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7월말 나는 대사로 봉직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몇주간의 정착기간이 지난 8월12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식으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약 한 달 뒤 나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86년 작고)씨로부터 저녁초대를 받았다.
만찬은 서울도심 인사동에 있는 「동원」이라는 한정식집에서 열렸다. 인사동은 미술품, 서예작품 등으로 한국의 전통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오래되고 유명한 식당인 동원은 여러 세대동안 내려왔다. 그것은 전통적인 「기생집」이었다. 만찬은 추석 전날인 9월11일로 잡혀 있었다.
내 몇몇 참모진은 이 만찬이 합당한 것인지, 그리고 미 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자마자 기생집에 가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나는 김씨와 매우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왔다. 그는 건축가들의 모임인 「스페이스 그룹」(Space Group)을 만들었고 매우 흥미로운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한국건축에 대해 설명했고 또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그 화랑은 검은색으로 장식돼 있었는데 방문객들은 커다란 강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둠과 공간관계의 조화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매혹적인 곳이었다. 김씨는 확실히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들 모두 그를 존경했다. 공간은 가로 세로 20×30평방피트(55.7㎡)정도였는데 모든 사람은 훨씬 더 큰 것처럼 느꼈다.
김수근씨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그는 서울의 호텔 신라에서 멀지않은 타워호텔 옆에 아직도 서있는 「자유센터」(Freedom Center)의 디자인공모에서 다른 경쟁 건축가를 제치고 이를 따냈다. 나는 김수근씨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결코 부적절한 목적을 위해 나를 초대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내 참모진에게 확신시켰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7시30분 음식점의 현관에서 그와 만났다.
김씨는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한 데 대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몇몇 친구를 나에게 소개시키고자 했다. 그는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씨를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전대통령을 청와대에까지 이끈 쿠데타에서 그를 도운 육군대령들이었다.
그들은 풍채가 좋았고 분명했으며, 흥미로운 사람들이었다. 허화평씨는 김대중씨의 사형형량을 감형하는 대신 전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의 첫 국빈방문객이 되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내 친구 리처드 앨런씨와 같이 일을 했다.
당시 이같은 거래는 한반도에서의 더 이상의 폭력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허화평씨는 후에 스탠퍼드 대학에 갔고 워싱턴에 있는 헤리티지 재단의 객원연구원이 됐다. 허삼수씨는 인상이 좋고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려깊고 조심성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청와대의 세번째 측근인사는 몇 년 후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허문도(許文道)씨였다. 대사관의 미국 참모진과 「Foreign Service Nationals」(FSNs;외국공관에 근무하는 한국요원)들은 전대통령의 「이너서클」에서 권력을 장악한 이 세 사람이 모두 같은 「허」씨라는 사실에 재미있어 했다.
당시 그들은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허, 허, 허』하면서 흉내내고 웃기도 했다. 세 허씨에 대한 소문과 평판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 모임은 흥미로운 자리였고 나는 중요한 이 세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청와대와 중요한 상호관계를 맺어야 하는 신임 대사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기회가 된 것은 분명했다.
미국사람들은 종종 기생파티의 풍습에 대해 오해한다. 전통적인 시대에는 여성에게 많은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집안에 있어야 했다고 한국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줬다. 아름다운 여성들은 기생으로 뽑혀 시와 문학에대한 특별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접대하는 방법, 농담과 익살을 나누는 법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한국 예술세계에 대해 많이 친숙해 있었으며 사회의 여러 소문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과거 이 여성들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시작했으나 30세가 되면 결혼하거나 혹은 떠나야 했다. 왜냐하면 한국남성들은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후대에까지 보호자들이 매우 엄격하게 그들을 동반하고 다녔다.
그 여성들의 임무는 음식점에서 남자손님옆에 앉아 시중들면서 전통주나 다른 술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지 그래서 손님이 가장 좋은 한국음식을 잘 먹고 있는 지 책임지는 일을 했다. 또 함께 춤추고 노래하기도 했다. 기생집에서 모든 사람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으로 돼있다. 우리는 금방 한국사람들은 외국인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81년에 이르러 많은 기생파티에서 한국의 전통주는 매우 값비싼 스카치 위스키로 대체됐다. 위스키는 손에 넣기가 매우 어려웠던, 그래서 영향력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물론 건축가로서 대성한 김수근씨는 우리가 축배를 들 때 기생들에게 위스키를 잔에 가득 따르도록 했다.
운좋게도 나는 과거에 기생집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나를 시중들도록 돼 있던 매우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설득해 가능하다면 항상 내 조그만 잔에 위스키 대신 차를 따르도록 했다. 축배가 자주 돌아갈 수록 이는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
매우 훌륭한 한국 전통 음식과 유쾌한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나혼자 힘으로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허화평씨와 허삼수씨는 아마도 불같은 술을 엄청나게 마셨을 터였다.
이 일화는 내가 들어왔고 내 대사관 참모진이 내게 경고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경우가 됐다. 그들은 나에게 미 대사에게는 사생활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 줬다. 내 전임자 중 한사람인 윌리엄 포터 대사는 자주 이에 대해 불만을 말했다. 가끔 빌(윌리엄의 애칭)은 막 어디론가 떠나기를 원했다. 그는 조그마한 컨버터블차를 몰고 서울 교외로 나가 전통스타일의 여관에서 묵곤 했다. 문제는 그가 가는 곳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보안요원들에게 그것은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다. 나는 미리 내가 언제, 어디로 여행할 것인가에 대해 그들이 알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은 미 대사가 혼자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행히 빌 포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사관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인의 이같은 희망을 존중했다.
내 참모진은 내가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아무런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미 대사와 서울의 전도양양한 많은 미국인들은 유리 어항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었으며 나는 전혀 비밀을 가질 수 없었다. 후에 때때로 나는 존경하는 나의 아내 세니와 내가 정말로 그들에게 농담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지 못해 한국사람들이 입방아에 올릴 많은 사건을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동원에서의 만찬이 있은 지 3일 뒤인 9월14일 나는 노신영(盧信永) 외무장관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딕시, 축하합니다. 나는 당신이 금요일밤 청와대의 두 실세를 「녹초」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미 대사 사회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서울 장안에 얼마나 빨리 퍼지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여러면에서 서울은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소문으로 꽉찬 조그만 마을이었다. 내가 있는 동안은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있었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유리 어항, 정말 황금 유리 어항 속의 삶이었다.
후에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더욱 잦아지면서 한국에서의 고위급 미국 대표에 대한 안보에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마이크 맨스필드 일본주재 미 대사가 일본 보안간부에게 관용차에 「무장경호」를 취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국군 보안간부는 한국의 미 대사도 차에 동석하는 보안요원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아내와 나에게는 정말 예의바르고 헌신적인 한국의 박병장이 배속됐다. 30년 이상 미 대사관에서 일해온 우리 운전자는 박병장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무엇이든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줬다. 나는 그에게 민감한 문제는 절대로 얘기하지 말자고 주지시켰다. 박병장(후에 중위로 진급함)이 1년 이상 우리와 함께 한 후 운전자 김씨는 우리가 박중위에 대해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우리는 정말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얘기를 했고, 김씨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정다운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한국에서 우리가 근무하는 동안 느꼈던 가치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동원에서의 그 유쾌했던 저녁시간은 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왜냐하면 임기초기 나는 한국의 다양한 사람들, 그룹, 정파들이 미 대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내릴 기회를 찾고 있으며 미 대사 또한 그들 혹은 그들의 스타일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전정권에 의해 꽤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정파의 지도자들은 미 대사와 교제하려고 하곤 했다. 동맹국 미국의 지도급 주재국 대표자가 다양한 현안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경청하도록 하려는 희망에서였다. 나는 어떠한 부주의한 언급도 하지 않도록, 혹은 그 사회에 전달될 지도 모를 의견을 표출하지 않도록 극도의 조심을 해야만 했다.
반면 정치분야의 지도자들을 평가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역 방위 학술교류 심지어 대사관이 해결할 수 없었던 비자문제와 같은 주요 현안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운좋게도 미 대사관은 한국에서 대사의 임기 이상 근무한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침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좋은 지침은 대부분이 20년 이상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국사람들인 FSNs에서 나왔다. 나는 이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들이고, 또 그들의 입장때문에 생기는 몇가지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들을 금방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한국 시민들이었고, 자신들의 모국에 충성심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외국법인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전 세계 외교가에서 FSNs는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사소하든 심각하든, 양국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몇몇 현안을 해결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 임기동안 이같은 민감하고 현명한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안고 있던 모순을 극복하면서, 항상 변화하는 양국관계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나는 박인훈씨의 현명함과 그가 지역사회에 갖고 있던 대화통로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는 우리 대사관 정치분과의 선임 FSN이었다. 그는 다뤄져야 할 민감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가끔 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조치를 취해야 할 문화간 오해가 생길 경우 조언을 얻기 위해 그를 자주 찾았다.
