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훗!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나… 허나 난 반드시 살아날 것이니
네년은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소
문은 고개를 돌려 절벽위에 오연히 서 있는 당소희를 보곤 비록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훗날을 기
약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아래를 살피는 소문의 눈은 붉
게 충혈 되어 있었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 그곳으로 떨어져야만 그나
마 살 가능성이 보였기에 어떻게든 몸을 흔들어 이동을 했다.
‘이제 나의 운명은 신에게 넘어 갔군. 신이시여!’
자신이 정확하게 강물의 중앙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소문은 두 눈을 감고 생전 처음으로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
렸다. 이대로 죽기엔 그에게 할일이 너무나 많았다.
펑!
깊은 계곡을 울리는 충격음과 동시에 소문의 몸을 껴안은 강물
이 환영(歡迎)의 물보라를 하늘 높이 솟아 올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물은 단 한번의 환영인사를 한 뒤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성도에서 동남쪽으로 사십 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회하촌(回河
村)은 성도로 들어가고 나가는 약재(藥材)의 집산지(集散地)로
유명한 곳이었다. 명나라가 들어서고 무역의 중요성이 부각된
요 근애 서쪽 중원의 관문인 성도는 역대 어느 왕조(王朝)보다
매우 중시되었다. 성도의 규모가 커지고 거래되는 물건 등이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증가하며 상인들이 늘어나게 되자
성도의 집값이며 물가(物價) 등이 급등(急騰)했다. 결국 좀더 많
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상인들은 물가가 비싼 성도를 피해 인
근 마을로 하나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전히 무역의
중심은 성도였지만 몇몇 특별한 상품 등은 주변 마을에서 주로
거래 되었는데 회하촌이 그런 마을 중에 하나였다.
사천에서 나는 거의 모든 약초들이 이곳에 모이고 거래가 되다
보니 마을의 규모도 커지고 사람도 많이 왕래하게 되었다. 사
람이 모이는 곳엔 으레 몰리기 마련인 기루, 주루, 객점들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고 회하촌의 밤도 성도 못지않은
불야성을 이루게 되었다.
회하촌은 말 그대로 장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연히 주변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강물을 볼 수 있었고 특히 마을 북쪽에 이르
면 고운 모래사장이 정면의 기암절벽과 어울려 환상적인 아
름다움을 뽐내고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했는데 그런 이곳에서
중원 무림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 명의 남녀가 만나게 된 것은
모두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소문이 이곳 모래사장으로 밀려 온 것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등에는 여전히 당소희가 선물한
검이 흉측한 모습으로 박혀 있었고 한참을 물속에서 떠돌아서
그런지 몸에 발라져 있던 소금들은 물에 모두 씻기어 나갔지
만 상처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주변의 살들이 하얗게 불려져 있
었다. 게다가 상처가 덧나 곳곳에서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으으!”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소문의 입에
서 조그마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반쯤은 물에 잠겨 있는 몸도
약간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에서도 흔
들림이 느껴지기를 얼마, 마침내 조금이나마 소문의 눈의 떠지
고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내가… 살은 건가…? 정말 살아 난 것인가…?”
소문은 흐릿하게 보이는 사물들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크크크! 결국은 살았단 말이지. 이 꼴을 하고서도 말이야. 크
크크!”
정신이 조금 더 또렷해지고 강변에 짙게 깔린 안개에 주위가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꼼짝 않고 계속 자신에게 밀려오는
강물을 보게 되자 그제 서야 살아난 것을 실감한 소문은 그
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축복했다. 하지
만 살아난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
소문에게 가장 급한 일은 망신창이가 된 몸을 치료하는 것이었
다. 난자당한 몸은 물론이고 정신을 차렸지만 양쪽 어깨 밑으로
부러진 팔에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이라도 느껴진다
면 신경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오히려 상태가 좋다고 할 수 있었
다. 이렇게 고통도 없이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
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부러진 팔의 상태가 심
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 설마!’
무인에게 있어 팔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소문은 마음이 급해졌다.
“으으윽!”
그나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는 소문은 모든 힘이 바닥나고 아무런 힘도 없이
덜렁거리는 팔을 가지고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
운 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다가 번번이
쓰러지기를 몇 번 그는 허리를 숙여 머리를 모래사장에 깊숙이
박으며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가장 먼
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의원을 찾는 것이었다
. 힘이 들었지만 소문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모래사장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만해도 기운이 없긴 하였지만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진 않았다. 몸을 일으켜 겨우 십여
장을 걸었을 뿐인데 다리는 휘청거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
는 듯한 현기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소문은 더 이상 움직이
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눈을 감고 제자리에 서서 현기증과 고
통만이 가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가시지 않고
의식만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응…? 누…구지?’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고 있던 소문은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감았던 눈을 겨우 뜨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인 것 같았다.
‘제길…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겨우 눈을 뜨기는 했지만 도와 달라는 말이 입에서 차마 떨어
지기도 전에 소문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새벽인가? 후, 이제 일이 끝났구나!’
옆에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사내를 뒤로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은 여자는 살며시 방을 빠져 나왔다.
“청하(淸夏)야, 이제 가는 것이냐?”
“예, 아주머니. 저녁에 다시 봐요.”
“그래라. 오늘도 수고했다. 집에 가서 푹 쉬렴.”
졸린 눈을 비비며 막 문을 나서는 자신에게 말을 건 태대모(太
大母)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청하는 평소와 마찬
가지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쪽 강변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일을 마치고 새벽에 강변을 거니는 버릇은 그녀가 회하
촌에 들어온 지난 오 개월 동안 한번도 빼먹지 않은 아침일과였
다. 일을 끝낸 오늘도 어김없이 북쪽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
겼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강변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보였다.
그녀가 이곳을 찾는 시간이 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기도 전
인 이른 새벽인지라 지난 오 개월 동안 예외적으로 겨우 한
두 사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예외가 적용되는
날 중 하루인 모양이었다. 안개에 가려 아직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강변에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물체는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이 시간에 사람이라니… 참 오랜 만이네.’
자신만의 공간인줄 알았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기분이 나
빴지만 한편 자신과 같이 이른 새벽의 강변을 걷는 사람이 있
다는 것에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느리긴 했지만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던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 자신이 그의 지척에 이를 동안에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
사내에게 문득 이상함을 느낀 청하는 문득 겁이나 걸음을 멈
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누, 누구세요?”
