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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까진 얼마나 남았는가?”
“이제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흠, 하지만 쉽진 않겠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상황이 조금 다를 것입니다. 곳곳에 제갈
세가에서 펼쳐놓은 진들이 발목을 잡을 것이고 그에 편승하여
백도의 기습공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귀곡자의 설명을 듣는 관패의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싸움터로 향하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를 뚫지 못해서야 어디 중원을 도모할 수 있겠
는가?”
“하지만 궁주님!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들의 지원병이 사흘
이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물론 지원병이 도착하지 않거나 그
규모가 크지 않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병력을 집중하
면 저지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하나 예정대
로 지원병이 도착을 한다면 지금의 전력으로선 돌파는커녕 밀
고 내려오는 저들을 막아내기도 벅찬 것이 현실입니다.”
“후후, 군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여기에
병력을 집중 시킬 여력이 있을까? 화산이나 소림을 버려두고?
하하하!”
관패는 유쾌한 듯 크게 웃었다. 그 모양을 보는 귀곡자 또한 웃
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 그래서 말씀은 이리 드리고 있지만 그다지 걱정을 하진
않습니다. 저들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이곳과 화산, 두 곳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이곳을 포기하고 화산
을 지키고자 하겠지만 그 또한 조금만 늦으면 화산은 이미 본
궁에 접수될 것입니다. 결국 이번싸움 역시 지난 강남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성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몹시
궁금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본궁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미리 예측을 한 자가 있
다면 장강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이도저도 아니고
우왕좌왕 하다가는 장강은 장강대로 화산은 화산대로 본궁에
의해 접수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저희들에겐 가장 좋은 결과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자넨 욕심도 많구만. 난 그 정도 까진 바라지도 않네.
백도라고 인재가 없겠는가? 아마 예측하고 있는 자가 있을 것
이네. 아무튼 이곳이나 화산 둘 중에 하나라도 우리의 수중에
넣으면 일단은 만족하네. 일단은 말이지. 하하하!”
어떤 식으로 싸움이 일어나도 패천궁으로선 전혀 불리할 것이
없는 낙관적인 전황에 관패는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쯤 어디쯤 가고 있을 것 같나?”
“호남과 사천을 잇는 경계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허, 벌써 말인가? 하긴 그들이 떠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으
니….”
감탄하는 관패와는 달리 귀곡자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천천히 북상한 저희와는 달리 그들은 미리 출발했습니다. 그리
고 사방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세작(世爵)들의 이목을
피하느라고 분산을 하여 조심히 이동을 해서 그렇지, 이제 본
모습을 드러내면 보다 빠르게 화산을 치고자 움직일 것입니다.”
“하하하! 암 그래야지! 하하하!”
“다들 모였는가?”
“조금 전에 마지막 인원의 합류로 모든 병력의 집합이 끝이 났
습니다.”
“이틀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동을 하느라 많이들 피곤
할 것이네. 이곳에서 잠시 쉴 것이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하게.”
“이미 그리 조치했습니다.”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한 천수유는 슬며시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무언가?”
“태상장로님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수하들의 눈이 있어 이렇게
들고 왔습니다. 너무 허물치 말아주십시오.”
“허허, 술이라… 수하들에겐 미안하지만 좋겠지. 옛날엔 자네와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녔는데… 참 오랜만이구만.”
“그렇습니다. 태상장로님께선 그나마 몇 번 활동을 하셨지만 전
근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허, 벌써 그리되었나? 참 시간이 빠르긴 하네.”
궁사흔과 천수유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어쩌면 의외로 손쉬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나?”
“훗, 별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끌고
가는 전력이 어디 보통 전력입니까? 패천궁에서 자랑하는 혈
참마대와 혈영대, 흑기당, 적기당과 이번에 흡수한 만독문까지
참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장로들도 태상장로님과 저를 포
함해 다섯이 이곳에 왔습니다. 비록 궁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패천수호대가 오진 않았지만 실로 엄청난 전력입니다. 화산이
아무리 이름 높은 문파이고 또한 정도맹에서 아무리 지원병
을 보내어 막고자 하여도 절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천수유의 말과 표정에선 일말의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는 손쉬운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수유의 말을 듣는
궁사흔의 안색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엄청난 전력이지. 감히 대적할 상
대가 없는… 그러나 저들 또한 저력이 있네. 큰 산일수록 골이
깊다고 했네. 비록 손짓 하나로 쓸어버릴 것 같은 저들이지만
저들에겐 아직 우리 패천궁이 지니지 못한 역사와 전통이 있네
. 역사와 전통… 몸에 확연히 와 닿지 않아 별거 아닌 듯싶
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네. 게다가 강호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인재들이 자라고 있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
은 기인(奇人), 재사(才士)들도 강변의 모래만큼이나 널려 있지
. 자네도 들었을 것이네. 을지소문이라는 이름을!”
“궁귀 을지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당가에서 죽었다는?”
“흠, 당가에서 죽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난 의심이 간다네. 내
가 아는 그의 무위는 그의 죽음을 절대로 쉽게 허락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거든.”
“그가 그렇게 강했습니까?”
“이미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지난 싸움에서 목 호법을 죽이고
염왕도 헌원강 호법, 아니지 이제 장로가 되었군. 그 친구를
단번에 쓰러뜨린 사실을. 나 또한 그에게 중한 상처를 입었지.”
“하지만 그 친구도 중상을 입고 겨우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쯧쯧, 그 친구는 나와 싸우기 전에 이미 두호법과 혈참마대,
냉악과 한참을 치열하게 싸운 뒤였다네. 그렇게 지친 몸을 이
끌고서도 나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네. 그가 만약 정상이었다
면 모르긴 몰라도 난 자네와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네.”
씁쓸하게 말하는 궁사흔은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러니 그런 친구가 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 아닌
가? 머릿수로 싸움을 하는 일반 병사들도 아니고 무인들의 싸
움에서 절대 고수 한두 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는 자네도 알지 않나. 그러니 조심을 하자는 것이네.”
“알겠습니다.”
천수유는 자세를 고쳐 잡고 신중하게 대답을 하였다.
“참 아까운 친구야. 적임을 떠나 그런 젊은이를 본적이 없거늘.
믿기진 않지만 혹시나 그가 목숨을 잃었다면 중원 무림을 빛낼
큰 인재를 잃었다고 볼 수 있네.”
“저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허허,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적으로 만나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친구네.”
“그래도 강한 자를 보면 결과를 떠나서 한번 싸워보고 싶은 것
이 저희들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천수유의 얼굴에서 강한 승부욕을 느낀 궁사흔은 허탈하게 웃
음 지었다.
‘나 또한 그 친구와 다시 한번 손속을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네.’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패천궁의 정예중의
정예들로 우회하여 장강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북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북상경로에 종남과 화산이 있습니다. 최종
목표는 화산이라 생각됩니다. 사천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야산
에 모인 그들이 이제 대오를 갖추어 빠르게 북상하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종남파까지는 이틀, 화산까지는 사흘이면 도착
할 것입니다.
와락!
개방에서 대지급(大至急)으로 날아온 서찰을 거칠게 접은 여린
손의 주인공은 군사였던 아버지 제갈공을 대신하여 정도맹의
두뇌역할을 하고 있는 제갈영영이었다.
“역시, 화산이었구나!”
입술을 파르르 떨며 신음성을 내뱉는 그녀의 앞에는 구겨진 서
찰과 함께 몇 장의 서찰이 함께 놓여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이동을 한다는 전갈이 쉴
새 없이 날아오더니 결국 오늘 그들이 패천궁의 정예라는 것
이 밝혀진 것이었다.
“지금 즉시 맹주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모두 의사청으로 모이
시라는 말씀을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수하가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예상은 했지만 의외로 전력이 너무 강
하다. 게다가 시간도 촉박하고….’
제갈영영이 급히 의사청으로 들어섰을 땐 맹주인 영오대사를
비롯하여 이미 대부분의 수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자세한 내용은 모르니 부 군사께서 설명을 해 주시
지요.”
영오대사는 제갈영영이 들어오자마자 예의를 차릴 것도 없이
가볍게 눈빛만을 보내 인사를 하곤 바로 설명을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허리를 굽혀 맹주에 대한 예를 표한 그녀는 좌중을 둘러
보며 차분하게 그간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어제부터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려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좌중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두 패천궁의 무인들로 밝혀졌습니다.”
“허!”
“흠!”
혹시나 했지만 예상했던 결과가 나타나자 저마다 탄식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느라 조용했던 의사청이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아미타불! 모두들 진정하시고 부 군사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결국 영오대사가 나서
서 소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시선을 부 군사인 제갈영영에게
주었다.
“저들의 행보는 이미 예상했던 바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논의
되었던 것과는 달리 저들의 전력이 패천궁의 삼할 정도가 아닌
약 오 할에 버금가는 막강한 전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제갈 군사의 말씀대로 모든 전력을 몰아 저들의 본진을
뚫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됩니다. 그 또한 승산이 없습니다.”
제갈영영은 남궁우의 의견에 고개를 흔들었다.
“적은 지금 전력을 정확하게 양분했다고 보시면 맞을 것입니다.
화산으로 오고 있는 저들이 비록 일당백의 고수들로 패천궁의
실질적인 힘이긴 하지만 장강을 넘어 공격하는 이들의 전력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물론 지금 장강에 정도맹의 모든 역
량을 쏟아 붇는다면 어렵긴 하지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
고 저들의 본거지를 공략할 수 있을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들의 오할 병력이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승리를 거둔 우리들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과
연 나머지 병력으로 저들의 본거지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
을 지가 의심스럽군요.”
설명을 하던 제갈영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완전히 적을 제압했다고 가정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런 후에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치고
전력에 큰 구멍이 난 정도맹이 여전히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패천궁의 실질적인 주력 부대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정도맹의 주력이 저들의 본거지를
정벌할 동안 북상하고 있는 저들이 화산을, 소림을, 여기 정도맹
을 가만 놔두진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상태론 그들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깊은 침묵의 바다로 빠져버렸다. 반박하고 싶지만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는 전력의 열세 탓에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소이까? 이대로 저들에게
중원을 내줄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고!”
깊은 침묵을 깨고 의사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사람은 황충
이었다.
“물론입니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지레 포기할 수는 없는 노
릇이지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황충의 외침이 있자 숨죽이고 있던 자들의 봇물 터지듯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쯧쯧,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
이거늘….’
남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슬쩍 제갈영영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모두 조용히 해 주시오. 이렇게 중구난방(衆口難防)
으로 떠들어 댄들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
선은 부 군사의 말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부 군사는 어떤 복안
이 있는 듯 합니다.”
좌중의 시선이 제갈영영에게 모아졌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나와 있다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영오대사가 의아하다는 듯 반문을 했다.
“작금의 백도의 힘으론 두 곳으로 함께 밀려오는 적을 감당하
지 못합니다. 한곳은 포기를 해야 합니다.”
“포기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게요?”
목인영이 눈을 크게 뜨며 질문을 했다.
“화산은 그 지리적 위치를 보아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곳
입니다. 당연히 장강의 저지선을 포기해야겠지요.”