때때로 FSNs는 특별한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지극히 나빠졌을 때, 동료 한국인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국제관계와 문제 해결을 위한 필요한 감도(感度)를 순화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필수적인 존재인가를 진실로 깨닫게 됐다. 모든 미국 참모진은 그들의 존재와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번역=황유석 기자>
환갑… 82년, 새로운 삶의 시작
한복입고 치른 '60번째 생일파티'/한국친구들 손수나서 모임준비등 '소중한 순간' 축하/미국있는 세자녀·손자들도 참석 전통 큰절 받기도/이웃·가족들과의 관계 중시 '따뜻한 한국문화' 새삼느껴
중국, 일본, 한국에서의 초창기 경험을 통해 나는 유교적 관습과 그 가치의 굳건한 뿌리에 대해 알게 됐다. 내 60번째 생일(환갑)을 축하할때, 나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수 있었다. 시간을 나타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방법에서는 이것은 「60년 주기」의 새 시작을 의미했다.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60년 주기는 B.C. 2697년 황제(黃帝)에 의해 시작됐다. 「식」(蝕)에 의해 결정되는 이 주기를 정확히 지적해낸 사실상의 첫 시기는 B.C. 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문명에 큰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60주기는 그후 계속 이어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물에 새겨진 날짜를 고고학자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복원해 낼수 있었다. 중국 문화의 출현에 영향받은 고대 한국문물이 이를 뒤따른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한 주기의 시작인 환갑은 상서로운 일이었다. 낙관적으로 보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고, 유교적 전통에 따라 젊은이들이 연장자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 이정표를 통과한 한국의 신사(紳士)들은 옛날에는 하얀색으로 된, 눈에 띄는 의복을 입었다. 오늘날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무료로 탈수 있고, 젊은이들로부터 전통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외 다른 특별한 권리도 갖고 있다.
60회 생일을 맞을 당시는 내가 대사로 부임해서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 의식은 몇몇 한국문화의 독특한 일면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따뜻한 감정을 더욱 강화시켜 줬다. 4월13일 하루내내 나는 한국에서는 의식, 가족, 전통, 유대감, 그리고 특별한 의식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을수 있었다. 한국친구들은 이 기억에 남을만한 행사 계획의 대부분을 떠맡았다.
우선, 노신영(盧信永) 외무장관과 그 부인은 우리 부부가 당일 및 그들 부부가 예약해 놓은 다음날 행사에 진짜 전통 한국의복을 입도록 했다. 우리는 옷을 맞추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한국 재단사에게 갔다. 그 다음 이경희(李京姬;오수인(吳壽寅) 전 프라자호텔 사장 부인)씨와 마거릿 조(나은실(羅恩實)씨;조동하(趙東河)씨 부인)가 행사를 치를 테이블이 우리 대사관저에 적절하게 설치되는 지에 대한 일을 함께 했다. 관저는 많은 꽃다발에 둘러싸인채 과자상자와 과일그릇으로 넘쳐났다.
우리 세 자녀와 배우자 두명, 그리고 세 손자는 이 행사를 위해 미국에서 건너왔다. 마거릿 조와 함께 이경희씨는 의식이 시작될 때, 그들에게 의식의 주인공앞에서 절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또다른 친구 서니 류(안경선씨)와 한국의 대표적 여류시인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모윤숙(毛允淑)씨도 함께 있었다.
모윤숙씨는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시(詩) 한수를 지어줬다. 서니는 그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각 연(聯)을 암송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 시는 내 임무가 한국국민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이 특별한 날이 젊은이들에게는 기쁨과 웃음이 충만한, 꽃이 재탄생하는 봄에 자리하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노래했다.
그날 아침 적당한 시간에 한국친구들과 우리 가족, 사저(私邸) 관리인들은 대사관저 리셉션 룸에 모였다. 아내 세니와 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여러 포장꾸러미로 가득차 있는 의식용 테이블뒤에서 양반자세로 앉았다. 우리 자녀와 아내들은 나이많은 순서대로 한사람씩 우리앞에서 전형적인 한국스타일로 절을 했다.
다음 차례는 세 귀여운 손자였는데, 그들 또한 어린이 한복을 입고 있었다. 조동하씨와 우리 장남 조프리가 수많은 축하편지를 낭독했다. 이것들은 대사관저에 도착한 많은 메시지중에서 골라 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난뒤 우리는 참모진이 참석자 모두를 위해 준비한 비공식 오찬으로 흥을 돋웠다.
오후 1시가 지나 우리는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국립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로 돼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전에 내 아내와 내가 총장인 권이혁(權彛赫)씨 부부로부터 인사를 받기 위해 제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을 연락받았다. 엄청난 차량행렬속에 나머지 어린이들과 몇몇 한국친구들이 뒤따랐다. 심지어 우리는 한국경찰이 제공하는 모터 사이클 호위까지 받았다.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각각의 행사들의 특별한 성격에 대해 글을 써왔다.
학위수여를 위한 공식행사와 이에 대한 나의 짤막한 연설이 끝난뒤 서울대학교의 여러 학계 동료와 친구들간의 비공식 모임와 즐거운 토의가 뒤따랐다. 여기에는 이홍구(李洪九)씨 부부도 포함돼 있었다. 이박사는 한국의 예일대 동창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나처럼 박사학위를 예일대에서 받았다. 이 훌륭한 친구는 통일원장관이 됐고, 그후 영국대사,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98년 봄 그를 주미대사로 임명했을 때, 정말 기뻤다. 이홍구씨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한국사람이 고국에 돌아와서 한미 동맹관계를 얼마나 살아 숨쉬게 하고, 또 우리의 문화접촉을 생기있게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우리는 서울 프라자호텔 꼭대기 덕수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때맞춰 돌아와서는 옷을 갈아입으며 기분을 전환했다. 내 자녀들과 김승연(金昇淵;한화그룹 회장)씨가 초대장에서 손님들을 리셉션에 모신다고 언급한 것은 한국적 전통에서 보면 적절한 것이었다.
「영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부친에 대해 내가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비록 그가 파티를 열었지만, 호의상 우리 자녀들까지 주최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한국적 전통을 더욱 강화시켜 줬다.
나는 프라자호텔에서 있었던 그날밤 리셉션에 버금갈 만한 다른 행사를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친구나 동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존경의 뜻을 표할 때가 있다. 나는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한 이 행사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도 느꼈다.
덕수홀이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진 적은 아마 예전에는 없었을 것이었다. 한없이 다양한 얼음조각들이 있었는데, 여러 스타일의 음식과 좋은 조화를 이뤘다.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한국과 서양의 음율이 배경음악으로 잔잔이 깔렸다. 호텔 직원들은 김승연회장의 지시대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했다.
손님명부는 몇몇 대사관 동료와 내 아내와의 상의하에 작성됐다. 이는 내가 수년동안 한국인과 함께 쌓아온 우정의 깊이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내게 깨닫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여러해 동안의 내 임기중 그들이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 것이 증명됐다.
아내 세니와 나는 주최인인 「영 다이너마이트」와 그의 약혼녀(서영민(徐瑛民)씨), 우리 자녀들과 함께 리셥션장에서 손님들을 맞을 때 우리 삶이 한국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공유한 여러 경험에 의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에 대해 똑같이 실감할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의 어머니 케이 킴(강태영(姜泰泳)여사)도 거기에 있었다. 또 김상만(金相万) 동아일보 회장, 내가 일찍이 알고 지냈던 친구인 전 국방장관이자 주미대사였던 김정렬(金貞烈;「마이크」) 장군과 그의 아내도 참석했다.
전 언론인인 봉두완(奉斗玩)씨도 우리와 인사를 나눴고, 「화약그룹」 (Explosives Group;註 한화그룹을 지칭)의 핵심 참모인 오수인씨와 대사관저에서의 행사준비를 도와줬던 그의 아내도 이 일에 즐거움을 더해줬다. 나의 예일대학교 제자중 한 사람이었던 스티브 브래드너는 한국 여자농구계의 영웅인 박신자(朴信子)씨와 결혼했는데,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스티브는 40여년동안 연합사령부에서 기품있고 헌신적인 자세로 일해왔다.
특별히 한국의 두 숙녀분이 그룹에 초대됐다. 첫번째는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미 국무성 한국어 연구원」(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 일하고 있던 내 한국어 선생인 이경희(李璟姬)씨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외교가에서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또 다른 나의 제자 이경숙(李慶淑) 박사는 당시 국회 외무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녀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나와 함께 했고, 숙명여자대학교 총장까지 됐다. 나는 스승으로서 제자가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성취해가며 성공하는 것을 볼 때, 선생이 느낄수 있는 자부심으로 가득찼다. 특히 98년 봄 그녀가 4년 임기의 총장에 압도적으로 재선됐을 때 더욱 그랬다.
82년 4월13일 정말 훌륭히 고양됐던 그 모임은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일화로 자리잡았다. 양국의 문화적 전통이 아무리 상이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속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순간을 양국이 함께 할 때, 한국민과 미국민사이의 충심어린 우정이 얼마나 크게 성장할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였다.
주최인은 리셉션장에서 찍은 사진을 모은 예쁜 앨범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우리는 자주 그 앨범 책장을 넘기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비스러운 「선」(善)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곤 했다. 사실, 한국 주최인들은 우리에게 앨범을 선물해서 우리가 한국에 있을 당시 보물처럼 소중한 일화의 추억속에 잠길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는 한국에서의 여러 체험담이 진실로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나 자신에게 종종 상기시키기 위해 이 앨범들을 통한 감상적인 여행을 하곤 했다.
다음날 저녁 우리에게는 내 환갑을 위한 또 하나의 축하행怜?열렸다. 우리의 좋은 친구이자 외무장관인 노신영씨와 그 부인은 서울 「한국의 집」에서 똑같은 의식용 테이블을 차려놓고 한국식 만찬을 준비했다. 마찬가지로 존경의 뜻으로 치르는 절을 하는 순서가 있었고, 많은 축배와 훌륭한 한국음식도 뒤따랐다. 그 다음 그곳의 조그만 무대에서 전통음악과 춤사위가 벌어졌다.
