 창녀들에게 빠져 다 탕진해 버렸다고 하니,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문으로이거나 추측이겠지요.
사실 더욱 서글픈 것은 그가 아버지가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보살펴 준 부모의 은혜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네 모습 아닙니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제발,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다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셈이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것이니
기쁨을 나누고 즐기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기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도 당신의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 한번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깊이 마음에 새깁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날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지기 때문에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요?
성격이 타고난다고 하지만,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태아기와 유아기에 각인된 경험으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서 튼튼한 몸을 만들 수가 있듯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분명히 성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뀌어 갑니다.
성격, 자아, 행동양식, 습관 모두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단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쉽게 포기해서 문제입니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죄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열정을 가지고 변화의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선함으로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율법의 유산법은 장자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그 나머지 3분의 1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생전에 유산분배가 있어도, 분배받은 아들들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있어도 처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유산을 분배받았고 처분까지 한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죄를 마음껏 범하라는 이유가 아닙니다.
또 자기 혼자만 잘 살면 그만도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상의 삶을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의 비정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정상적이지 않은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하느님께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를 매번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물론 복음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세상은 이런 용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끊임없이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면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이를 위해 작은아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변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노력입니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새 사람’,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 과정이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된 땅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말합니다.
곧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과 ‘새 것’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2코린 5,17),
우리를 ‘화해의 직분’(2코린 5,18)과 ‘화해의 말씀’(2코린 5,19)을 맡기시고,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로 파견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음(2코린 5,21)을 말합니다.
곧 ‘새 사람’으로의 변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새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지고한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받아 집을 떠나 방종한 생활 끝에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 내고서 말합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루카 15, 8 참조)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침내는 돼지 치는 품팔이꾼이 되어서야
‘내 아버지 집의 품팔이꾼들에게까지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큰아들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그에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줍니다.
한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멀리서 보고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종들에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 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버지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혀주셨듯이(창세 3,21),
그는 ‘가장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의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들의 새로운 탄생을 모태에 묻고 있는
갓 태어난 어린애의 머리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탄생하는 깊고 깊은 사랑과 선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도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순 제4주일 : 다해
오늘의 전례는 사순절의 엄숙한 분위기에도 기쁨이 있다.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오늘이 “기쁨의 주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땅, 자유의 땅에 도달하여,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리며 감사드렸다.
광야에서 당했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감사드릴 수 있었듯이
주일의 모임과 미사는 이러한 기쁨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한 주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계획하고 은총을 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미사는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당했던 수모, 마음 상함, 상처, 슬픔, 아픔, 원한, 미움, 분노 등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며,
형제들과도 화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15,1-3.11-32: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주인공은 전후반을 연결하는 아버지이다.
전반부에서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고향을 떠나 ‘방종한 생활로’(13절) 탕진하고,
그들의 생각으로는 더는 잘못될 수 없는 처지인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될 정도로 나빠지고
이제는 돼지가 먹는 먹이를 먹어야 할 만큼 처지가 변하자(16절),
‘제정신이 들어’(17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품꾼으로라도 써주기를 아버지께 청했다.
그러나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고 성대한 잔치를 열라고 했다.
왜냐하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므로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절).
후반부는 ‘성실한’ 아들의 반응을 그리고 있다.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잔치가 벌어진 이유를 듣고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28절).
그 아들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가 나간다.
그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너그러움을 책망하고 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29-30절).
자기 동생의 입장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성실함이 무시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 정의의 저울에 달아보면 큰아들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의의 척도에 두지 않고
사랑과 용서의 차원에 두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동생뿐 아니라, 형과 같은 이기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구원될 수 있을 것이다.
동생보다 형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점은,
매일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행복을 누리면서 사랑의 잔치가 계속됐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곧 잔치인 줄 모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의무감과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겨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받아들여
함께 그 잔치에 참여할지 어떨지를 결정해야 하는 형의 입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와 ‘이기주의’가 자신들을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을 알고,
복음 때문에 부딪히게 될 걸림돌을 뛰어넘어 복음이 가지고 있는
큰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반대자들의 마음을 꾸짖음과 동시에 정복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면서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의 알량한 정의나 공치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당신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되돌아온 아들도, 성실하다고 하는 아들도 다 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할 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켜 구원하셨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2코린 5,19-20절).
