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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에제 47,1-9.12
복 음 : 요한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사업도 성공적이었고, 가족 안에서도 문제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몸에 중병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술만 받으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워낙 큰 수술이었기에 회복 기간이 길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던 사람이 누워만 있으니 점점 우울한 마음이 들었고,
병원에서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말이 자신을 병원에서 포기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몸이 분명 예전 같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수술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분명 몸에 무리를 주어 예전 같은 생활을 당연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하니, 헛된 기대에서 좌절로 이어진 것입니다.
저 역시 30대의 몸과 지금 50대의 몸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을 나의 몸으로 인정해야 50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0대의 몫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은 가끔 샘물이 솟으며 물이 움직였는데,
이때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다는 민간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 몸을 적시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병자가 못 주위에 있었겠습니까?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이런 이유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해서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지요.
못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원래의 목적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병자의 치유처럼, 병자의 간청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병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병자가 원하는 못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병의 치유를 주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 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저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 사랑의 표지로 말입니다.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의 표징, 생명의 표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야곱이 축복의 징표로 간직했던 엉덩이뼈의 상처처럼,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사순을 살되, 부활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순은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닌,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건강해지고 싶으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영어는 고통의 3가지 의미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pain), 정신적인 고통(suffering), 영적인 고통(agnoy)을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고통은 관계의 단절과 우울감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불안, 걱정, 근심, 시기, 질투,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고통은 연민(compassion)에서 시작됩니다.
타인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합니다. 타인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부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강재구 소령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철길에 떨어진 일본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수현이 있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희생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런 희생은 연민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고통입니다. 이를 희생의 제사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입니다.
꽃이 지면 열매가 생기듯이, 영적인 고통은 부활의 씨앗이 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육체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넘어 영적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상황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빵을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것이 미사이고 감사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고통의 순간들이 힘들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민(compassion)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은 은총의 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생명을 살리는 물, 생기와 활력을 주는 물을 보았습니다.
물은 필요하고,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순히 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말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라 버려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야만 영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는 통로입니다.
기도, 전례 참여, 단체 활동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주님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의 미사 독서들은 입당송부터 영성체송까지 온통 물 이야기로 채우고 있어,
그 안에서 맑고 밝은 생명력이 뿜어나오는 듯합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병자들이 모여있는 벳자타 못으로 가십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요한 5,3)고 합니다.
흡사 응급실이나 야전병원 같은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물론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고 피폐한 형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거기에 모인 병자들은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는데,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요한 5,4 각주)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장애가 덜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
부축해 줄 가족이나 종을 거느린 이에게는 제법 유리한 조건일 터이고,
그들은 진작에 치유되어 그 못을 떠났을 겁니다.
그중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이에게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릅니다.
그 역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을텐데
그 긴 시간을 그저 부러움과 자책으로 보내다 이제는 무기력만 남은 듯 보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수님께서 그의 원의를 물으십니다.
강렬하고 순수하고 절실했던 첫 바람을 일깨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좌절과 실망을 쌓아온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응답 대신
여태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도와 줄 이가 없어서 그렇다는 원망이 살짝 섞여 있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를 고쳐주십니다.
원망 섞인 동문서답 이면에 자리한 바람을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출렁이는 연못의 물이 물리적으로 몸에 직접 닿아야 낫는다고 믿는 이에게,
생명의 물이신 분이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진정 치유는 매개물을 통하건 통하지 않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업적임이 드러납니다.
이제는 낫기 위해 요행을 바라며 다른 병자들과 경쟁하기보다
몸소 생명의 물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살아난다는 진리가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훗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세상으로 피와 물을 흘려보내셨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인 오늘의 독서 말씀이 이를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물이 솟아"(에제 47,1)나는데,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11)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쓰는 물이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세상을 정화하고 치유하고 풍요롭게 되살립니다.
복음의 병자가 연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치유되어 새 삶을 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치유는 예수님 박해의 전주곡이 되어 버립니다.
