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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보고 증인이 되어 달라?”
“예.”
“내가 왜? 흥이다.”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획 돌리는 환야의 얼굴엔 분노의 그림자
마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지 말고 허락해 줘요. 그까짓 게 뭐 어려운 거라고 그리 뺍니
까?”
“암, 어렵지 않지.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지. 그저 니들 옆에서
조용히 서서 구경이나 해 달라는 말 아니냐?”
“그렇다니까요. 힘들 것 하나 없고 금방 끝나는 일 아닙니까?”
소문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환야에게 다시 한번 간청을 했
다. 하지만 환야의 음성은 냉랭하기만 했다.
“싫다.”
“아니, 왜 싫은 게요? 청하와 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이 그리
못 마땅하시오?”
소문도 슬슬 화가 나서 따지듯 물었다.
“배 아파서 그런다. 누군 혼자 외로워 죽겠는데….”
“허, 나참. 그럼 형님도 여자를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니요?”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는데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더
냐?”
“허이구!”
결국 소문은 가슴을 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
던 청하가 환야의 곁으로 다가왔다.
“큰 오라버니….”
다른 특별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청하가 그저 한번 부르는 것으로
환야의 태도가 눈에 띠게 달라졌다.
“흠, 흠.”
“오라버니….”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 그런 얼굴로 바라보지 마라.”
“그럼 허락을 한거요!”
소문이 희색이 만연하여 확실히 다짐을 받으려는 냥 말을 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 정혼의 증인이 되어주지. 단 조건이 있다.”
“조건? 뭐든 말만 하시요. 내가 청하를 달라는 것 빼고는 다 들어
주겠소.”
“으이구! 말하는 것 하고는… 청하가 물건이냐? 달라고 주게?”
대뜸 핀잔을 준 환야가 소문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조건은 둘이 행복하게 잘 살라는 것 하고, 언제가 내 부탁이나
하나씩 들어 달라는 거다.”
“부탁이요? 어떤….”
청하가 물었다.
“글쎄, 아직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말해주지. 뭐 둘이 낳
은 아이를 제자로 달라고 할 수도 있겠고….”
“흥, 하인으로 부려먹지만 않으면….”
“싫으면 관둬라. 난 가서 잠이나 잘란다.”
심드렁하게 말을 한 환야가 방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쉬운 것은
소문이었다.
“아, 알았소. 계속 해 보시요.”
“뭐, 대충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 확실하게 결정은 한 것은 아니지
만….”
“알았소. 다 들어 줄 테니까 증인이나 서 주시구려.”
소문은 두 번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을 하고는 여전히 시큰
둥 한 환야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소문이 청하의 허락을 받은 날로부터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 둘은 간단한 의식과 함께 혼인을 하였다. 물론 소문과 청하
가 장백산에 돌아가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모시고 다시 혼인
식을 치루기는 하겠지만 청하의 마음을 염려한 소문의 주장으로
환야를 증인 삼아 약식이나마 간단히 혼인식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제길, 결국 시도도 못 해보고 이렇게 멍청한 꼴이 되었군. 한심한
인간이야….’
나무 밑에 앉아 혼자서 연신 술을 들이 키고 있던 환야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주변엔 벌써 십여 개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연신 술을 들이키던 환야가 고개를 들어 한 곳을 응시했다
. 그가 바라보는 곳은 청하와 소문이 첫날밤을 보내고 있는 방이었다.
그렇게 정혼녀를 찾아 머나먼 이국땅에 들어온 소문은 전혀 다른
여인이긴 하지만 마침내 사랑하는 여인을 얻고야 말았다.
소문과 청하가 혼인을 하였다지만 셋의 생활에는 그다지 큰 변화
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야는 여전히 좌충우돌 하며 틈틈이 몸이
약한 청하를 위해 몸을 건강히 할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내공
심법을 전수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소문은 전과 마찬가지
로 오전에는 강물 속에 들어가 수련을 하고 오후엔 절벽을 기어
오르며 망가진 몸을 회복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청하 역시 집안
살림을 하며 소문과 환야에게 정성을 다 했는데 특히 자신과
소문의 혼인에 적지 안이 쓸쓸해하는 환야를 위해 자신이 아니라
환야와 혼인을 한 것 같다는 소문의 핀잔까지 들어가며 최선을다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소문과 청하가 한방을 쓴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난날에도 둘이 함께 방을 쓴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청
하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소문의 수발을 들기 위해 한방을 쓴 것이고
, 지금은 그때의 상황과는 틀림없이 구별되는 것임은 삼척동자
라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압!”
기합소리와 함께 엄청난 높이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회하촌의 북
쪽 강변, 오늘도 어김없이 수련에 열중인 소문을 볼 수 있었다.
압력이 거센 강물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발놀림은 둘째 치
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 속에서 그동안 배웠던 검법 등을 목
검으로 시전 하는 소문의 동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횡소천군을 필두로 태산압정, 팔방풍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들
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간간히 폭발적인 기
운을 보이는 것을 보아 절대삼검 까지 펼치고 있는 듯 했다.
파바팡!!
파공음과 함께 강물이 요동치고 소문의 정면으로 기적처럼 하나의
길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비록 그 시간이 짧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건 틀림없이 강물이 갈라진 현상이었다.
소문이 펼친 무심지검의 기운이 일순간 강물을 가르고 지나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 대단한 솜씨!”
막 펼쳐진 무심지검의 위력에 감탄을 한 환야가 소문을 부르려다
멈춘 것은 소문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감
지한 직후였다.
무심지검이 끝이 아니었다. 무심지검을 시전하고 강물이 잠시 진정
하기를 기다리던 소문의 손이 하늘로 향해지고 강물에 잠겨 있던
거무튀튀한 목검이 물기에 번들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목검, 무심한 두 눈 그 어떤 외부의 힘에도
굴하지 않을 듯한 천주부동의 자세!
