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 / 이기철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까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 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새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 이기철 시집 <가장 따뜻한 책> 2005
첫댓글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1957년 난 한글의 자모도
알지 못했고, 그대가 각색 연출한 연극을 보러 파리로 향하던 중
차가 가로수에 부딪쳐 47세의 나이로 급하게 죽은 1960년 1월,
난 국민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1970년 고등2학년이
되어서야 그대의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뭣도 모르고 유명한 책이라 해서 <시지프스의 신화>까지는
빌려보았지만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던’ 기억만 아슴하다.
하지만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다거나,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으로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것으로 그뿐 그의 이름은
간간히 술병에 붙은 라벨을 통해 환기되었거나 ‘사르트르’ ‘말로’
‘지드’ 등과 함께 패키지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뜨거운 태양에 눈이 부셔 현기증이 날 때
‘뫼르소’의 살해 동기를 생각했으며,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식의 의문들이 불쑥 떠오를 때나,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것과의 차이를
느낄 때 그의 ‘방아쇠’를 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문학이 불치의
병이 되리란 어림없
고 끔찍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교과서에서 김진섭이 번역한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가운데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란 대목을 읽으며 가을은 본디 그렇게 조금은
슬퍼하면서 맞이하는 계절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는 왜 슬픈지 알지 못했고,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깃’이 슬픈 이유도 잘 몰랐다. 약간 골똘했지만 그땐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성의한 ‘골똘함’일지라도 지금 생각하면 그 사색이
일말의 詩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까뮈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한 까뮈의 통찰을 통해 이후에도
그럭저럭 문학 등속과 친화할 수 있었으며, 글을 쓴다는 것은
까뮈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자신의 강박관념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일’이라는 것도 아주 먼
훗날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