“…….”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자
신을 노려보았다.
“사….”
쿵!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사내에게 두려움을
느낀 그녀가 소리를 치며 도망가려는 순간 그녀의 앞으로 쓰
러진 사내는 가뜩이나 겁을 먹은 그녀의 혼을 빼 놓았다. 자신
도 모르게 십여 장이나 뒷걸음질치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
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노려본 사람이 공격을 할 것 같아 강
변이 떠나라가 비명을 질렀다.
‘질긴 사람들 같으니, 더는 못 데리고 다니겠다.’
새벽 같이 주루를 빠져 나오는 환야는 밤새 마신 술에 취해서
탁자에 엎드려 있는 두 명의 수하들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혈대의 보고대로 라면 패천수호대에선 환야 혼자만이
떨어져 나온 것이어야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환야
가 명령을 하고 우겨보았지만 부대주인 적성은 결국 두 명의
수하를 그에게 호위의 명목으로 붙여주었다. 오랜만에 궁을 벗
어나 사천이라는 먼 곳까지 원정을 온 그는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혼자서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호위라지
만 두 명의 수하는 한마디로 귀찮은 혹이었지만 그들을 보내
준 적성의 정서도 있고 해서 며칠 동안 함께 다녔지만 더 이상
은 아니었다. 주루를 나선 환야는 뒤도 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제는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는 거야!”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얼마를 그렇게 달렸을까? 그의
발을 붙잡는 비명성이 들린 곳은 그가 있는 곳에서 무려 백여
장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소리
였지만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그인지라 비명을 듣자마자 비명
성이 들린 곳으로 주저 없이 달려갔다. 주루를 빠져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짙지 않았던 안개는 비명이 들린 곳에 이르
자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어져만 같다.
“어라, 저 여자는!”
비명을 지른 여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자
환야는 상당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소리를 지른 여자는 어제
저녁 그의 수하들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이 기녀들이 몸을 파
는 곳임을 안 환야가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려 빠져 나오려다 문
에서 쓰러뜨린 그 기녀였다.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붉히고 사
과를 하자 살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비켜준 그 기
녀가 틀림없었다. 유난히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그인지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그녀가 왜 이런 시간에 여기에 쓰러져 있는 것이지?’
잠깐 의문이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환
야는 재빨리 다가가 쓰러져 있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아가씨! 정신을 차리세요!”
한참을 그렇게 소리치며 깨우자 작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뜬 그녀는 냅다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이런! 걱정 하지 마시오. 내가 어디 아가씨를 헤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환야는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서 한발 벗어나 부드럽게 말을
했다.
“하하, 어제 저녁에 보았지요. 그 기루에서 말입니다. 아가씨를
쓰러뜨린….”
그제 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청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하하, 무슨 말씀을… 그런데 이런 이른 시간에 무엇 때문에 그
리 놀라신 것입니까?”
환야의 말에 자신이 놀란 이유를 생각하던 청하는 자신을 노려
보던 괴 인영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환야에게 다가
갔다.
“저, 저기에 이상한 사람이….”
환야는 청하가 지적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 때문에 자
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뿌연 안개 사이로 드러난 물체는 사람이었다.
‘저런!’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서 등에 커다란 검이 꼽힌 채 쓰러
져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혹시 몰라서 조심스레 다가간 환야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재차 얼굴을 확인한 얼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웬만해서는 이런 모습으론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 아는 사람인가요?”
어느새 다가왔는지 겁을 잔뜩 먹은 청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 아니오. 다만 그 몰골이 너무 처참해서 좀 놀랐을 뿐입니
다.”
정색을 하고 말을 바꾼 환야는 서둘러 소문의 몸 상태를 살펴
보았다.
“죽었나요?”
“흠, 아직 미세하게 숨을 쉬고는 있지만 죽은 거나 진배없군요.
휴~ 어떤 사람들이 이리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잔인한
인간들입니다.”
“등에 칼이 꼽혀 있는 보면 싸우다 그런 것 같은데….”
“전신에 나 있는 상처들은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아니라 고문
의 흔적입니다. 보십시오. 이 손도 그 증거의 하나지요.”
환야는 소문의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손가락에는 당연히 있어
야 할 손톱이 모조리 뽑혀져 있었다.
“어, 어쩜 사람을….”
굳은 안색을 유지하고 있던 환야는 소문의 등에 박혀 있는 검
을 부러뜨렸다. 당가의 여식이 사용할 정도의 검이라면 널리
이름 있는 검은 아닐지라도 제법 쓸만한 검 일진데 너무나 손쉽
게 부러져 나갔다.
“우선 의원을 찾아야겠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아가씨께서 도와주
셨으면 합니다.”
소문을 들쳐 업고 청(請)하는 환야의 말에 청하는 자기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청하가 안내하여 그들이 도착한 곳은 회하촌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인술원(仁術院)이라는 곳이었다.
“계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청하가 굳게 닫친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환야까지 나서서 문을 두드리며 난
리를 피우자 이제 막 잠에서 깼는지 윗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
며 한 노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인술원의 하인인 듯했다.
“뉘시오? 뉘신데 이런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시는 게요?”
“급한 환자가 있어서 이렇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문
을 열고 의원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허, 중한 상처를 입은 모양이구려. 일단 안으로 들어는 오시구
려. 하지만 의원님께서 일어나시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겠소?”
슬쩍 고개를 비틀어 환야가 업고 있는 소문을 살펴본 노인은
붉게 물들다 못해 피로 찌든 옷과 찢어진 옷 사이로 비치는
상처들을 보곤 적지 안이 놀란 듯 했다.
“고맙습니다.”
노인의 안내로 환자들이 대기하는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 환야
는 준비되어 있는 이불위에 조심스레 소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안내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의원님은 언제 일어나십니까?”
“이제 겨우 묘시(卯時-새벽5-7시)이니 적어도 한 시진은 더 지
나야 일어날 것이오.”
노인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킨 환야는 방문을 나섰다.
“왜, 왜 이러는 게요?”
“노인장은 모른 체 하십시오. 이 친구가 너무 중한 상처를 입어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자고 있다면 깨워야지요.”
“이, 이러면….”