"너는 치유를 받아 네 힘으로 짐을 챙겨 걸어갈 만큼 건강해졌으니,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나도 된다."는 뜻으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셨는데, 여기서 곡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가 멀쩡히 걸어가는데도
축하와 격려를 건네기는커녕 안식일에 들것을 들었다고 지적하자,
병이 나은이는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이 시키신 것이라고,
그분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합니다.
들것을 들고 가라는 말씀의 의미보다 그렇게 문자의 외피만을 전하다 보니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신원을 유다인들에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5,14) 하셨고,
그분에 대한 유다인들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생명의 은인을 고자질하는 모습이 사실 적잖게 당혹스럽습니다.
육신의 병은 나았을지 몰라도 여전히 영혼은 비틀려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책임을 면하는데 급급했던 걸까요?
예수님 삶이 그랬고 우리 인생사가 그렇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역시 유다나 가야파나 빌라도처럼
구원사에서 부정적이나마 제 역할을 한 것이라면 연민이 들기도 하고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당신의 생명으로 치유 받고 회복되어 날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책임 있게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되살리고 고치시려고 부어주신 은총을 과연 하느님께 감사로 되돌려 드리는지,
아니면 그분 앞에 걸림돌을 놓는지 깊이깊이 바라보는 사순절입니다.
“이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나리라.”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어제 미사에서 들려온 말씀이 부활 신앙의 창조적 국면이었다면,
오늘은 부활 신앙의 구원적 국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예식 터로 쓰이던 벳자타 연못에서 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38년째 중풍에 걸려 고생하던 앉은뱅이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이 희생제물로 쓸 짐승을 죽여 피를 뺀 후에
이 연못에서 씻는다는 이상한 이유로 엉뚱한 미신이 생겨났습니다.
연못의 물이 출렁일 때 제일 먼저 이 물에 들어가는 병자는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앉은뱅이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낙담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쓸데없는 미신을 탓하시거나
또는 그 앉으뱅이의 어리석음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그저 낫고 싶은지만 물어보셨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는 말씀 한마디로
그를 그 오랜 중풍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벳자타 연못을 둘러싼 미신도 엉뚱했거니와
그 축하받아야 할 병자를 괴롭히는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신관도 꽤나 못돼 먹었습니다.
물의 치유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대목은 요한복음 7장입니다.
6장에서 생명의 빵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에 가시어 모여있던 군중에게 당신이 생명의 물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생명의 빵과 물은 성체성사에서 한데 모입니다.
그래서 성찬례를 통해 예수님을 생명의 빵과 물로 선포하는 교회는
벳자타 연못의 중풍병자 같이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그 옛날 에제키엘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든 것을 생기있게 바꾸어주는 생명의 강을 환시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가는 곳곳에서 생기 잃은 것들은 물론
바닷물까지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하는 놀라운 환시였습니다.
이것이 종교로서 구원의 효능감을 발휘해야 하는 교회에게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부활의 은총을 입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는 구체적으로 생명력 넘치는 기운을 사람들
특히 신자들에게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불어넣어 주어야 그 사명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전례에서 말로만 그 사명을 되뇌이는 교회는 세상에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창조과정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일어나는 것인 이상,
부활 신앙이 지닌 구원의 효과가 개별 신자들이나 약자들에게
그것도 실제로 느껴져야만 교회의 활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현실입니다.
비구원의 현실에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교회라면 그나마 있는 활력도 조만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안목이 그래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이를 구원효능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 말씀이 적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물이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9) 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겪던 상황은 그야말로 긴장투성이였습니다.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온갖 험담을 퍼뜨리고 다니기 시작했고,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은 그분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세우고자
혁명당원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언행이 몹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형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물이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경건한 분위기만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도 고통받지도 않는 편안한 신자들입니다.
혼란스러운 속세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박해를 백 년이나 겪은 후유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떠받드는 이들한테서나
대놓고 무시하는 자들에게서나 휘둘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길은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진리를 밝히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러진 갈대 같은 생명도 꺾지 않으셨고,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생명도 보살피셨습니다.