인간 편에서 먼저 하느님과 화해할 수는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대한 잘못에 대해 해결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그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에게 그러했듯이
크나큰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포용하심으로써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화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가 되시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어 봉헌되시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죄 있는 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는다(2코린 5,21). 즉 거룩하게 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인간들의 모든 거절, 도피, 이기주의 등의 행위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냉랭한 오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사순절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에 앞서 우리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자.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이 잔치란 바로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의 참여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이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의욕은 넘치는데 함께 하는 신자들이 적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많이 나오면 10명 남짓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집중 호우로 피해가 컸습니다.
성당에서 피해자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실수로 보상에서 제외된 분들이 있었습니다.
실수와 오해는 큰 상처가 되었고, 그런 분들은 성당과 멀어졌습니다.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었고, 새로 온 신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삼계탕과 칼국수를 하는 유 가브리엘 형제를 만났었습니다.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고 함께 하자고 부탁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성당에 나왔고, 남아 있는 분들이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오해를 풀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본당 이전이나, 증축과 같은 결정에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자들 간의 반목과 불신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 새로 부임한 사제는 가정방문을 통해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한 사목입니다.
마음이 열린 신자들이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나가는 것이 사목자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사순시기에 성당에서 멀어진 분들, 하느님을 떠나있는 분들을
성당으로 모시고 오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건강도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중에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둘째 아들을 보았고,
마당으로 나가서 둘째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던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처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불평의 이유는 ‘잔치’였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 주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한 큰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큰아들에게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집에 있지만
교만과 허영에 빠져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방황하면서 집을 나갔던 둘째 형을 걱정하였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바람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는 둘째 형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앞가림을 잘하는 형제들의 자리도 있었지만,
방황하던 둘째 형을 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늘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둘째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그늘이 모처럼 활짝 갠 하늘 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지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어머니의 마음보다는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던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희망’을 간직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한다면,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다면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큰아들처럼 ‘비난과 불평’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을지라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희망의 배를 타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되찾은 아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사순절 미사 독서에서 "되찾은 아들" 비유를 종종 만나는 이유를 우리 각자는 잘 압니다.
저마다에게 뿐만 아니라 또 공동체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르심이 되기에 그렇지요.
오늘은 이 비유 말씀에 담긴 방향성과 운동성이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먼저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들어온 질책이나 비난, 무시의 말과는 달리,
자기들을 사람대접하고 진정 염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싶어서 모여듭니다.
이를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안에서도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작은아들이 유산을 요구해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3)고 합니다.
그는 제 욕망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집과 가족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물리적 거리는 물론 심적⋅정서적으로도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껏 방종하게 지내면서 아버지 품 안에서 익힌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결과는 재산 허비 · 탕진, 굶주림, 구걸, 거부 체험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에게 품팔이꾼들도 배불리 먹던 아버지 집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통해 돌아갈 의향이 싹트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복음사가는 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굳이 분리하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버지 집 역시 같은 의미, 곧 "제자리"를 의미합니다.
작은아들은 욕망의 탐닉과 자기 파괴적 삶을 멈추고 "제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편, 멀리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향해 달립니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사랑은 멈출 수 없습니다.
끊어낼 수도, 없었던 일처럼 무효화시킬 수도 없기에,
아들의 부재 동안 내면으로 더 절절히 동동거리면서도
외적으로 잠시 멈추어 있던 아버지의 사랑에 발동이 걸립니다.
그동안에도 마음은 늘 그를 향해 달렸기에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건 문제도 안 됩니다.
아들의 돌아오는 발걸음은 굶주림과 불안에 지쳐 무겁지만
그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노구임에도 재빠릅니다.
행여 괜한 자존심으로 작은아들 맘이 변할까 조급하기까지 하지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마침내 서로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접점을 찾습니다.