“그, 그럼 무당을 포기하자는 것입니까?”
“제갈세가 또한 포기하는 것이지요.”
깜짝 놀라는 영오대사의 말에 자신의 세가 또한 포기를 해야
한다고 대꾸하는 제갈영영의 모습은 당차기만 했다.
“하지만 무당이라면….”
무당이 어떤 곳인가? 소림사와 더불어 백도를 떠받치고 있는
양대 기둥 중 하나였다. 검에 관한한 중원의 그 어떤 문파도
한수 양보한다는 중원 최대의 검파이자 심신(心身)을 수양하며
백성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는 도인, 도사들의 성지였다. 그
런 무당을 포기한다고 하니 맹주인 영오대사가 저리 망설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이미 오대세가중 하나인 남
궁세가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작은 것을
지키다가 큰 것마저 잃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런 생각 또한 아버님께서 떠나기 전에 이미 저와
의견을 교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군사나 부 군사께선 일이 이리 될 것을 예측했다는 말이
오?”
“확신은 하지 않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고요,”
“아미타불! 군사께서 떠나시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하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포기를 한다면 어찌 하는 것입니까? 대책은
있는 것입니까?”
근심어린 표정으로 연신 불호를 외던 영오대사가 마침내 결심
을 했는지 대책을 물어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장강으로 내려가고 있는
지원병을 즉시 회군시켜 화산으로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
으론 부족합니다. 어차피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로 했으면 최소
한의 피해로 저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자면 이곳에 남아 있
는 병력 또한 화산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림이 움직
여야 할 것입니다.”
좌중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버렸다. 이제 결정은 한사람의 몫이
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맹주인 영오대사에게 쏠리고 한참을
숙고하던 영오대사의 입에서 불호가 튀어 나왔다.
“아미타불! 중원 무림의 정기를 어지럽히는 저들의 야욕을 꺾으
려면 이만한 아픔은 감수해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 즉시 남하
하는 병력을 회군하여 화산으로 보내도록 하고 최소의 병력을
제외한 정도맹의 모든 병력 또한 화산에 집중시키도록 하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견(異見)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맹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리
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명을 받았다.
하나 명을 내리는 영오대사나 명을 받는 좌중의 인물들의
안색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조용한 산사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온 것은 남쪽하늘에 높이
솟았던 해가 막 서편으로 넘어갈 때였다. 정도맹의 맹주자격
으로 보내진 것이 아닌 소림사 방장의 자격으로 보낸 서찰은 잠
시 후 영오대사를 대신하여 소림을 이끌고 있는 영묘(迎渺)대
사 앞에 놓여졌다. 자신의 사형이자 방장인 영오가 보낸 서찰
을 읽어가는 영묘대사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아미타불!”
몇 번의 불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영묘는 함께 자리하고
있던 영우(迎愚)대사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사제는 즉시 소림의 무승을 이끌고 화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
게. 복마단에 소속되지 않고 남아 있는 나한들을 비롯하여 경
내를 경계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조리 이끌고 떠나게.”
“사, 사형! 소림의 전력을 동원하는 것입니까?”
경악에 휩싸이며 반문을 하는 영우대사를 바라보며 무겁게 고
개를 끄덕인 영묘대사가 말을 이었다.
“상황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네. 패천궁이 지금 화
산으로 대거 몰려온다고 하네. 화산에서 막지 못하면 다음엔
이곳일세. 소림이 피에 젖기 전에 막으시려는 사형의 의지로
보이네. 그리고… 아니네. 이는 내가 직접 처리할 사항이니 자
네는 우선 화산으로 떠날 준비나 갖추어 주게.”
“알겠습니다.”
영우대사는 서둘러 방장실을 빠져나갔다. 영묘대사 또한 자신
에게 보내진 서찰 안에 들어있던 또 하나의 서찰을 들고 방장
실을 빠져 나갔다. 방장실을 빠져나간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은 장격각이었다. 장격각에 들어선 영묘대사는 한참 경서(經書
) 정리에 바쁜 무무를 불러 세웠다.
“네가 수고 하는구나.”
“오셨습니까?”
무무는 갑자기 나타난 영묘대사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모습이
었다.
“사숙조님은 어디 계시느냐?”
“번뇌정(煩惱亭)에 계십니다.”
대답을 한 무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영묘를 안내했다. 앞서 걷
던 무무가 멈춘 곳은 장격각의 동편에 조그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정자 앞이었다. 그곳에선 한참 노승과 구양풍이 바둑
을 두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흠, 이번엔 자네가 이겼네. 자네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
고 있네 그려.”
“허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야. 처음엔 열판을 두면 한두 판을 질까 했는데 이제는
거의 반반이 아니던가? 게다가 처음엔 그저 싸움으로 일관하던
자네의 바둑이 이제는 제법 모양새도 갖추고 말일세. 나야 물
론 더욱 재미가 있지만 말이네.”
“그렇습니까? 스님과 두다보니 저의 기풍(棋風)도 바뀌는 모양
입니다.”
말을 하던 구양풍은 고개를 돌려 영묘와 무무를 바라보았다.
노승 또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사숙조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웬일들이냐?”
“정도맹에 있는 장문사형으로부터 사숙조님께 드리라는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영묘는 공손히 서찰을 올렸다.
“흠, 어인 일일꼬?”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서찰을 받아드는 노승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해 했다. 단숨에 서찰을 읽어 내려간 노승의 안색이
잠시 흐려지더니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찰을 받았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네. 사숙조님. 물러나겠습니다.”
안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한 영묘대
사는 총총히 뒤로 물러섰다.
“무무는 이리 오너라.”
“예, 태사숙조님.”
무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립했다.
“무릎을 꿇어라.”
영문을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은 무무에게 다가간 노
승은 장중한 목소리를 말을 시작했다.
“이 갑자였다. 사미승이었던 일곱 살 때 사부님에 의해 수호신
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후계자로 지목을 받은 지 정확하게 이
갑자가 지났구나. 이제 그 짐을 벗으려고 한다. 네가 도와
주겠느냐?”
“태, 태사숙조님!!”
무무 또한 다음대의 수호신승으로 내정된 몸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구양풍 또한 놀라는 모습이
역력했다.
“패천궁에서 화산을 치러 온다는 구나. 저들에 비해 전력이 약
하다보니 소림의 힘이 필요하다는 장문인의 전갈이 왔다. 화
산이 무너지면 다음이 소림이 될 것은 자명한 일. 해서 나는
장문인의 청을 허락할 생각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나서기
도 무리인 즉 이제는 소림을 지키는 중임을 네게 맡기고자 한
다. 힘든 자리이다. 모든 이들이 양지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
고 있을 때 너는 음지에서 묵묵히 이를 지켜야 할 것이다.
네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갈 수 있을 때는 오직 소림에 누란(累卵
)의 위기에 빠졌을 때 뿐 일 것이다. 그 또한 해결이 되면
다시 음지로 돌아가야겠지만… 그나마 나와 너는 선대의 수호
신승들 보다는 사정이 낫구나.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그분들은 단 한번도 정체를 드러내 본적이 없다. 어떠
냐? 네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염려 마십시오. 태사숙조님. 양지에 있든 음지에 있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소림의 사람이고 어디를 가든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가 아니겠습니까
? 세속의 명리(名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제게 맡겨
진 일을 묵묵히 해 나갈 뿐이지요.”
안정을 찾은 무무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아미타불! 네 말이 맞다. 양지에도 음지에도 부처님은 계시거
늘… 내 너 만한 나이에는 공명심(公明心)에 사로잡혀 있었
는데. 장하도다. 아미타불!!”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자리에 좌정을 하고 앉도록 해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노승은 정좌를 하고 앉아 있는 무무의
뒤로 걸어가 앉았다.
‘저건!’
노승이 손을 뻗어 무무의 명문(命門)에 손을 올리는 것을 본
구양풍은 곧 노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태사숙조님!”
무무 또한 갑작스런 노승의 행동의 의미를 알고 소리를 질렀
다.
“움직이지 말거라. 다음대의 수호신승에게 일신의 내공을 전하
는 것은 전대로부터 내려오는 숙명(宿命)이다. 약간의 고통이
있을 것이나 참아 내리라 믿는다. 내가 전해 주는 기운을
거부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라.”
“태…사숙조님….”
눈시울을 붉히던 무무는 명문을 통해 밀려오는 엄청난 기운을
느끼고 화급히 정신을 집중했다. 태사숙조가 별거 아닌 듯 말을
했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는 것이
다반사 일만큼 위험한 것이 격체전공(隔體傳功)을 통한 내공의
전수였기 때문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구양풍은 몹시 힘들어하는 노승을 염려하며 말을 했다.
“괜찮네. 약간의 내공은 남겨 놓았네.”
노승은 홀로 운기에 여념이 없는 무무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
을 이루고 난 만족감과 허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얼굴
이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가 지니고 있던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였는
데 노스님의 내공마저 더해졌으니 중원에서 그를 능가하는 내
공을 지닌 사람은 없겠습니다.”
“허허,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저 아이에게 비록
많은 내공을 전수하기는 했지만 저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은 겨우 일 갑자에 불과할 것이네. 그 이상을 욕심내려 하
면 몸이 성하지 못하게 되지. 나머지 내공을 얻으려면 평생
동안 수련을 해야 할 것이네.”
“그래도 지금의 내공으로도 천하를 오시할 정도가 아닙니까?”
흐뭇하게 무무를 바라보던 노승의 고개가 구양풍에게 돌려졌
다.
“이 아이가 이제 소림의 수호신승이네. 그리고 패천궁을 상대
하기 위해 화산으로 떠날 것이네.”
“…….”
“나도 이제 천수(天壽)가 얼마 남지 않았네. 오래도 살았지. 헌
데 아직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네. 해서 이참에 무무를 따라
산을 내려갈까 하네. 어떤가? 자네도 나를 따라 내려감이?”
“제가요?”
“어차피 일어날 싸움, 하지만 언제까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적당한 시기를 봐서 멈출 수 있으면 멈추도록 해야
할 것이네. 물론 그리 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하겠지
만 말이네.”
잠시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구양풍이 활짝 웃으며 대답을 했
다.
“허허, 싸움이 어찌 돌아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스님을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저 또한 지난 세월을 패천궁에서만 묻혀
살았습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웠던 참
입니다.”
“쯧쯧, 자넨 아직도 호승심을 버리지 못했군. 하긴 자네가 이
룩한 패천궁의 힘을 보고도 싶겠지. 암튼 내려가 보세나.”
그날 저녁 영우대사를 필두로 하여 소림의 정예가 소림의 산문
을 나섰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노승과 구양풍,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수호신승이 된 무무가 길을 떠났다. 떠난 시간
은 달랐지만 방향은 한곳 화산이었다.
“너, 너는!”
“왜? 이렇게 살아있으니 이상한가?”
“네놈은 틀림없이 내 칼에 맞고 절벽 아래로….”
“후후, 떨어졌지. 하지만 죽어 지옥에 가니 염라대왕이 다시
이곳으로 보내더군. 네년을 먼저 보내라고 말이지.”
“저, 저리가! 악!”