연이은 이틀밤, 우리 가족이 관저에 돌아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우리는 정말 기억에 남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던 행사들을 되돌아봤다. 우리 자녀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친구들에게 감사하면서 한편으로 행사를 통해 우리 관계가 그들과 친밀히 연결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미국인들이 한국문화로부터 배울것은 많다는 것이었다.
여러면에서 공감한 그 행사는 우리 자신의 가족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됐다. 한국 국민은 우정을 넓힐줄 알았다. 그리고 그 우정은 공식적인 모임을 반드시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우 그같은 행사는 우아하고 인상적인 것이었다. 우리 친구들의 따뜻한 우정은 나의 환갑을 진정 내 인생에서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어 줬다.<워커 전 주한미대사/번역=황유석 기자>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
美 문화원장 여성임명 안된다?/부임준비중 소식듣고 "한국선 부적절" 한때 강한 반대/뒤늦게 판단잘못 깨닫고 한국의 女權신장·여성활약 감명/그러나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전통 훼손되지 않길 바라
여성의 변화하는 역할과 외교관 생활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첫 일화는 워싱턴에서 서울로의 부임을 준비하던 중에 일어났다. 찰스 윅 미 공보처장(해외에서는 미 공보원(USIS)으로 불린다)은 대구 광주 부산의 세 문화원장에 공보처의 세 여성을 임명했으며, 그들은 이미 언어교육을 마쳤고, 또 매우 전도유망한 간부들이라고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한국민들은 그런 책임있는 자리에 여성을 앉히는데 익숙지 않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문화원장은 아마 「키와니스」나 「로터리」같은 민간 사교단체에 가입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한국사람들은 그 여성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윅은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이를 바꿀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미국의 여성지도자들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았을 것이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또 한국민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나는 이것이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한번 두고 봅시다』라고 대답했다.
내 훌륭한 친구이자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보원 관리로 지낸 버나드 러빈은 서울에서 문화원일을 총 관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같은 당황스런 느낌을 전했다. 그는 나의 이같은 우려를 이해하면서도 정부의 충성스런 관료로서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 판단이 이렇게까지 틀린 것은 일찍이 없었다! 세 여성관료는 자신들의 임무에 정말 놀랄정도로 잘 적응해, 미국이 능동적인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세 문화원장은 매리 컬린, 모린 테일러, 그리고 프랜시스 설링거로, 「버니(버나드의 애칭)의 천사들」로 불렸다. 나는 여성의 변화하는 역할은 세계적 추세이며, 한국도 그 발전의 한 부분이라는데 익숙해졌다.
98년 봄, 나의 옛 제자이자 지금은 각별한 친구인 이경숙(李慶淑) 박사가 숙명여대 총장에 다시 임명됐다. 사람의 직업중 가르치는 일이 왜 가장 보람있는 일인가에 대한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재능있는 제자의 성공때문이라고 말할수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경숙 박사는 국회 외무위원회의 첫번째 여성위원이었고, 교수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한국에서 여성이 보다 공정하고 존중되는 대접을 받는데 많은 기여를 한 지도자였다.
2년전인 96년 5월4일 이 총장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그녀의 두번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때 그녀는 학위수여식 연설자였다. 그녀의 졸업연설이었던 「21세기 여성과 지도력…한국여성의 전망」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열정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변화하는 지위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여성들은 아직 정책결정의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세기동안 내려온 차별의 결과입니다. 차별의 상당부분은 전통적 유교가치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당이 여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데 매우 고무적으로 느꼈다.
나는 주의깊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이박사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것은 곧 내가 수년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내 생각이 여러 사건에서 사람들로 넘나들면서, 나는 국외자(局外者)로서 진행중인 혁명을 지켜봐왔다는 것을 의식할수 있었다.
97년 두어번의 방문중 나는 동료에게 길거리나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여성을 매우 많이 볼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번드르르한 컨버터블에 매우 세련된 모습을 한 젊은여성들도 몇몇 있었다. 60년대는 여성이 운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여성이 보여준 모험과 지도력의 결과물이다.
86년 7월1일 이화여대는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훌륭한 친구인 정의숙(鄭義淑) 총장이83년 10월 미얀마 랑군폭탄테러사건 직후 여의도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어떤 것보다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축하연설을 했다. 연설에서 그녀는 학교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며, 『하느님과 진실의 편에 남을 것』을 맹세했다.
그녀가 『인간해방』과 함께 하는 실용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녀가 뜻하는 바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화여대는 유구한 세월동안 한국여성의 기회를 증진시키는 최전선에 서왔다. 많은 학계지도자들처럼 그녀는 정부의 권위주의적 정책에 대해 안타까워했으나 국제화 자유 세계평화를 증진시킬 것을 맹세했다.
한국의 전통가치가 변화하는 세계가치와 충돌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그녀가 인식하고 있을때, 민주주의를 향한 그녀의 헌신적 노력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대학 경쟁학교의 이경숙씨가 이룩한 업적에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정의숙씨의 역할을 기억했다.
나는 다른 한사람의 경이로운 한국여성지도자를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그녀와 함께 많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가정법률상담소의 이태영(李兌榮) 소장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 정대철(鄭大哲)씨는 김대중(金大中)씨와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활동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다.
투옥된 김대중씨의 아내 이희호(李姬鎬)씨가 남편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대사관에 왔을 때, 그녀는 이희호씨와 함께 왔다. 그해 초 서울대학교에서 내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을때, 그녀는 미국에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하전문을 나에게 보내왔다.
『서울대학교와 제가 학부과정을 마친 드루(Drew)대학교의 동창생으로서 동료 동창생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84년 12월13일 대사관저 옆에 있는 정동감리교회에서 있은 그녀의 서품(敍品)식에 참석할수 있어 정말 기뻤다. 그녀는 84년 「감리교신자 세계평화상」(Methodist World Peace Award)을 수상했다.
그 행사에 대한 내 논평에서 나는 한국에서 처음이며 존경받는 여성의 한사람으로서 인권을 위해 그녀가 보여준 용기있는 지도력을 칭찬하고 지지했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대의(大義)를 향한 그녀의 조용하면서도 결의에 찬, 명민하면서 헌신적인 노력은 그녀가 한국이라는 국경을 넘어 광범위한 인지도를 얻을수 있게 했습니다… 이 상이 그녀가 지금까지 받은 박수갈채를 더욱 확장시킨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이 상이 인권주간중에 나온 것은 적절한 것입니다… 우리 미국민은 인간에의 관심을 지지하며, 이태영씨는 특히 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이태영씨의 노력은 또한 한미관계를 증진시키는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나의 이 말중 상당부분은 청와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사관의 언론·출판 담당자가 인권을 강조하는 나의 논평을 복사해 배포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의 언론들은아마도 언론지침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겠지만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또 김대중씨같은 민주투사를 위해 미국에서 싸우는 몇몇 한국인들이 내가 한국에서 인권을 위해 아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했다. 그날 정동감리교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강하게 언급해준데 대해 나에게 감사했다.
84년 12월 그날의 나의 언급은 또 이태영씨 노력의 또다른 면을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이 회고록의 한 소론(小論) 주제이다:
『미국민은 여성과 가난한 자의 권리를 위한 이태영씨의 헌신적 노력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대표되는, 급속히 발전하는 경제기적속에서 이 고무적인 여성은 수세기동안 일관되게 내려온 전통의 무게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대변해 왔습니다. 그녀의 다른 사회운동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이태영씨는 진실로 우리의 존경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부부가 일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태영씨가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의 부인이 한국을 방문해 이 변호사의 가정법률상담소를 두번 찾았다는 것도 확인할수 있었다. 내 아내도 순종하는 하인과 같은 유교적 여성관념과 관련된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전통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는 것을 꺼려했다.
지금까지 나의 회고록은 거의 예외없이 남성 지도자들에 대한 기억에 집중돼왔다. 한국정부와 주요 기업에서 내가 상대해야 했던 사람들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활동분야에서 놀랄만큼 뛰어난 여성 지도자들과 내가 접촉할 기회는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양한 한국여성 공연예술가들의 훌륭한 재능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60년대 나는 패티 김을 소개받았는데, 그때 그녀는 막 음악인생을 시작해 당시 남대문옆에 있던 「그랜드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녀의 가수인생을 지켜봤다. 대사로 있는 동안 우리는 자주 그녀와 자리를 함께 했다. 패티 김은 대중적 음악에다 열정과 고상함까지 갖췄다.
아내와 내가 오페라의 열렬한 애호가가 된 이후 우리는 기회있을 때마다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그곳은 정말 황홀한 콘서트 홀이어서 음향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잘 어울렸다. 82년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인 김영미(金英美)씨를 소개받아 알게 된 것은 그곳에서였다.
그녀는 2년전 파바로티 상을 받았다. 그녀는 대규모 미국 대표단의 방문이 있을 때 대사관저에서 노래를 불러주기로 했다. 아내는 이 일을 주선했다. 그러나 나한테 좋았던 것은 재능있는 멋진 음악가를 가까이에서 즐길수 있었다는 것 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한사람으로서 나의 위상을 높일수 있었다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위해 공연할 훌륭한 음악가를 데려올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김영미씨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들려주는 얘기를 즐겼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야기중 하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푸치니 오페라를 불렀을 때에 대한 것이었다. 뚱뚱한 체구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곤 했던 그 테너를 포옹하려고 할때 자신이 얼마나 작고 팔은 또 얼마나 짧은지 그녀는 몸짓을 써가며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는 대사관의 모든 한국인과 미국인은 폭소를 터뜨렸다.
