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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8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이사 65,17-21
복 음 : 요한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이 오랜만에 애인과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서로 회사 일이 바빠서 공동의 취미활동인 영화관람을 오랫동안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가 상영한다고 해서,
회사 일을 모두 마치고 밤에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10시까지만 극장 이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것인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간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여자친구가 공원에 산책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둘은 함께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람이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으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방향을 찾는 것이
본인들에게 더 유익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가 진짜 중요하다.”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과 이적을 봐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표징과 이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거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수님 말씀이었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왕실 관리는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화가 났을까요?
왕실 관리인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꿉니다.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였기에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었기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고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늘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춥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 버리고만 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 주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카나에 가셨을 때,
카파르나움의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한다.
카파르나움은 카나에서 80리 정도 되는 먼 거리였다.
예수님은 애원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고관은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종들을 만났다.
아들이 완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이 고관의 자세를 살펴보자.
우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고관이 일개 목수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8절) 하시면서 왕실 관리를 가르치신다.
사실 그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9절) 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예수님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적들은
무엇보다 영혼을 위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해 주신다.
우리가 당신의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때문에 당신께 귀 기울이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는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50절)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야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이 관리를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관리에게 “가거라.”는 말씀으로 왕실 관리의 믿음을 알아주셨고,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과 권위로 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고 계시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50절)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그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리는 대신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각부터 물어보았다.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아이가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와 온 가족들이 믿게 되었다.”(53절) 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왕실 관리에게는 뜻밖의 믿음이 생겼고, 아이는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지난날을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혜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에 모시고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집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95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매님의 집입니다.
95세의 연세가 무색하리만큼 어머니는 정정하였고, 순수하였습니다.
손에는 작은 십자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황해도 해주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성당에서 종을 쳤고, 신부님을 도와 드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수산나, 아버지는 요한이었다고 합니다.
제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해서 ‘신문사’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잘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에 사제는 모두 성당에서 오는 것이었나 봅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성당’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사제인 저를 본 것이 더 반갑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예수님을 만났던 ‘한나’라는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한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기뻐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연세가 많아서 외출은 못하지만, 매일 기도하던 95세의 어머니에게 사제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집 축성을 마치면서 사제로서 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길을 성찰하였습니다.
95세 어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내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왕실 관리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군가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누군가에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재해석하였고, 편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꼬, 루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삶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셨고,
표징을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셨고,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였습니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토마스아퀴나스, 칼라너, 한스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베네딕토, 프란치스코, 대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영성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성당에 팔이 부서진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의 팔이 되어주십시오.”
군인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묵상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상선 바오로 신부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요한 4,46)
왕실 관리 한 사람이 갈릴래아 카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와 앓고 있는 아들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으면서 표징과 이적 따위나 요구하는 이들에게 많이 지치셨는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요한 4,48) 족속들이잖아."라고 동문서답을 던지십니다.
예수님과 왕실 관리, 두 사람의 관심사와 바람이 엇갈립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관심이 있으신데 반해,
그는 앓는 아이의 아버지로서 온 정신이 아들에게 쏠려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요한 4,19)
이 말씀에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아주 간결한 접속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동문서답이 어쩌면 완곡한 거절일 수도 있었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간청을 이어갑니다.
"그래도~"라는 말씀에는 아들의 회복을 위한 간절함과,
지금은 저렇게 말씀하셔도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이
자기도 모르게 이미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의 싹에서 풍기는 미세한 향기를 감지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
아버지 안에 돋아난 믿음의 싹을 믿어주신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그가 바라마지 않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제 두 사람의 관심사와 바람은 하나가 됩니다.
그는 아들을 치유해 주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싹이
언젠가 큰 나무가 되리라 믿어주십니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0.53)
예수님의 믿음 역시 응답을 받습니다.
이처럼 그는 예수님의 믿음에 실망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벗님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체험한 적이 있나요?
절박한 간청이 단박에 거절당한 순간에,
그래도~ ... 믿고 기다렸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처절히 버림받고,
그래도~ ... 벼랑 끝으로 끝으로 몰리면서도 믿고 버티었는데
겨우 딛고 선 나머지 발마저 떼라고 하실 때,
그래도~ ... 믿고 바랐던 바가 다 무너져 더 청할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순간에, 그래도~ ...