“이렇게 팼던가?”
조용히 말을 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소문을 바라보는 당소희는
겁에 질려있었다.
퍽!
“악!”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고통에 두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질
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문의 주먹은 발길질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당소희에게 쏟아졌다. 이미 저항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당소희는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몸을 웅
크려 고통을 감소시키려고 바동거릴 뿐이었다.
퍽! 퍽!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전신의 감각이 사라지고 정신
이 희미해질 즈음하여 소문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픈가? 고통스러운가? 지난번 네년과 당일기에 당한 매질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 죽여라….”
당소희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하나 돌아오는 것은 소문의 차
가운 조소뿐이었다.
“물론, 그리 말을 하지 않아도 너를 살려줄 마음은 없다. 네년
이 살려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쉽게는 못
죽이지. 내 지난 시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날만을 기
다렸거늘 어찌 편히 죽이겠느냐? 지난날 당한 것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 연후에 죽일 것이다.”
“아….”
당소희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네년은 손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철면피를 죽였다. 얼
마나 잘났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느냐? 그 잘난 얼굴을 믿고
그런 것이더냐? 그럼 우선 네년의 잘난 얼굴부터 손을 봐주마!”
소문의 손에 어느새 소도(小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소도를
당소희의 얼굴로 천천히 가져갔다.
“가, 가까이 오지맛!”
“네년이 죽인 철면피를 생각하거라!”
눈앞의 소도가 춤을 추었다. 당소희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곧 엄청난 고통이 느낄 수 있었다.
“으악!!”
패천궁의 북상을 막기 위해 장강으로 향하는 지원 병력을 이끌
고 있는 제갈공은 정도맹에서 날아온 전서구를 받아들고 곧
회군을 결정했다. 이미 정도맹을 나설 때부터 예견된 일이고
자신의 딸과 충분한 상의를 한 후라 그다지 망설일 것도 없었다
. 다만 거세게 반발하는 무당의 운검자를 설득하는 것이 힘
들 뿐이었다. 결국 전후 사정을 설명하며 회군의 부득이함을
주장하는 제갈공의 말을 이해한 운검자의 동의를 얻어 지원
병력의 목적지를 화산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갈공 자신
은 운검자와 비록 복마단에 소속되었지만 본산의 위기를 외면
할 수 없는 무당의 제자들과 함께 계속해서 장강으로 내려갔다.
제갈공과 헤어진 병력들은 서둘러 화산으로 향했다. 밤낮을 가
리지 않고 이어진 강행군은 무공으로 다져진 그들이었지만 지
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가장 필요
한 것은 잠깐의 휴식이었고 화산을 목전에 두고 꿀 맛 같은 휴
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휴식은 갑자기 들
려온 비명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소희야! 소희야!”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던 당소희는 그녀를 붙잡고 소리를
지른 당소기에 의해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것이더냐?”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소기를 바라보며 당소희
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얼
굴도 더듬어 갔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소희에게 문제라도?”
소희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은 옆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당소
기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워낙 격렬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기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녀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다. 소희가 악몽을 꾼 모양이다. 별일 아니니 염려할 것
은 없다.”
흘린 땀으로 전신의 옷을 적신 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
고 멍하니 앉아 있는 당소희에게 자신이 덮고 있던 장삼을 덮
어주며 말을 하는 당소기의 안색엔 여동생에 대한 염려가 하나
가득 깃들어 있었다.
“아버님께도 별일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동료들에게도 양해를
구하여라.”
“알겠습니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요. 집에서 곱게 자라온 아이
가 아닙니까? 지난 사흘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몸이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곧 있을 싸움에 걱정도 되었
을 것이고… 하지만 소희야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백부님과 형
님, 그리고 나도 있지 않느냐? 이제 하루 정도만 더 가면 화
산에 당도할 것이다.”
당소명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당소희를 달랬으나 당소희에게선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자식! 이제는 꿈에서까지!’
확연히 정신을 차린 당소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반년이 넘었다. 소문은 죽었지만 을지소문이라는 지긋지긋한
이름은 그녀를 절대로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그녀가 소문을 죽였다는 사실이 백도에 알려지고 그녀가 당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을 가장 아끼는 당천호에게 죽
임을 당한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을 보는 다른 세가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자신을 경원시하
는 모습들이었다. 특히 소문에 의해 가주가 구함 받고 그나마
세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드러내
놓고 그녀를 경멸했다.
자신의 경솔함으로 젊은 인재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
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사죄를 했고 진
심으로 미안해했다. 또한 속죄하는 의미로 남자들이나 하는
공사장에서 막일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신
이 그렇게 속죄를 하고 자숙(自肅)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다
른 이들의 시선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큰 실수가
있었기에 그녀 스스로는 참을 수 있었고 노력을 했다. 하나 당
가가, 중원의 오대세가의 일원이자 사천의 패자(覇者)인 당가
가 덩달아 죄를 지은 냥 기도 못 펴고 눌려 있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변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도 공사장에 나가 일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그
녀를 못 마땅해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 당당하게 생활을 했다
. 당문천과 오라비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들에 이미 뒤바뀐 그
녀의 행동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
지 익히 알고 있기에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됐어요. 오라버니. 이제 괜찮아요.”
여전히 근심스런 얼굴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 당소기를 바라보
며 말을 하는 당소희는 이미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후~ 그래, 알았다.”
당소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섬서성 남부의 종남산에는 구파일방의 하나이자 명문대파인 종
남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혹자는 전진파(全眞派)의 후예들이
세운 것이 종남파라는 소리도 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지
닌 한 도인이 세웠다는 소리도 있었다. 어느 말이 정확한 것인
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종남파가 비록 지금은 속가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최근까지 많은 도인들을 배출한 것을 보면 도가
였던 그 뿌리가 무당이나 공동과 같은 도가임은 부인하지 못
할 사실인 듯 했다. 그런데 그런 종남산 중턱의 종남파엔 도인
들과 종남의 제자들은 간데없고 전혀 다른 사람들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을 포기하고 화산으로 이동한 듯싶
습니다.”
패천궁이 점령하기 전엔 오직 장로들만이 드나들었던 장문인의
처소에 앉아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있는 궁사흔의 빈 잔에 술을
따르는 천수유의 얼굴엔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랬겠지. 어차피 그들로선 우리와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네.”
“그래도 저는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빌 줄
알았습니다. 설마 이렇게 꽁지를 내뺄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
니다.”
“허허, 자네도 감상적인 면이 있었군. 물론 그들 또한 그런 생
각을 한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네. 하지만 그랬다간 그동안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던 종남파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
을 것이네. 아니 그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소
의 명문정파라는 자들은 죽음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명예와
자존심이니. 하나 이미 청성과 점창은 회복 불능상태에 빠졌네.
그래서 정도맹에 나와 있던 모든 제자들이 우리와의 싸움을
앞두고도 모조리 본산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았나. 아미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이런 마당에 종남파 마저 고집을 부
리다 무너지면 우리와의 힘 싸움에서 가뜩이나 불리한 백도로
선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겠지. 저들은 아마 그 점을 염
려했을 것이야. 자신들의 명예나 자존심보다는 백도의 명예를
지키고자 말이네. 싸움이란 말이지… 각개격파(各個擊破)를 당
하면 아무리 거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어도 상대에게 이기기 힘든
법이네. 무서운 건 그 힘들이 모였을 때지. 지난번 사천에서
의 싸움도 그렇다네. 그들이 함께 모여 미리 대비를 했다면 그
렇게 속절없이 무너졌을까? 난 그렇지 않았으리라 보네. 하나와
하나가 모이면 둘이 되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놈의 싸움
이라는 것은 하나와 하나가 모이면 어느 때는 셋도 되고 넷도 되
지. 물론 둘도 못 될 때가 있지만 말이네. 그런데 지금까지
족적(足跡)을 살펴보면 흑도보다는 백도의 문파들이 뭉쳤을 때
둘이 되어야 할 힘이 종종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곤 했네.
그 말은 위기가 닥치면 저들은 무섭게 힘을 합쳤다는 것이네.
흑도에선 오히려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힘을 약화시켰고. 이
점은 우리가 반성해야 하네. 저들에겐 우리의 행보가 엄청난 위
기로 느껴질 것이네. 이미 문파의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지
. 백도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변해버린 이상 그들에게 명예
니 자존심이니 하는 문제는 뒷전이 되 버린 셈이라네. 이렇게
문파를 버리고 떠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말이네.”
잠시 말을 멈춘 궁사흔은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
에 비웠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네. 위기 때마다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저
들의 저력이… 그러하기에 필승의 승리를 장담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밀려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굽니까? 과거에 눈앞의 이
익만을 쫓고 힘만을 앞세우던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낙관은 하지 않지만 비관은 더욱 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수유의 확신에 찬 말을 들은 궁사흔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나 또한 걱정은 하지만 비관은 하
지 않네. 그나저나 저들은 어디까지 왔다고 하던가?”
“장강으로 내려가던 지원군 말씀이신지요?”
궁사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맹에서 출발한 병력은 지금쯤 화산으로 들어서고 있을 것
이고, 장강으로 내려가던 지원 병력은 급히 화산으로 회군을
하였지만 아직 화산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인가?”
“소림에서도 제자들이 화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
니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소림 아니겠습니까?”
담담하게 설명을 듣던 궁사흔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소림이
라는 이름! 무림인에겐 절대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이름이었다.
“흠, 그들은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공교롭게도 저희나 장강으로 향하다 회군하는 병력이나 소림
의 병력 모두 화산에서 하루의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흠….”
천수유의 말을 듣던 궁사흔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당을 부르게.”
눈을 뜬 궁사흔은 돌연 안당을 찾았다.
“예? 안당을 말입니까?”
천수유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뭔가 방법을 써야지. 힘으로만 밀어붙이
면 너무 많은 피해가 생길 것 같네.”
“그렇다면?”
천수유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 궁사흔이 재
차 말을 했다.
“안당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네. 그를 부르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천수유와 들어온 안당의 몸에선 술 냄새가 진동했다.
“허, 이곳에 온지 겨우 반 시진이 지났는데 벌써 그리 마신 겐
가?”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태상장로님. 피로를 푸는 데는 술이 최
고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원들과 한잔 했습니다.”
약간은 겸연쩍은 듯 말을 하는 안당은 그러나 시종 당당하게
행동했다.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란 말이야….’
웃으며 말을 하던 궁사흔은 정색을 하고 안당을 바라보았다. 궁
사흔의 자세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안당 역시 자
세를 고쳐 앉았다.
“자네가 나서 줘야겠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하루만 가면 화산이네. 저들 또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고 우리가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하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겠지요.”
“그리고 장강으로 향하던 지원군도 지척에 이르렀고 소림에서
도 무승들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네. 물론 그들이 와도
패배는 생각하지 않네만 기왕 하는 싸움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를 얻어야 하지 않겠나?”
“하면 태상장로님의 생각은?”
“그렇네. 혈영대가 먼저 움직였으면 하네.”
“음….”
말의 진행상황으로 보아 예견은 했었던 일이었지만 신음성이
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지금 서둘러 길을 나서면 이 밤이 가기 전에 화산에 도착하리
라 생각하네.”
