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全州川)
河水天色如烟雾(하수천색여연무)-강물과 하늘색 어울려 안개연기 같고
石間魚游是雾影(석간어유시무영)-돌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 안개그림자 같네
年歲水流聚而散(년세수류취이산)-세세연연 흐르는 물줄기 모였다가 흩어지고
流水萬代傳後世(류수만대전후세)-흐르는 물도 만대를 이어가며 후세에 전하구나
농월(弄月)
도심하천중 생태보존환경이 좋은 전주천에 수달이 놀고 !
승암산(僧巖山) 한벽당(寒碧堂)아래 차고 푸른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필자는 전주에 살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신문에 도심중간을 흐르는
하천 중에서 산소요구량(酸素要求量)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하천이 전주천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산소요구량(酸素要求量)”이란 미생물 물고기 등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속의 산소를 충분히 공급한다는 말이다.
실제 와서 전주천 환경을 보니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전주천은 1998년 자연하천 조성사업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 제방과
각종 생활하수 및 폐수 등으로 인해 생물이 거의 살 수 없는 4∼5급수의 하천이었다.
전주시는 전주천을 맑은 물이 흐르는 자연형 하천으로 가꾸기 위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11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생태계 복원 사업을 전개한 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전주천이 되었다고 한다.(전북일보 기사)
전주천을 볼 때 첫눈에 “신문기사처럼 물이 맑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도시속의 하천은 준설(浚渫)을 하여 강바닥이 깊이 패여 있고 시멘트가 등장이후로 강둑을 모두 시멘트벽으로 막아놓았다.
물고기등 생물들은 강둑 물밑에 굴을 파거나 돌사이에 산란을 할 서식장소를 마련하는데 시멘트벽 때문에 불가능하다.
서울 한강도 제5공화국때 시멘트로 강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전주천은 마치 늪지처럼 강바닥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흐르는 물줄기가 강바닥의
자연 생김새대로 마치 지렁이가 기어간 자리처럼 흐르고 있으니 강속의 흙이나
풀 나무뿌리에 각종 물속의 생명체가 서식하게 되고 또한 자정능력(自淨能力)으로
물이 맑아지는 것이다.
한강도 전주천처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명실 공히 “은하수가 흐르는 강”
한강(漢江)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전주천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전주천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고 있다.
추천대
전북일보 기사에는
전주천과 삼천(三川)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추천대(楸川臺) 정자가 있다.
추천대 밑을 흐르는 곳을 “가래여울”이라 한다는데 전주천과 삼천(三川)이 만나
합수(合水)되는 곳으로 “가래여울 가리내(추천-楸川)”라고 한다.
이 지역은 500여 년 전에 병조참판(兵曹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효행이
지극한 추탄 이경동(楸灘李瓊仝1438~1494)선생의 고향(故鄕)이라가 한다.
추탄(楸灘)선생은 효자였다.
아버지가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급히 인근에 사는 의원을 찾아가 약을 처방받아
돌아오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주천이 삽시간에 범람하였다.
그곳은 삼천(三川)과 전주천이 만나 합류되는 곳으로 지금도 소나기만 내리면
삽시간에 물이 불어나는 지역이라 한다.
폭우로 징검다리가 물에 잠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경동 선생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오직 아버지의 위독함만 생각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였던지 물살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고 한다.
이경동 선생의 효성으로 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곳을 “가래여울” 추탄(楸灘)이라 부른다.
황방산(黃方山) 밑 추천(楸川) 물가 이경동 선생이 낚시하던 곳에 기념비와 정자가 있는데 비 앞면에는 “추탄이선생조대유지(楸灘李先生釣臺遺址)”라고 되어 있다.
비석 바로 뒤에 추천대(楸川臺) 정자가 있다.
전주 남천교 너머 완산칠봉(完山七峰)으로 해가 넘어가고 남천교(南川橋) 위에
세워진 길다란 “청연루(晴烟樓)”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서울 갈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
남천교(南川橋) 위에 길게 세워진 “청연루(晴烟樓)”가 이색적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누각(樓閣)일 것이다.
누각 마룻바닥에 들어서니 전주천 양쪽에서 부는 바람에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마룻바닥에는 이곳저곳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한벽청연(寒碧晴煙”은 완산팔경(完山八景)중의 하나다.
뜻은 “승암산 기슭 한벽당(寒碧堂)과 전주천(全州川)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를 이름이다.
“청연루(晴烟樓)”현판은 송하진 전북도지사가 전주시장 재임 시절 쓴 글씨라 한다.
전주가 예향( 藝鄕)이라서 인지 현판 글씨가 아주 매력있다.
전주천(全州川)에는 등장하는 이름이 많다
상관천(上關川), 남천(南川), 공수내(攻水川), 삼천(三川), 추천(楸川), 맏내(長川),
횡탄(橫灘등등
전주천을 내려다보는 곳에 곤지산(坤地山) 초록바위가 있다.
바위의 색이 푸르스름하여 초록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죄인의 목을 베든(梟首) 곳이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천주교 신자들과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참수 당했던 자리라고 한다.
초록바위
바위 옆에는 참형 자를 목매어 교수형에 처하던 나무가 남아있다.
1936년 제방공사로 인해 절벽의 본래 모습은 잃었다하지만 전주천을 내려다
보고 있는 고목은 자기 가지에 목매여 죽은 원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원래 전주(全州)와 완주(完州) 완산(完山)은 같은 뜻의 고장이다.
백제 신라 때 모두 완산(完山)으로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부터 전주의 명승지 완산승경(完山勝景) 37경(景)이 있다.
그중에 전주천에 빨래를 하여 자갈위에 말리는 풍경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남천표모(南川漂母)-전주천의 빨래터”라 하는데 세월이 변하여 아름다운 전경은 흔적도 없다.
전주천 빨래터 옛 사진
전주천에 다리가 여럿 있지만 답사를 하지 못해서 적지를 못한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흘러내리고 있는 전주천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
필자의 답사(踏査)가 미치지 못하여 두서없는 글을 여기서 끝을 맽고 후일을 기약한다.
서천교 기공식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