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향기에 묻혀
김 미 화
하루하루 시간에 이끌려 지내다보니 어느새 겨울은 꼬리를 감추고 봄의
전령사들이 축제를 연 듯 하다. 봄은 그렇게 소리 없이 내 곁에 다가와 있
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살랑 이며 꽃잎들을 애무한다. 어디선가 날
아든 한 쌍의 나비는 이 꽃 저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황홀한 입맞춤에 꽃
잎은 더욱 발그레해지고 연두 빛 나는 싱그러운 바람에 내 맡기어 향기로
운 꿈을 꾼다.
어릴 적 내 고향은 온통 진달래 꽃밭을 이루는 깊은 산골이었다. 자연 속
에 망아지 마냥 들판을 뛰어 놀던 유년의 먼 기억 속에는 남동생과 동네
어귀 커다란 바위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고향의 봄을 부르며 퇴근해 오시
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때가 어슴푸레 생각이 나곤 한다.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여 잘디잔 봄꽃잔치가 열리면 하느작하느작 바람
결에 꽃잎들이 눈송이 날리듯 하늘 가득 흩날리는 때, 동무들과 우르르 산
등성이에 올라와선 진달래 꽃잎을 따먹으면 푸른 보랏빛 물감을 먹은 듯
입안 가득 알싸한 향기가 온 동산에 메아리처럼 퍼진다.
동네 아낙들은 꽃잎을 따다 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약주를 담기도 하며
봄은 무르익어 간다. 무리 지어 흐트러진 곳에서는 참꽃 귀신이 나타나 어
린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인양
두려움에 떨었던 순박한 산골아이들의 유년시절 추억은 세월에 묻혀 그사
이 까마득히 잊혀져갔다. 그러다 햇볕이 서로 다툼하는 계절이 오면 수첩
에 오랜 낙서의 흔적처럼 낡은 추억이 되어버린 내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
고픈 생각이 뭉게구름 되어 때때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곤 한다. 영원한 노
스탤지어, 돌아갈 수 없는 우리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아지랑이와 나비
가 춤을 추는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동산이 아닐는지….
산책 나온 초로의 노부부, 그 옛날 춘정의 사연을 떠올리듯 꼭 잡은 두
손이 애틋하다. 앙증맞고 서투른 걸음으로 봄나들이 나온 아이와 할아버
지의 발걸음도 마치 진달래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가벼워 보이는 것
은 할아버지의 소싯적에도 진달래 향기와 같은 청춘이 있었음일까! 흥얼
흥얼 흥겨운 콧노래에 햇살은 농익어간다. 시작과 끝을 거듭하면서도 여
전히 아름답게 피워내는 진달래꽃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에서
세월의 정직함을 거부할 수 없는 삶의 훈장 같은 주름이진 그 얼굴에 번진
미소는 꽃나무만큼이나, 봄바람만큼이나 화사함이 묻어 나온다.
“계절은 속절없이 다시 봄은 시작되건만
이 내몸 늙어 내 청춘 다져가도
꽃잎은 언제나 그 자리에 만발이로구나.
때를 알아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어
이름 모를 흰나비 살포시 날아와 비로소 봄이라고 전하네.”
자연에 순응하며 앙상한 가지마다 꽃을 피워내 다소곳한 아름다움을 보
여주는 야생화, 한겨울 내내 매운 바람에도 꿋꿋이 이겨내어 누가 피어나
라 한 것도 아니건만 가혹한 운명을 딛고 일어서 꽃송이를 피워내 봄의 화
두가 되고 진한 향기와 화려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장식을 하는 그 어떤
꽃들보다도 순수한 열정을 간직한 채 수줍은 듯 피어있는 진달래꽃, 인생
이 그러하듯이 때로는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부는 평탄치 않은 애증
의 세월을 무던히도 끌어안고 살아온 내 어머니의 모습과 닮은 듯 하여 애
잔한 마음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춘심을 유혹하는 봄날에 겨우내 고독하고 쓸쓸했던 마
음을 청산하고 연정의 날개를 달아 나비처럼 날아 보고픈 이 설렘은 필시
계절병이 또 도져 오나보다.
2003 14집
첫댓글 이 내몸 늙어 내 청춘 다져가도
꽃잎은 언제나 그 자리에 만발이로구나.
때를 알아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어 이름 모를 흰나비 살포시 날아와 비로소 봄이라고 전하네.”
자연에 순응하며 앙상한 가지마다 꽃을 피워내 다소곳한 아름다움을 보
여주는 야생화, 한겨울 내내 매운 바람에도 꿋꿋이 이겨내어 누가 피어나
라 한 것도 아니건만 가혹한 운명을 딛고 일어서 꽃송이를 피워내 봄의 화두가 되고 진한 향기와 화려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장식을 하는 그 어떤
꽃들보다도 순수한 열정을 간직한 채 수줍은 듯 피어있는 진달래꽃, 인생이 그러하듯이 때로는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부는 평탄치 않은 애증
의 세월을 무던히도 끌어안고 살아온 내 어머니의 모습과 닮은 듯 하여 애잔한 마음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때로는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부는 평탄치 않은 애증의 세월을 무던히도 끌어안고 살아온 내 어머니의 모습과 닮은 듯 하여 애잔한 마음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춘심을 유혹하는 봄날에 겨우내 고독하고 쓸쓸했던 마음을 청산하고 연정의 날개를 달아 나비처럼 날아 보고 픈 이 설렘은 필시 계절 병이 또 도져 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