“도착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선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합니다. 오랜 강행군으로 많이 지쳐 있습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이 일은 다른 누구보다 혈영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네. 각각의 혈영대원들이 비록 일신에 지닌 무공이나
실력이 혈참마대나 패천수호대에 약간 부족하기는 하나 생
존능력과 끈기, 체력은 단연 앞서리라 믿네. 혈영대의 대원들은 모
두 살수의 수업을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혈영대만으로 그들을 치는 것은 무리입니다.”
안당은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그들을 치라고 했나?”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 혈영대를 이끌고 먼저 화산으로 먼저 떠나라고 한 것은
기습을 하라는 의미였다. 안당은 물론 천수유 마저 이상하다는
듯 말을 멈추고 술을 들이키는 궁사흔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자네가 혈영대를 이끌고 가되 기습적인 공격을 하라
는 것은 아니네. 다만 자네들의 특징을 살려 달라는 것이지.”
“암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감을 잡은 안당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흠, 부끄럽지만 그렇다네. 사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러한 방
법을 도외시하고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거리를 두
었지만 많은 병력을 이끄는 책임자의 위치를 맡게 되니 나의
생각에도 변화가 오는군. 비겁한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승리를 위
해, 아니 승리보다는 수하들의 피해를 보다 적게 하기 위해
서라면 내 자존심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 화
산에는 정도맹에서 도착한 고수들이 운집해 있을 것이네. 그중
각파의 수뇌와 백도의 명망 있는 인물들을 능력이 있는 자들
을 제거를 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네. 발각당하면 나가 싸우지 말
고 즉시 몸을 숨기고 우리를 기다리게. 이번 일은 아직 우리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할 저들의 방심을 한번 찌르고 들어가 보는
것일 뿐이네. 물론 성과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어떤
가? 해 줄 수 있겠는가? 정히 내키지 않으면 강요는 하지 않겠네만.”
궁사흔의 말이 끝났지만 안당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말
이 쉬워 암살이지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암살이 성공하기란
몹시 어려웠다. 그나마 시도를 한다면 궁사흔의 말대로 어쩌
면 방심하고 있을 저들의 틈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성공보다는 많은 실패가 있을 것이고 그만큼 수하들의 희생도
따를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유난히 수하들을 아끼는 안
당이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 병력을 총괄하는
궁사흔의 부탁이었다. 명령을 내리면 간단한 것을 자신의 입장
을 헤아려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궁사흔의 배려 또한 저
버릴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오! 고맙네.”
“하지만! 전부 다는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궁사흔을 대신해 천수유가 물었다.
“아무리 살수의 수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저들 또한 인간입니
다. 지금은 지칠 대로 지쳐 있어 다시금 길을 떠나면 암살은커녕
제대로 잠입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궁사흔은 아무런 말도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와 부 대주를 포함하여 그 중 뛰어난 수하 이십 명만 추려
가겠습니다. 그 이상은 무립니다.”
“알겠네. 자네가 편한대로 하게. 반에 반이라도 성공을 한다면
우리에겐 크나큰 힘이 될 것이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절대로
무리는 하지 말게.”
“하하하! 알겠습니다. 위험하다 생각하면 바로 줄행랑을 치겠습
니다. 무공은 떨어져도 경공하나는 자신 있는 저희들이 아니겠
습니까?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발각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모를 그들이 아니었다. 하지
만 그걸 알면서도 보내야 하는 궁사흔이나 가야하는 안당은
끝내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들은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무인이었다.
“허허, 역시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모양이네. 내 자네들의 경
공 실력은 익히 알고 있는데 말일세. 자 떠나기 전에 내 술이나
한잔 받고 가게나.”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한잔이었다. 궁사흔이 따라주는 술을 마신 안당은 바로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의 뇌리는 벌써 누구를 차출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이고 있었다.
‘하문도가 뭐라 할지 벌써부터 겁이 나는군.’
구파일방 중 무당파와 함께 중원의 이대검파로 불리는 화산파
는 섬서성에 위치한 화산의 연화봉(蓮花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본래 화산은 지금처럼 단일 문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화산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봉우리에는 저마다 특색이 있는
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세력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 반목과 화합을 통하여 결국 하나의 통일된 문파를
이루게 되니 그것이 곳 구파일방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화
산파의 시작이었다. 화산파 역시 시작은 도가로 시작했지만 최
근에 와서는 도가와 속가가 뒤섞인 성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당과 소림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원을 이끌고 있는 화산파!
지금 화산파의 최대의 위기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녘에
일어난 비명소리는 그 위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잡아랏!”
“서둘러라!”
“의원은 어디 있느냐?”
밤이 지나고 여명(餘命)이 다가올 즈음 조용했던 화산파에선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한 곳도 아니고 동시 다발적으로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고함소리에 밤기운은 어느새 사라지
고 저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다른 이보다 많인 지쳐있는 제갈영영
이 옷깃을 여미며 방을 나섰을 땐 혼란했던 상황이 이미 진정
국면에 다다랐을 때였다. 제갈영영은 우선 급히 달려가는 화
산파의 제자 한명을 불러 세웠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자객이 침입했습니다.”
제갈영영이 누군지를 익히 알고 있던 그는 다급한 와중에도 공
손히 대답을 했다.
“자, 자객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각 문파의 어르신들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자객이
침입했습니다.”
순간 제갈영영의 뇌리에 스친 것은 정도맹 맹주인 영오대사의
안위였다.
“맹주님, 맹주님은 어떠하신가요?”
“맹주님은 무사하십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제갈영영은 보다 안정
된 모습을 되찾았다.
“맹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자하각(紫霞閣)에 계십니다.”
제갈영영은 서둘러 자하각으로 뛰어갔다. 자하각엔 어느새 많은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부 군사. 다행이외다. 저들이 부 군
사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무사하시니
빈승의 마음이 놓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자객이 들었다 들었습니다.”
“후~ 자세한 정황은 날이 밝은 다음 보다 정확한 조사를 해 보
아야겠지만 일단 패천궁에서 보낸 자객이라 의심을 하고 있습
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 입니까?”
제갈영영의 질문을 받은 영오대사는 일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맹주님!”
“아미타불! 이번 자객은 철저하게 각 문파의 존장들을 노린 것
입니다.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화산파의 장로, 종남파의 장로 두
분과 개방의 장로 한분께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물론 시도
가 더 있었기에 좀더 상황을 지켜봐야 정확한 피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아마 혈영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들이 아직 멀
리 있다고 생각하여 안심을 하고 있을 때 정신적인 타격과 혼
란을 주기 위해서 먼저 파견된 자들 같습니다. 게다가 경계가 가
장 약해질 새벽녘에 침입을 했기에 그들의 의도대로 많은 분
들이 당하신 것이고….”
남궁우의 말 대로였다. 혈영대가 아니고선 이렇게 몰래 잠입하
여 화산을 발칵 뒤집어 놓을 인물들이 없었다. 오직 혈영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실기(失期)를 범했구나. 보다 조심했어야 하는 것을!’
적이 아직 접근을 하지 못했다는 소리에 자신 또한 안심을 하
고 있었던 터라 이런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워 한
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당황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자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이고 또한 존장을 잃은 분노에 엉
뚱한 일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조만간 큰 싸움이 있습니다. 지
금은 참아야 할 때입니다.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
독여야 할 것입니다.”
“빈승 또한 부군사의 생각과 같습니다. 동요하는 제자들이 없도
록 직접 챙겨주시고 자객들을 추격한 제자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라고 주의를 주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뭣이! 사제가?”
이제 막 지원군을 이끌고 화산으로 들어선 곽무웅은 자신의 사
제이자 어려서부터 친형제처럼 지낸 양수국(楊邃菊)이 자객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리에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누구냐? 어느 놈이 감히 사제를!! 네놈은 뭘 하고 있었더란 말
이냐? 그러고도 네놈이 사제의 진전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
느냐?”
곽무웅의 분노는 양수국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자신의 큰 아들
인 곽화월(郭花月)에게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소자가 불민하여… 소자가 사부님의 비명
성을 듣고 뛰어 왔을 때는 이미….”
“닥쳐라! 네놈이 어디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냐?”
“…….”
곽화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 하여라. 화월이는 잘못 한 것이 없다. 네 사제뿐만 아니
라 근 열명에 이르는 각 문파의 어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곽무웅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의 주인이 누구
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이자 전대 화산파의
장문인인 화산검선 해천풍(海天風)이었다.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사부님!”
“그만 하여라. 네게는 사제지만 화월이에겐 사부다. 사부의 잃
은 화월이의 마음도 헤아려야지.”
“…….”
그랬다. 자신에게 형제만큼 귀한 사제이기 전에 아들에겐 하나
밖에 없는 사부였다. 자신만의 감정을 앞세우는 것도 좋지 못
하다고 생각한 곽무웅은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오랜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의 여유도
없구나. 화산을 노리는 자들이 산 아래에 도착했다는 전갈이다.
이제 곧 저들이 몰려 올 것이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해천풍은 슬픔 어린 눈으로 관속에 누워 있는 제자
의 주검을 바라보았다. 젊어서는 현 장문인인 곽무웅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과 지략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른 누구보다 화산
을 빛내줄 제자란 생각에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는
화산파의 숨겨진 절기인 18로낙영검법(落英劍法)을 익히다가
주화입마를 당해 모든 무공을 상실하여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
다. 아꼈던 제자였기에 더욱 가슴 아파했건만 그는 별일 아니
라는 듯 담담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사형의 아들이자 어려서부
터 자신을 따랐던 곽화월을 제자로 삼아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
기 시작했다. 곽화월이 자신이 익히다 주화입마를 당한 18로
낙영검을 무리 없이 익혀나가자 눈물을 글썽이며 찾아와 기쁨
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그였다. 그런 제자가 이제는 싸늘한 시
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허허, 사부보다 먼저 가는 놈이 어디 있다더냐? 고연 놈 같으
니… 너의 억울함은 내가, 아니다. 나보다는 화월이가 풀어줄
것이다. 네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구나.’
해천풍은 이미 나올 눈물도 없이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은 곽화
월을 바라보았다. 매화삼십육검은 물론이고 스승이 익히지 못한
18로낙영검법 또한 어느 정도 깨우친 곽화월! 세간에는 알
려지지 않은 화산의 보물이었다.
“소림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선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혈영대의 활약으로 혼란해 있을 틈을 타 밀고 올라가는 것입
니다.”
“하지만 수하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공격을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냉악은 선공을 하자는 천수유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네. 하지만 지치기는 저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싸움이란 상
대가 조금이라도 전력이 약할 때 치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
닌가?”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궁사흔은 한쪽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안당을 보며 넌지시 물
어 보았다.
“기세입니다. 우선은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잡고자 노력을 하겠지만 문
파의 어른들을 잃은 저들의 마음속엔 분노가 가득 차 있을 것
입니다. 냉정한 무인보다 분노하여 흥분한 자들을 상대하는 것
이 보다 쉽겠지요.”