노인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방을 뛰어나간 환야는 잠시 후 겁
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의원을 앞세우고 태연히 돌아왔다.
“이친구가 아까 말씀드린 그 사람입니다. 조금 전의 일은 덮어
주시고 최선을 다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예? 예예.”
여전히 겁에 질린 의원은 천천히 소문에게 다가갔다.
‘훗, 덩치는 커다란 사람이 왜 저렇게 떤다지?’
청하는 지금 덜덜 떨면서 소문에게 다가가는 의원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인근에선 용하
기로 소문난 주병진(周病振)이라는 의원이었다. 그러나 너무 일
찍 재물을 알아서 인지 돈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그런 자로
덩치는 평범한 사람의 두 배는 됨직 했는데 열흘에 한번은
꼭 찾아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주병
진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어대니 우습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했다.
비록 인간성이 나쁘고 재물을 탐하지만 이만한 의원을 꾸려 나
간다는 것은 그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
금전만해도 그렇게 떨어 대던 주병진은 막상 환자를 눈앞에 두
자 언제 떨었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문의 전신을 살펴갔
다. 맥을 짚어보기도 하고 옷을 벗겨가며 상초를 자세히 관
찰한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환야를 바라본 것은 거
의 일각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후, 제가 이곳에서 의원 질을 한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지독한 상처를 입은 환자는 처음 봅니다.”
“그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살수는 있겠지요?”
산다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을 하는 환야의 태도에 다시
겁을 먹은 듯한 주병진이 떠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 그게… 제가 지니고 있는 좋은 약재들과 의술을 총 동원하
면 살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계속 말씀을 하십시오. 무엇이 문제인가요?”
주병진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답답해진 환야가 재촉을 했다.
“온몸에 입은 상처가 워낙 심해 최대한 없애기는 하겠지만 보
기 흉한 흉터가….”
“하하! 그 정도가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양 팔인데 뼈가 심하게 부러지고 뒤틀려서
상처가 낫는다고 해도 팔을 쓰기가….”
“…….”
환야는 의원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자
신이 보기도 소문이 팔에 입은 상처가 보통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게, 나도 잘 모르겠소이다. 이 정도 상처를 입은 사람은 본
적이 없는지라….”
“알았습니다. 우선은 살리는 게 급하니 당장 손을 쓰십시오. 비
용은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약재는 무엇이든 아끼지
말고 사용하십시오.”
환야의 말을 들자 주병진의 겁먹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를 하지요.”
“그리고… 환자가 조용히 기거할 곳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리하지요. 다행이 며칠 전에 부상을 당하고 찾아왔던 무사님
들도 대충 치료가 되자 다 떠나고 지금은 방이 꽤 남았습니다.
가장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주병진은 소문을 치료에 필요한 준비를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던 청하가 입을 열
었다.
“그런데 무슨 수를 쓰셨기에 저자를 데려 오셨나요?”
“하하, 별거 아니오. 가서 조용히 청했을 뿐입니다.”
웃으며 말을 한 환야는 소문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청하는 고
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환야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장 약재창(藥材倉)으로 가서 여기에 적힌 약재를 찾아오게.”
주병진은 소문을 치료하기에 필요한 약재를 적은 종이를 불안
에 떨고 있는 노인에게 전해 주었다.
“괜찮으신지요? 소인이 괜히 그들을 들여서….”
“아니네. 자네가 막아도 어차피 이리될 상황이었네. 거참, 며칠
전엔 한밤중에 무사들이 떼거지로 찾아와 난리를 피우더니 그
놈들이 가니 이번엔… 휴, 말을 말아야지. 그래도 이번엔 돈이라
도 제대로 받을 것 같으니. 서둘러 주게.”
“예. 의원님!”
행여나 치도곤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노인은 떨리는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재빨리 약재창으로 뛰어갔다.
“허허, 그래. 값은 제대로 받았는가?”
“예. 어르신. 워낙 귀한 약초 이다보니 매우 높은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들고 온 짐을 마당에 내려놓으며 장씨는 들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자신이 캐온약
초를 내다팔고 생필품(生必品)을 사다주는 장씨의 시원스런 대답을 들은할아버지가
흐뭇해하자 장씨는 더욱 신이 나서 크게 떠들어댔다.
“사람들이 어찌나 값을 높이 부르는지 파는 제가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어르신
께서 부탁하신 물건을 사고도 상당한 금액(金額)이 남았습니다.”
장씨는 허리에 찼던 주머니를 풀러 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하나
가득 동전이 들어 있었다.
“흠, 그런가? 수고했네. 나에겐 돈이라는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으니 나머지 돈은자
네가 알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워 주게. 듣자니 정(鄭)서방이 아들을 보다고하고
천(千)서방이 조만간 딸을 여윈다 하니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갈게야.”
“번번이 이렇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리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장씨의 얼굴에 고마움과 감격(感激)이 표정이 교차(交叉)하고있었다.
항상 그랬다. 소문의 할아버지가 캐오는 약초들은 인근 주변의 난다 긴다 하는약초
꾼들이 온 산을 뒤지고 죽어라 다리품을 팔아 구해오는 다른 어떤 약초보다귀했고,
그 수령(樹齡)이 오래되어 부르는 게 값이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장씨에게 준 산삼(山蔘)은 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장백산에서
도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삼이었다. 그러니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해 졌고 유래가 없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고 자연 많은 돈이 남을 수밖에없
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남는 돈을 마을이나 인근지역의 불쌍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처음엔 장씨를 통해 익명(匿名)으로 그리했지만 언젠가취
중에 이 사실을 떠들어댄 장씨 덕분에 지금은 할아버지의 선행(善行)이 널리 알려져있
었다.
“참, 예서 이럴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지. 그렇잖아도 혼자 마시던 참이라 영적적했
었네. 술이나 한잔 하세.”
“흐흐, 술이라면 지금 당장 북망산(北邙山)으로 간다 해도 절대로 마다하지 않는제
가 아닙니까!”
장씨는 좋아 라며 할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마당 한 켠 나무그늘에 마련되어 있는탁
자에 아무렇게나 자리하고 앉았다.
“허허, 술 좋아하는 것은 자네나 자네 선친(先親)이나 똑 같네 그려.”