목을 껴안는 것은 반가움과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다시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결속의 욕구입니다.
입맞춤은... 아, 이 아름다운 입맞춤은 우리를 창세기의 한 대목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 하느님께서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하느님께서 입 맞추심으로 사람이 생명을 얻었듯이,
죄로 죽었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입맞춤으로 방종과 굶주림, 구걸과 거부당함으로 무너졌던 그의 자존감이 되살아나고,
떠나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입맞춤은 흡사 마술과 같습니다. 사랑의 마술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서로를 향해 나아간 두 존재의 만남에서 사랑의 절정이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화해"라는 과정보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화해"라면 자기 허물에 대해 쌍방이 인정을 하고,
각자의 과실에 대해 상대방에게 동시에 사과하고
또 서로를 용서해 주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 짧게 인용된 본문에서
"화해"(2코린 5,18.19.20)라는 말씀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직설을 날립니다.
감히 하느님과 화해라뇨? 하느님께서 뭘 잘못하셨다고?
"그분이야 그저 잘못한 사람이 엎드려 빌면 용서해 주시는 입장이지 화해는 무슨..." 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허물은 아버지 품을 떠나고 곁길에서 방종하고 죄지은 사람 편의 문제이고,
하느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회개와 용서"의 관계일 때는, 한쪽이 다가가 빌면
다른 쪽이 받아들이고 풀어주는, 일방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고,
"화해"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다고요.
복음의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달리십니다.
돌아오는, 아니 돌아갈까 마음먹기도 전에 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화해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아니 굳이 잘못이라면
잘못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용한 잘못 밖에 없으면서, 우리와 화해하고 싶어 하십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목을 껴안고 입 맞추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시려
늘 만반의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영화 촬영 때 고Go 사인이나 큐Q 사인 직전에 외치는
"레디~~"나 "스텐바이~~" 상태로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큰아들과 아버지의 방향성, 운동성도 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루카 15,28)
사랑을 향하다 말고 "멈춤"입니다. 정체되고 고착됩니다.
사랑은 특성상 흘러야 하는데 이처럼 멈추어 고이기 시작하면 탁해지고 썩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또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지요".
상대방이 어떻건 간에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니고 급박하게 움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잠재적 죄인 또는 활성화된 죄인인 우리에 대해 하느님께서도 그러고 계십니다.
제1독서는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전합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시어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여호 5,9) 버리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고 벌판에서 하느님의 업적과 그 완성을 기리며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요.
이집트 탈출 후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 장막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오로지 한 방향성, 한 운동성을 지니고 배신과 징벌 간청과 용서 등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척박한 광야살이 중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징표였던 "만나가 멎습니다."(여호 5,12)
함께 한 방향으로 움직이건, 서로를 향해 움직여서 만남을 이루건,
하느님과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 움직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움직이기 마련인데다, 특히 사랑이 본성상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선 이들은 축제를 벌입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만남 이후에도 잔치가 벌어지지요.
큰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은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정착 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작은아들이 귀향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의 문제처럼 열려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역사는 일회적 회개와 용서, 화해를 이룬 뒤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범죄도 실수도 용서도 화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아버지, 아버지 집, 아버지 품,
즉 제자리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이미, 여전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실 것이니
우리만 그 자리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아멘.
3월 한 달도 말씀 안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1.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가 사순시기에 듣고 있는 복음은 주님 세례 축일에 들었던 대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역사의 도정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며 대결하셨고(제1주일),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는 거룩한 변모를 보여 주시며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으며(제2주일),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처럼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제3주일).