제조업계에는 많은 여성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존경스런 마음으로 그들이 이룩한 업적을 지켜봤다. 채몽인(蔡夢印·70년 작고)씨가 타계했을 때, 그는 이미 성장일로에 있는 화학기업을 세웠다. 미망인 장영신(張英信)씨는 계속 사업을 수행했고, 애경그룹으로 발전시켰다. 이 그룹은 10개이상의 계열사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다. 그녀는 독학으로 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외에도 애경백화점을 설립했고, 중부컨트리 클럽을 만들었다. 세니와 나는 거기서 우리의 솜씨를 시험했다.
또 하나의 훌륭한 여성 기업가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그녀는 워커집안과도 매우 가깝고, 또 소중한 친구였는데, 오리엔탈 공업 사장 남궁욱강(南宮郁江)씨이다. 그녀는 직접 플라스틱과 기타 품목 제조업체의 선두업체로 회사를 탈바꿈시켰다. 남성들이 지휘하는 다른 회사와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녀가 당시 건축이 진행중이었던 올림픽 스타디움의 의자 공급권을 따냈을 때,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정치를 포함한 한국의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점점 적극적이고 동등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 상당부분은 현대화가 진행중인 다른 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었다.
첫째, 많은 여성들이 일터로 옮겨가면서 육아(育兒)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93년까지 한국인력의 40% 이상은 여성이었다. 이것은 가정과 가족생활의 불협화음을 의미했다. 둘째, 여성을 대변하는 활동이 많은 나이든 보수 유교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외국의 침투와 서구사상의 결과로 간주되는것을 나는 지켜봐왔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동안 다른 어떤나라보다 한국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내 임기가 거의 끝나갈때, 여성운동에 대한 이같은 관심이 반미(反美)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적 조직체를 만들고, 양국간 균형관계를 위한 주요한 토대로서 여성문제를 다룬다는 확고한 입장을 우리가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97년 5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열린 「가속화하는 한국의 변화」라는 주제의 회의에서 「한국사회에서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을 주요 안건으로 채택했다. 워싱턴에 있는 「환태평양 컨설팅」(Pacific Rim Consulting)의 캐티 오(Katy Oh) 박사는 「직장과 정치에서의 여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중 가장 열띤 학술토론을 불러일으켰다. 95년 12월 서울에서는 여성 정치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아시아·태평양 회의가 열렸다.
반면 한국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많은 토론주제들은 너무 복잡해서 부계(父系)사회로서 가정에서 여성에게 동등치 못한 요구를 하는 유교사회에서는 이를 해결할수 없었다. 캐티 오 박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한 여성이 전통적인 집안에 시집가면, 그녀는 일생동안 충성심을 요구하는 사회공동체의 한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바깥에서는 의사이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시댁의 하인이 된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훼손하는 것은 한국의 중요한 사회조직인 가정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다.
김대중씨는 오박사가 언급한 것처럼, 『여성인권의 가장 유망한 정치후원자』였다. 대통령 취임식후 그는 여성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주요 외교직책중 하나인 주 러시아 대사와 각료, 부(副)각료직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한국의 여성 단체들을 기쁘게 했다.
처음의 주제로 돌아와서 우리는 여성지위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한국내 많은 미국친구들은 그 변화가 한국민의 업적들가족간 유대, 규율과 예의, 이성(異性)간의 존중―에 튼튼한 기반을 제공했던 중요한 특징을 크게 훼손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은 가족전통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적이면서 헌신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어머니」로 대표되는 한국의 여성에 의해 고무된 것임은 물론이?<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아시안게임·올림픽과 재벌
재벌이 만들어낸 '스포츠 한국'/'청와대 명령 재벌 실천' 88올림픽 성공적 개최 밑거름/각 대기업들 개별종목 나눠맡아 재정지원등 큰 역할/외환위기로 비판받지만 '조직적 체계적 공헌' 긍정요소도
내 고향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주(州) 컬럼비아의 일간지는 5월초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는 「미스터 복싱」(Mr.Boxing)으로 알려진 크리스 히토풀로스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는 선수시절 각종 상을 휩쓸었고, 나중에는 미국의 올림픽 복싱팀의 맡아 지도한 것으로 소개됐다. 신문은 또 『그는 82년에 석달동안 한국에서 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을 대비한 한국대표팀을 정비하는 일을 맡았다』고 썼다.
신문은 그와 가까운 친구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크리스를 알아보았다. 애틀랜타 올림픽때 그는 게임을 지켜보느라 3주동안 경기장 플로어를 지켰다. 대회 초반의 어느날 우리는 누군가가 「코치!」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코치가 된, 당시 한국팀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권투선수중 한사람이었다』 히토풀로스의 사망 소식은 내 기억속에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에서의 경험들과 이어져 있는 운명적인 일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했다.
나는 크리스를 그다지 잘 알지 못했지만, 80년대초 조동하(趙東河)씨가 한국의 올림픽 복싱팀을 위해 「다이너마이트 김」대신 그를 채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강펀치를 갖고 있는 한국의 권투선수들을 지능적이고 효과적으로 점수를 딸 수 있도록 조련하는 데 성공했고 이때문에 한국팀은 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신준섭(申俊燮)은 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한국이 86년 9월 제10회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을 때, 나는 한국이 갖고 있는 경이롭고도 조직적인 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운좋게도 아내와 나는 두 행사에 모두 참석할 수 있었고, 행사기획에서 부터 복잡한 교통·숙소 문제,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의 상이한 식습관, 그리고 일정조정 등에 깊숙히 간여했던 나의 한국 친구들이 일궈낸 성공사례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시안게임은 86년 9월20일∼10월5일에 열렸다. 바로 나의 대사 임기 마지막달이었다. 무척 바쁜 시간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2년뒤로 예정된 서울올림픽이 어떻게 치러질 것인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 한국 방문을 원했다. 내가 평소 즐거운 마음으로 교류하고 있던 워싱턴 DC의 헤리티지 재단에서도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아내와 나는 대표단 175명을 위해 리셉션을 베풀었고, 9월29일에는 24명을 위한 저녁만찬을 열었다.
아시안게임 기간중 우리는 또 존 애쉬크로프트 미주리 주지사와 토머스 킨 뉴저지 주지사의 방문을 받았다. 미주리 주지사는 교보빌딩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 뉴저지 주지사는 후에 내 모교(母校)인 「드루(Drew) 대학」의 총장이 됐다. 나의 딸도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녀는 아시안 게임의 몇몇 행사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올림픽촌을 돌아봤고, 박세직(朴世直)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이 여러 시설을 안내하면서, 점심을 대접했다. 우리는 그가 아시안게임에 관한한 세세한 일까지 모든 것을 정말 잘 알고 있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는 다가오는 올림픽의 성공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이 때는 또 많은 한국 친구들이 떠나는 우리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꼭 시간을 내주도록 원했던 시기였다. 한국 출발은 10월25일로 예정돼 있었다. 떠나기 한달 전인 9월24일 세니와 나는 각별한 친구인 이홍구(李洪九) 서울대 교수의 저녁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교수 부부는 수년동안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 많은 일을 같이 해왔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마지막 두달동안 우리가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는 몇 안되는 조용한 가족단위 행사중 하나였다. 이교수는 그후 정부의 중요 직책을 맡아 나갔다. 이중에는 김영삼(金泳三) 정부하에서의 총리직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취임직후의 주미대사직도 포함돼 있다.
아시안게임에 이어 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을 세계의 핵심 관심사로 명확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27개국 선수들과 임원들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주최국의 철저한 준비와 축제 분위기, 색다른 편의시설에 경탄해마지 않았다.
올림픽 기간중 구 소련팀은 인천항의 대형 여객선에 묵었는데, 그들은 한국민이 이뤄놓은 훌륭한 성과와 그에 어울릴만한 환대에 「기절할 정도로」 감명받았鳴?솔직히 말했다. 올림픽 개막날까지 남은 날짜를 세고 있었던 도시 곳곳의 광고판만한 커다란 시계를 10년후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궁금했다. 이 엄청난 국제적 행사를 개최한 한국에는 분명히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은 희망과 올림픽 열기에 사로잡힌듯 했다.
아시안게임은 분명히 올림픽을 위한 성공적인 「총연습」이었다. 이 행사를 준비하는데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각종 경기를 위한 특별 스타디움과 함께 올림픽 공원이 완전히 새로 건설됐다. 선수들이 묵을 아파트도 세워졌다. 경기가 모두 끝난뒤 이곳으로 이주해 올 사람들에게 비교적 화려한 이 숙소를 미리 분양함으로써 아파트건설의 재원을 마련했다. 한강이남을 서울 남동쪽의 새로운 상업 및 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키는데 올림픽 사업은 큰 도움이 됐다.