소문의 무공에서 이러한 기세와 자세를 자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
절대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무극지검을 펼치기 위한 기수식이였다.
“절대삼검 제3초 무극지검!!”
꽈과광!!
낭랑한 기합소리와 함께 머리위에 있던 목검이 내려오고 소문을
삼킬 듯 넘실대던 강물이 어마어마한 기운에 밀려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물고기들이 충격을 못 이겨 튀어
오르고 새하얀 모래를 자랑하던 강변의 모래사장엔 소문의 주변에
서 밀려난 강물이 화풀이나 하려는 듯 거칠게 덮쳐 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멈춰 있던 소문의 목검이 서서히 움
직이고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절대의 기운!
단 한번의 시전으로 모든 내공을 앗아갔던, 그래서 내심 절체절명
의 위기가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절대삼검의 최후
초식, 무극지검이 또 한번 펼쳐지고 있었다. 그 기세 또한 방금
전에 펼쳤던 것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부족하지 않는 실
로 엄청난 위력으로 겨우 본래의 모양으로 회복하려던 강물을 휩
쓸고 지나갔다.
쿠구구구쿵!
대지를 무너뜨릴 것 같은 강기의 소용돌이가 소문을 휘감아 돌며
소문의 주변엔 더 이상 강물이 존재하지 못했다.
소문을 바라보는 환야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일신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환야였지만 근
래에 소문을 보며 많은 것을 느낀지라 소문이 수련에 힘쓰는 동안
그 또한 익히기는 했으나 아직 완벽하게 깨우치지 못한 무공을
완성하고자 땀을 쏟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일찌감치 수련을 마친
오늘은 소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고 소문의 수련장소로 온 것
인데… 실로 우연히 절대삼검의 위력을 목도(目睹)하게 된 것이다.
“대, 대단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건 도대체가….”
환야는 너무나 엄청난 무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환야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고 바닥을 드러낸 강가에 굳건히
서 있던 소문의 움직임이 다시 이어졌다.
꽝!!
수 천년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지내던 바닥의 돌과
모래 등이 사방으로 날리고 목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을 감당
하던 강물마저 밀려난 지금 소문이 내뿜는 기운을 막을 그 어떤 것
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도히 사방을 휩쓴 기운들은 특히 정면에
서 있는 절벽의 곳곳에 수없이 많은 상처를 남기고야 멈추어 졌다.
“으…으….”
비록 십여 장이 넘게 떨어져 있던, 본격적으로 기운이 밀려온 곳도
아닌 소문의 뒤편에 있던 환야였지만 잠깐 동안 소문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은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저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과연 누가 있어 저 기
운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환야의 안색은 마치 비무에서 패해 낭패한 무
인의 얼굴 같았다. 환야가 아무리 소문과 형제의 연을 맺었다지만
그에 앞서 그도 강함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
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당하지 못할,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
여도 상대하기가 불가능한 무공을 보게 되었으니 절로 패배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무공 또한 이에 못지않으리라 난 믿는다.
비록 내가 제대로 익히지 못해 본래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진 못
하지만 그 무공을 완성만 한다면 이런 패배감에 사로잡히지는 않
으리라!”
“뭐해요? 형님! 뭘 하느냐고요?”
“응? 아! 자네구만. 언제 왔는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을 하는 환야를 바라보는 소문의 시선은 황담
그 자체였다.
“내참, 내가 형님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기나 합니까?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멍 해가지고선… 쯧쯧쯧….”
“험험, 홀리다니! 그저 잠시 딴 생각을 했을 뿐이네. 그나저나 방
금 시전 한 무공이 뭐였나?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네. 내 많은 무
공을 보아왔어도 그런 무공은 처음이었네. 자네의 궁술이 하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검술은 오히려 궁술을 능가
하는 것 같네 그려.”
“어! 내가 궁술을 익힌 것은 어찌 알았습니까?”
소문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환야는
재빨리 그런 기색을 감추고 태연스레 대답을 했다.
“어찌 알긴! 지난번에 자네가 말해주지 않았나.”
“이상하네. 그런 기억이 없는데….”
소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환야는 대뜸 화를 내며 퉁명한 목소리
로 말을 했다.
“자네가 말을 하고 그걸 나에게 물으면 내가 어찌 알겠나. 암튼 자
네가 말을 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의 책임이지.”
“그런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았다. 그리고 사실 그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랬나보네요. 요즘은 정신이 영….”
“젊어서 벌써 그러면 안 되지.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무공이 어떤
것 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나?”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환야는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
다.
“뭐, 별건 아니고… 무극지검이라는 초식으로 그저 집안에 내려오
는 무공입니다.”
“별게 아니라니? 그게 별게 아니면 도대체 어떤 무공이 별거란 말
인가? 좀 전에도 말했듯이 난 여태껏 그 정도의 무공을 본적이
없네.”