벳자타 연못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중풍병자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치유 소원을 군말없이 들어주신 것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다투지도 않으셨고 소리치지도 않으셨으며,
그저 말없이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진리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듣겠다고 따라다닌 군중 가운데에서 그래도 골라 뽑으신 열두 제자들이,
깨달음이 늦고 굼떠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야단을 치시면서도
어느 한 제자도 내치지 않으시고 깨달을 때까지 그들의 몰이해를 참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러 예루살렘 한복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이 선포한 진리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물, 부활 신앙으로 구원의 효능을 체험시켜주는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사람에겐 이 두 질문의 답을 찾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 있는 벳자타 못에서
병의 치유를 바라며 38년이나 매일 그곳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선 요한에게 ‘양 문’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0’을 채워야 합니다.
숫자 ‘40’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이 완성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숫자입니다.
38년은 ‘은총과 진리’, 곧 ‘2’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충만히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은총과 진리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먼저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라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은총은 보통 기름으로 상징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곧 ‘은총’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온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으로써 벳자타 연못의 병자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은총과 진리를 받기 전에
38년이나 은총을 바라며 연못에 머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벳자타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오는데 그때면 물이 출렁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한 사람만 치유를 받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바라며 평생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불러주십니다.
‘가톨릭 신문’에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재직 중이던 뛰어난 물리학자가
사제의 길을 택한 예수회 김도현 바오로 신부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친척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늘 벳자타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는 50년 중 30여 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표현합니다.
38년은 안 돼도 30년을 찾은 것입니다.
76년도 4월에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고 수술은 해야 하지만
사실상 사망하실 가능성이 더 컸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뇌종양을 수술해서 살아나신 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고 그 후유증을 견디며 사셔야 했습니다.
이때 친가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께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은 따로 계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기를 권유했습니다.
이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뒤로 계속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미사도 다니고 냉담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김 신부는 공부를 잘하여 카이스트에 입학하였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난이었습니다. 굉장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아래서부터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도 몇 명씩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실제로 자신이 잘 아는 친구도 자살하였습니다.
여러 친구가 학업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며
다시 76년에 자신에게 닥쳤던 질문이 심각하게 다시 올라왔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죽음 이후의 세상은 무엇인가?”
물론 주위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지만,
과학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신앙에서는 다들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과학이 죽음과 내세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았어도 더는 벳자타에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신부는 그런 사조에 빠지지 않고 대학원 다니면서도 오히려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논문 지도교수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그는 더 중요한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00년에 어머니와 상주 가르멜 수녀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원장 수녀님이 “수도 성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은총을, 이 수녀님을 통해서는 진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셨고 김 신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수녀님은 예수회에 가는 것이 낫겠다 하셨고 그 이후 예수회 성소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가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학년에서 가장 유능하여 3년에 대학을 끝내고 또 3년에 박사 학위를 마쳐
독일 연구원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누구나 부러워하던 한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며칠간 큰 충격에 빠져 있다가, 다시 생사를 쥐고 계신 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었고 수도회 입회의 마음을 굳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처음의 질문이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면,
이젠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가 주는 답변입니다.
먼저 여러 기적과 같은 체험을 통해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이 당신임을 알려주시고
그다음엔 진리를 통해 죄짓지 말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던 중 한 성경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5)
순간 세상에서 무엇을 가진다 한들 결국 하느님 품에서 제대로 죽는 게 가장 좋은 삶이고,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잘 죽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는 그냥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 묻는 것을 포기하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분이 계신지, 나는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입니다.
벳자타 병자의 38년은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를 찾는 마음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는 마음입니다.
이 두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진리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하느님의 양의 무리에 들게 됩니다.
벳자타 연못은 하느님 나라의 양의 무리에 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그곳에 끝까지 머물 줄 아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주님은 은총과 진리로 그 사람을 당신 우리로 초대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