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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토에서 독도가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 / 홍속렬
국가는 국토가 있어야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대륙에 붙은 반도 국가로 대륙의 수많은 민족에게 긴 세월
침략을 받아오며 시달려온 고난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거의 1000여 번의 침략을 받았는데 침략받은 날짜를 따져 보면 평균 4일에 한 번꼴로 침략을 받았다고 보면 맞습니다
한국전쟁(6.25)발발로 민족 상쟁의 비극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하며 칠 십여 년을 전쟁 없이 지나온 시절인 요즘은 나라 건국 이래 처음 있는 평화의 시기가 됩니다
나는 1944년생으로 해방 전해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북한 지역 강원도 철원이 고향입니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한국전쟁을 맞아 전쟁의 비참함은 물론 B-29의 폭격으로 집은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집터엔 큰 연못이 생겼습니다
집안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집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 시신 수습도 못 했습니다
어머니는 쌕쌔기의 기총소사에 다리를 정통으로 맞아 의료시설이 모두 파괴된 당시의 상황으로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나무 써는 톱으로 다리를 절단했는데 마취도 못한 상태에서 절단했으니 얼마나 고통이 컷겠습니까?
강원도 철원은 철의 삼각지대라 해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곳
집 한 채 남아 있지 않은 그야말로 잿더미만 남은 비극의 땅입니다.
백마고지의 처절한 전투가 치러진 곳 격전지의 비극의 땅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비극의 주인공이 아직까지 생존하여 고난의 민족 역사를 증언합니다.
국군과 인민군이 밀고 밀려가고 거듭하기를 수십 회, 사람과 도시는 완전 폐허의 늪에서 건져 올릴 수도 없는 지경이 돼 버렸고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갈 무렵 패색이 짙은 북괴군은 마지막 후퇴를 하며 주민을 몰아 북한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을 지극히 싫어하셨던 부친께서는 한탄강 바위 밑에 주거를 마련 하고 집 근처에 새끼 줄을 쳐서 엠병(장질부사)이 걸렸다, 써 붙여 인민군의 접근을 막아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목발 짚은 어머니 그리고 쌕쎄기 기총소사를 맞을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동생이 태어나 그 아이를 업고 목발 짚은 어머니와 함께 걸어 걸어 의정부까지 갔고 그곳에서 피난민 열차를 타고 피난길에 접어듭니다
그렇게 고난의 피난민의 삶을 살아가며 학령기에 학교도 못 가고 나무하고 벼동냥을 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아직도 나에겐 어린 시절 신주머니들고고 벼동냥 다녔던 그 상처가 깊게 마음에 남아 큰 상처로 작용을 합니다
그렇게 피난 생활을 하다가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고향이라고 찾아 들어간 곳은 곧 전쟁이 멈춘 수복지구였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철저하게 파괴된 고향은 황량한 땅 모든 것을 잃은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폐허였습니다
집도 군용천막으로 해결했고 학교도 천막 교실이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은 공부를 못 하고 책보를 싸갖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고향의 산하엔 불발탄이 너무 많이 너부러져있어 함께 놀던 동무가 고물 캐러 간다고 곡괭이를 들고 나갔다가 잘못 건드린 불발탄이 터져 고 작은 몸뚱이가 공중분해 되는 아픔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배가 고팠고 옷은 미국에서 지원해주는 구호물자로 당시는 미국의 구호식량과 우유 배급 옥수수가루로 끼니를 이어 갔고 삶의 질은 그냥 생명만 유지해 나갈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교실이 없어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흙벽돌을 쌓아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어 교실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공부를 했겠으며 제대로 된 공부가 되었겠습니까
중학교를 졸업한 해인 1961년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어 열일 곱 살 나던 해에 소년병으로 군에 입대합니다
1961년 군사 혁명으로 조국이 제2의 도약을 하던 해에 입대했는데 당시 자유당 정권에서 군입대를 미루고 도망 다니던 기피자들이 모두 잡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아버지뻘 되는 분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엠원총을 어깨에 메면 땅에 개머리판이 끌리며 어깨가 총의 무게로 아파와 고통스러웠습니다
귀 밑뿌리가 빨개 군복을 입고 군인이 된 어린 나이의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을 받았고 30년의 긴 군대 생활을 통해 월남전 파병 2회 공수특전단에서 수많은 공비토벌 작전 6.70년대 학생데모 10월 유신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등등 조국의 위기 앞에 앞장서서 조국 수호에 앞장섰으며 월남전 무공훈장에 빛나는 특별 진급으로 대한민국 육군 사 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육군 상사 진급의 역사를 쓴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육군대표 감독 시절 나의 최종 할력이 중졸이라서 각족 세미나와 지도자 코스에 입교가 안 됩니다