“하하! 그런 과찬을… 제가 쓰고 있는 무공은 한두 개를 제외하곤
모두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전무공입니다. 그리고 아까 본
검법은 가문에 내려오는 유일한 검법이지요. 사실 원래 마지막
초식인 무극지검은 한번 쓰기도 힘에 부치고 제대로 익히 못했는
데 지금은 연이어서 몇 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혀 생각
하지도 않았는데 내상이 깔끔이 치유되고 나니 이처럼 이어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공도 이전에 비해서 상당히 증가한 것 같
고…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랬다. 장백산에서 무위공을 익혀 순식간에 엄청난 내공을 모은
소문은 이후 한계에 다다랐는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생사를 걸고 적과 싸우는 동안 심한 외상과 내상도 입고 내공이
바닥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어떤 장벽에 가로
막혀 있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던 무위공 한계가 무너지고
무서운 속도로 내공이 증가하고 있었다. 최근에 까지 이어진 내공
의 증가는 다시 벽에 막혔다. 그러나 소문이 지닌 내공의 수위는
과거에도 거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건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
여 한 단계 증가한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중원으로 출도 할
때 겨우 7성에 불과했던 무극지검의 수위가 만독문과의 싸움에
선 어느새 9성에 이르고 지금은 12성에 육박하고 있었다. 검법
의 조예가 깊어진 만큼 헛되이 사용되는 내공이 현저히 줄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많은 실전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루어진 의외의 성과였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겨우 한번의 시전에 모든 내공을 쏟아내
고 내공을 잃게 만들었던 무극지검을 무려 세 번에 걸쳐 연속으로
사용하고도 몸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허참, 많은 싸움을 통해 무공이 증가할 수도 있겠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처음 보겠네. 뭐, 암튼 축하하네. 자네는 무인이라면 꿈에도
그린다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한 셈이 아닌가?”
“예? 환골탈태라니요?”
소문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물었다.
“자네를 처음 발견했을 때 온 몸이 포(脯)를 뜬 것처럼 난도질 되
어 있지 않았겠나. 거기에 양손의 뼈란 뼈는 다 부러져 있었고…
그런 자네가 상처도 다 낳고 뼈도 더 단단하게 붙었으니 환골탈태
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하하!”
“어이구! 내가 미쳐!”
그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소문을 앞에 두고 사방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던 환야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절벽도 오르고 몸 또한 정상으로 되돌아 온 듯하니 이
제는 떠나야 될 시간이 된 것인가?”
“그래야지요.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지요.”
간신히 회복된 팔과 겨우 쥘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지 한달 째, 마침내 어제 저녁, 소문은 무공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절대 불가능할 듯 보였던
절벽을 점령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최종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
를 파악해 본 것이었다. 그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힐끗!
걸음을 옮기던 청하의 고개가 돌려지고 텅 비어 버린 집을 바라보
는 청하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청하의 손을 잡은
소문은 부드럽게 말을 했다.
“청매,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아쉬운 마음은 그만 접고 가야지.”
고개를 돌려 소문을 바라본 청하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였다. 말은
그리 했지만 소문 또한 청하와는 다른 느낌에 사로잡혀 남겨진
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북쪽 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절벽을 바
라보았다.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가로 가봐야 아무도 없지 않나? 그들은 이미 정도
맹인가 하는 곳으로 떠난 지 오래인데….”
소문의 상념을 깨뜨리며 환야가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어제 말씀드
리지 않았습니까? 비록 아무도 없는 당가일 지라도 한번은 가봐
야겠습니다.”
“흠, 알았네. 그럼 가세나.”
소문의 눈에서 한광이 스쳐지나가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환야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소문과
청하가 나란히 따라갔다.
그들의 예상대로 당가엔 을씨년스런 바람만 불어댈 뿐, 그 누구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는 살아서 다시 이곳에 왔구나….’
느린 발걸음으로 정문을 통과하는 소문의 가슴에 만감(萬感)이 교
차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설렘과 흥분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에 마음이 무거웠다.
꽤 시간이 걸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당가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한 한 건물의 앞이었다. 굵고 진한 글씨체로 편액에 집법당이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청하와 잠시 이곳에 계십시오.”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선 소문은 자신과 철면
피가 갇혀 있었던 밀실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소문이
목을 매었던 쇠사슬이었고, 넘어진 의자, 바닥에 굴러다니는 몽둥이
와 각종 고문기구 등이 그를 반겼다. 사방을 훑어가는 소문의 눈
은 너무나 차갑게 가라 앉아 있었다. 밀실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곳곳에 쌓인 먼지만이 이곳이 상당히 오래
방치되었음을 알게 해 줄 뿐이었다.
“큭큭큭!”
무엇을 본 것일까? 갑자기 괴소(怪笑)를 짓는 소문의 몸에서 엄청
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면피야….”
한쪽 벽으로 다가간 소문은 벽을 매만지며 나직이 자신을 보호하
다가 먼저 간 친구, 철면피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소문이 바라보고
만지고 있는 벽에는 당소희의 발길질에 무참히 쓰러진 철면피가
만든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계속된 고문과 구타, 면피의 처
절한 죽음! 절대로 잊지 못할 그때의 상황이 확연히 떠오르며 소
문을 괴롭혔다.
“음….”
잠시 동안 벽을 바라보던 소문이 천천히 몸을 돌려 집법당을 빠져
나왔다.
“갑시다.”
“자, 자네 괜찮은가?”
“오라버니!”
집을 떠나기 전, 당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은 그들이기에 내
심 마음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이 막상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하니 오히려 이상했다.
“후후, 괜찮아요. 괜찮아 청매.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되돌릴 수도
없는….”
자신을 염려하는 환야와 청하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소문이 살며시
미소를 짓고 그런 모습에 그들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정도맹으로 가야지요.”
“…….”
“너무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청매도 그런 얼굴은 하지 말고….”
소문은 어두운 안색을 하는 둘을 달래며 말을 이었다.
“난동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니… 다만 이대로 묻어둔다면 면피를
볼 면목이 없어서요.”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얽혀 있는 것을 풀려면 당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지. 알았네. 그럼 자네의 뜻대로 하게. 어차피 말려선 듣
지도 않을 듯하니… 기왕 가기로 한 것, 지금 바로 떠나세.”
“그러지요.”
인적 없는 당가에 들어왔던 이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
히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도맹이 있는 하남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결자해지라… 암, 얽힌 것은 당사자들이 만나서 풀어야만 하는 것
이지. 당사자가… 하지만! 난, 결코! 철면피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기다려라!’