“하하하. 그런 게 어디 가겠습니까? 제 자식 놈도 벌써 제법 마십니다.하하하!”
앉자마자 할아버지가 권한 술을 단숨에 들이 킨 장씨가 기분 좋게 웃어 제꼈다.
“어떤가? 맛은 괜찮은가? 옛날에 담가둔 술은 소문이 놈이 다 결딴을 내버리는바람
에 소문이 떠나고 난 뒤 따로 담근 술이네. 비록 이년 밖에 안됐지만 제법 맛이들은
것 같던데… 자네가 생각하기엔 어떤가?”
“이거 머루주 아닙니까? 어르신!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아주 그만입니다.”
장씨는 입안에 남아 있는 진한 향을 음미(吟味)하며 조그만 단지에 담겨찰랑거리고
있는 머루주에 연신 시선을 던졌다.
“허허, 그리 말해주니 기분이 좋네 그려. 술은 충분하니 사양 말고 마음껏마시게나.
나도 오랜만에 한껏 취해보고 싶구만.”
할아버지와 장씨는 서로의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몇 단지의 술을비웠
다. 그러나 그렇게 마시고도 변화라고는 할아버지의 안색에 약간의 홍조(紅潮)가보
인다는 것뿐이었다.
“참, 그나저나 중원인가 하는 곳으로 간 소문이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까? 떠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흥, 그 무심한 놈이 연락은 무슨. 아예 기대를 안 하는 것이 속 편하지.”
말을 그리 했지만 내심 서운한 눈치가 보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장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 사연이 있겠지요. 일가친척(一家親戚)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객지(客地)에서
고생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생은… 내 그놈을 그렇게 멍청하게 키우지는 않았네. 별다른 고생이야하겠는가?
혹, 예쁜 마누라라도 데리고 올지 모르지. 클클클!”
“색시라니요?”
또 한잔의 술을 들이 킨 장씨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흠흠, 아닐세. 그런 게 있네. 그냥 신부감이나 하나 데리고 무사히 왔으면좋겠다는
말이지.”
할아버지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할배!!!”
소문이 그를 살피던 주병진을 깜짝 놀라게 하는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차린 것은그
가 인술원에 들어 온지 꼭 사흘이 지난 후였다. 하루만 지나면 의식은 차릴것이라는
주병진의 장담을 간단히 무시한 소문이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하자 하루라는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환야는 장담을 지키지 못한 주병진에게 슬슬 압력을가
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다른 환자를 돌보고 있는 그의 혼을빼놓
기가 일쑤였고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한마디
가 첫날 환야에게 죽음의 공포를 맛본 주병진의 가슴에 비수(匕首)처럼 박혀왔다.
결국 그는 인술원을 찾아오는 모든 환자를 물리치고 소문의 회복에 전력을기울였다
.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나고 소문이 인술원에 들어와 만 삼일이 되는 오늘 아침마침
내 굳게 닫혀 있던 소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차린 것이었다.
의식을 차린 소문은 오랜만에 본 빛에 눈이 부셔 잠깐 동안 사물을 분간 하지못하
고 있었는데 점차 시력을 회복한 그가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입은계집애처럼
작고 코는 무식하게 크며 눈은 낫으로 찢은 듯한, 그리고 턱은 밑으로 길게늘어져
마치 서있는 돼지를 연상시키는, 그러면서도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괴상한
사내가 냄새나는 입을 자신의 코앞에 들이밀고 요리조리 자신을 살펴보는모습이었다.
‘이놈은 뭐지?’
철면피의 죽음, 자신에게 칼을 던지고 싸늘하게 외치던 당소희, 강변에서 자신을보
고 놀라던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으며 장씨 아저씨와술을
마시던 웬수 같은 할배! 이 모든 상념(想念)들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소문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들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괴인이 갑자기 두 손을 하늘로 치켜세우더니 환호성을 지르는것
이 아닌가?
소문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강변에서 정신을 잃은 자신이 이렇게 누워 눈을뜨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 의해 구원은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돼지를 닮은 인간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구한 것 같지도 않았고, 혹구했다손
치더라도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냄새나는 입이나 치울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환호성을 지르던 괴인은 재빨리 밖으로뛰어나
갔다.
‘후~ 그나저나 살긴 살은 것인가?’
점점 선명해지는 주변의 풍경과 생생하게 살아나는 고통에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
을 인식하게 된 소문은 살아났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엄청난 당혹감에 사로잡
혔다. 온 몸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자 하는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직 한곳에서만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서,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신에 힘을 주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양팔만은예외였다.
소문은 거듭해서 팔에 힘을 주었다. 아니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힘도손끝까
지 전해지지 않았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제길!’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결과였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다가오자 오랜만에
세상을 접하고 마음껏 빛을 빨아들이고 있던 두 눈을 감아버렸다.
‘크크, 신이라는 양반이 내 소원대로 목숨은 살려줬지만 두 손은 앗아가 버렸군.이
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래서! 어차피 내가 멍청해서, 실력이 없어서 당한 것이니병
신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러나! 그러나 면피는 어쩌란 말인가? 면피는!그리고
당가는? 면피를 죽이고 나를 이 꼴로 만든 당가와 그년은 어찌 하란 말인가!’
좌절감과 분노로 소문의 입술이 저절로 깨물어지고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의상념을
깨는 낯선 목소리가 있었다.
“하하! 의원의 말대로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이외다. 그래 몸은 좀어떠시오?”
굵지는 않지만 힘과 활기가 넘치는 소리가 방안에 울리고 소문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한두 살 어려보이는 청년이었다. 지혜(智慧)로 가득 차 보이는
두 눈, 태산(泰山)의 높이를 무시하려는 듯 하늘로 치켜 올라라간 콧날하며크기와
균형이 알맞게 조화된 입술을 지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을 지닌자였다.
‘허! 얼굴 하나는 정말 잘났구나! 그런데… 이 놈은 또 뭐지?’
갑자기 나타난 청년의 얼굴을 보며 절로 감탄을 하던 소문은 조금 전의 이상한인간
과 마찬가지로 이 청년 또한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자 또 한번 궁금함이 치솟았다.
“누군 신지…?”
“이런! 기쁜 마음에 제가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저는 환야라고 합니다.나이는
올해로 스물넷입니다. 지난번 강변에서….”