다가오는 경기와 관련, 가장 흥미있고 효과적인 사업은 한강개발사업이었다. 하루 24시간 꼬박 일해서 4년이상이 소요된 이 사업은 아시안게임이 개막되기 정확히 10일전인 9월10일 완료됐다. 미국의 많은 내 친구들은 한국민이 오염된 한강을 어떻게 깨끗이 만들어 훌륭한 운동장으로 바꿔 놓았는지를 전세계에 보여줬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 사업에는 거대한 준설(浚渫)작업과 강변의 여가공원 조성, 선착장 시설 및 유람선 계획 등이 포함됐으며, 심지어 36㎞에 달하는 올림픽 도로 건설도 포함돼 있었다. 진흙투성이의 지저분했던 한강은 깨끗해졌고, 그로부터 몇년뒤 한국민들은 야생동물이 자연 서식지로 되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한강개발 사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현대 한국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 헌신적 노력에는 강력한 의사결정과 의지가 필요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수십년동안 커다란 혜택이 될 올림픽 유치 결정의 한 부산물이기도 했다. 몇몇 미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은 한국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생각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
한강개발 사업 완성 5일후 김포공항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한 폭탄 폭발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5명이 숨지고 29명이 부상했다. 북한의 위협이 만들어낸 긴장감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 준 사례였다. 사실, 86년초 쿠바 공산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평양을 방문하는 동안,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한국국민은 제24회 서울올림픽을 평화롭게 개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열렬히 환호했다. 그리고 다시 87년 11월29일 대한항공 858편이 태국해안에서 테러리스트의 폭탄에 의해 떨어졌다. 명백히 서울올림픽 참가를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자국 선수단을 올림픽에 파견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몇몇 나라들은 이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며, 베이징(北京)과 모스크바가 북한에 대해 경고할 것을 촉구하는데 동참했다. 한국으로서는 앞으로 다가올 「중요한 행사」에 대해 주요언론이 매일 관심을 보였던 참으로 중요하고 긴박한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언론 취재는 내가 특히 흥미롭다고 느꼈던 경기의 또 다른 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고향친구인 크리스 히토풀로스와도 관계된 것이었다. 한국은 박정희(朴正熙)시대 이전부터도 여러 거대기업이 개인종목을 지원하도록 하는 일정한 패턴을 발전시켜 왔다. 복싱을 지원하는 일은 한화그룹에 떨어졌다. 전에도 자세히 얘기한 것처럼 나의 훌륭한 친구 김종희(金鍾喜·81년 7월 작고)씨는 81년 7월 내가 대사로 부임하기 직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화약그룹」의 전통을 이어갔고, 그와 많은 참모들은 수년동안 한국복싱에 많은 지원을 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아들인 김승연(金昇淵)씨가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KABA) 회장이 됐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개막되기 직전인 86년 9월19일 아시아경기단체총연맹(GAASF)의 신임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그와 그 동료가 앞으로 수년동안 복싱과 스포츠 행사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친구인 오수인(吳壽寅)씨는 한화그룹 계열사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아온 예절바른 사람이었는데, 왜 복싱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국제행사에 자신이 간여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는 듯 가끔 머리를 가로젓곤 했다. 그러나 「영 다이너마이트」(김승연 회장의 별명)는 그를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97년 늦가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와 한국 경제패턴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외국의 비판가들과 함께 대부분의 위기 책임을 재벌들에게 돌렸다. 사실,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는 「재벌」이란 용어를 들어보지 못했지만, 98년 봄이 되자 그것은 전세계에 상식적인 말이 돼버렸다.
한 한국친구는 나에게 『세계에 공헌하는 한국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용어는 없었을까요?』라고 묻기도 했다. 아직도 나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되돌아보면서 한국이 재벌의 도움없이 이 사업을 조직적이면서도 체계있게 개최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확실히 86년, 88년 게임을 위한 조직위원회에는 조직체계와 확고한 지도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는 여전히 한국의 대기업들이 전제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때였다. 청와대는 명령을 내렸고, 각료와 재벌회장들은 이를 수행했다. 국제 스포츠계 진입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면서 한국에는 거의 군대조직과 같은 지휘계통과 통제 체제가 형성돼 있었다.
가끔 산업계 지도층에 있는 몇몇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개별종목을 지원하고 자금을 제공하라는 압력이 너무 많이 내려온다고 불평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포츠에 기여한 재벌의 재정적 지원은 기부금이 뇌물스캔들에 휩쓸려 조사받으면서도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내 명망있는 친구인 한진그룹의 「찰리 조」(조중건<趙重建>)는 당시 대한항공 회장이었는데, 테니스 선수들을 맡았다. 이는 그가 테니스 경기에 관한 모든 접대와 필요한 음식물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내와 나는 열렬한 테니스광이었기 때문에 그와 시간을 함께 할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우리는 특히 올림픽 테니스 경기에 참석할수 있다는데 기뻐했다. 윈스턴 로드 주중미국 대사가 베이징에서 왔고, 우리는 전세계 위대한 선수들이 열전을 벌이는 테니스 경기를 지켜봤다. 찰리는 정말 훌륭한 호스트였다. 그러나 접대 및 편의시설에 대한 자금지원을 그에게 맡김으로써 그의 팔이 얼마나 휘어져 버렸는지에 대한 약간의 불평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를 지켜보고, 또 서울 올림픽에서 보여준 그들의 열정을 느끼면서 우리는 그와 그의 한국동료들이 충분히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올림픽때까지는 나는 거의 2년동안 외교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당시 한국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정부는 모든 전임 미 대사부부들을 그 행사의 손님으로 초청했다. 내 전임자 대부분은 이미 사망했거나, 참석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세니와 나는 이 친절한 초대에 응할수 있는 유일한 부부였다. 우리는 88년 9월17일 개막식부터 10월2일 폐막식까지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한국이 이처럼 훌륭한 행사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민족적 자존심, 통합, 그리고 업적에 필적할수 있는 일을 다시 한번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88년 올림픽은 참으로 분수령격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최근 몇몇 한국친구들이 98년 외환위기를 걱정하기 시작할 때, 한국이 그 당시 어떻게 일어섰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줬다. 김우중(金宇中)씨와 대우그룹의 많은 친구들은 기꺼이 요트경기를 지원했다.
그리고 노(櫓)를 이용하는 선수를 위한 경기장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현대, 효성, LG, 그리고 다른 그룹들은 민족적인 사업에 동참했다. 화사하고 매혹적인 전통의복을 입은 한국국민들이 수천명 단위로 참여한 안무(按舞)가 놀랄정도였던 개막식 및 폐막식 행사를 지켜봤을 때,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VCR」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세계를 서울로」라는 두개의 비디오 테이프 복사본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대 한국역사의 가장 엄청나면서도 화려한 순간을 매력적으로 담고 있다. 이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자부심속에 자신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번역=황유석 기자>
점<占>과 샤머니즘
癌 발병 알아낸 女점술가에 경탄/美 대학원서 수학전공까지 한 김봉희씨/극비부친 '혹' 위치·갯수 등 정확히 예견/관저설계 趙子庸씨의 샤머니즘·풍수존중에도 감명
84년 6월 서울 용산의 미8군 병원에서 나는 겨드랑이의 혹(종기)이 악성 흑색종(腫)으로 전이(轉移)됐으며, 매우 위험한 암(癌)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무부와 국방부 의료진은 내가 3개월이상 살 가능성이 높지않다는 진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미 국무부의 한 내과의사로부터 들은 것은 더 후의 일이었다.
몇번의 추가검사와 함께 대사관 일을 조용히 마무리짓고, 또 당시 한국을 방문중이었던 딸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마친뒤, 나는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정밀 진단결과가 나올 때까지 건강상의 문제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서울에 지인(知人)도 많았던 미 정부출신 친구들도 당시 우리에겐 손님들이었다. 나는 한국 친구들과 한국 정부에 단순히 업무협의차 워싱턴에 간다고만 말했다. 헌신적인 아내는 나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숨기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게 틀림없다.
아내는 내가 떠난뒤 몇몇 친구들에게 이를 털어놓았다. 6월15일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아내가 애써 즐거워하는 웃음을 띠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동하(趙東河)씨와 그의 부인 마거릿(나은실·羅恩實)이 도착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조씨는 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점술가인 김봉희씨와 방금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내가 워커대사 문제로 자신에게 전화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또 워커대사의 림프샘에 제거해야 할 혹이 있고, 그것이 두개 이상이며 워커대사가 7월말까지 다시 한국에 돌아올 것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김봉희씨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병 치료를 맡을 암전문의를 찾은 것을 포함해 다른 세세한 일까지도 알고 있었는데, 모두 정확했다. 그의 예측은 모두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과거에 점을 약간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내와 내가 갖고 있던 이같은 회의적 시각을 어느정도 바꿔주었다. 그후 우리는 김봉희씨와 만나게 됐고, 우리 부부와 자녀들의 운명을 예측하는 그의 능력에 경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점이 정말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탄스러운 이 여성이 미국에서 수학전공의 대학원 과정을 거쳤지만 그 이전부터 「육감(六感)」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육감이란 서양에서는 「초감각적 지각」(ESP;Extrasensory Perception)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또 점을 다룬 중국고전인 「역경」(易經)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사관 직원과 용산 미8군 지휘부에 건강상태를 비밀에 부치라는 지침이 내려왔지만, 절친한 친구인 노신영(盧信永)씨 부부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나왔다. 그들 부부는 떠나는 친구에게 자신들의 기도와 축복이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했다. 분명히 한국정부의 많은 인사들은 미국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했을 터였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김봉희씨가 예언한대로 내가 돌아온 7월30일,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한가지 밝혀야 할 점은 이것이 ESP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는 이란성쌍둥이이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릴리안은 미국에서 우리와 1,500㎞이상 떨어진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78년 어느날, 아내는 사무실로 전화를 해,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빨리 집으로 와달라고 했다. 집에 와보니 아내는 짐을 모두 싼채, 보스턴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당장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릴리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게 틀림없어요. 나는 알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공항에서 아내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릴리안의 남편이었다. 그는 『리처드, 이런 말해서 안됐지만, 세니가 이곳으로 왔으면 좋겠어. 릴리안이 비장(脾臟)이 막 탈장해 지금 수술중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는 이미 떠났어』라고 대답한뒤,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쌍둥이에 관한 이같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이심전심으로 얼마나 잘 통하는지 알고 있다. 이런 느낌을 표현할 때 나는 지난 45년동안 아내가 자신의 쌍둥이 자매와 대화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들어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에겐 의사소통할 수단이 없어 사실상 대화는 처음부터 있을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김봉희씨와의 만남, 그리고 집에서 느낀 몇가지 경험은 서양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무시하던 한국 문화의 한 단면, 이를테면 샤머니즘이나 샤머니즘과 점과의 관계에 더 흥미를 느끼게 했다. 김봉희씨는 분명히 그를 「카리스마적 점술가」로 분류하도록 만든 초심리학적인 연관관계를 지닌 어떤 영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과 연결되는, 보다 전통적인 운명 예언방식을 따랐다.
