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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지혜 2,1ㄱ.12-22
복 음 :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대표 음악가로,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음악을 수없이 작곡했습니다.
많은 미사곡뿐 아니라, 마태오와 요한 수난곡도 너무 유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하느님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11살에 고아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20명이나 두었지만, 절반가량이 자신보다 먼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자신도 돌팔이 의사에게 받은 백내장 수술로 인한 시력을 잃었고,
수술 후 4개월 후에 뇌졸중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상실과 절망으로 점철된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흐처럼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이는 행복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이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쳐야 할 중대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중 앞에서 거리낄 없이 자유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은
이 예수님을 향해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성도 이름도 없이 언제 어디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가 맞다.’, ‘메시아가 아니다.’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들도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기적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맡을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을 굳건히 해서
세상에 떨칠 왕국의 건설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주님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절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 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란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하셨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연한 기회에 신학교 선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1995년 이집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같이 갔었습니다.
1997년 미국으로 유학 온 선배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이제 교구로 돌아가면 쉽고 편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도와서 일할 수도 있었습니다.
본당사제가 되어서 공동체와 함께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하고 삶이 변했던 것처럼
선배도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하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교구의 방침에 따라서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지순례 중에 체험한 것이 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교구장님의 허락을 얻어서
교구사제에서 미국에 있는 카프친 수도회 사제로 소속을 바꾸었습니다.
선배 사제의 차는 작은 경당 같았습니다.
뒷좌석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차의 오디오에서는 성시간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니 오랜 시간 운전도 즐겁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장밋빛 미래는 아니었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는 배신자로 취급당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구를 떠나 수도회로 자리를 옮긴 선배도 예상치 못한 일로 오해를 받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묵묵히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지는 길에 선배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를 번역한 책을 주고 갔습니다.
성모님의 전구 하심으로 건강하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1981년에 시작된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발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성모님의 발현이 계속되고 있기에
교회는 공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지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자들과 사제들의 순례는 허락하고 있습니다.
순례지에서 행해지는 전례와 신심활동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특사를 파견하였고,
메주고리예 성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6년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전례는 거룩했습니다.
손에 묵주를 들고 순례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한 전례와 아름다운 신자들이 만났으니 그곳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와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신자들과 함께 메주고리예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은총이 넘쳐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다른 성모 발현지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미사, 묵주기도, 성경읽기, 성체조배, 성시간, 십자가의 길, 화살기도와 같이
적어도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도록 요청합니다. 굳은 신앙을 요청합니다.
현시대를 살고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요청합니다.
죄로 인해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요청합니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단식을 요청합니다.
단식은 비단 음식을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이기적인 자아를 죽이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길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 신앙, 회개, 단식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드라마들을 보면, 항상 악역이 있고 선량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악인의 술수나 모함 때문에 온갖 오해와 박해를 받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시청자들은 한결같이 악인을 보며 저런 나쁜 놈(년)이 있나 흥분하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불쌍한 주인공 편이 되며 함께 울고 웃습니다.
대분분의 결말은 해피앤딩이지요. 그제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 안에는 늘 의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악인을 선천적으로 싫어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이런 악인들이 꼭 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악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여러분 주위에 진짜 못되먹은 악인이 있나요?
의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지혜 2,12.16.18)
하느님이 의로운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는 의인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지혜 2,13)
온유하고 인내로운 사람입니다.(지혜 2,19)
그래서 의인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할 줄 압니다."(지혜 2,22)
반면,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원래부터 악인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원래의 자기 모습을
어떤 이유에서든 상실하거나 왜곡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29)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하는
유다인들을 피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축제 때가 되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요한 7,10)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지요.
당신을 두고 메시아니, 아니니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신"(요한 7,28) "나는 그분을 안다"는 내용 안에
저 엄청난 고백, 아니 선포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안다"는 말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대화에서 먼저 등장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자렛 출신에 마리아와 요셉의 외아들이며
지금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방랑 설교자로서
식자층도 못 되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치료사"라는 정도의 정보는
굳이 감출 필요 없이 드러난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그들이 영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역사와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에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대략 그림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 앎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지혜 2,22),
지혜서 저자는 의인에 대한 악인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뒤, 결국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지혜 2,21)고 확정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믿음과 의혹 사이 어디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요한 7,30)에
지혜서에 나열된 악행을 적극적으로 자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불신과 적대감이 아직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은 단계일 뿐,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을 이유보다 믿지 말아야 할 이유에 더 집착하는 그들의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고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시점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도 성전이라는 공적인 특수 장소에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앎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요한 7,29)에 참됩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드님의 오심, 아드님과 하나이신 아버지의 보내심은,
소위 인간 조직 안의 파견 근무나 소임 이동처럼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고 공간적 장소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하나시기에 서로를 완벽히 알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 구원이라는 계획을 위해 자신을 서로에게 모조리 내주고 텅 비어버린 신비,
흡사 죽음 같은 비움의 상태가 육화이며 강생이니,
우리 경험의 틀로는 가히 짐작조차 어렵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아마도 그건 육화, 강생에 이어 십자가 구속이라는
남은 잔을 채우는 소명에 온전히 동의하신 까닭이겠지요.