“아! 그때 강변에 계셨던 분이군요. 그럼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오신분이… 그런줄도
모르고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을지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제 목숨을구해주셔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을 앞두고 누워 인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소문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이 그의 생각을 향동으로따
라가 주지 않았다.
“하하! 그냥 누워 계십시오. 의식은 돌아왔지만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무
리하지 마시고 누워 계십시오. 그리고 소협을 구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소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용을 쓰는 그의 어깨를 조심히 누르며 말을 하는환
야의 말에 의아해 하며 대답을 구했다.
“그날 소협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청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그길
을 지나가다 그녀의 외침을 듣고 조금의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환야의 말의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말을 반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이라니요. 저는 그저 이분을 보고 기절을 했을 뿐인걸요. 공자님께 오시지않았
다면 전 그냥 도망쳤을 것입니다.”
환야의 뒤에서 들려온 음성의 주인공은 한손엔 하얀 헝겊을 다른 한손에는 작은사
발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이런, 무슨 말씀을… 소저께서 이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제가 어찌 그곳으로알고
뛰어갔습니까? 다 소저의 덕이지요, 아무튼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서로 인사들나
누시지요.”
“을지소문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살수 있었습니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모르겠
습니다.”
“소녀는 청하라고 해요. 이렇게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상처가 너무 중해서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리고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소협을 구하신 분은 환공자십니다.
저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는 걸요.”
들고 있던 천으로 살짝 입가를 가리며 말을 하는 청하의 목소리는 새벽이슬이구르
는 듯 맑고 고왔다.
“그만 하지요. 누가 구했건 그건 중요하게 아니지요. 이렇게 을지소협이깨어났으니
그걸로 족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건 무슨 약입니까? 지난번 것과는 달라보입니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항상 의원님이 주시는 대로 가지고 왔을뿐이에요,”
약간은 부끄러운 듯 얼굴에 홍조를 띤 청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을 했다.
“하하,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색깔이 조금 더 진해진 것 같아서 그리 말을 한것
이지요. 그런데 헝겊을 가지고 오신 것을 보니 또 상처를 닦아내실 모양이로군요.”
“예. 그런데….”
대답을 하던 청하는 난처한 듯이 소문을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환야는 그런청하의
모습에 집히는 게 있었다.
‘하긴 의식을 잃었으면 모를까 저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옷을 벗기고 상처를닦
는 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겠지.’
드르륵!
방문이 열리면서 조금 전에 소문이 깨어난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던 그 괴인,인술
원의 주인인 주병진이 들어왔다.
“이제 상처를 닦아낼 필요는 없다. 청하가 그간 고생했구나.”
청하가 들고 있는 헝겊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한 본 주병진이 소문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몸은 좀 어떠시오. 조금 전에는 소협께서 깨어나신 것을 알리느라고 제가 너무경황
이 없었습니다.”
주병진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가 겪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 소문이깨
어난 것을 보고는 환자가 살아났다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이제 고생이 끝났다는생
각에 그는 절로 환호성을 지르며 환야에게 뛰어간 것이었다.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얼굴 하나 가득 무게를 잡고 말을 하는 주병진의 모습에자신
이 처한 상황도 잠시 잊고 연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소문이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덕분에 의식은 회복을 했지만…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것인지.”
생각이 자신의 팔에 이르자 또 다시 안색이 흐려졌다. 주병진은 소문이 왜그러는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은 원해선 아니 되지요. 우선은 목숨이라도 건진 것이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소협께서 지금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그건
걱정하고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마음을 단단히 하시고 우선 몸부터
회복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 팔이 이리 되었는데 그런 마음이 가져지겠습니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말
씀해 주십시오. 팔은… 영영 못 쓰게… 되는 것입니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소문에게서 그가 얼마나 불안 해 하고 걱정을 하고있는지,
그리고 한편으론 혹시나 하는 기대가 깃든 그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는데주병진의
대답은 소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뭐라 확신의 말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소협의 팔이 움직이지않는
다는 것이고 제가 그것을 고칠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하지만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소협의 몸에선은연중
소협의 몸을 보호하는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소협께서 익히신 무공 중에
그런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 있는 듯한데 그 기운이 부상이 더 이상 악화되는것을
막고 있었고 미약하기는 했지만 회복시키려는 움직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그래
서 소협의 그런 엄중한 상태를 보고도 하루 만에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 장담을한
적이 있지요. 물론 제 예상이 틀려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어긋난 장담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 뼈저리게 느낀 주병진은고소(苦笑)
를 지으며 딴청을 하고 있는 환야를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기운이 제 의술과 함께 소협의 망가진 팔을 회복시킬 수 있을 지도모르
겠습니다. 물론 이 또한 장담은 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주병진의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소문이 질문을 했다.
“혹, 제가 팔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다시 무공을 쓸 수는 있는 것입니까?”
“그 또한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보통 뼈라는 것은 한번 부러진 이후에는 보다단단
해지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소협의 경우는 뼈는 물론이도 양팔을 지나는모든
경맥(經脈)들이 심하게 손상을 입어 부러진 뼈들이 붙는다 해도 망가진 팔이정상으
로 회복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고 다행히 회복을 한다 해도 어쩌면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되면 무공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이겠지요.”
“그렇군요….”
힘없이 대답을 하는 소문의 얼굴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팔을 쓸 수 없다는 것은 곧사형선고(死刑宣
告)나 마찬가지인 것을… 게다가 일신의 무공이 천하를 오시할 정도면 그 고통이
어떠할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자신도 제법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바 소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환
야 또한 안색을 흐리고 있었다.
“여기계신 청하 소저께서 그동안 수고가 참 많았습니다.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닦
아내느라 한시도 자리를 뜨질 않았습니다. 이곳에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많았는데
굳이 그 일을 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덕분에 지켜만 보던 제가 미안해서혼났습니다
. 하하하!”
환야가 어두운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화제를 돌렸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소생 때문에 소저께서 괜한 고생을하셨
습니다.”
“아니예요. 고생이라니요. 지난번 강변에서 도움을 청하시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놀
라 도망간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답니다. 그리고 의원님께서 그렇게 애쓰시는데저
라도 작은 도움이 될까 하고….”