그리고 오늘 사순 제4주일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을 예수님께서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이를 지켜본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며
그분과 그분의 생활양식을 비난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고 종교적으로 소외시켰던 세리와 죄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생활양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오늘,
전례의 성격은 이미 입당송에 잘 나와 있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즉, 슬퍼하던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 주시려던 삶이 예수님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 진복팔단의 말씀은 예수님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그 행복을 우선적으로 차지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살거나 일하는 현장에 가야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전해 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장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가치 지향성이 예수님의 뚜렷한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먹보요 술꾼”(루카 7,34) 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엘리트로 대접받던 이들의 이런 반응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가식적인 처신을 하던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예수님의 생활양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만들어놓은 유다교 제도의 혜택을 입은 엘리트였고,
자신들이 주석해 놓은 율법 규정 체계를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윤리적으로 가식적이었으되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살아가는 데 아무 걱정이 없던 중산층이었습니다.
3. “내가 오늘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오늘 제1독서인 여호수아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첫 수확을 거둔 이야기입니다.
수치스러운 노예살이를 하며 지내던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거둔 소출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여호 5,9ㄴ).
이는 더 이상 하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또 이 자립생활이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척박한 땅투성이였던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호수와 강이 있는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가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역사도
지난 과거의 삶의 양식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이어 이제는 로마의 힘에 의해 자기네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또다시 백성을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기존의 체제는 청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생활양식의 가치가 지닌 역사 도약적 의미였습니다;
현장성과 공동체성과 가치지향성.
4. 의로움으로 대동세상을
오늘 제2독서인 코린토 후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의 특징을 의로움 안에서의 화해로 설명합니다.
그가 옳게 설명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입니다”(2코린 5,17).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모두 과거의 행적과 상관없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메시아적 백성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므로,
다 같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의로움을 기준으로 화해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역설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 백성 안에서는 유다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아무 차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의로움을 기준으로 작은 차이를 넘어서 커다란 일치를 지향하는 대동세상이 된 것입니다.
5. 거룩함으로 복음화를
새 역사를 창조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있어서
의로움이 필요조건이라면 거룩함은 충분조건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처신함이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조건 없이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감수할 정도로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거룩함의 실체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을 지향하는 의로움에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화의 도구로 쓰십니다.
기껏 죄를 짓지 않는 정도의 생활양식을 보고 감탄하거나 존경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장과 공동체와 가치 지향이라는 거룩한 생활양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6. 실사구시의 신앙
이 땅에 복음 진리가 들어올 때, 한 가지 기저(基底) 요인과
또 다른 한 가지 촉진(促進) 요인이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저 요인은 한민족 전통으로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이었고,
촉진 요인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과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었습니다.
역사 초기부터 3천 년 동안 한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었던 하느님 신앙은
불교와 유교 등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면서 민족 생활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기를 2천 년, 민중의 종교심성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이 하느님 신앙이 이벽과 천주실의에 의해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동료 선비들과 중인,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종교심성으로
하느님을 알고 또 믿고 있던 이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권을 모르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모르던 왕조와 유림들에게 저항하여
새로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의 가치를 심어주었습니다.
또 다른 촉진 요인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 하여
실학(實學)이라 부르던 합리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민족의 종교 심성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하느님 신앙은 이 실학에 의해서 자극받아
민족 사회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커다란 도약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분히 이 명칭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던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던
정신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교리 또한 이 실학적 사고방식으로 보유론(補儒論)적 노선을 취하여
우리 민족의 종교 심성에 자연스럽게 젖어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7. 박해가 초래한 그늘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성리학 세력이 가했던 백 년 박해가 초래한
그늘이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5백만 명을 넘는다는 세례자 통계가 무색하게
예수님의 생활양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듯하고, 마치 심리적으로 박해 시대를 사는 듯
위축되고 소극적이고 인습적이며 타성적인 신앙생활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치 지향적이지도 않고, 공동체적이지도 않으며, 현장적이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눈으로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아들에 빗대셨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보여 준 처신이
어느새 우리 교회에 짙게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전해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 교회를 실사구시적으로 쇄신해야 할 요청이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8.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오늘 복음의 내용으로 보거나, 스스로 신앙 진리를 찾았던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거나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기의 말씀대로 심리적 박해시대의 수치를 치워 버리고
자발적인 실사구시의 정신 전통을 회복해야 하고,
코린토 후서의 말씀대로 이전까지 어떠했든지 간에
복음 안에서 화해한 새 백성의 신선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 말씀대로 복음적 가치를 찾고,
공동체로 모여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물론 믿음을 잃어버린 이들까지 돌아오도록 기다리면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감정의 원인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의 형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시는 것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 기뻐해야 옳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아버지만을 위해 일했는데
방탕하게 살고 돌아온 동생에게만 잘해주는 것이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속하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내가 어디, 혹은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은 내가 속하려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 감정의 원인을 나르는 수레바퀴입니다.