또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인 이상 더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누구에게도 숨길 필요가 없으니 그리 당당하실 수 있으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히 피조물이 하느님을 안다고요?
사실 진정으로 그러고 싶지만, 천상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처럼 온전한 앎은 불가능하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를 고통스럽게 절감하며
몸부림치고 눈물지을 때, 바로 그때 앎이 곧 사랑이 됩니다.
그토록 진심으로 당신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 모른 체 하실 리 없으시니까요.
그리고 지식으로 차오르는 "앎"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는 "앎"을 존재 가득 채워주실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시 "나는 그분을 안다"는 이 고백이 외침은커녕
입 안에서, 목구멍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아니 아직 뱃속에서조차 형성이 안 되었다면,
각자 자신의 앎이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눈을 멀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이
이기심과 탐욕인지, 죄의식과 두려움인지, 무관심과 게으름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시 자신이 인격신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미꾸라지처럼 피하면서 그저 단순한 "종교 장신구주의자" 정도로
성당 건물만 오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쩌면 오늘 예수님께서 던지신 "나는 그분을 안다"는 초대가
우리 신앙 인생을 재점검할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진정 "은총의 때"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나는 의인이 되고,
모르면 모를수록 악인이 될 위험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아는 하느님의 귀한 아들딸 되시길 축원합니다.
악인들이 놓은 덫을 탈출하는 법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은 부활 신앙의 전술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초막절이 가까웠을 무렵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당신은 생명의 물이심을 천명하시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그분을 잡으려 했지만,
그분은 무사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분이 자청해서 악인들이 놓은 덫에
제발로 걸어 들어가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악인들이
의인에게 덫을 놓자고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악인들은 의인이 하느님의 뜻을 거론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습니다.
의인의 질책이 듣기 싫었고 의인의 충고가 고까웠던 악인들은
모욕과 고통으로 덫을 놓기로 했습니다.
구도정신을 지녔던 의인들의 노력 덕분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한국교회는
악인들의 덫으로 박해를 받았던 피어린 역사가 있습니다.
그 발단은 영조와 세자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2백여 년 전 영조가 세자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눈치챈 노론파 유림들이
여론을 조작해서 영조의 손으로 그를 죽인 다음에,
세월이 더 흘러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정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는 말로 왕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론은 자신들이 정조로부터 숙청될 것이 두려워
잠재적 정적인 남인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채제공, 이가환이나 정약용 같은
뛰어난 남인 선비들이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자
선제적으로 남인 숙청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노론 악인들은 천주교로 덫을 놓았습니다.
마침 남인 선비들이 천주학을 공부하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천주교를 전하기 위해 명례방에서 교리 공부와 세례성사 예절을 거행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좋은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는 천주교 교리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니
그들은 천주를 임금보다 더 높이 공경한다는 것을 알고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라고 공격했습니다.
명례방 모임에서 적발된 모양새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이
신분 구별없이 모여 있었던 데다가 남녀도 섞여 있었으므로,
반상(班常)의 신분과 남녀 유별의 윤리도 무시하는
패륜(悖倫)적인 무리라고 비난하는 구실이 더 붙었습니다.
충효의 가치와 신분 질서 그리고 삼강오륜으로 포장된 덫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북경에서 날라 온 조상 제사 금지령이 좋은 빌미가 되어 주었습니다.
게다가 불난 데 바람 부는 격으로 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연루된 남인 선비를 죄다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와중에,
황사영이 교황께 위험에 처한 신자들을 구해달라고 탄원하면서
서양 선박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들통이 나서, 일이 단박에 대역죄로 커졌습니다.
노론 악인들의 박해로 인해 이벽, 약전 약종 약용 등 정씨 삼형제를 비롯한
남인 출신 양반 신자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라는 노론의 모함에 대항하여
‘대군대부(大君大父)’를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한
중인, 양인, 천민, 부녀자 등 수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불과 십여 명의 강학회 선비들로 시작한 한국교회가
백 년의 박해를 거치는 동안 기록상 2천 명, 구전상 2만 명이 넘는 치명자가 나왔습니다.