“제가 그래도 복이 있어 죽기 전에 소저 같은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소문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이 자신을 위해 애를 써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세상엔 당소희 같이 사갈 같은 계집이 있는가 하면 청하 소저 같은 분도계시는구
나….’
“그런데 청하야! 요 며칠 일을 나가지 않았구나. 그래, 언제부터 다시 일을시작할
작정이냐? 너도 알다시피 내 요 며칠 신경을 썼더니 몸이 영 피곤하구나.”
뜬금없는 주병진의 말에 당황한 청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흠, 왜 말이 없는 것이냐? 단골을 너무 무시하면 안 되는 법이니라. 하하하!”
소문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에 긴장이 풀린 주병진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청
하에게 계속 농을 걸었다. 그럴수록 청하는 더욱 움츠러들 뿐이었다. 소문이 그이
유를 몰라 다소 의아해 하는데 이미 기루에서 청하와 만난 적이 있는 환야는주병진
이 하는 말을 단숨에 알아들었다.
“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 생각이 되는군요. 당장 급한 것은 을지소협의 팔을정
상으로 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환야는 어느새 색기(色氣)로 번들거리는 주병진을 은근히 바라보았다.
“아! 그, 그렇지요. 하하!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을지소협의상세를
살피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데. 흠, 흠… 청하야 방금 내가 한 말은 없었던걸로
하자꾸나. 허허헛!”
‘내가 미쳤지. 저놈이 어떤 놈인지를 잊고 있었다니!’
담담하게 말을 하며 쳐다보는 환야의 눈빛에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린 주병진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소문과 눈이 마주쳤다.
씨익!
되도 않는 미소(媚笑)를 짓느라 고생하는 주병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문의
뇌리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돼지가 아양을 부리는것
같군!!’
잠시 후 주병진이 환야의 눈치를 보며 방을 나가자 소문은 그동안 내심 궁금해왔던
것을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무례한 말씀이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저를 위해 애를 쓰시는 겁니까?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허, 막상 그렇게 물어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도와
드리고 싶어서 도와드리는 것이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믿습니다. 믿고말고요. 그래도….”
“음, 부담스러워 그러시는군요. 하지만 무림에 적을 두고 사는 사람은 다 같은동도
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객지생활을 하다가 많이 다쳐도 봤고, 혼자 외롭게병마(病魔
)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서럽고 비참한 것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사람
은 모릅니다. 절대 알 수 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다가 우연히 중한 상처를 입은소
협을 만나게 되어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 옛날의 저와 같은 사람을 보게되었
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런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뭐 이기회에
그동안 지은 죄를 탕감(蕩減)해 달라고 부처님께 아부나 한번 하려는 의도도있습니다
만.”
환야의 우스개 소리에 소문은 물론이고 진지하게 듣고 있던 청하까지도 살며시웃음
을 지었다. 그녀는 웃음이 가시길 기다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이분 공자님과 마찬가지예요. 집을 떠나 객지에 나온 것이 오래 되진않았지만
그 서글픔을 잘 알지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귀한 것이라고 돌아가신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악한 사
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목숨 귀한 것은 매 한가지라고요. 항상 도와줄 수 있을 때도
와주라고 배웠답니다.”
말을 하는 환야의 말에 은근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제가 험한 꼴을 당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사람을 의심하는 못된버릇이
생겼나 봅니다. 죄송스럽기도 하고 두 분께 무슨 말씀으로 감사의 말을 들여야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감사는 무슨. 외로운 사람끼리 돕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너무이
러면 오히려 저희가 부담스러워 집니다. 안 그렇습니까?”
“호호, 그래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시는 게 좋겠어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소문은 두 사람의 호의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문이 의식을 차린 지 열흘이 지나고 소문은 인술원에서 나와회하촌
의 북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청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선 중했던 소문의 상처도 제법 많이 아물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인
술원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소문이 그곳에서 나오고 싶어했기 때
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거처를 옳긴 다는 것이 지니고 있는 돈도 없고
중한 부상마저 당한 소문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지만 의
형제를 맺은 환야가 기꺼이 동의 했기에 성사된 일이었다.
소문이 의식을 차린 이후 환야와 청하는 소문의 곁에서 잠시도떨어지
지 않았다. 무슨 놈의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환야와 청하는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는데 그리고도 힘이 남아 주체를못하
니 두 사람 속에서 번거로운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 소문만 죽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등살에 못 이겨 소문도 가끔 몇 마디 말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형조문, 곽검명, 단견이 맺은 삼광결의에 대해서 말을
했다가 의형제를 맺자고 주장하는 환야의 끈질긴 고집과 반 강제적인
회유(懷柔)와 협박에 못 이겨 얼떨결에 형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환야가 소문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소문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형
님으로 모셔야 했다. 환야는 청하에게도 의남매의 연을 맺자고 했지만
그녀는 그 제안을 고마워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청을 끝까지
거절했다. 다만 그녀의 나이가 소문보다도 어리기에 이들과 단순한
오라버니와 동생의 관계처럼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비록 서로를 알게 된 시일이 오래 되진 않았지만 객지에 홀로 나와외
롭게 생활하고 있던 이들인지라 어느새 금방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워
졌다. 특히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한 청하는 비록 남매의 연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진배없는 관계를 맺은 두 명의 오라비가 생겨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문이 인술원을 떠나고자 했
으니 환야가 쾌히 허락을 하고 청하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인술원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소문이 청하의 집에 들어오자 청하와환
야는 몸이 불편한 소문을 위해 항상 신경을 쓰고 챙겨주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환야에 비해 집안 살림을 맡고 있
는 청하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매일같이 약을 달이고 식사 때가
되면 양팔을 쓰지 못하는 소문을 위해 직접 먹여주고, 혹시 상처가 덧
날까봐 항상 깨끗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내색은 안했지만 청하를 당황시키고 덩달아 소문을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배설(排泄)문제였다. 배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몸안에
쌓인 노폐물(老廢物)을 밖으로 버리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옷도벗어
야 했고 뒤처리도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손가락 끝이 간간히
꿈틀거리는 정도에 불과한 소문 혼자서 그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
다. 인술원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위해 따로 그런 궂
은일을 하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문도 그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이 없는 이곳에서는 결국 환야나 청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없었다.