‘요나’(Jonah)라는 단편 영화 내용입니다.
움부나와와 그의 친구 주마는 한 휴양지 바닷가에 사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둘은 관광객의 사진기와 같은 물품들을 훔치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은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은 물고기가 잘 잡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뷰포인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진기로 여기저기 찍는 순간 그들의 인생을 바꿀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찍힌 것입니다.
음부나와는 흥분하여 이 사진으로 마을을 홍보하자고 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보러 몰려들었고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향락 시설도 함께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움부나와는 ‘피시 맨’이라 불리며 이 지역의 가장 유명한 홍보대사가 됩니다.
움부나와는 행복을 마음껏 즐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는 점점 관심을 잃어갑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주마는 너무 변해버린 움부나와를 떠납니다.
세월은 흘러 움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멋진 바닷가를 이렇게 쓰레기장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 물고기를 잡는다면 마을을 다시 한번 일으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는 배 한 척을 끌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움부나와는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거대해지고 더 더러워진 그 물고기는 음부나와를 삼켜버립니다.
이 영화는 구약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었다고 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결국 들어가게 된 것이 큰 물고기의 배 속입니다.
그는 다시 자기 행복의 원천을 하느님의 뜻에 둡니다.
그리고 니네베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감정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에 내 마음을 둘 때
그 행복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 감정이 비롯됩니다.
우리는 마치 마차의 바퀴와 같습니다.
마차의 바퀴는 중심에 축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그 중간에 여러 개의 살이 바퀴를 지탱합니다.
가장 중간의 구멍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언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종속됩니다.
바큇살들이 바로 여러 감정입니다.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 의해 감정들이 나옵니다.
바퀴는 그 감정들에 의해 움직이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만약 내 마음을 하느님 사랑의 축에 끼우면 나의 감정은 그것에 의해 좋게 바뀌고
그러면 사랑의 행위가 나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면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과 함께 슬퍼합니다.
세상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됩니다.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그 마음이 부모에게 꽂혀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슬프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을 뽑아내는 다른 것에 먹힌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움부나와는 물고기에 자기 마음을 빼앗겨 절친 주마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잃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면 좋은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사실 두 아들의 모든 감정을 다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감정은 열려있었고 첫째 아들의 감정은 닫혀있었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정의 원인은 어둠입니다.
빛은 태양이고 어둠은 블랙홀입니다.
‘만개’(In full bloom)라고 번역되어도 괜찮을 이런 단편 영화도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별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행복의 원천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밖에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택배로 주문하고 집안에서 남편이 하던 식물을 가꾸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분에서 지렁이 몇 마리가 나와 거실을 파고듭니다.
이내 그 구멍은 블랙홀이 되어 점점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집안에서 달아나려 해 보지만 지금까지 밖을 나가보지 않아서 밖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남편이 좋아하던 화분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갈등합니다. 화분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화분과 함께 남편의 기억이 있는 블랙홀로 들어갈 것인가. 영화는 후자를 택합니다.
이는 어떻게 세상 것으로부터 감정을 얻어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최후를 보여 줍니다.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머지 우리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피조물은 실제로 바퀴와 같은 우리를 굴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감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입니다.
요나처럼 자신을 만든 분의 목적대로 그분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퀴는 구르게 되고 자신이 딛는 땅의 느낌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블랙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맏이의 모습은 아버지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끼워 넣지 못한
가짜 하느님 자녀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것에 감정이 휘둘리면서 하느님 자녀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끼워져야 하는 마차 바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피조물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는 우리 선택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