다친 팔에서 오는 고통이 제법 되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한
안당의 말은 궁사흔이 마음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인사는 해야겠지. 본격적인 싸움을 앞두고 말일세. 이보
게. 냉악!”
“예. 태상장로님.”
“혈참마대가 앞장을 서게. 바람과 같이 밀고 올라가 공격을 하
고 신속히 물러나게. 물론 지원은 하겠지만 흑기당이나 적기당
으론 치고 빠지는 것이 무리일 듯싶으니 자네들이 나서주게.”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자네들은 혈참마대를 도와주게. 물론 오래 머물 것은
없고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게. 이건 어디까지나 전초전(前哨戰
)이니까.”
“알겠습니다.”
궁사흔의 좌우에 앉아있던 천수유와 장로들이 고개를 숙여 대
답을 했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생각만큼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바로 전
력을 투입할 것이네. 기호를 잡으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야 하
겠지. 아무튼 자네들이 애써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세나.”
“먼저 가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궁사흔의 말이 떨어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냉악이 일어나는 것
으로 마침내 중원무림의 운명을 결정할 화산대회전의 막이 올
랐다.
내가 너희들이 장강으로 가는 것을 막은 까닭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가세도 가세지만 세가에 일어났던 일로 너희들이
평상심을 잃을까 두려워서였다."
말을 하던 남궁상인이 힐끗 남궁혜를 바라보았다. 단 며칠 사이
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살이 빠지고 안색이 어두웠다.
하긴 부모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정상적인 몸을 유지하는
사람이 더 이상하겠지만….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조만간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내 너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 남궁세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싸워달라는 것이다. 항상 냉정하
게 상황을 주시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흥분해서는 아니 된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예.”
얼마 남지 않은 세가의 젊은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당부의 말을 마친 남궁상인은 분위기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
는지 화제를 바꿨다.
“그래, 진아는 제갈가의 여식과 잘 지내고 있느냐?”
“예?”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남궁진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허허, 녀석! 무엇을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가문도 그렇고
지닌 재주나 미모 또한 훌륭하지 않더냐. 잘 사귀어 보거라.”
“예.”
남궁진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남궁상인과 세가의 식소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소매에 화산파의 상징이랄 수 있는 매
화 무늬를 수놓은 장포를 입고 있는 화산파의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
“적이 쳐들어 왔습니다. 검성 어르신께서는 지금 즉시 상궁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음, 역시… 알았네.”
남궁상인은 남궁진을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와 숙부는 이미 자리를 비웠고 나마저 가고 나면 세
가의 식솔들은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믿겠다.”
남궁진의 당당한 모습에 다소 안심을 한 남궁상인은 서둘러 상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는 저와 함께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알겠소이다.”
앞장을 서는 젊은 무인의 뒤로 남궁진과 세가의 식솔들이 긴장
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적이 쳐들어 왔다고?”
남궁상인은 상궁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지금 연화봉 동쪽 능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
고 있습니다.”
누구랄 것 없이 나온 대답에서 상황의 급박함을 알 수 있었다.
남궁상인이 좌정을 하자 잠시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들어온 소식으로는 연화봉 동쪽에 투입된 적은 패천궁의
정예 혈참마대라 합니다.”
“음!”
“허!”
전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화산검선 해천풍(海天風)이
었다.
“지금 종남파와 화산의 장문인과 양파의 제자가 나서서 막고
있지만 역부족인 듯싶소이다.”
“혈참마대라면 패천궁의 정예중의 정예입니다. 정예제자들이
모두 복마단으로 보내진 지금 일반 제자로는 막기가 힘들
것입니다. 저희도 당연히 복마단을 보내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제갈영영은 주저 없이 복마단의 지원을 주장했다.
“하지만 먼 거리를 급히 이동하다 보니 그들은 많이 지쳤소이
다. 이제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대로 싸울 수 있겠습
니까?”
곽무웅과 함께 복마단을 이끌었던 공동파의 일각진인이 다소 염
려된다는 듯 말을 했다.
“아미타불! 하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들 또
한 오랜 기간 강행군으로 많이 지쳐 있을 터 지친 몸은 정신
력으로 버텨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즉시 복마단을 지원토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무리인줄은 알지만 맹주의 명령이었다. 일각진인은 서둘러 상궁
을 빠져 나갔다.
“다른 의혈단과 호천단 또한 준비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혈참
마대 만이 공격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곧 다른 곳에서도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건 염려할 것 없다. 벌써 다들 모여 있더구나. 명령만 떨어
지면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상궁으로 들어오는 또 한명의 인물, 막 전갈을 받고 뛰어오던
당천호였다. 제갈영영의 말에 답을 던진 당천호가 남궁상인의
옆으로 다가가자 잠시 예를 취했던 영오대사가 옆에 앉아 있던
황충을 바라보았다.
“황 방주께서는 힘드시겠지만 저들의 동태를 보다 정확하게 살
펴주십시오.”
“이미 발 빠른 제자들을 온 산에 풀었소이다.”
고개를 끄덕인 영오대사가 좌중을 바라보았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정의가 무엇인지 저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침착하게 말은 하였지만 영오대사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 있
었다.
‘아미타불!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미
타불!’
화산에서 막 싸움이 시작되던 그때 장강에서의 싸움은 거의 마
무리가 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겠소이다.”
무당을 이끌고 있는 운상진인은 허탈한 음성으로 말을 하며 제
갈공을 바라보았다.
“예. 지금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훗날을 도모해야겠습
니다.”
무당과 아미, 제갈세가와 백도의 많은 무인들은 최선을 다해 북
상하는 패천궁을 막아보려 했지만 절대적인 전력의 차이는 도
무지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들이 예상
을 뛰어넘어 이토록 오래 버틴 것은 제갈공의 탁월한 지략과
목숨을 도외시하고 장렬히 희생한 무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지원군을 화산으로 돌린 제갈공이 장강의 전선에 도착했
을 때는 무당산을 배경으로 하여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패천궁은 온갖 기진으로 둘러싸인 제갈세가보다는 고
수들과 많은 무인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설치된 진
이 허약한 무당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다행이 제갈공이 도착
했을 때까지 무당은 무너지지 않았다.
제갈공은 우선 무당에 집결해 있던 병력을 적의 빈틈을 노려
제갈세가로 이동시켰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패천궁에서 무섭게
추격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제갈공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희생자만 늘릴 뿐이었다. 결국 최후의 싸움은 제갈세가에서 이
루어졌다. 설치된 진을 힘으로 때로는 귀곡자의 능력으로 파해
한 패천궁은 제갈세가를 목전에 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들
또한 어차피 더 이상의 지원군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파
해하기는 하였지만 진과 진속에 숨어있던 백도의 무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전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정은 백도 쪽
이 더 좋지 않았다. 제갈공이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싸움으로
이미 상당한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진속에 숨
어 뒤쫓아 오는 패천궁의 무리와 상대를 하며 제갈세가에 도착
한 무인의 수는 채 백오십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일신에 지
닌 무공이 뛰어났던 무당의 인원이 오십을 넘을 뿐이고, 수백
을 헤아리던 군소문파의 무인들 대부분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
다. 개중에는 패천궁에 투항한 자들도 있었고, 겁에 질려 도망을
친 자들도 있었다. 또한 오십 여명의 제자을 이끌고 무당
으로 내려온 아미파의 금정신니는 패천수호대의 대주인 적성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티고 싶어도 도저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퇴각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운상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그렇겠지요. 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고… 후,
내 대에서 무당이 이런 치욕을 당할 줄이야! 무량수불!!”
제갈공 또한 침울한 안색으로 연신 도호를 외는 운상진인을 바
라 볼 뿐이었다.
‘아무튼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
에 맡기는 것뿐….’
“퇴각을 했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관패였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
는 제갈세가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퇴각을 했다는 소
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새벽을 틈타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귀곡자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요 며칠 관패의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익히 알기에 몸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음….”
“추격을 하는 것이….”
귀곡자는 극도로 조심을 하며 말을 건넸다. 그런 귀곡자를 물끄
러미 바라본 관패의 입에서 약간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되었네. 그만두지.”
“예?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잃은 전력이 얼마인가?”
귀곡잔의 말을 무시한 관패는 전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그것이….”
“말해 보게.”
“처음에 장강을 넘었던 전력의 사…할 만이 남았습니다.”
“사할 이라… 허허, 어이가 없는 일이군. 겨우 무당과 제갈세가
두 곳을 치는데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다니. 역시 무당
이라는 것인가?”
“…….”
귀곡자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추격이라 했나? 무당에서 추격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피해
를 입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내 기억으로는 대부
분이 이때 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추격을 하다가 또 한
번 그런 꼴을 당하면 어찌 하려는가? 그만두게. 지금은 무당과
제갈세가를 무너뜨린 것으로 만족하세나.”
귀곡자는 입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사실 지난번 추격에서 그
리 많은 피해를 본 것은 미리 설치되어 있는 진을 너무 성급히
파해하려다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서둘러 퇴각을 하는 저들
이 지난번과 같은 진을 설치하고 자신들을 기다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하여 관패를 설득하기도 이
미 늦어버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동안 너무 많은 피해를 본
것이었다.
“화산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태상장로께서 방금 보내오신 전서구에는 혈영대를 통한 기습
작전으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
격을 시작하시겠다고 했으니 지금쯤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
을 것입니다.”
“허, 태상장로께서 혈영대를 이용하셨단 말인가?”
혈영대를 이용한다는 것, 그것이 암살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관패였다. 평소 궁사흔의 성정을 생각하면 상상키 어려운 일이
었다.
“태상장로께서도 일의 중함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자네도 보지 않았나? 정도맹에서 이리로 오
던 모든 병력이 화산으로 발길을 돌렸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무당과 제갈세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고. 아마 힘든
싸움이 될 것이네.”
관패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했다. 귀곡자 역시 관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백도의 거의 모든 힘이 화산으로 쏠렸습
니다. 아무리 패천궁의 정예들이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이기기는
힘들 것입니다.”
“즉시 전서구를 날리게.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적당한 선에
서 물러나라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염려와는 다르게 화산에서도 패천궁이 보여주고
있는 힘은 기대이상이었다.
최초 혈참마대의 선공으로 시작된 싸움은 이제 완전 전면전의
형국을 띠고 있었다. 혈참마대의 공격에 연화봉 동쪽 능선에
마련된 저지선이 의외로 쉽게 무너지자 궁사흔은 나머지 전력
을 모조리 이곳에 쏟아 부었다. 다만 혈영대만은 배후로 침투
시켜 본진을 혼란시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정도맹 또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산의 곳곳에 깔려 있는 개방의 방도들에 의해
이러한 패천궁의 움직임은 즉각 보고 되었고 정도맹역시 나머
지 전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말 그대로 피아도 알아볼 수
없는 물량전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나!”
연신 섭선을 흔들며 적을 쓰러뜨리는 형조문의 모습엔 지친 기
색이 역력했다. 수일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려 온데다가
벌써 한 시진 가까이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니 들고 있는 섭선
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으악!”
갑자기 뒤에서 비명이 들리고 기분 나쁜 액체가 머리에 쏟아졌
다.
“쯧쯧, 그렇게 굼떠서야 죽여 달라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정신
차려요.”