고졸 이상이라서 학력 콤플렉스가 아닌 진정한 학문에 목 말랐던 그때 입시학원에 가 면담을 했습니다
나이가 많아 고교 검정고시는 따라가기 힘들고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 하라 권해줘 수원에 있는 수성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 학업을 시작 했습니다
밤마다 방송을 들으며 학업을 계속했는데 방송 시그털 음악이 “롯시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였는데 이 음악을 뼈에 사무쳐 언제니 이 곳이 나여면 그때 그렇게 절실하게 공부했던 시절이 떠 오릅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인천 전문대 체육교육학과에 진학 체육교사 자격증과 기타 스프츠에 관한 자격증을 세 개나 보유하게되었습니다
웬만한 의지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인생의 승리 였습니다
일요일에 출석 수업을 하는데 당시 미그기를 몰고 수업중에 이웅평 중위가 남하 하는 바람에 현역군인인 나는 급히 부대 복귀를 해야만 했습니다
초년병 시절부터 사단 선수로 활동하며 당시는 축구를 군 정신전력의 중요 요소로 보아 매 분기 각 군단에서는 사단 대항 체육대회를 열었는데 각 종목 운동을 다 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축구가 대단한 인기였고 나는 중학교 때 실력으로 사단 선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내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는 지휘관들은 감동을받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뛰고 달리며 만일 우리 편이 지고 있으면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울며 뛰고 달려 기어코 승리하게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책임감이 강하고 용기와 호연지기가 있는 나는 뼈속부터 군인이었습니다, 제1공수특전단 시절에 전두환 장군을 지휘관으로 모셨는데 늘 말씀 하셨습니다. “홍속렬 너는 뼈속부터 군인이야 그리고 넌 3000명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가졌어” 하고 칭찬하시며 늘 중요 보직을 주셨습니다
군대 세계에서는 내가 가장 축구를 잘한다는 인식이 심어져 1977년 드디어 육군대표 축구 감독직에 보임 되었습니다.
내가 팀을 맡고부터 70년대 당시는 한국성인 축구에는 19개 실업 축구단이 있었는데 한국성인 축구의 최고봉인 금융, 실업, 군, 이렇게 구성된 한국축구의 최고봉으로 한국축구를 이끌어 갔습니다.
내가 육군대표축구팀을 맡을 즈음엔 육군 대표 팀은 중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그해 1977년 가을 실업연맹전에서 우승을 일궈 냈으며 그 후부터 승승장구 한국성인 축구 최고의 팀을 만들어 냈음은 물론 각 구단대표팀의 전부가 육군 선수 출신이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선수가 GK 김병지 그리고 손흥민의 父 손웅정까지 남자대표선수 50여명, 여자대표 선수 14명을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일궈 냈습니다.
그러니까 손흥민의 오늘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태국에서 개최하는 제13회 킹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일궈 내는 등 그 뒤로부터 육군대표 충의 축구단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대한축구협회 여성 분과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당시 한국여자축구가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서 여자축구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한국은 여자축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전국에서 다른 종목 운동을 한 여자 선수들을 공개모집 급조된 팀을 파견한 결과 참담한 결과를 갖고 불명예를 가득 안고 돌아온 여자축구의 현실을 보고 나라가 위급할 때 애국자가 필요한 것처럼 이때 내가 여자축구를 시작하자고 굳게 결심을 하고 여군으로 팀을 만들어 한국의 여자축구를 시작하자는 당찬 계획을 갖고 당시 국군체육부대장이 월남전에서 이웃 중대 소대장을 하셨던 분이고 노태우 대통령을 9공수단에서 여단장으로 모셨던 분이여서 여군으로 축구팀을 만들자는 건의서를 만들어 대통령의 재가까지 얻었으나 군의 씰링을 좌지우지하는 미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군 여군 팀의 창단은 무산되고 신학교를 운영하는 목사님이 선교 차원에서 여자축구를 하자는 제안에 철밥통인 안정된 상무(국군체육부대)를 제대해 나와 체육선교신학교 여자축구팀을 창단하게 됩니다
당시는 여자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정부 주도로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주고 여자축구팀을 창단케 했습니다
그러나 두 명문 학교는 돈만 받고 형식적으로 얼마간 팀을 운영하다가 그만 팀을 해체해 버립니다
이화여대, 숙명여대. 체육선교 신학교. 인천전문대 이렇게 4개팀이 초창기에 태동하여 한국여자 축구를 이끌어 나가는 기본이 되었고 대한 축구협회 여자축구 전문위원으로 여자축구를 발전시켜 나가고 대표팀을 운영해 나가는 주체가 되어 여자연맹까지 창단하여 오늘의 여자축구가 발전하는 기초를 닦았습니다
당초 체육선교 신학교는 무인가 학교로 팀을 이끌어 나갈 의지는 있었지만 재정적 뒷받힘이 안 돼 내 사비 곧 일시 퇴직금과 연금으로 팀을 운영하게 되어 거의 혼자 힘으로 7여년을 팀 이끌어 나가 나 개인은 파센에 이르게 됩니다