“그게 아니다. 한 호흡이 늦지 않았느냐?”
“소손은 초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친 것인데 늦은 것입니까?”
최근 새롭게 익히고 있는 제왕검법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
고 수련에 힘쓰던남궁진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검성의 지적에
검을 거두고 공손하게 물었다.
“상대가 너보다 하수라면 모를까 비슷한 수준이거나 뛰어나다면 큰
낭패를 봤을 것이다. 초식의 흐름은 자연스러웠지만 세기와 빠름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초식이라는 것은 막힘이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질 때 큰 위력을 지니지만 그에 더불어 순간순간 적절한 시기
에 펼치고 거두어 들여야 진정 그 초식이 지닌 위력을 다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지금 펼친 것처럼 아무리 자연스럽게
초식이 운용되었다 하더라도 적이 이미 그 초식에 대비하고 준비
를 하고 있다면 그다지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은 적이 눈앞에 없기 때문에 그리 펼쳤을 수도 있지만 검을 들고
수련을 할 때에는 항상 바로 앞에 적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
상대와 싸운다는 가정 하에 수련을 하도록 하여라. 지금보다는 한결
성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남궁진의 힘찬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남궁상인은 남궁진과 더
불어 자신에게 검을 배우고 있는 또 한명의 무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힘찬 기합성과 함께 지면을 박차고 올라 연신 검을 휘두르
고 있는 남궁혜가 있었다.
‘허허, 벌써 저기까지! 내 익히 혜아의 실력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
게 뛰어날 줄이야! 아깝다. 아까워! 혜아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쯤은 또래의 그 누구보다 앞선 실력을 지니고 있을
텐데… 나의 어리석음이다. 왜 미리 저토록 뛰어난 혜아의 자질을
이제야 알아보았단 말인가?’
홀로 검무를 추고 있는 남궁혜를 바라보며 남궁상인은 자조의 미소
를 지었다. 그런 남궁상인의 뇌리에 어느새 그날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른 세가의 제자들은 저마다 정도맹을 건설하는 공사에 참여하여
일손을 거들었지만 이미 정기가 크게 상하고 인원마저 보잘것없는
남궁세가는 다른 세가와 정도맹의 수뇌들의 배려로 그 공사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은 매일 같이 무공연마에 힘쓰고 있었다. 가주인
남궁검과 남궁우가 나서서 직접 나서서 일일이 식솔들과 제자들
을 챙기고 독려하며 지난날 남궁세가의 영화(榮華)를 되살리기 위한
초석(礎石)을 닦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부터는 진아는 나에게 검법을 배우도록 하여라.”
남궁상인은 세가의 식솔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남궁진을
지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앞으로 세가를 책임질 남궁진의 실력을
향상시티는 것과 더불어 남궁세가 최고의 절학인 제왕검법을 전
수하겠다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남궁진보다 오히려 남궁검이 감격을 하여 인사를 했다.
“허, 할애비가 손자에게 무공을 가르친다는 데 감사는 무슨,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리 알고 너는 오늘부터 나와 무공을 익히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담담하게 말은 하였지만 대답을 하는 남궁진의 가슴은 흥분에 사로
잡혀 주체를 못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따로 떨어져 연신
검을 휘두르던 남궁혜가 다가왔다.
“저도 가르쳐 주세요.”
“응? 혜아로구나. 방금 무어라 했느냐?”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 무공을 익히고 싶습니다.”
남궁혜는 또랑또랑하게 말을 했다.
“이런, 무공을 익히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지만 네 수준에선 아직
무리다. 우선은 어느 정도 실력을 키우도록 하자꾸나.”
남궁검은 당차게 말하는 남궁혜에게 부드럽게 말을 했다. 남궁상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허, 혜아야. 무공이란 것은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것이니라.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다고 처음부터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라.
우선은 기초가 중요한 것이지. 듣기론 너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아직은 나의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무리
가 따를 터이니 조금 더 수련에 힘 쓰거라. 그런 연후에 너에게도
나의 무공을 전수해 주마. 어차피 나의 무공이 세가의 무공이 아니
더냐. 허허허!”
남궁혜는 자신을 바라보며 타이르듯 말을 하는 백부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남궁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검을 정중앙에서 비스듬히 세웠다. 비무를 청하는
자세였다.
“하하, 왜 그러느냐? 엉뚱하게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냐?”
남궁진은 남궁혜가 자신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에게 화풀
이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할아버지의 무공을 배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저와 오라버니
의 비무를 보고 판단해 주세요.”
남궁혜는 여전히 검을 세운 체 말을 했다.
“어허, 어서 그 검을 거두어라. 네 마음을 알겠지만 이런 억지를 부
려서야 되느냐?”
“허허, 되었다.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한번 손속을 겨루어 보거
라.”
“아버님!”
“되었다. 아무리 남매지간이지만 저 아이들 또한 무인이다. 호승심
이 있을 터. 어디 한번 지켜보자꾸나.”
말리는 남궁검에게 말을 하던 남궁상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호
기롭게 외쳤다.
“자, 어디 너희들이 지닌 재주를 뽐내 보거라.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여 서로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세가의 다른 사람들 또한 비무에 적당하도록 거리
를 두었다.
“흠,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비무를 하는구나. 어디 그 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
남궁진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며 검을 세웠다.
“어찌 될 것 같으냐?”
“이전에도 몇 번 비무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진아가 승리를 했습
니다. 비록 혜아가 세가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흠… 그렇겠지.”
이미 남궁혜의 뛰어난 실력은 세가에 정평이 나있고 지난번 패천궁
과의 싸움에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발군의 실력을 보였었다.