곽검명이었다. 피곤에 지쳐 잠시 방심한 사이에 뒤에서 공격을
하는 적을 놓친 형조문이었다. 곽검명이 조금만 늦었으면 저렇게
목이 없이 쓰러져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으리라.
“흥, 다 알고 있었네. 자네가 손을 쓰지 않아도 그까짓 것이야
문제도 아니지.”
“허, 말은….”
곽검명이 어이없다는 듯 형조문은 바라보고 있을 때 정면에 있
던 형조문의 섭선이 허공을 갈랐다.
“끄윽!”
막 곽검명의 허리를 베어가던 적이 목에 박힌 섭선을 잡고 이
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자네나 조심하게. 쯧쯧쯧.”
“이런!”
“그나저나 정말 많기도 하구만.”
목에 박힌 섭선을 빼고 찝찝한 얼굴을 한 형조문이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지독하다는 것은 남궁세가에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
지만 오늘은 더 지독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혈참마대에 비해 무공수위는 떨어지는 것 같은
데 끈질기기는 오히려 더하네.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으니….”
그랬다. 곽검명이나 형조문이 속한 복마단이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는 패천궁의 흑기당이었다. 처음에 상대하던 혈참마대는
어느새 뒤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지금은 적기당과
흑기당, 만독문의 문도들이 정면에 나선 상태였다. 새롭게 나선
이들의 무공이 혈참마대에 비해 뒤떨어짐에도 함부로 안심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수가 워낙 많고 까딱 잘못하다 기세에
서 밀려버리면 순식간에 싸움에서 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호천단은 화산의 배후로 침투한 혈영대를 상대하기 위
해서 빠진 상태였다. 그러니 잠시 휴식을 취할 여유가 나지 않
는 것이었다. 하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정예로 이루어진
복마단과 의혈단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수에서는 밀리고 있
지만 싸움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이들이었다. 게다가 화
산파와 이미 본산을 저들에게 내준 종남파의 제자들 또한 목
숨을 아까지 않고 싸우고 있었기에 전황은 점점 백도의 우위로
나타나고 있었다.
“다행이외다. 저들의 기세가 점점 꺾이고 있소이다.”
“아무렴요. 우리들이 지쳐있었다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 아
니겠습니까? 이쯤에서 나머지 병력을 충원하고 저들을 쉬게
해줌이 어떠하겠습니까?”
황보천악은 지친 복마단과 의혈단의 인원대신 아직 싸움에 참
여하지 않고 있는 맹주인 영오대사가 직접 이끌고 온 정도맹의
잔여 병력의 투입을 주장했다.
“아닙니다. 기세가 오른 지금 밀어붙여야 합니다. 잠시라도 저
들에게 틈을 주면 오히려 밀릴 수가 있습니다. 힘은 들겠지만
버텨야 할 것입니다.”
남궁우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싸움에 있어서 흐름이란 그만
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흐름이 단숨에 뒤바
뀌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게….”
“크윽!”
흑기당과 맞서 싸우던 화산의 제자들이 갑자기 목과 가슴을 부
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도, 독이다!”
“크악!”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이 되고 말았다. 벌써 공력이 약한 제자들
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을 뒹굴었고 간신히 독기를 제어하고
있던 제자들 또한 이어지는 저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
할 수밖에 없었다. 만독문도들이 조금씩 흘려내던 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절독이 전장터를 휩쓸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제자들이 쓰러지자 아연실색한 곽무웅이
화급히 뛰어왔다.
“독입니다.”
“독?”
임평산이 그런 곽무웅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한곳을 지적
했다.
“저들이 등장하면서 엄청난 독이 사방을 휩쓸고 있습니다.”
임평산이 지적한 곳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그저 양손을
휘젓고 다니는 두 명의 흑의인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아 보이는 손동작이었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모든 생명
을 앗아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놈들!”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제자들이 속절없이 쓰러지자 크게 분노한
곽무웅이 검을 들고 달렸갔다.
“사부님!”
임평지가 급히 만류하려 하였지만 곽무웅의 신형은 어느새 흑
의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곽무웅뿐만 아니었다. 종남파의 장
문인인 목인영 또한 분기탱천(憤氣?天)하여 뛰어 나왔다.
“조심하십시오. 보통 놈들이 아닌 듯 싶습니다.”
“곽 장문께서도 보중하시오.”
곽무웅과 목인영의 등장에 잠시 손속을 멈춘 그들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고는 다가왔다.
“하압!”
먼저 움직인 것은 곽무웅이었다. 그들이 채 다가오지도 않았는
데 몸에 느껴지는 독기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선공마저
빼앗긴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공격을 감행했다. 그것은
목인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응? 이건!’
화산파의 절기인 매화삼십육검 중 일초인 매화만발(梅花滿發)
펼쳐나가던 곽무웅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자신의 검
법에 대응하는 그들을 보니 제법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
만 조금 전에 보았던 거처럼 제자들이 속절없이 쓰러질 정도
의 무공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자신의 공격을 받은 흑의인
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일검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곽무웅의 절대적인 오산(誤算)이었다.
깡!
‘깡? 헉!!’
당연히 베어져야 할 적은 멀쩡히 서 있고 검을 잡고 있는 자신
의 손아귁에 고통이 느껴졌다.
“금강불괴(金剛不壞)!”
사정은 목인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목인영이 공격을 한
그는 곽무웅이 공격한 흑의인 보다 한층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당황한 목인영은 오히려 적의 역습에 말려 왼쪽 팔에
조그만 상처를 입었다.
“크악!”
손목에 입은 상처가 어느새 팔꿈치에 이르고 있었다. 상처를 타
고 침입한 엄청난 독기가 빠른 속도로 타고 올라왔다.
“윽!”
주저할 것 없이 팔을 베어버린 목인영은 잘린 팔의 혈도를 짚
어 독기의 침투를 막고 신형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독기 또한 상당한 것이라 상처주변의 피부마
저 벌써 변색을 하고 있었다. 단 한번의 공격에 패퇴한 목인영
과는 달리 곽무웅은 꽤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도 압도적인 무공을 바탕으로 버틴 것뿐이지 이미 피부를 통
해, 호흡을 통해 몸안으로 들어온 독으로 인해 심한 중독현상
을 보이고 있었다.
‘내공이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겨우 독기를 누르고 있던 곽무웅은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있었다.
“퇴각하라!”
방법이 없었다. 온 몸에서 절독을 내뿜고 도검이 통하지 못한
저들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자신의 무공이 역부족이었고 제자
들의 희생만 커질 뿐이었다. 더구나 만독문에서 본격적으로 독공
을 쓰고 있는지 흑기당과 적기당을 막고 있던 복마단이나 의혈
단도 점차 상황이 좋지 않게 변하고 있었다.
곽무웅의 명을 받은 화산의 제자들과 정도맹의 무인들은 주저
없이 뒤로 물러섰다. 이미 흑의인의 위력을 맛본 그들이기에
퇴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반대로 오히려 앞으로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 퇴각하는 이들이 백도의 핵심임은 자네 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물러나면 화산은 물론이고 정도맹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라
도 저들은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저 괴물을 상대할 시간을 벌
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복수는 저들이 반드시 해줄 것이
다. 나를 따르라.”
복마단과 의혈단, 호천단에 들지 못한 제자들을 이끌고 있던 하
북팽가의 가주 팽덕신은 결연한 의지로 말을 했다. 그리고 분
분히 퇴각하는 정도맹의 정예들을 지키기 위해 전장터로 뛰어
들었다. 삼백여명의 무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중에는
구파일방의 제자도 오대세가의 제자도 있었고, 때로는 변방의 보
잘 것 없는 문파에서 나온 무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절대로 그대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오.’
제일 앞에 달려가서 흑의인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 팽덕신과
죽음으로 추격대를 막는 무인들을 바라보는 곽무웅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진기를 회복하라.
약간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퇴각이라니!!”
맹주인 영오대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도
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상궁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반의 불리를 극복하고 승기를 잡았지만 만독문에서 독공을
쓰기 시작하고 특히 두명의 절대 고수가 등장하면서 전세가
순식간에 뒤집혔다고 합니다.”
“절대고수라니요. 저들에게 절대고수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있지
않소이까? 곽 장문인과 목 장문인, 그리고 오대세가의 가주님
들께서 병력을 이끄셨건만….”
영오대사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나 황
충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단 한번의 충돌로 목 장문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곽 장
문인 또한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곽 장문인이 패퇴했단 말이오?”
해천풍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제자이기 이전에 곽무
웅이 누구인가? 나이 삼십에 화산파의 절기를 모두 깨우친 절대
고수였다. 그런 그가 힘없이 물러나다니. 상상이 가질 않았다.
꽝!
거친 격타음이 들리고 상궁의 문이 부서지며 온 몸을 핏빛으로
물들인 곽무웅이 들어섰다.
“모두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무웅아!”
“단 두 명입니다. 단 두 명의 인물에 패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
습니다. 암왕 어르신!”
곽무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당청호를 불렀다.
“말하게.”
“일전에 말씀하신 독혈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천호를 비롯하여 좌중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안색이 조금 전
보다 더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럴 리가! 독혈인이라면 소문이가 다 부쉈다고 들었는데.”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닌 내공으로도 몰아내기는커녕 간신히
제어하는데 불과한 정대의 독을 내뿜고 도검이 소용이 없는
그런 괴물은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독혈인 밖에 없습니다.”
곽무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좌정을 했다. 그리곤 독기
를 몰아내기 위해 운기를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본 해천풍이 재
빨리 다가가 곽무웅을 도왔다.
“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독혈인이라니….”
“뿐만 아닙니다. 만독문에서 독공을 쓰고 있습니다. 저들이야
해약을 복용하고 있겠지만 저희들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그건 너무 염려 말게. 황보가주. 독이라면 우리 또한 당가도
쓸 수 있으니. 문제는 독혈인인데….”
“그건 자네와 내가 맡아야 할 것으로 보이네.”
남궁상인이 나직이 말을 했다. 당천호 또한 지금 독혈인과 싸울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사람은 남궁상인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당천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당문성에
게 말을 했다.
“지금 즉시 저들이 쓰는 독을 파악하고 그것을 중화시킬 수 있
는 해독제를 알아 보거라. 또한 저들이 독을 썼으니 우리 또한
참고 있을 수는 없겠지. 독을 풀 준비도 하고.”
“알겠습니다. 아버님.”
대답을 한 당문성은 서둘러 상궁을 나섰다. 독혈인의 출현으로
싸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간 소문의 일행은 대파산을 넘어 화산을 향해 부지
런히 오고 있었다.
“자네 정말 화산으로 가려는 것인가?”
“예. 듣자하니 정도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화산으로 몰려왔다
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애써 멀리 갈 필요 없이 화산으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환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문이 벌써 저만큼 걸어가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하야 네가 좀 말려 보거라. 저 인간은 내 말은 도통 듣지 않
으니… 그래도 네말을 잘 듣지 않겠느냐?”
환야는 소문의 뒤에 따라가는 청하를 불러 세우곤 말을 했다.