81년 대사직에 부임한지 얼마뒤 아내와 나는 존 카터 코벨 박사를 알게 됐다. 그는 「한국문화의 뿌리」란 제목으로 한국의 영자지 코리아 타임스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 민속종교와 관련된 예술형태와 샤머니즘의 특이한 예술적 표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여성 예술사학가였다.
샤머니즘은 5,000년이상 불교, 유교, 서구 및 일본의 경멸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존속해왔다. 친구이자 동료인 함병춘(咸秉春·83년 작고) 박사는 81년 「한국문화」(Korean Culture)라는 잡지에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두개의 중요한 기사를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우랄알타이 뿌리와 연결돼 있는 한국의 전통적 애니미즘(Animism)이 아직까지 한국민의 세계관과 가족, 사회생활 양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분석했다. 나는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이같은 면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약 14년전의 암 경험과 한국민의 운명예언을 지칭하는 「점」에 관한 김봉희씨의 탁월한 능력을 경험한뒤 나는 한국을 복잡한 세상과 떼어놓게 만든 「점 문화」의 새로운 일면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샤머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다른 중요한 사람이 있는데, 훌륭한 예술가겸 건축가인 조자용(趙子庸)씨이다. 그는 필립 하비브 대사가 72년 새 대사관저를 설계하기 위해 뽑은 사람이었다. 하비브대사는 워싱턴으로 가 국무부의 담당부서「Foreign Buildings Office」관료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끝에 승리했다.
국무부는 새 관저를 표준 콘크리트와 유리로 지을 것을 원했다. 하비브는 그들을 제치고 「캐피틀 힐」(Capitol Hill·미 의회)의 상하원 의원과 직접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해 편의시설은 비록 현대식으로 하더라도 전통적인 한국스타일로 관저를 짓도록 했다. 그 결과, 나는 대사로서 서울에서 가장 우아한 한국풍의 집에서 살수 있었다. 한국문화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82년 8월25일 우리는 관저설계를 도운 조씨와 한국문화 부서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했던 버니 러빈(전 서울 미 문화원장),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를 관저 만찬에 초대했다. 우리는 조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훌륭한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조씨는 가슴따뜻한 유머와 정열, 약간 변덕스럽지만 항상 역사인식이 결합된 속사포같이 힘있는 말투가 놀랍도록 잘 조화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한국말이건, 일본말이건, 영어건 어떤 말로 얘기해도 그의 스타일은 배어나왔다.
조씨는 관저 건축과 관련한 세세한 일화 몇가지를 설명했다. 놀랍게도 그중 많은 부분이 그가 전문가로 공인받은 샤머니즘 전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60년대말 윌리엄 포터가 대사로 재직했을 당시부터 나도 한때 머물렀던 옛 관저는 150년이상 됐다. 어떤 부분은 심지어 이 보다도 더 오래됐다. 후임 대사들이 지붕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흰개미가 대들보를 갉아먹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은 이같이 위험한 상황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과 서양에서 이름을 떨친 건축가 조씨는 옛 가옥을 사서 이를 복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옛 가옥과 관련된 영(靈)적인 면에 대한 관심때문이었다. 새 관저를 지으면서 그는 관료적인 여러 문제에 부닥쳤다. 그는 관저 건축 4년간 때로는 한국의 전통적인 목수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조씨는 영적 소망과 과거의 샤머니즘에서 나온 많은 전통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거의 한국민속을 관저에 옮겨 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옛 가옥과 똑같은 일반적 양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하나의 지붕밑에 허용된 전통적인 건축한계를 넘게 됐다. 한국의 가옥은 보통 한개이상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왕족이 아닌 일반인의 숙소는 하나의 지붕밑 마루에서 99칸을 넘을수 없도록 돼있다. 조씨가 완성한 미 대사관저는 147칸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한국의 건축가는 수세기전 샤머니즘적인 배경에서 기인한 다양한 양식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옥에는 전통적으로 「성주」(상량신·上樑神·집을 지키는 신령)를 중시했다. 이 중심 대들보에는 그 신령을 불러온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조씨가 가옥에 대한 원초적 풍수(風水)설을 고집한 것으로 거실의 화로 한가운데 쓰여있는 한자(漢字)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한국사람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할 때의 「녕」자인데 옛 가옥에는 「寧」이라는 글자가 잘못 쓰여있었다. 그러나 잘못 쓰여진 글자를 바꾸는 것조차 하면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풍수를 거스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정대로 조씨는 자신이 서울에 소장하고 있던 샤머니스트의 미술작품 및 유물들을 82년 속리산에 설립한 새 건물로 옮겼다. 우리는 샤머니스트의 의식(굿)을 보고, 또 무당이나 샤머니즘적 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러번 그곳을 찾았다.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 시골의 전통양식은 북, 꽹과리, 그리고 샤머니즘의 전수자가 행하는 춤과 연계돼 있다. 아내와 나는 여러번 그곳을 찾아 전수돼 내려오는 민간전통에 대한 조씨의 설명을 들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샤머니즘적 전통에서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호랑이와, 동양의 신비스런 청룡(靑龍)에 대한 경이로운 미술품을 그는 재생해냈다. 조씨의 에밀레 민속박물관은 지난 15년만에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는 한국문화전통에서 매우 특별한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정말 큰 공헌을 했다.
유교 및 당시 기독교 지도자가 초기에 한국 샤머니즘의 상징물과 풍습을 비난한 것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승려들은 전통민속학, 특히 미술품, 조각, 호국의 상징물등을 인정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미신에 근거한 전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타클로스나 부활절은 어떤가? 미국사람한테 할로윈(10월31일)을 설명해달라고 해본적이 있는가?
샤머니즘적 양식이 갖는 가장 큰 호소력중 하나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당은 대부분 여성이다. 나는 한국에서 각종 상을 휩쓴 한무숙(韓戊淑·93년 작고)씨의 소설「만남」(영문판 「Encounter」)을 읽는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딸인 김영기(金榮起) 교수는 95년 내가 지금까지 보물처럼 아끼는 그 책 한권을 선물했다. 「무당의 딸」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4장은 한국에서 샤머니즘과 다른 종교간 초창기 대립양상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함병춘씨는 사려깊은 분석이 돋보이는 여러 시론(時論)에서 『샤머니즘적인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가장 잘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현실에 직면한 한국의 마을 주민과 직접 대면했던 나의 옛 만남을 되돌아보면, 나는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한국민의 혈족관계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이해할수 있었다.
혈족관계는 인류와 자연으로 향하는 샤머니즘적 접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수년동안 한국친구들과의 교제에서 얻었던 똑같은 혈족의식을 향유할수 있게 됐으며, 이는 내가 한국에서 친분을 쌓았던 많은 지인(知人)들을 왜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를 설명해 준다.
한국은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돼 있다. 그리고 일정기간 한국에 머물렀던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초기 샤머니즘적 뿌리가 갖고 있는, 상존하는 힘을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 샤머니즘적 뿌리는 변화하는 시기에 깊이 각인돼 있다. 또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갖는 본질의 다양성과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워커 前 주한美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덩치커진 한국 "이젠 동생취급 말라"
한강의 기적·북방정책으로 국제무대 위상 급속히 높아져/한미야전사령관 한국인 임명 등 양국관계 재정립 필요대두
한국과 숱한 한국 친구들과 맺어온 지난 수십년을 돌이켜 보면, 81년 7월∼86년 10월의 주한 미국 대사직은 한국과 한·미관계의 가장 극적인 변화와 궤를 같이 했다는 것을 느낀다. 당시 학생들과 사회 운동가들은 『불법통치』라고 비난하며 반정부 시위를 계속했지만, 한국은 전세계로 부터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고, 또 국내의 삶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여러 지표를 통해 알수 있다.
임기가 한창 진행중이던 85년 5월3일 나는 뉴욕의 「한국학회」(Korea Society)로 부터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때 본국과 업무 협의차, 그리고 가족도 만날 겸 미국에 있었다. 한국의 역동적인 모습과 서(西)태평양에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좋은 기회였다.