하지만 남궁상인이 보기엔 아니었다. 뛰어나기는 했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대부분의 세가, 문파에서 그렇듯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고 무공을 전수받는 이들은 대부분이 가문을 이을 남자
자손이었다. 물론 여자들도 무공을 전수 받기는 하지만 전수하는
어른들의 노력과 관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는 남궁세가 역
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남궁진은 앞으로 남궁세가를 이끌어갈 장
자이자 장손이었으니 그 기대가 남달랐다.
‘허허, 혜아가 이번 일로 상처나 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남궁상인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동안 감추어 왔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지그시 남궁진을 응시하고 있는 남궁혜는 필승을 자신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남궁혜의 실력은 남궁진을 앞선 지 오
래였다. 세가의 모든 시선이 남궁진에게 쏠리고 있는 동안 남궁혜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보내지는 시선은 실로 미미했다. 그리고 그들
의 생각대로 그녀들은 그다지 뛰어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
만 남궁혜만은 예외였다. 아무도 모르는 심지어 그녀의 부모조차
제대로 알진 못했지만 남궁혜는 실로 엄청난 자질을 지닌 무재(武才
)였다. 남궁진이 아무리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전수 받
았어도 열다섯을 넘긴 이후 그녀는 스스로가 남궁진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을 포함하여 집안 어른
들이 사촌 오라버니인 남궁진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기에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일신에 지닌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 간간히 보여주었던 무공도 절대로 남궁진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
여주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였기에 그 정도로도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몇 년을 숨겨온 무공실력을 드
러내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하앗!”
“헛!”
힘찬 기합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남궁혜가 남궁상인을 비롯하여 몇 남지 않은 남궁세가의 식솔들 앞
에서 남궁진에게 비무를 신청했을 때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무공을 배우고 싶은 남궁혜의 억지라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허나 막상 비무를 시작하고 남궁혜가 남궁진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움을 하는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
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특히 남궁검과 남궁상인은 경악을 금치 못
했는데 그녀가 시전 하는 창궁무애검법의 성취가 이미 완숙의 경지
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공이 따라주지 못해 남궁진이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지 남궁혜의 내공이 남궁진에 버금만 간
다면 벌써 끝나고 남았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연신 감탄사를
내 뱉었다.
“허, 이런 일이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혜아의 실력이 저리 뛰어날 줄은 소자도 미처 생
각지 못했습니다.”
“허허, 도대체 우린 무엇을 했단 말이냐? 집안에 저런 아이가 있다
는 것도 모르고….”
남궁상인과 남궁검의 탄식 어린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 비무가 끝
이 났다.
“져… 졌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힘없이 검을 늘어뜨리며 패배를 자인하는 남궁진의 안색은 처참하
게 일그러졌다. 무려 반시진이나 이어진 비무는 결국 부족한 내공
에도 불구하고 남궁혜의 승리로 끝났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리고 남궁혜가 남궁진과 더불어 자신에게 검을 배운다고 선
언한 남궁상인의 결정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경악의 눈
으로 남궁혜를 바라볼 뿐이었다.
“후, 어느새 또 저만큼… 이제는 더 이상 혜아를 따라갈 엄두가 나
지 않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남궁혜를 바라보던 남궁진은 절로 감탄을 했다.
비록 남궁혜에게 패했지만 그는 남자였다. 패배감에 사로잡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남궁혜와 사이가 벌어지거나 그녀를 시기하지 않았다
. 오히려 틈만 나면 남궁혜에게 비무를 청하여 자신의 실력을 키
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비무 조차 청하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났음을 은연중 느끼게 되자 약간 씁쓸한 어조로 말을 했다.
“흠, 그렇구나. 네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조차 혜아가 저 정도의 성
취를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내공만 갖추어진다면 현 가주와
비견될 정도야.”
남궁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남궁상인의 말은 남궁진을 깜짝 놀라
게 만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 그 정도 입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내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어려서부터 내공의
기초를 다지긴 했지만 제왕검법을 펼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니…
혜아의 실력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남궁상인의 말에서 그녀의 실력을 일찍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책망
함이 역력히 느껴졌다.
잠시 후, 남궁혜 또한 검을 거두고 남궁상인에게 다가왔다.
“수고했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구나!”
“모든 것이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휴, 이제 더 이상 비무하자는 소리도 못하겠다. 비무라는 것이 수
준이 비슷해야 제 맛이 나는 것이지. 이거야 어디….”
짐짓 엄살을 피우며 말을 하는 남궁진을 바라보며 남궁혜는 그저
살짝 웃을 뿐이었다.
“예끼, 이 녀석아. 비무라는 것이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고 자신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기 위함이지 멋이라니?”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슬쩍 꼬리를 마는 남궁진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남궁상
인이 정색을 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진아와 혜아는 들어라.”
“예.”
“예 할아버지.”
“그동안 많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아직도 너
무 구결에 얽매여 있는 것 같구나. 모든 무공이 그렇듯 초식을 시전
할 때는 항상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해선 구결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
겨야 한다. 구결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물론 구결에 얽매이지 아니하되 때에
따라선 구결에 정신과 몸을 맡겨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거라.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
준에 오르기 위해 정진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내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남궁혜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남궁진 또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소가주님!”
다급하게 남궁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세
가의 제자가 눈에 띄었다.
“춘명(瑃冥)이로군. 웬일인가?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하게 뛰어 오
는가?”
다급하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모양에 뭔가를 느꼈는지 순간 긴장한
남궁진이 급히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세가가… 세가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떠나올 때부터 이미 무너진 것이 아
니던가?”
남궁진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이상하게 춘명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아니오라….”
잠시 말을 머뭇거리면 말을 하지 못하자 남궁혜가 입을 열었다.
“혹시, 세가에 남아 있던 분들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있었나요?”
“그, 그러니까 그게….”