이렇듯 악인들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의인들은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주는
자발적 성사모임을 해서 한양 선비 천여 명을 입교시키기도 했고,
박해가 시작되자 새로 입교한 평신도들이 전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섰습니다.
치명자의 유족을 비롯하여 양반 신자 가문에서 해방된 노비 출신 등이
심산유곡을 찾아 교우촌을 건설하여 2백 군데 가까운 신자 마을이 조성되면서
제 발로 찾아온 입교자들이 더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우 중에 밀고자가 생겨 발각되고 체포되면,
목숨을 구걸하기보다 차라리 치명하여 천당에 가기를 원하여 그 끔찍한 고문을 참아 받았습니다.
그러다 힘이 부쳐서 입술로 배교한 신자들은 교우촌으로 살아 돌아와서는
자책하는 마음으로 자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이전보다 더 열심히 물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박해가 진행될수록 신자들은 더욱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천주교 박해는 반만년에 걸친 한민족 역사상 피지배층이
지배층과 다른 독자적 가치관을 내세워 집단적으로 항거한 첫 사태였으며,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상 가장 크고 오래 진행된 학살 사태였고,
더욱이 칼이나 창도 들지 않고 평화적으로 저항하여
끝내 신앙의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승리한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이웃 나라를 비롯하여 천주교 박해가 자행된 나라들은 많지만
현재 순교자 성월을 지정해 놓고 해마다 순교정신을 다짐하는 교회는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여오기도 했거니와,
자발적으로 성사를 갈망하면서 피어난 신앙의 의인들이 하나같이 터득한 전술은
악인들이 놓은 덫을 구원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되
결코 신앙과 의로움을 잃지 않고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자원하여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전술을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당으로 파견받는가, 성당에서 파견받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포도 수확 철에 가을걷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초막을 치고 농장을 지켰던 가나안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는 새로운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친 초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막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축제는 이렇듯 무언가를 기억하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시기가 초막절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막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남모르게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치르시려는 초막절이
그들이 원하는 초막절에는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인데 자신들이 알 수 있는 곳에서 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자는
양 떼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면서
결국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곳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초막절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영화 ‘안테벨룸’(2022)의 줄거리입니다.
남부 연합군이 운영하는 루이지애나 노예 농장,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말을 누군가 먼저 걸어주지 않으면 말도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화장당합니다.
그들을 도왔던 이든이라는 여자는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장군에 의해 낙인이 찍힙니다.
이든의 친구인 줄리아도 매를 맞아 유산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입니다.
이든은 본래 베로니카 헨리 박사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대해 TV 토론 쇼에서 강력한 발언을 합니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우버를 타고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실제로는 엘리자베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재스퍼가 베로니카를 때려눕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내용에서 이든과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부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니 다시 과거의 농장입니다.
농장에서 베로니카는 줄리아가 목을 매 죽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녀는 일라이에게 그날 밤 탈출할 거라 말합니다.
일라이는 이든과 함께 탈출하려다 아내를 잃은 남자입니다.
사실 현재 노예 생활하는 장소는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과거 시대를 재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실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납치되어
말도 못 하고 실제 노예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오두막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장군의 전화를 훔칩니다.
장군이 베로니카를 공격하는데 일라이가 베로니카를 보호하다 살해당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총검으로 장군을 찌르고 전화기의 잠금을 해제하고
GPS를 사용해 남편에게 위치를 보냅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른 병사들을 화장터에 끌어들이고는
불을 지르고 장군의 말을 훔쳐 타고 나갑니다.
FBI가 들이닥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장소를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납치되어 온 흑인들은 이 집단이 너무 무서워
조금씩 자신의 신원을 잊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적어도 생존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만은 자신이 갇힌 곳에 딸이 그려준 그림을 새깁니다.
그 그림을 보고 만지며 자기 집이 본래 어딘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문에 왁스를 바르고
방에서 걸을 때 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외워둡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핸드폰을 두는 위치를 기억하고
결국엔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을 해방합니다.
내가 본래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온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온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의 의미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이 목적지였지만
예수님은 이 축제 때 당신의 목적지는 천국임을 되새기시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에 성당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의 초막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성당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막이 지금의 성당입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아이는 버릇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도 생각할 줄 아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가슴을 쓸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집으로’인 이유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집으로일까요,
아니면 다시 힘들 때 돌아와야 하는 집이 할머니라는 의미일까요?
아무리 봐도 후자일 것입니다. 사랑이 주어지는 곳이 참으로 집입니다.
따라서 성당에 올 수 있음에도 TV를 보며 미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부모님을 만나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는
베로니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짜 집이 성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성당으로 파견받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집으로 파견받는 것입니다.
성당은 우리가 축제를 지내야 하는 초막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