그런데 당연히 남자인 환야가 해야 할 일을 어찌된 일인지 청하가 하
고 있었다. 이유인즉 환야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소문이 그를 필요로 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결국 참다못한 소문이 바지를 버려 두 번의
망신을 당하느니 아예 창피함을 무릅쓰고 청하를 부른 것이다. 소문
의 우려와 달리 청하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
문을 도와주었다. 마을에 다녀와 이 말을 들은 환야가 박장대소하며
자신은 못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결국 자연스레 이 일마저 청
하의 담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
던 소문도 며칠이 지나고 이미 볼 것 안 볼 것을 다 보여준 상태라 부
끄러웠던 감정도 점점 무덤덤하게 변하게 되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답답하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터벅터벅 발자국하난 나지 않은 강변의 모래사장에 생채기를 내며 걷
고 있는 소문은 우울하기가 그지없었다. 의식을 회복한지 벌써 보름
여가 지나고 자신을 괴롭혔던 대부분의 상처 중 당소희가 던진 검에
관통당한 등을 제외하고는 이미 대부분의 상처가 치유된 상황이었다.
등에 입은 상처는 그 상세가 워낙 지독해 지금도 꾸준히 상처를 돌보
는 중이었다. 지난날 혈영일호에게도 가슴을 찔린 적이 있었지만 정
상적인 몸에서 입은 상처와 최악의 조건에서 입은 상처는 그 회복력에
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문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당소희가 던진 검이
그녀가 의도한 만큼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지 못
했다고 말하기도 뭐한 일이었다. 철면피의 유해(遺骸)를 수습한옷가지
를 등에 매고 탈출을 한 소문에게 당소희가 던진 검은 소문의 등을 꿰
뚫기 전에 그 옷가지에 먼저 적중을 하고 소문의 등에 박혀버렸다.
충격이 일차적으로 철면피의 유해에 흡수되고 검날 또한 애초에 향하
던 방향에서 약간 틀어져버렸다. 결국 살아서 소문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철면피가 죽어서도 소문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는데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소문은 그저 자신의 운이 좋은 것으로 여길 뿐이었고 그
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소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
은 온몸에 입은 상처도, 그 상처들로 흉측하게 만들어진 흉터들도
아니었 다.
양팔! 의원의 말대로라면 이제 막 뼈가 붙기 시작한 양팔이 소문에게
있어선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근육을 지탱해주는 뼈에 이상이 있어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리는 팔을
보호하고 뼈가 빨리 붙도록 하기 위해 소문은 처음 의식을 차린 날로
부터 지금까지 양팔의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부목(副木)을 대고있었다
. 처음에는 자신의 괴상한 모습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비참한 마음
이 들기도 했지만 이러지 않고는 움직일 때마다 양팔이 심하게 흔들
려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고,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러진 뼈
도 더디 회복된다기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의원의 말대로 부목
을 대어 흔들리는 팔을 고정시켰다.
생긴 것과는 달리 주병진은 상당히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원이었다.
전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양팔의 회복이 점점 그 가능성을 내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는 아무런 고통도감각
도 느껴지지 않던 팔에 반응이 온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비록 약
간이지만 손가락 끝이 움직인 것이었다. 의원의 말로는 다행이도 신경
이 죽지는 않았기 때문에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론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뼈가 굳어가는 것은 느껴지는데 아직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쥐지는 못했다. 그래도 처음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해 많은 발전을 한 것이었다.
‘후~ 여전히 안 되는군. 하지만 가능성은 남아 있으니….’
또 한번 힘을 주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여전히 별다른 힘이 실
리지 않은 것에 실망한 소문이 크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자네 여기 있었군. 한참을 찾았네.”
고개를 돌리자 환야가 서 있었다.
“제가 어디 가겠습니까? 이 몸을 해 가지고.”
“쯧쯧, 또 그러는구만.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 내가 자네를 위해 잉어
몇 마리를 구해오지 않았겠나. 지금쯤 푹 고아 졌을 것이네.”
환야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 소문의 등을 밀치며 집안으로데리
고 갔다. 뒤뚱거리며 집으로 들어서는 소문과 그런 모습을 보며 소문
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웃으며 뒤따라오는 환야를 반긴 것은 절
로 군침이 도는 향기로운 음식(飮食) 내음이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막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하하! 지금쯤이면 될 것 같아서 소문이를 불러왔지. 뭐 하는가청하가
자네를 주려고 정성을 다해 만들었네.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어서 앉게.”
환야는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 탁자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
문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좋겠어. 나도 누가 먹여주는 사람 없나!”
“흥, 부럽기도 하겠소. 정 부러우면 나처럼 당해보시구려.”
의자에 앉자마자 다가와 소문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청하를 보며 환야
가 능글맞게 중얼거리자 짐짓 화가 난듯 소문이 소리를 질렀다.
“뭐 다칠 것까지야 있나. 그저 마음씨 착한 마누라 한명만 구하면되
는 것이지.”
“그런 짓이나 하려고 시집오는 정신 나간 여자가 있을 것 같소?”
소문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을 하자 막 입안의 음식을 삼킨 환야가
반주(飯酒)로 놓인 죽엽청 한잔을 마시곤 말을 했다.
“호,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네. 나한테 정신을 홀딱 뺏긴사람이라면
까짓 음식 먹여주는 것이 문제이겠는가? 뱃속에 있는 쓸개라도 빼 줄
걸!”
“으이구! 자랑이외다. 그래 결국 부인을 얻어 쓸개나 빼먹으려고그러
시오!”
소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환야
는 돌연 청하에게 말을 걸었다.
“청하야 안 그러냐? 사랑한다는데 그깟 쓸개 따위야 우스운 것이지.
응?”
“호호호, 쓸개까지는 줄 순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바란다면 그깟
음식을 먹여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겠지요.”
“그것 보게나. 사랑 앞에서 못해줄 것이 무엇이랴!”
청하가 자신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자 기가 살은 환야가 목소리를높
였다.
“휴, 여기서 조문 형님같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알았소.내가
두고 보리다. 과연 그리 되는지… 행여나 반대가 되지나 마시구려.”
“하하, 염려 말게. 솔직히 내가 얼굴 하나는 자신 있는 사람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시게나.”
“호호, 잡담들은 그만 하시고 어서 드세요. 음식이 식겠어요.”
결국 청하가 나서 이들의 말싸움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데 몸은 어떤가? 전보다 나아지는 기미라도 보이는가?”