“호호, 큰 오라버니도. 소문오라버니의 고집을 잘 알면서 그러
세요? 어림도 없어요.”
“하긴… 저만한 고집통을 본적이 없다. 쇠심줄은 저리가라야.”
살짝 웃으며 대답을 하는 청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환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뒤에서 욕하지 말고 빨리 앞장이나 서세요. 내 마음대로 가기
전에.”
“아, 알았다.”
소문의 호통에 찔끔한 환야는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며 대답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청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저런 괴물을 상대했단 말인가?”
“상대만 한 것이 아니라 박살을 냈다는 것 아닙니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를 하는 곽검명의 눈에는 화산을 향
해 올라오는 패천궁의 맨 앞에 서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독
혈인을 바라보며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팽덕신과 삼백의
무인들이 전멸을 당하며 벌어들인 시간은 고작 반 시진이었다.
하지만 저들 또한 지치기는 마찬가지 인지라 잠시 휴식을 취
하느라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했다고 생각했는지 두 명의 독혈인을 앞세
우고 화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패천궁에 무릎을 꿇은 만독문은 귀곡자에게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독로연! 진전한 독혈인을 만들 수 있는 내공법이 패천
궁에 있었던 것이었다. 독왕과 기수곤은 패천궁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금 독혈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단 두 명에 불과했지
만 지난번 소문에게 부서진 독혈인과 비교해 그 위력이 뛰어
난 독혈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명령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던 이전의 독혈인에 비해서 화산에
나타난 독혈인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 이미 그 위력은 백도의
절대 고수들인 곽무웅과 목인영을 간단히 패퇴시킨 것으로 잘 나타
났다.
“보기만 해도 끔찍하군. 저런 놈들과 싸우고 당가에 갔으니 그
리 쉽게 목숨을 잃지. 바보 같이….”
또 한번 소문의 억울한 죽음이 생각나는지 형조문의 입에서 이
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검성어르신께서 저놈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
습니다.”
“믿어보아야지. 검성 어르신이 상대하지 못하면 정말 힘든 싸움
이 될 것이네.”
패천궁의 무인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화산파까지 이를 수 있었
다. 연화봉 중턱의 드 넓은 분지에 자리 잡은 화산파는 구파일
방의 하나이자 무당과 더불어 양대 검파로 불리는 명성에 걸맞
게 웅장한 모습을 지니고 있엇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궁사흔은 정면에 보이는 화산파의 정문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들도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터, 조건은 같다. 조금의 방심도
없이 최선을 다해 공격을 하라. 이전과 마찬가지로 혈참마대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흑기당과 적기당, 만독문이 따른다. 만
독문의 독혈인은 나의 명령과 관계없이 자유로이 행동하도록!”
“알겠습니다.”
“공격하라!”
궁사흔의 말이 입에서 공격의 명령이 떨어지고 패천궁의 무인
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저놈들인 모양이군.”
남궁상인은 몰려오는 패천궁의 무인들 중 유독 한가로이 걸어
오고 있는 두 명의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하나는 내가 맡는다 치고 다른 하나는 누가 상대하는가?”
“내가 하지.”
당천호가 당연하다는 듯 앞으로 나서자 그를 말리는 손이 있었
다.
“암왕께선 당가를 지휘하시면서 만독문의 독공에 대비해 주십
시오. 제자가 진 빚도 있으니 하나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당천호는 자신을 말리는 상대가 해천풍임을 알자 기꺼이 양보
했다. 그 또한 자신과 같은 연배의 고수로써 검성과 어깨를 나
란히 하는 검도의 고수였다.
“알겠소이다. 그러나 저놈들이 뿜어내는 독은 실로 막강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자네도 조심하게나.”
“훗, 염려하지 말게.”
남궁상인은 자신을 걱정하는 당천호를 바라보며 여유있는 미소
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해천풍도 뒤질세라 걸음을 옮겼다.
양쪽의 무인들은 벌써 뒤엉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검성과 검선이군.”
궁사흔의 두 눈에 흥미로운 눈빛이 떠오른 것은 백도의 진영에
서 두 명의 노인이 한가로이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였다. 두 명의
노인은 주변의 어떠한 상황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간간히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저 살짝 피할 뿐이었다.
파도였다. 마치 파도가 갈라지는 것처럼 전장터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고 그 길의 끝에는 독혈인이 서 있었다. 비록 독혈인
이 되었지만 그들이라고 검성과 검선의 명성을 모를 리가 없었
다. 완벽해진 자신들의 몸을 믿으면서도 떨리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자네들이군. 내 제자를 저 꼴로 만든 것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해천풍이었다.
“말이 필요 없겠지. 독혈인이라 과연 어떠한지 견식이나 해 보
세나.”
남궁상인과 해천풍은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일전이 시작되었다.
독혈인과 처음 손속을 겨룬 사라들이 항상 그러하듯 검을 튕겨
내는 몸뚱이는 남궁상인과 해천풍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공격을 할 때마다 적중을 시켰지만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쇳소리와 검을 통해 전해오는 아련한 울림뿐이었다.
‘역시 단단하군.’
남궁상인은 잠깐 동안이었지만 독혈인의 위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의 모공(毛孔) 막고 호흡도 최소한으로 줄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위협하는 독의 위력은 실로 지독했다. 시간
을 끌면 끌수록 불리할 것은 자명했다. 해천풍은 벌써부터 검
기를 날리고 있었다. 그 또한 독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평
범한 무공이 아닌 검기나, 검강 등 막강한 내공을 통한 기의
공격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왕검법 제1초, 제왕독보!”
마침내 남궁상인이 창안한 남궁세가 검법의 최고봉인 제왕검법
이 펼쳐졌다.
우우웅!
공기를 울리는 듯 검의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남궁상인
의 검에서 무려 이장에 이르는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명불허전. 과연 검성이란 이름에 걸 맞는 무위로다.”
독혈인과 남궁상인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궁사흔이 탄성
을 질렀다.
“지난번 남궁가주가 저와의 대결에서 썼던 그 검법 같습니다.
그런데 위력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군요.”
호법에서 장로라는 직함을 받고 궁사흔을 따라 나선 헌원강 또
한 남궁상인이 펼치는 검법을 보며 절로 감탄을 했다. 적들의
심정이 이러할 진데 지켜보는 백도의 무인들은 필승을 자신했다
. 하지만 독문의 전설 독혈인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꽈과광!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사방으로 먼지가 날리고 드러난 모습, 독
혈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근 오장을 날아가 땅에 처박혔지만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교차하여 검기
를 막은 양손에 검상을 입었을 뿐이었고 오히려 독혈인의 몸
에서 튕겨져 오는 반탄력에 검성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럴 수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남궁상인은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려 구성의 힘이
실린 공격에도 독혈인은 멀쩡했다. 남궁상인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들에게 절대로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천천히 다가오는 독혈인을 바라보던 남궁상인은 힘껏 검을 움
켜잡았다. 해천풍 또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막강한 내공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몹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흠, 독혈인이 저들에게 잡혀 있는 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겠
군. 자네들이 나서야겠네.”
궁사흔은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장로들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처음에 잠시 싸움에 나섰던 이들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철수했던 혈영대도 다시투입을 하게.”
궁사흔은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안당을 바라보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괜찮겠는가?”
안당은 상처 입은 팔을 흔들며 대꾸했다.
“뭐, 고수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조심하면 상관
없습니다.”
“알았네. 그럼 조심하게나.”
‘후,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덤볐던 것인지.’
안당은 자신의 기습을 너무나 간단히 막아내고 팔에 상처를 입
힌, 독혈인과 어울리며 무시무시한 검기를 쏘아내는 남궁상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 대단하오이다. 맹주. 역시 소림의 이름이 괜한 것이 아니
외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자, 이번 공격도 막아 보시오.”
무섭게 영오대사를 몰아쳐가는 궁사흔의 눈에는 조금의 살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진정한 상대를 만났을때서 오는 긴
장감과 호승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건 천수유를 상
대하는 당천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구나!”
“허허, 우리가 손속을 겨눈 것이 벌써 수십 년이 되었소이다.”
“그렇구려. 그때 보지 못한 승부를 이번에 가려 봅시다.”
단구의 체격으로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됨직한 천수유를 바라보
는 당처호의 일신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웃음이
나올 만큼 백도의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패천궁의 장로들은 육십이 넘은 헌원강이 가장 연배가 낮을 정
도로 무림에서 활동한지 오래된 전대의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남궁상인이나 해천풍에 못지않은 그런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패천궁에서 이번 싸움을 지휘하는 우두머리인 궁사흔 마저 싸
움에 참여하자 패천궁의 무인들의 기세는 크게 올라갔으나 반
면에 그들을 막고자 나선 각파의 수뇌들이 나섰지만 속절없이
밀리며 낭패를 당하자 백도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단지 천수유를 상대하는 암왕과 직접 궁사흔을 상대하는 정
도맹의 맹주이자 소림사의 장문인인 영오대사만이 평수를 유지할
뿐이었다.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고수들은 고수들끼리 하수들은
하수들끼리 어울리며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만독문이 독을 쓰면
당가가 나서 해독을 하고 당가가 독을 쓰면 만독문이 나서 이
를 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타래가 끊어진 것은 힘겹게 독
혈인을 막아가던 해천풍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중독이 되어
쓰러지면서부터였다. 제자들의 희생으로 겨우 몸을 빼기는 했지만
해천풍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자유롭게 풀린 독혈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발이 묶인 울분을 토하려는
듯 싸움장에 뛰어든 독혈인의 일수에 힘겹게 싸움을 끌어가
던 백도의 무인들이 변변한 대항도 못하고 중독 되어 쓰러졌다.
정신이 없어 몸에서 발출되는 독을 다스리지 못했던 지난번
의 독혈인과는 달리 새롭게 만들어진 독혈인은 자유자재로
독을 방출하며 백도인들을 쓸어갔다. 독혈인을 막기 위해 명망
있는 고수들이 뛰어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그들이 빠진 자
리를 교묘히 파고드는 혈참마대의 손속에 정도맹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한줄기 빛과도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마침내 숭산을 출발한 소림의 무승들이 화산에 도착한 것이었
다. 이들을 이끈 영우대사와 두 명의 전주를 제외하고 정확하게
백팔 명으로 이루어진 나한승! 화산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이 펼
친 것은 열여덟 명이 한조가 되어 만드는 소나한진(小羅漢陣
)이었다. 그리고 소나한진이 여섯 개가 되어 거대한 하나의
진을 이루니 오직 단 한번, 구양풍이라는 일세의 영웅에게만 그
영역을 허락했을 뿐 그 어떤 세력도, 인물도 넘보지 못했다는
무림의 전설이자 신화인 백팔나한진(百八羅漢大陣) 펼쳐졌다.
“오오!”
“소림이!!”