“어허, 무슨 말이 그러하더냐? 말을 꺼냈으면 올바르게 소식을 전해
야지 그렇게 얼버무리면 되느냐?”
남궁상인 또한 궁금하기는 매한가지 결국 춘명을 나무라는 소리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에 그만… 세가를 지키
고 있던 남궁가의 식속들과 치료를 받던 무인들이 탈출을 감행했다
합니다.”
“뭣이! 탈출을?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다더냐?”
“아직 자세한 결과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무인들이 곧바로
뒤를 쫓은 패천궁의 추격대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우리 부모님은 어찌 되었습니까?”
남궁혜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두 분의 생사에 대해선 이렇다할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가에 머무르던 인원이 떠나자 패천궁의 악도들이 그나마 남아있던
세가의 전각을 모조리 불살랐다 합니다.”
“그랬구나. 결국 그리 되었어.”
남궁상인은 불타오르는 세가를 생각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러나 세가를 떠나올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곧 안색을 회복한
남궁상인은 여전히 자신를 바라보고 있는 춘명에게 말을 했다.
“또 할말이 있더냐?”
“지금 곧 의사청으로 모시고 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의사청으로? 흠, 그래. 알았다.”
남궁상인은 불안한 마음에 안색을 찌푸리고 있는 남궁혜를 다독였
다.
“걱정하지 말거라. 큰일이야 있겠느냐? 아마 무사할 것이다.”
“그래, 숙부님과 숙모님은 틀림없이 무사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남궁진 또한 남궁혜의 두 손을 잡으며 애써 위로했다. 하지만 남궁
혜의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의사청에는 이미 정도맹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의 수뇌들이 모여 한
참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정도맹에는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오
대세가, 강북에 산재한 많은 백도문파와 무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장강에서 직접적으로 패천궁을 막고 있는 무당파와
패천궁의 갑작스런 기습에 당한 청성, 아미, 점창파에선 몇몇 인
사들만 문파를 대표하여 정도맹에 입성해 있을 뿐이었다. 그들 대
부분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벌써 많은 의견이 오갔는지 그들
대부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남궁상인이 의사청에 들어서자 회의에 분주했던 사람들이 급히 자
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래 탈출을 한 사람들의 소식은 있는가?”
남궁상인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앉자마자 자신이 궁금해 하
는 것을 물었다. 그보다 먼저 의사청에 들어온 남궁검이 재빨리 대
답을 했다.
“아직 이렇다할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만 간간히 들어올 뿐입니다.”
“허!”
“문제는 그것을 빌미로 해서 패천궁의 병력이 대거 북상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남궁세가를 탈출하면서 제법 많은 패천궁의 무인들이 죽은 모양입
니다. 그러자 패천궁에선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신의를 어겼다는
핑계하에 이미 장강을 넘어 무당과 제갈세가로 움직이고있다합니다.”
“흠….”
제갈공은 침중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 진 것
일 뿐입니다. 문제는 쳐들어오는 저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흥, 쳐들어오면 맞서 나가 싸우면 될 것 아니겠소이까? 천하의 백
도인들이 모였소이다. 게다가 저들이 치려는 무당과 제갈세가의 근
처엔 이미 온갖 절진들이 펼쳐진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 진을
이용해 기습을 하고 진을 뺀 뒤에 지친 그들에게 맹공을 가하면 승
리는 당연히 우리의 것일 것이외다.”
“허허, 황보가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오죽이
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들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무리수를 쓰진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 저들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지금 장강을 지키고
있는 병력으론 절대 막지 못할 텐데 말입니다.”
맹주인 영오대사가 물었다.
“아직은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선은 장강으로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제가 그 병
력을 따라가겠습니다.”
“군사께서요?”
“예. 패천궁이 아무리 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제갈세
가에서 펼쳐놓은 진과 무당파와 연수하여 많은 백도인들이 지키고
있는 저지선을 그리 쉽게 뚫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다행인 것
은 며칠 전에 운상진인께서 무당으로 돌아가시고 때를 같이하여
금정신니께서 여기 계신 명진 사태를 제외한 아미파의 모든 제
자들을 이끌고 장강으로 떠나셨다는 겁니다. 그분들의 힘이라면
아마 정도맹에서 파견되는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는 패천궁
을 상대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로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원 병력이라면
어떤 병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들과 상대하자면 웬만한
수와 무공수위로는 부족할 듯싶습니다.”
“곽장문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정도맹의 핵심전력인 복마
단, 호천단, 의혈단 모두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장강으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제갈공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계신 수뇌분들 또한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를 해 주시고 나
머지 제자들을 준비시켰으면 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적의 계책(計策)이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남궁우의 지적은 좌중의 인물들을 일순 긴장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은 지난 강남과 사천에서 저들의 책략에 말려 농락당한
너무나 아픈 기억을 새삼 떠오르게 만들었다.
“하하! 그래서 미리 준비를 해 두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
고 그 점은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개방에서 그들의 동태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물론이오.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다신 없을 것이외다.”
강남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최선을 다해 방도들을 독려하고
있는 황충이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약까지 생각해야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 정도맹에겐 좋은 호기(好機)가 될
겁입니다.”
제갈공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호기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번의 일이 저들이 우리의 시선을 딴 곳으
로 돌리려는 시도라 한다면 우리는 아예 장강을 넘어 그들의 본
거지를 치는 것입니다. 저들이 다른 곳에 병력을 집중시킬 때 말
이지요. 이번에 지원을 하러 가는 병력은 정도맹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막강한 전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적의 빈집을 치는 것은 그다지 어려
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
“좋은 생각이오.”
제갈공의 말이 끝나자 저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
만 그런 그들의 감탄은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에 의해 제동을 받
았다.