가족과 나 개인의 고난의 삶이 시작되어 이 나이 곧 여든이 된 이때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나가는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개척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게 개척해 나간다는 것에 나 개인도 한국의 여자축구 아무도 관심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볼모지에서 혼자의 힘으로 외로히 고독하게 그 어려움을 개인 나 홍속렬이가 오롯이 감당하며 한국의 여자축구의 기틀을 마련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2016년 중미 국가 온드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에 축구선교사로 파송되어 오늘까지 그곳에서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기독교 복음을 전했습니다
선교사는 그나라 현지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으면 선교사라 할 수없는데 나는 진정 그나라 과테말라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이제 귀국한지 한달이 채 안 되었어도 늘 보고 싶고 8년동안 가르친 아이들이 이제 스스로 팀을 운영해 나갈 자활력을 길러 놓고 돌아와 계속해서 잘 돌아갈 겁니다
KBS 축구해설위원이며 당시 대한 축구협회 부회정이였던 이영표 위원이 볼 100개(싯가 700 만원)을 보내줘 앞으로 5년을 넉넉히 사용할 량의 볼을 물려 주고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현재 내 나이 80세
우리의 역동적 시대인 6,7,8,90 년대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젊음을 다 바쳤고 이제 노병으로 남아 새삼 발전한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봅니다
보리죽도 못 먹던 민족이 위대한 조국의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로 나라가 이리도 발전하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돋음 했고 이제는 방위산업으로 세계에 우뚝 서서 북한 깡패 도당들의 시시각각의 위협에 대처하며 그들을 압도하여 도무지 도발할 수도 없는 격차를 별려 놓았고 세계열강에 접어들어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나라의 발전 규모에서도 북한은 우리를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때 일본과의 관계가 문제 되겠습니다
일본과는 지정학적 문제와 정치적 국토 적 문제에서 풀어야 할 것이 많은데 그중 독도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겠습니다.
독도는 분명히 우리땅이며 우리가 실효 지배를 하고 있는 마당에 일본은 국토문제에 있어 사사건건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 정부나 국민들은 좀 더 확고한 신념과 의지로 실효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 경찰이 독도를 지키고 있으므로 인해 대한민국의 영토가 분명한 가운데 이 노병이 근대와 현대에서 겪은 한국전쟁과 민족 수난의 시대에서 받은
고통을 공유하므로 인해 독도와 대한민국 영토. 분단된 조국에 대한 국토 사랑에 대해 더 깊은 숙고와 나라 사랑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한국전쟁 당시 여섯 살 백이가 머리가 흰 노인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한 축구발전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충성을 다한 마당에 우리 국민모두가 이 노병의 피맺힌 호소를 받아드려 나라 사랑, 민족 사랑, 독도 사랑,을 부르짖으며 호소하는 바입니다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전한 우리 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국제법 상에도 엄연히 우리땅인데 우기며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우리를 아직도 지네들의 식민 지배하던 그때를 회상하며 부리는 억지라는 걸 우린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린 더욱 강한 국가를 만들어 우리를 깔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일체 통일된 국민의 뭉친 힘과 능력을 세계에 보여줘야만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해야만 합니다
요즘 같이 국회가 파행으로 움직이며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적에게 허점을 보여 행여나 독도를 잃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국론 통일 일치단결 하나가된 민족의 힘 만이 독도를 지켜 나갈 힘이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도는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영토이며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 우리의 영토, 그리고 독도가 대한민국의 국토라는데서 오는 의미는 세계적인 인증의 표시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마지막 보류로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를 주는 독도를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지키고 유지해 나가야만 합니다.
첫댓글 현재는 평온하고 발전된 나라,대한민국의 성장을 가져온 산업역군들도 잊으면 안되겠지요.
풋볼님,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사회 각층에 숨은 공로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지혜를 찾아야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일들
많이 알려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