믿음은 머릿속에 고이 모셔둔 개념이나, 책상 위에서 침 튀기며 증명하는 논리를 넘어섭니다.
믿음은 생각과 마음과 영혼이 몸과 함께 반응하고 견지하는 의지적 실제이고 그 표현이기에
목숨을 바치는 순교까지도 가능한 겁니다.
이 "그래도~"의 믿음을 먼저 발휘하고 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인류와 함께하시면서 "그래도~"를 얼마나 수없이 되뇌이셨겠습니까!
지금도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실수와 죄악에 여전히 "그래도~"를 반복하며
새 길을 찾아주려 살피고 계실 겁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하느님의 무수한 "그래도~"가 이렇게 새 창조의 장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인인 너희가 싹 바뀌면,
잘못된 걸 다 뒤집으면, 죄악의 결과를 다 되돌리면
그때 이루어 주시겠다고 미뤄두는 조건부 계획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선 믿고 보시는,
번번이 배신당해도 또 믿어주시는 하느님의 "그래도~" 덕분에 아직 죄인인 채,
부정하고 불결한 채, 불순하고 탐욕스러운 채로 맞이하게 되는 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4월이 시작되고 사순 제 4주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시작 때의 기개와 포부가 점점 쪼그라들어 가고 초라해지는 중인가요?
괜찮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실패의 순간마다 "그래도~" 하시며
인자한 시선으로 우리 등을 두드려 주시는 하느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굳은 믿음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를,
시편 작가의 입을 빌어 고백합니다.
"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입당송) 아멘.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이 "그래도~"를 되뇌이며,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믿어주시는지,
또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체험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래도~~~~"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은 부활 신앙의 창조적 국면에 대해 묵상한 바를 강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카나 마을에서 헤로데 왕실의 관리를 만나셨는데,
그의 아들이 거기서 제법 떨어진 카파르나움에서
죽을 병을 앓고 있으니 가서 살려주십사 하는 청원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헤로데는 에사우의 후손인 에돔족의 후예로서 이두메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에 그 권력을 여러형제들과 함께 나누어 받아
갈릴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로마 제국의 위임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위하는 대신 그 반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에 불과했습니다. 악정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바른 소리로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것도 그 헤로데 영주였으므로,
그의 관리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께는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것도 말씀 한마디로 그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까지 가실 것도 없이 원격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바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소생 기적이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살려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라든가(루카 8,55),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친구 라자로를 살려내신 일이(요한 11,43)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생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깨우쳐야 할 것은
소생은 부활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생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지만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육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거듭 태어나는 일이고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소생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당신이 지닌 신적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소생 기적 사건 중에서 라자로의 소생 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별히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그의 누이들이 죽기 전에 일찌감치 전해왔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미적거리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가서 살리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그 장소 또한 베타니아로서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다면 그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에게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군대가 계엄령을 내려서
학살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눈치챈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는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한 각오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일으키시는 라자로 소생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부활 신앙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일깨우고자 교회의 전례에서도
창조에 관한 이사야 예언을 독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소생은 육신에 붙어 있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활은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다 함께 생기를 되찾는 것이고
이 기운은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로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에 해당됩니다.
창조의 국면을 생각해 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우리의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을 해야 살아있는 영혼이 됩니다.
종교의 본령입니다.
개인이든 겨레든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야 제대로 된 종교입니다.
미신적인 종교는 악령이나 귀신과 소통하게 해서 영적 질서를 더 어지럽힙니다.
둘째, 영혼의 생기가 정신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화의 영역입니다.
개인의 마음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민족의 문화도 자기만 평안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어야
보편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전에 유행했던 강대국의 문화
즉 로마나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이나 일본 등의 문화와
최근의 한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셋째, 정신과 마음이 몸도 움직입니다.
경제의 자리입니다. 흔히 민생경제라 말합니다.
정치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고르게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소생 사건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예비시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다 마치시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부활을 위한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입니다.
머지않아 곧 예수 부활 대축일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우리 겨레에게 부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