“안됩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 일 뿐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갈공의 옆에서 조용히 사
태를 지켜보고 있던 제갈영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바램일 뿐이라니?”
수뇌들의 회합에 당돌하게 나서는 그녀를 보고 저마다 약간은 못
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제갈공은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우선 객관적으로 정도맹의 힘이 패천궁에 비해 처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장 저들이 모든 힘을 집중하여 장
강을 밀고 올라온다면 아무리 제갈세가가 설치한 진과 많은 무인들
, 지원병이 파견된다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험!”
“흠!”
그녀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 그러했기에 누구하나 입
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제갈공만이 입을 열 뿐이었다.
“하지만 지원 병력이 제때에 도착만 한다면 쉽게 패하지도 않으
리라 보는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여기서 그곳까지 도착을 하려면 삼일이 걸
립니다. 패천궁이 아예 작심을 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진으로 둘러싸고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절대 삼일
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패천궁 또한 막대한 손실
을 입게 됩니다. 비록 장강을 넘어 저지선을 뚫기는 하겠지만 다
시 지원된 병력과 싸움을 벌이고 나면 패천궁 또한 살아남는 자
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병력으로 중원에 군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정도맹을 굴복시켜 중원을 제패하겠다는 저
들의 의도를 감안하면 표면적으론 성공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이냐?”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당천호가 질문을
했다.
“예. 어르신. 모르긴 몰라도 저들의 주요 공격지점이 장강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말이 아니더냐? 저들이 다른 곳은 공격한
다면 네 아버지 말대로 장강을 넘어 저들의 본거지를 치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당천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했다. 자리에 모인 대
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약간 다릅니다. 정도맹에서 장강을 넘는 동안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직접 치고 들어올 수 있고
또는 우회하여 화산이나 소림을 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
가 자리를 비운 상태라 아마 손쓸 틈도 없이 당하고 말 것입니다
. 화산의 지리적 위치나 소림이 무림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난 강남이나 사천에서의
패배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저들의 본거지를 친다 하지 않았느냐?”
곽무웅이 강하게 부정을 하며 말을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그 또한 성공하기가 힘들다 생각합니다.”
“그건 또 어찌 그러냐?”
“아버님께선 저들이 다른 곳에 병력을 집중시킬 것이라 말씀 하
셨지만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도맹의 주력이 장강에 모여
남하를 하는데 패천궁의 모든 힘을 다른 곳에 쏟을 리가 없습니다
. 그들이 지닌 힘의 육에서 칠 할은 남겨두고 있을 것입니다. 저
들의 삼할 힘으로는 주력이 빠진 화산이나 정도맹, 소림을 칠 수
있지만 정도맹의 주력은 비록 육 할 정도에 불과하지만 남아 있
는 저들에게 필승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잘해야 양패구상 정도
로 생각됩니다. 억울하지만 그것이 현 시점에서 패천궁과 정도맹
의 전력차이 입니다. 그리 되면 이번 싸움은 끝이 난 것이나마찬가지
지요.”
“음….”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리게만 보았던 제갈영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정도맹
의 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공이 간과하는 부분까지 지적하고 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저도 확실한 방법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들의 의도를 제
대로 알지 못하고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켜 움직이거나 공격 하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
이 아직은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이 장강으로 밀려오고 있다 하
니 우선은 아버님의 말씀대로 지원 병력을 장강에 보내야 할 것입
니다. 하지만 저들이 필시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있을 터 한시라
도 눈을 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들의 다음 행동을 재빨리 알
아채지 못하면 지난번보다 더욱 뼈아픈 낭패를 볼 것입니다.”
말을 마친 제갈영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의사청엔 깊
은 적막만이 자리를 잡았다.
“흠, 그래도 우선은 장강에 지원 병력을 파견한 연후에 그들의 다
음 행동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소이다. 황충 장로님과 개방에서
많은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번엔 틀림없이 저들이 어떤 일을 획책하고 있
는지 사전에 알아내겠습니다.”
황충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영오대사는 고
개를 돌려 제갈영영과 대화를 나누는 제갈공을 바라보았다.
“허허, 영애께서 저리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
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직은 어린아이 입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움직일 호천, 의혈, 복마단은 정도맹의 핵심이
자 가장 중요한 병력입니다. 저들이 혹 다른 음모를 지니고 있다면
그에 발 빠른 대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들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까 말씀하신 대로 군사께서 지원 병력을 이끌
고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비록 능력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갈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허허, 겸손의 말씀을… 그리고, 제갈영영 소저를 군사께서 자리
를 비우시는 동안에 정도맹의 지낭 역할을 해 주실 부군사의 자
리에 임명하겠습니다.”
“옛? 맹주님! 영영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세상물정을 잘 알지 못
합니다.”
제갈공이 깜짝 놀라 말을 했지만 맹주인 영오대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했다.
“공자께서도 어린아이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
이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비록 제갈 소저께서 나이는 어리
시지만 능히 중책을 맡을 능력이 있어 보입니다. 경험이야 쌓으면
되는 것이지요.”
“맹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갈 소저라면 충분히 제갈 군사의
자리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찬성이네. 내가 보기엔 제갈공 자네보다 자네의 여식이 더
뛰어나 보이는군. 허허!”
당천호 또한 남궁우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슬쩍 딸의 얼굴표정을 살피고 있는 제갈공의 안색은 자랑스러움
과 염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제
갈영영의 안색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살포시 눈을 깔고
담담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형님 어째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심상치가 않다니?”
“지금 의사청에 수뇌들이 모조리 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기
하늘을 좀 보시오. 전서구가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마 큰
사단이 난 듯싶습니다.”
봄 햇살에 낮잠을 청하고 있던 형조문은 살짝 눈을 뜨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과연 곽검명의 말대로 전서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흠, 자네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네. 하지만 아직은 아무런 말
도 없지 않나. 뭔 일이 일어났다면 연락이 있겠지. 기다려 보세.”