화산을 울리는 불호소리와 함께 백팔나한진이 펼쳐지자 벼랑
끝에 몰렸던 군웅들은 저마다 감격의 탄성을 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거의 동수의 무공 수위를 지닌 백팔나한들이 펼치는 나한대진
은 과연 절대의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무섭게 몰아쳐오던 패
천궁의 기세가 꺾인 것은 물론이고 진의 위력에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점차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이 정도맹
의 맹주를 맡고 있음에도 복마단에 나한전의 정예들을 보내기
를 꺼려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하나의 나한대진을 이루
기 위해서는 백팔명의 나한들이 필요했다. 말이 좋아 백팔명이
지 거의 동일한 무공수위를 지닌 제자를 그 만큼이나 육성한
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웬만한 일이 아니고
서는 백팔나한대진을 구성하는 나한들이 소림을 나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최후의 보루로서 소림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백팔나한진의 위력에 감격한 사람들이 또
한번 경악을 하게 되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젊은 승려가
나타나 무자비하게 살생을 하던 독혈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막는 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붙
이고 있었다. 독혈인의 신체가 워낙 단단하여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끝장이 나고도 남음이 있
을 정도였다.
“오늘은 이만 합시다. 오늘은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가겠소이
다.”
영오대사와 격전을 벌이던 궁사흔이 돌연 패배를 인정했다.
“아미타불!”
영오대사는 불호로서 답을 대신했다. 기세를 탄 지금 단숨에 적
을 섬멸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렇게 하기엔 돌아올
피해가 너무나 컸다. 소림의 등장으로 잠시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림에 저들이 당황해서 그렇지 이렇게
많은 시신과 장애물이 흩어진 이곳에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
럽게 움직여야 하는 나한진은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지금 펼치고 있는 나한진은 허점투성이였다. 아쉬웠지
만 싸움은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만! 패천궁의 궁도들은 뒤로 물러나라!”
“아미타불! 그만 손을 거두십시오.”
수장의 명령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싸움을 하던 양측의 무인
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거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선 처음에 보였던 적의도 살기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지친 몸을 가누기에도 벅차보였다.
꽈광!
“크윽!”
싸움이 다 멈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독혈인들과 검성,
젊은 승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검성은 힘에 겨워
하는 모습이 역력한 데에 반하여 검을 들고 홀로 검무를 추는
젊은 승려의 모습에선 압도적인 우위가 보였다.
“허, 저런 무승이 소림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소림에서 검을 쓰는 이는 단 한사람뿐입니다.”
영오대사는 담담하게 말을 했다.
‘서, 설마!’
영오대사의 말은 궁사흔과 패천궁의 장로들은 물론이고 백도의
수뇌들 또한 경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검을 쓰는 승려!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소림에서 검을 썼다는 소리가 들린 것
은 단 한번 뿐이었다. 모두다 설마 하는 의구심 속에 영오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가 현대의 수호신승입니다!”
영오대사의 음성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수호신승이다!”
“오!”
“전설의 현신이로구나!”
백도의 인물들은 저마다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젊은 승려, 무
무를 바라보았다. 무무를 바라보는 패천궁의 무인들의 눈빛 또한
백도의 군웅들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신으로 알고 있는
구양풍을 꺾은 인물이 바로 수호신승이 아니던가! 비록 사람
은 달라도 가슴에 다가오는 느낌은 똑 같았다.
털썩!
마침내 무무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독혈인의 목이 땅에 떨어
지고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독혈인의 몸이 땅에 처
박혔다.
“와아!”
“수호신승 만세!”
백도의 군웅들은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이러다간 하나 남은 독혈인 마저 잃겠다.’
이미 싸움이 끝난 것을 선언한 상태인지라 뒷일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은 최강의 전력인 독혈인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 돌아오너라.”
궁사흔의 커다란 외침이 있고 막 또 한번의 공격을 시도하려한
독혈인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크윽!”
팽팽히 이어졌던 긴장이 일순 풀리자 그 자리에서 쓰러진 남궁
상인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그 또한 이미 심한 중독현상을
겪고 있었다.
“괜찮은가?”
당천호가 재빨리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아직은 견딜만하니 그리 소란 떨지 말게나.”
독혈인이 뒤로 물러서자 궁사흔이 영오대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조만간 다시 뵙게 될 것입니다.”
“아미타불!”
영오대사는 대답으로 합장을 했을 뿐이었다.
“돌아간다.”
궁사흔의 한마디. 그 한마디는 서로 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화산대회전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소리였다.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할 여력도 없이 화산에 몰려왔던 패천궁의 무인들
이 물러나는 것으로 승자도 패자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처
참한 싸움은 끝이 나고 말았다.
“복마단에서 백오십, 의혈단에서 이백 십, 호천단에서 백여 명
의 목숨을 잃었습니다.그리고 화산파와 종남파의 제자 이백오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만 하십시오.”
영오대사는 제갈영영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너무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단 한나절의 싸움으로 패천궁에서 잃은 병력은 천삼백의 병력
중 절반이 넘는 칠백이었고, 백도에서 잃은 병력은 근 천 여명에
이르렀다. 그나마 백도에게 다행이라면 정도맹의 핵심 전력인
삼개단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었다.
“저들이 잠시 물러가기는 하였지만 조만간 다시 이곳으로 몰려
올 것입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마시고 방비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상궁에 모인 군웅들은 영오대사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했다. 맹주의 말대로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흠, 그랬단 말이지. 소림과 수호신승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화산을 무너뜨리는 것이 가능
했을 것이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보고를 하는 귀곡자의 말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백도의 전력이 그쪽으로 모조리 집중되었기에 큰 걱정을 하였
건만 그리 잘 싸워줄 줄이야.”
“저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이옵니다. 역시 만독문에 독로연을
넘겨준 선택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관패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백도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단 두 명에 불과했지
만 독혈인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허, 그런가? 하지만 지난번엔 열명이나 되는 독혈인이 소문이
라는 친구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혈독인과 지금의 독혈인은 차원이
다릅니다. 온전한 정신과 무공을 지닌 작금의 독혈인이 열배는
강할 것입니다.”
관패가 사뭇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곡자는 슬쩍 화
제를 바꿨다.
“이번에 무당과 제갈세가를 접수했지만 이 전력으론 더 이상의
북상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화산을 무너뜨리는 것도 실질적으론
어렵게 되었습니다.”
“상관없네. 어차피 우리가 의도했던 것 중 하나는 얻지 않았는
가? 화산에서의 싸움도 그만하면 큰 성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하시면….”
“제갈세가를 패천궁의 강북총타로 삼고 이곳에 병력을 집중적
으로 배치하게. 그리고 화산에서 물러난 태상자로께 전갈을 보내
종남파에서 기회를 엿보시라고 전하게. 애써 뺏을 것을 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어느 정도 견제도 가능할 것이니… 어떤가?
자네가 생각하기에 나의 생각이?”
귀곡자 또한 관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며시 웃은 귀
곡자가 대답을 했다.
“저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럼 즉시 시행하게.”
“알겠습니다.”
화산에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후, 열흘이 지나자 화산파는
제법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궁사흔은 패천궁의 무인들을 이끌고
종남파로 들어갔다. 더 이상 큰 싸움은 없었지만 작은 충돌은
계속 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정탐을 해야 했기에
패천궁이나 정도맹에선 종남산과 화산 인근에 수 없이 많은
세간들을 풀었고 또한 그런 세간들을 잡기위해 무인들을 풀어
놓았다. 당연히 이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너무 멀리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쪽은 종남산 쪽이 아니니 괜찮겠지. 너무 염려하지 말게나.”
당일기는 은근히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무인들을 달랬다. 이번
싸움에서 독혈인보다 백도의 무인들을 괴롭힌 것은 만독문에서
풀어 놓은 독이었다. 다행히 만독문과 쌍벽을 이루는 당가가
있어 독으로 인한 일방적인 피해를 막기는 하였지만 당가에
서 준비해온 많은 독과 해약이 소모되었다. 언제 다시 그들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비한 해약을 다시 준비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당천호는 당가에서도 특히
독을 잘 다스리는 당일기로 하여금 그 준비를 맡겼고 복마단
이 그런 당일기와 당가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필
요한 약재를 찾아 매일 같이 화산과 인근의 산을 헤매던 이들이
오늘은 화산을 떠나 조금 더 멀리 나와 있는 중이었다.
“아까 내가 말한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집중하여 찾아야 한
다. 지금은 하찮은 댁초라도 매우 중하게 쓰일 것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고.”
“알겠습니다.”
당가에서 당일기를 따라 나온 식솔들은 저마다 무공보다는 약
초채집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당가의 음지
에서 당가의 버팀목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호오, 정도맹의 영웅들께서 예까지 어쩐 일이신가?”
갑자기 들려오는 비웃음. 당가의 식솔들을 지키는 복마단원들은
어느새 무기를 빼어들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거 무서워서 어디 나가겠나. 하하하!”
복마단이 바라보고 있는 반대편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고
십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나타났다.
‘흑기당!’
흑빛의 무복은 흑기당의 상징이었다.
‘좋지 않다. 적의 수가 너무 많구나.’
복마단을 이끌고 당일기를 따라온 하후제는 안색을 굳히며 자
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흑기당을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고작
다섯인데 반하여 전후좌우에서 쏟아져 나온 적의 수는 무려
이십이 넘어 보였다. 무공이 약한 당일기나 채집꾼들을 합쳐
도 이십이 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하, 혹시나 사천을 오고 가는 자들이 있을까 하여 둘러보고
있었는데 엉뚱한 인간들이 걸리는군. 아무래도 좋겠지. 어떠냐?
얌전히 항복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소리를 질렀다. 얼굴 전체가 검은 수염으
로 뒤덮인 인물이었다.
“닥쳐라! 누가 네놈들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한단 말이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호, 그래? 난 두 번 권하지 않는다. 죽여라!”
사내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명령을 받은 흑기당의 무인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당황하지 말게. 어차피 오합지졸일 뿐 흩어지지 말고 한곳으로
모여 대항하면 이길 수 있네.”
하후제는 동요하고 있는 동료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또한 뾰
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싸움은 의외로 싱거웠다. 아니
시작되지도 않았다. 결과를 뻔히 알고 있는 당일기가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는 이들을 재빨리 만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숨만 걸린 것이 아니라 무공도 없는 채집꾼들의 목숨까지
걸린 일이라는 말을 들은 하후제는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하하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가고 그런 꼴을 하고 있느냐?”
의외의 상황에 혹시 몰라 긴장을 했던 털보 우두머리는 한껏
비웃으며 하후제 일행에게 다가왔다.
“왜? 막상 싸우려니 죽음이 두려운… 크윽!”
털보장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기서 날아왔는지 그의
가슴엔 커다란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웬 놈이냐?”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은 흑기당의 대원들은 좌우를 살피며 화
살이 날아온 곳을 찾고 있었다.
“맹수는 자신이 노린 먹이를 노리는 놈들은 용서를 하지 않아!”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음성이 들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새 흑기당의 대원들을 피해 당일기 앞에
당도해 있었다.
“네, 네놈은?”
순식간에 자신 앞에 나타난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본 당일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첫댓글 감사해요~~~^~
즐감하고갑니다.
잼납니다
즐감
즐감 ~!
ㅎㅎㅎ
먹이
드디어 웬수를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ㅈㄷㄱ~~~~~~````````````````
ㅈㄷㄳ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감
좋아좋아
즐독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