「지난 15년동안 여러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컴퓨터를 통한 무역, 통신체계, 컨테이너 화물운송량 등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나는 참석한 한·미 양국 청중에게 부탁했다. 이런 것들은 당시 태평양을 대서양보다 훨씬 좁게 만들었다.
연설의 주제는 한국이 세계의 「차세대강국」(Middle Power)으로 부상했고, 이는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었다. 향후 양국관계가 조화롭고, 또 응당 그래야 하겠지만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다양한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강조했다.
한국은 힘의 균형이 빠르게 이동하는 동북아와 환태평양지역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나는 세계무대에서의 한국의 역할에 엄청난 변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은 「차세대강국」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의사결정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또 서울이 세계무대에서 보다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 의견과 정책이 강대국간 회의에서 보다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국제관계에서 점증하는 한국의 유연성, 창의력, 그리고 창의적 접근방식을 요구했다.
주요 동맹국으로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는 미국인 청중에게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새로운 역할을 조정하는 일이 미국민에게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는 15년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한 국가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군사동맹 형식을 포함한) 여러 공공시설, 지적 임무를 수행하는 건축물, 심지어 전문용어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동아시아와 그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을 주요 우방국인 한국과의 긴밀한 협의없이 내렸던 때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한국민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사에 대한 그들의 다른 인식과 가치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뉴욕연설에서 내가 표현했던 경고를 상기하면, 나는 그것이 오늘날에도 똑같은 비중을 갖고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을 이끄는 현 세대는 나이 어린 동생으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대접받기를 원한다.
동생이란 개념은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미국이 사용하는 형제관계보다 종속의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계무대에서 주연으로 등장한 나라와 상의조차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재임기간중 언론계에는 서로 별 차이는 없었으나, 가끔 적잖게 정당성을 갖고 서울의 전제통치를 비판했다. 「대중성을 잃은 통치」「압제정권」「군부통치」는 표준말이 돼버렸다. 이는 가끔 평양의 이미지 조작자의 계략에 빠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들은 이 말을 반복하면서 거기에 욕지거리 수식어를 덧붙였다.
비판할 것은 분명히 많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압제행위 중간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이끌 튼튼한 토대를 인식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항상 북(北)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었고, 김일성(金日成) 정권은 「위협이 현실」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줬다.
80년대 한국은 실생활에서 진정한 현대화를 경험했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에 대한 추진력은 81년 「서울이 88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된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정권시절부터 시작된 여러 프로젝트들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정권이나 노태우(盧泰愚) 尹酉?정권이 이룬 업적도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80년∼81년은 인플레와 심각한 경제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는 재빨리 반전됐다. 80년대는 정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부인들이 「한강의 기적」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적 교양도 고양됐던 시기였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국회는 흥미있는 토론의 장이었다.
그리고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적 규정이 마련되고 있었다. 서울의 군수산업은 북측과 비교해 이미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10년동안 한국은 모든 면에서 땀을 흘리며 북한을 앞서가고 있었다. 보건 및 공공복지분야에는 한국전직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삶의 질」을 향한 거보(巨步)가 내디뎌졌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 한국역사의 비극적 사건은 더 이상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회고해 보면, 전두환씨가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퇴임한 것과 그의 동료장군인 노태우씨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방된 선거를 통해 선출된 것은 지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노태우 후보는 87년 격렬했던 항의시위의 심장부에 놓여있던 많은 요구사항을 수용, 그 해 6월29일 월요일 아침 중요한 약속을 발표했다. 이는 정치 현대화를 향한 커다란 진전을 의미했다.
노태우씨는 전임자가 시작했던 몇몇 정책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노태우씨의 「북방정책」으로 명명된 국제적인 개입정책이 포함돼 있다. 구 소련과의 관계 개선과 중국과의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 등이 진전을 이뤘다. 이 협상은 친구이자 외무차관을 지냈던 노재원(盧載源)씨에 의해 베이징(北京)에서 마무리됐다. 세계무대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한국의 새 역량에 대한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전대통령과 노대통령은 둘다 80년대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성장을 주도했는데, 청와대에서도 군 고위지휘관의 전통을 살리면서 때때로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장시간 성실히 근무하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전씨의 경우 월남전을 포함한 군경험으로 인해 83년 북한의 미얀마 랑군 폭탄테러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놀랄정도로 침착성과 냉정함을 유지했다. 두 대통령 모두 한·미 동맹관계를 살아 숨쉬게 하는데 일조했고, 또 이에 대한 조정능력도 있었다.
유능한 참모진들은 한국을 많은 주요 국제기구에 참여토록 했으며 한국민들은 철저한 준비와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그 곳에서도 금방 존경을 받았다. 두 대통령은 한국을 찾는 주요 방문객들을 환대했고, 장기적 관점에서 외국과의 개입정책및 상호관계의 전형을 만들기 위해 전세계를 두루 돌아다녔다.
86년 주한 외교관중 최고참이었던 프레데리코 카르나우바 브라질 대사가 장기휴가차 본국으로 귀환하자 다음 연장자였던 내가 대리 고참역을 맡게 됐다. 이 자격으로 나는 자주 주요 외국방문객이나 국가원수를 영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일이 너무도 흔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차가 공항까지 가는 길을 혼자서 저절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이 보다 차원높은 외교무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됐다. 정부기능은 지구촌 경제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간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은 전세계에 80년대 한국은 더이상 「은둔의 왕국」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줬다.
임기 초창기의 한국과 임기말 한국간의 가장 큰 질적 차이는 나에게 많은 조정 역할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나 또는 지식인들간의 모임에서 불평이 터져나왔던 18홀짜리 골프코스등 미8군존재의 경우,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군 지도자들에게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는 가끔 자신의 특권은 조금도 손해보려 하지 않으면서 『천편일률적인 외교집단(외교관)』이라며 욕하는 미국 군지도자들에게는 미국측 임무에 관한 불신 분위기를 조성했다. 몇몇 군 동에게는 당황스러웠겠지만, 나는 때때로 한미야전사(CFA)의 4성 사령관을 한국인이 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곤 했다. 양국 인사는 상대적으로 무리없이 작동하던 양국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꺼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기운은 감돌고 있었다.
약 1,5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로 늘고, 미국과의 쌍무교역도 95억달러에서 360억달러로 급증한 80년대의 극적인 발전을 통해 한국인이 가질수 있었던 엄청난 자신감에서 보면, 관계재정립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최근 대화를 나눠본 한국인들은 미국이 자신을 능력없는 동생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느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예를 들어 한국신문과 시사평론가들은 94년 10월 미국과 북한간에 제네바 협정 골격이 이뤄졌고, 이것이 오만한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전달됐다고 생각했다. 한·미 양국 확대회의에서 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한국의 핵위기는 양국간에 해결돼야 한다는 비판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한국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양국의 유연성과 타협을 요구하는 모든 현안의 목록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역조건, 시장개방, 주둔군 신분협정(행정협정), 군지휘체계의 재조정, 여권·비자취급문제, 북한에 대한 정책, 지적재산권, 희망섞인 바람이지만 북한이 품위와 예의를 요구하는 전세계적 의무를 이행하고 현명하게 개방의 길로 갈수 있도록 유도하는 재정지원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서울과 워싱턴이 긴밀하게 협의해서 결정돼야 한다는데 우리는 동감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종속적인 하위 파트너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곤 했다.
가끔은 부적절한 논평이 폭풍우와 같은 비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 회고록 초반에 내가 언급한 것처럼 양국 언론들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과장하곤 했다. 96년 9월18일 북한 잠수함사건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워렌 크리스토퍼는 『모든 당사자들은 이같은 도발적인 행동을 더이상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적절치 않은 발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고, 언론은 미국측의 사과와 설명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도 5공화국때 가끔 말 실수를 했다. 관련된 사람들이 워싱턴의 대표자에게 신세진 것이 전혀 없다고 시위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와 괴롭혔다.
우리는 98년 금융위기에 대한 한국의 대응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안한 몇몇 조치에 대한 한국정부의 초기 대응을 지켜봐 왔다. 또 한번, 자제가 요구되고 또 민감한 부분은 이해돼야만 했다. 미국이 IMF의 주요 참여국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한 반응이 반미운동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 해왔다.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문제들은 한미관계의 복잡성을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과거 20년동안 구축했던 굳건한 토대가 우리에게 긴밀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는 것을 나는 줄곧 체감했다.
또 형제관계에서 동반자관계로, 생명력이 넘치고 조정능력이 있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잘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로 늘어나고,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할 줄 아는 미국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직면한 금융문제,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 미술·음악적 재능의 교환, 그리고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확장시키는 문제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진정 동등한 동반자가 됐으며, 나는 이 동반자 관계가 21세기 세계에서 핵심요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우리' 정신으로 위기 이겨낸 나라 (끝)
“할수있다” 애국적 유대감으로 IMF도 극복하리라 믿어/지정학적 위치탓 强國 상호균형속 '안정된 미래' 예상도 반세기 이상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해(理解)의 폭을 넓히고, 점점 좁아지는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전망해보기 위해서는 다른 문화에 푹 빠져볼 것을 권해 왔다. 나는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동아시아 국가에서의 경험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1년, 52주동안 매주 50년의 한국전 발발이후 한국에서 겪은 여러 경험담을 되짚어 왔다. 나는 매주 연재된 「한국의 추억」을 매우 사려깊고 정확한 솜씨로 다뤄준 한국일보 및 코리아 타임스의 편집진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껴 왔다. 이 회고록이 자신들에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국과 미국의 친구들이 편지와 여러 의견을 보내온 데 대해 나는 정말 기뻤다.