“막내가 조금 전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다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막내가 오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쯧쯧,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게 될 일을 가지고 조급해 하기
는… 난 잠이나 더 자야겠네.”
하지만 오수(午睡)를 즐기려는 그의 소망은 단견의 등장으로 깨지
고 말았다.
“형님들!”
항상 들고 다니던 술병을 연신 돌리며 달려오는 단견의 안색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저렇듯 수선을 떨고 있는 것이더냐?”
“큰일 났습니다. 결국 터졌습니다.”
단견의 다급한 음성에 낮잠에 대한 한줄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형조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터지다니? 뭐가?”
“백도와 흑도의 전면전이 일어났습니다.”
“헛!”
“흠!”
곽검명과 형조문은 일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믿기지가 않았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좀 전에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남궁세가에 있던 무인들이 그들
을 감시하는 패천궁의 무사들을 없애고 탈출을 시도했고 패천궁
에선 이를 핑계 삼아 장강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는 전갈이었
습니다.”
“흥, 그건 말 그대로 핑계지.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야. 그런데 탈
출은 성공했다 하더냐?”
곽검명의 질문을 받은 단견의 안색이 어두워 졌다.
“아닙니다. 이미 대다수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제
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막 도착한 소식엔 아직 생사가 불분명했던
남궁가주의 동생이시자 남궁혜 소저의 아버님이신 남궁수민
선배께서 목숨을 잃으셨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저런, 선배께서? 그럼 남궁혜 소저의 어머님은 어찌 되었는가?”
“그분 역시 같은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그래, 의사청에선 어떤 결론이 내려
졌는가?”
“제갈 군사께서 직접 호천, 의혈, 복마단을 이끌고 전선으로 가신
다고 합니다. 또한 각문파의 많은 어른들께서도 거기에 참여하신
다고 합니다.”
“그럼 곧 명령이 떨어지겠습니다. 이럴게 아니라 준비를 하는 것
이 좋겠습니다.”
곽검명의 말에 형조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네. 그나저나 자네들 때문에 구파의 제자도 아니
면서 복마단의 일원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
같은 백도라 하더라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지닌 힘이나 위
치는 다른 백도들에 비해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당연히 그 제
자들은 은연중 다른 문파의 사람들을 경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물론 그것에 연연할 형조문이 아니었지만 혹시 자신 때문에
곽검명이나 단견이 피해를 볼까 염려했던 것이다.
“형님 때문에 저희들이 호천단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요. 그리고
지난번 남궁세가에서 형님께서 펼치신 활약이 있으니 감히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혹여 라도 저어하는 자가 있으면 제
가 나서서 한방에 잠재우지요. 하하!”
곽검명은 두 손을 흔들며 나섰다. 형조문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했다.
“잠들지나 말게.”
패천궁의 도발이 시작되었다는 전갈과 남궁수민 부부의 죽음 등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보에 정신을 차릴 수는 없었지만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시간이 잠시라도 지체되면 그것이 어떤 결과
를 불러 오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인지라 지원 병력이 출병준비
를 마치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시진이 체 걸리지 않았다.
삼개단의 인원이 각 삼백에 구백을 헤아리고 사태의 심각함을 익
히 알고 있는 많은 문파의 선배들과 고수들이 속속 참여하여 장
강으로 나가는 지원 병력의 수가 천을 헤아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맹주님!”
제갈공은 연무장에 도열해 있는 무인들을 보며 맹주인 영오대사
에게 보고를 했다.
“하나같이 눈빛들이 빛나고 있군. 이 정도의 병력과 기세라면 두
려울 것이 없겠소이다.”
“허허, 당연하지요. 백도의 정예중의 정예이외다. 그 누가 있어서
이들과 맞서겠습니까?”
저마다 한 소리들을 하며 자신들의 제자들과 식솔, 수하들을 보는
수뇌들의 음성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남에서 패
천궁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맛본 이들의 안색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중의 한명이자 이번엔 구파일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복마단을 이끌고 떠나게 될 곽무웅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이
미 지난번 선발대를 이끌며 뼈아픈 패배를 맛본 그인지라 정예
중의 정예를 앞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후, 이들 중에 과연 살아남을 자가 몇인가? 아니 이들로서 막을
수는 있는 것인가? 하지만 반드시 막아야 하겠지. 반드시.’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당문천과 함께 호천단을 이끌게 된 황보천악도 곽무웅을 바라보
며 조심스레 말을 했다. 곽무웅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아미타불! 다른 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다만 여러분의 손에
중원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부디 중원을 지켜
주리라 믿겠습니다. 항상 부처님께서 여러분을 보살펴 주실
것이오. 아미마불!!”
“와아!”
“정도맹 만세!!”
“중원을 지키자!”
모여있는 무인들은 저마다 병기를 들고 자신감에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오대사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한 제갈공은 고개를 돌려 자신
을 대신해 군사의 자리를 맡게 될 제갈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영아. 너의 임무가 막중하다. 모든 정보가 이리로 몰릴
것이다. 잘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저들의 동태에 대한
것이면 어떠한 것이라도 세 번을 의심하여 생각하여라.”
“걱정 마세요.”
“너를 믿겠다.”
담담하게 말을 하는 제갈영영을 보며 활짝 웃음지은 제갈공은 몸
을 돌리며 외쳤다.
“출발하도록 합시다.”
첫댓글 감사해요~~~~^~
잼납니다
즐감하고갑니다.
ㅎㅎㅎ
즐감 ~!
즐감
파장
ㅈㄷㄱ~~~~~~~~``````````````````
비장한 각오로 출전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ㅈㄷㄳ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감
좋아좋아
즐독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