조금 전의 장난스러웠던 모습과 다르게 환야의 말투가 조심스레 변해
있었다.
“아직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조금씩 손가락이 움직인다는것이
지요.”
“그거라도 어디인가? 조금씩이라도 계속 움직이도록 노력하게. 어차피
팔이야 뼈가 붙고 부목을 제거해 보아야 알겠지만 이렇게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듯
싶으네.”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엔 아무런 감각도 없다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점차 나아질 거예요.”
“걱정은 안합니다. 전 반드시 회복할 것입니다. 아니 회복할 수밖에없
지요. 그리 될 것입니다. 하하! 괜한 얘기들 하지 마시고 음식이나 먹
지요.”
힘을 주어 말하던 소문이 웃으며 청하에게 음식을 청했다. 말을 하는
소문의 눈에서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한광이 뿜어져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청하는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환야는 그렇지 못했다.
‘후~ 무서운 눈빛이야….’
담담한 얼굴의 소문과는 달리 지켜보는 환야와 청하는 연신 침을 삼
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은지 한달, 드디어 오늘
소문의 양팔을 고정시키고 있는 부목을 제거하게 되었다.
슥슥!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팔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 환야가
어찌 변할지 감히 장담을 하지 못하는 주병진이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두껍게 감겼던 붕대
의 두께가 점점 얇아져만 갔다.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소
문의 눈썹이 떨리고 일순 허전한 느낌 속에 뼈마디만 앙상한 두 팔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음!”
보기에도 안쓰러운 팔의 모습에 절로 신음성을 내뱉은 환야와 청하와
는 달리 소문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내심마저 그런것은
아니었다.
‘이게, 내 팔이란 말인가! 크크크, 고목(枯木)나무의 나뭇가지처럼볼품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 내 팔이란 말이지….’
“어떤가요? 의원님. 제가 보기엔 어찌….”
청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부목과 붕대를 제거한 소문의 팔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주병진에게 물었다. 청하의 질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렇게 살펴보기를 잠시, 고개를 돌린 주병진의 입가엔 만족한듯
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하하! 예상외로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부러진 뼈도 제대로 붙은것
같고 살갗을 뚫고 뒤틀린 뼈도 또한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약간의 문
제는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말씀을 그리 하시니 기쁘기는 하지만 팔이 저렇게볼품
없어 보이는데….”
“당연하지요. 원래 오랫동안 저리 붕대를 감아놓으면 그 부위는저렇
게 마르고 볼품 없어집니다. 비록 겉모양은 저래도 상태가 아주 좋
습니다. 뒤엉켰던 경맥들도 제법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이 상태라
면 시간만 지나면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주병진은 확신에 찬 어투로 자신 있게 말을 했다.
“잘됐네. 얼마나 다행인가!”
“축하드려요. 소문 오라버니!”
하지만 환야와 청하의 이런 반응과는 달리 소문은 안색은 별다른변화
가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군요. 아직 주먹도 쥐지 못하고… 그리고움
직이는데 이상이 없다는 것은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 그것이….”
자신감이 넘치던 주병진은 소문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
다. 그러자 소문이 재차 물었다.
“확실하게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것이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지금
제 팔이 어느 정도까지 치료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굳은 안색을 한 주병진이 환야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더니천천
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팔로는무공
을 사용하기 힘듭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움직이고 쓸 수는
있지만 무공이란 정상인이 사용하는 능력을 넘는 힘을 쓰는 것입니다.
부러졌던 뼈야 더 단단해지니 문제가 아니지만 뒤엉켜 있던 경맥들
이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만 매우 불안한 상태입니다. 언제 다시 뒤틀
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짧은 생각이지만 무공을 사용해선 팔이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은 팔보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가 되다보니
손의 근육과 세맥 등이 아예 굳은 모양입니다. 지금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
“그럼, 주먹도 쥘 수 없다는 말입니까?”
질문을 하는 환야의 말에 힘이 실리자 주병진의 안색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
“그, 그것이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환자가 얼마나 노력을 하느냐에따
라서 그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람을 고치는
의원이라지만 더 이상 무엇을 해 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부터는 오로지 환자의 의지와 인내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환자의 노력
만이 굳어져 있던 근육들을 일깨우고 뒤틀린 경맥을 바로잡을 수 있습
니다. 다만 그런 환자의 노력에 약간이나마 효력을 더 하도록 탕약
은 지어드릴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환자의 노
력 여하에 한달이 지나지 않아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있고, 일
년, 이년이 지나도 움직이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복이 잘 되더라도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좀….”
이제부턴 회복여부가 모두 환자에게 달렸고, 그럼에도 무공을 사용하
기는 힘들다는 주병진의 설명이 끝나자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환야는 안색을 찌푸리고 있었고, 청하는 걱정이 가득한눈으로
소문을 바라보았다. 주병진은 연신 환야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소문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의 노력에 달렸단 말이지. 나의 노력에… 해주지! 해주고말고.이까
짓 노력도 하지 않아서야 어찌 복수를 꿈꿀 수 있단 말인가! 기쁜 마
음으로 고통을 받아들이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의원님께서 소생을 위해서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뭐, 은혜랄 것까지야.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할따름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난생처음 접하는 이상한 느낌을 주는
팔을 조금씩 움직이며 소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십시다. 이제 모든 것이 저에게 달려 있다하니 당장 오늘부터라도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아, 알았네. 거참. 급하기는.”
내심 소문의 반응을 걱정하던 환야는 의외로 소문의 안색이 밝자 자신
또한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너무 서두르다가는 될 것도 안 되고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다시는 소문을, 아니 환야를 보기 싫은 마음과 그런 중한상처
를 딛고 일어난 소문에게 약간은 경의를 표하며 주병진이 염려의 당
부를 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환야와 청하는 종종걸음으로 인술원을
나섰다. 그 앞에는 아직도 어색하긴 하지만 힘차게 걸어가고 있는 소
문의 모습이 보였다.
첫댓글 감사해요~~~~^~
잼납니다ㅣ
즐감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ㅎㅎㅎ
즐감 ~!
즐감
시작
진인사 재천명
ㅈㄷㄱ~~~~~~```````````````
ㅈㄷㄳ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감
좋아좋아
즐독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