나의 연재물이 그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려주곤 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재직할 당시에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던 사건에 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고, 한미관계가 중요한 시대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 통찰력을 제공해 준데 대해 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다.
지난 1년동안 이 회고록을 읽어온 사람들은 내가 유교전통아래서 대인관계에서의 평등을 중시하게 됐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법적 서류나 계약서보다 더 중요하다. 「한국의 추억」 최종회를 쓰면서 나는 다음 몇가지는 지적할만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에 머물면서 나는 몇몇 유력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만남이 겉핥기 수준조차 되지 못했고, 그렇게 가까운 많은 친구들에게 소홀히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대사관의 훌륭한 운전자였던 김승연씨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아내와 나는 정말 그와 각별한 존경과 사랑의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나의 대사 임기동안 그는 피붙이처럼 가족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씨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엄성을 갖고 있었고, 항상 우리의 안전과 편안함을 살펴주었다.
비록 그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으나, 내 아내가 90년 2월 세상을 떠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로 하여금 그녀를 추모하는 선물을 많이 하도록 한 사람이 김씨였다는 것을 나는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년전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슬펐다. 내가 교분을 쌓고, 또 나의 삶을 풍부하게 한 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한국사람은 각계각층에 너무나 많이 있었다.
둘째, 한국이란 환경으로의 출입이 잦은 국외인(局外人)으로서, 나는 한국문화의 힘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너무나 많은 외세와의 힘겨운 만남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한국민들은 너무나 큰 삶의 고통을 받았고, 때로는 국가적 자존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줄 아는 한국민의 능력을 알고 있고, 이를 높이 평가해 왔다. 나는 미국에서 98년의 외환위기를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확실히 그것은 한국의 민족적 특성이 극복해야 할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전세계 언론은 이 위기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위기는 분명히 심각한 것이지만 몇년 후에는 단지 불유쾌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수 십년동안 한국민들이 이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극복해 내는 것을 지켜봐 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감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교육수준과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산업시설 체계, 전 국토를 견고하게 엮은 에너지및 교통망이 있다. 무엇보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할 수 있다」(Can Do)는 정신이 한국민 마음속에 있다.
98년 외환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나에게도 「우리 증후군」이라는 것을 생겨나게 했다. 자신들만의 독특하고 오랜, 독자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국민들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왔다. 『국가적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금붙이를 내놓는 것이 우리(our)의 의무입니다』 이것이 금융위기에 처한 한국인의 첫 대응이었다. 「우리 증후군」은 어려운 시기에 한국민들이 서로 마음을 모으는데 기여했다.
셋째, 한국은 힘과 중요성이 증대되는, 세계에서 중요한 전략적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은 강대국간의 「게임」에서 점점 더 중요한 「선수」로 간주되고 있다. 일본이나 러시아와 잠재적 경쟁관계에 있는 중국은 근대화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에너지·천연 자원에 관한 합작사업에 일본이나 중국보다 한국을 끌어들였다. 일본은 강력한 한국을 대륙의 세력과의 관계에서 완충지대 또는 보호막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 지역내 다른 세 강국들이 안정요인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주변 4대 초강국들이 상호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한국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국의 미래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특히 중요하다. 한국은 과거 「Middle Kingdom」(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위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한국을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왔다. 베이징(北京)의 현 방침은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한국에게 유익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간여할 수 없을 것이고, 한국의 궁극적 미래는 베이징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룬 한국의 회귀(回歸)는 20세기 마지막 시기에 서울의 가장 중요한 움직임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정책을 펼 때, 서울이 스스로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워싱턴을 긴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국민들을 상호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지구촌의 일원으로 이끄는 것이며, 이는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우리의 입장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지만 한중관계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서울의 인식에 중요한 변화를 안겨주었으며, 그리고 그 것은 평양에 압력을 가하는 새로운 방법의 첫 단추를 제공했다.
거론하기에는 약간 부담스럽지만, 네번째도 이야기해야겠다. 「우리」증후군을 만들어낸 한국 역사는 한편으로는 우방국들에게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행동이나 사고(思考)방식으로 받아 들여졌다. 몇몇 미국인들은 이를 한국의 「제로섬」 접근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침략자나 압제자와의 관계는 한국 동맹국들을 중용(中庸)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기도 했다.
훌륭한 나의 한 한국인 친구는 『한국말에 타협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타협은 굴복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한국신문의 사설은 종종 한국민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논평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만약 국외자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그 때는 우리 증후군이 효과를 발휘하고, 이어 엄청난 분노가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는 가족외부의 비판가에 맞서 서로 돕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문화적으로 이런 반응이 더욱 격렬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Native Speaker」의 저자인 한국인 소설가 이창래(李昌來)씨는 98년초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그 해 위기의 첫 단계에서 표출됐던 애국심이 냉소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같은 애국적 유대감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사람들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다음 단계가 시작일 따름입니다… 희망이라면, 세계의 즉각적이고 충분한 지원이 이 나라를 다시 제대로 복원시킬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암울한 비관적 전망이 깔려 있습니다. 호화찬란한 배가 가라앉는다면, 그처럼 반짝거리던 한국에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같은 결속이 계속 공고히 유지될수 있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물론 나는 호화스러운 한국호(號)가 긍정적인 발전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미국에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98년 서울의 위기는 왜곡된 금융시스템을 제대로 바로잡고, 금융관례에 필요한 개방을 유도하며, 한국을 세계무역 시스템에서의 실질적 참여국으로 계속 남아있게 하는 데 매우 유익한 것이라는 남덕우(南悳祐)씨와 나는 견해를 같이 했다. 남씨는 국무총리를 지낸 훌륭한 경제학자이다.
이같은 틀안에서 우리 모두는 98년 6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관심있게 지켜 봤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영웅적으로 생각하고, 또 이 땅의 현 위기만큼 심각한 개인적 위기를 겪었던 지도자에게 이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과의 성숙한 상호관계를 설정할 기회였다. 김대통령은 금융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김대통령의 목표는 한반도를 두쪽으로 갈라놓은 냉전의 마지막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있는 새 정책을 펴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은 한국인과의 생활이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히려 그것은 놀랄만큼 보람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김대통령은 수년동안 어느 전임자들보다 더 활발하게 그리고 강도높게 세계를 누비며 경험을 쌓아 왔다.
비록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피?상황에서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그의 초기 활동은 그가 진정 필요한 지적 통찰력을 갖고 있고, 위기에 대응하는 한국의 「Can Do」 정신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미국에서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수많은 토대도 구축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맞서 싸웠던 몇몇 전임자들이 효과적으로 추진했던 세계화 약속도 함께 이행해 나갔다.
나의 후임자중 한 사람인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자신의 재임기간중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식과 이해가 부적절하며 때로는 왜곡됐다는 것을 자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바꾸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인들이 많은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레그 대사는 미국에서 「한국학회」(Korea Society)를 세웠고, 나는 그 학회의 일원으로서 그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우리는 한국의 여러 문제점뿐 아니라 한국과 한국의 예술, 생산품에 있어서 미국의 이익이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관이 개관하면서 그것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다. 미 전역의 대학캠퍼스에서 한국어 및 지역 프로그램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과 한국문화에서의 중요한 학문적 이해관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국제학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최근 몇년동안 한국을 다루는 유력 지도자들과 작가, 사상가들을 모아 한국에 대한 연례 회의를 개최해 왔다. 만약 지구촌에서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공감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 마지막 연재물의 제목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삶의 풍요로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이 모임에 정력과 시간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와 내가 86년 10월말 한국을 떠났을 때, 남덕우 박사는 환송파티를 열어줬다. 아마도 그것은 오랫동안 계속된 환송행사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 파티에서 한국인들은 정말 마음씨 따뜻하고, 호의적이며, 때로는 감동적이었다. 남박사의 그 때 인사말을 아내와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의 하나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외교관으로서가 아닌 학자로서 워커 교수가 한미 양국의 이해를 높이는 데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한미 동반자관계의 강력하고 분명한 옹호자로서 워커 박사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또 다른 활동을 위한 무대로 옮겨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남총리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써왔다. 여권에 찍힌 한국 입·출국 도장, 한국학회와 함께 한 일, 매년 한미 정례회의에서 한미 안보연구에 관한 활동, 「한국의 추억」과 같은 기고및 연설 작업, 여타 다른 활동 등은 참으로 한국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 삶은 이같은 상호관계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의 추억」에서 나타내려고 했던 나의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한국, 그리고 재능있는 한국민에 대한 나의 깊은 애정 (2)한국땅과 그 문화에서 찾을수 있는 광범위한 기회의 다양성 (3)내가 느끼기에 매우 필요한, 양국사이의 동등한 동반자관계로 이끌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4)과거 40년간의 변화의 중요성과, 한국문화가 이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와 혁신적인 세계통합의 물결에서 얼마나 놀랄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독자들이 아내 세니와 내가 「Hankuk」(한국)에 대해 느꼈던 애정의 깊이를 이해했으리라 믿는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황유석 기자>
첫댓글 이글을 읽고..과연 우리는 1945년 독립을 한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