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너무 오싹하게 만드는 글을 쓴다는 게 필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대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7절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 우리가 식인종처럼 예수님을 먹어야 되는지 한편 살펴보기로 하자
그 전에 31절을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만나가 모세가 준 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 떡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 세상(코스모 ko,smw|)에 생명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코스모’는 창세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되돌려 받는 존재인 세상을 의미한다.(잠 8:22~31)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구나 세상이나, 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는 자신을 생명의 떡(에고 에이미 호 아르토스 VEgw, eivmi o` a;rtoj th/j zwh/j\)이라고 하시면서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는 양식을 언급했다. 그러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생활하면서 얻어진 육의 속성을 홍해를 건너서 선택되어 구원받은 민족으로 뽑아졌지만 온전한 것으로 교환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광야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은 양식을 먹게 되었다. 광야라는 단어가 ‘미드바르’(rB'd>Mi)로 미(M 무엇이 임하여 베푸는 장소)라는 단어와 드바르(rIb'D> 정돈된 말씀) 단어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정돈과 질서로 이루어져 광야의 상태로 되어진 존재에게 임하여 베푸는 장소를 의미한다.
왜 광야에서 만나를 꼭 먹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광야와 같은 존재인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의미하는 가정 속에 말씀을 접근해야 한다. 그들은 눈으로 직접 만나를 보고도 듣고도 만나를 보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그게 무슨 소리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본질과 원형을 전하다 보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동안 애급에서 먹었던 양식에 길들어져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게 되어 있다. 본인도 이런 내용을 알기 전에는 괴상한 말씀이 들려오면 안 좋게 치부했던 적이 있다.
민수기 14:9에 열 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미리 들어가 답사를 마친 후 와서 보고를 하는데 열 정탐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민족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벌벌 떨면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만은 “그들은 우리들의 밥이다”라고 장담하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내용이 있다.
여기서 밥(~h,yle[]라이햄)이란 단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싸워서 진멸시키고 생명으로 충만한 가나안을 이루게 하는 대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길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자신만만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길들어진 상태를 “온유”라는 개념과 의미를 갖고 있다(마 5장 산상수훈)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떡을 먹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36) 그 다음 37절부터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오기 때문에 그들을 결코 내쫓지 아니한다는 확고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39절과 40절에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도록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영생이 죽고 난 뒤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요 17:3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서 철저하게 아는 것이 영생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의 영원이 미래의 시간보다 오늘이란 시간에 부각되어야 한다.
마지막 날은 지구의 최종 마지막 날인 시간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함께 하나가 되는 날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영혼들을 종교인으로 만들지 말고 다시 살려내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그러면 우리도 광야와 같은 존재에서 살아난 존재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광야에 같은 존재들을 예수와 함께 살려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광야의 존재가 되어 있는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이다.
50절 말씀에 그 어느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질문이 좋아하신다. 그런데 묻지도 않고 아는 척하는 것인지 모르는데도 질문하게 되면 무식이 탄로날까봐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되어 있다.
필자가 강의를 하면서 “그렇다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죽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다고 한다. 만나를 먹으면 죽지 아니한다고 되었는데 왜 죽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결론이다. 나이가 많아서 병들어서 죽을 때 되어서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으면 죽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말씀의 진미를 찾게 하셨다. 로마서 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란 구절에서 아무리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으면서 육신의 생각을 하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유명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설교를 해도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의 사상이나 논리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은 딴 것에 팔려 있는 자체가 죽는다는 뜻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53절부터는 이런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과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말씀이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피는 붉은 색의 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담”이란 단어에서 “담”이란 단어가 피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 생명의 피를 배우고 먹고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 매달려 말씀을 빨아먹고 사역에 임한다는 뜻을 갖고 있어 붉은 색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들어가 진드기처럼 매달려 아버지의 사상을 공급받아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단순히 무엇을 지시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전달되고 있다.
히브리어에 먹는다는 말이‘아칼’(lkoa')인데‘먹는다, 전적으로 불태워 버리다’라는 뜻이다.‘먹는다’는 말은 익히고 적용하는 것을 배운다는 말이다. 배운다는 말과 먹는다는 말은 같은 맥락이다. 배우는 것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일평생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지식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배운 그 지식을 삶 속에서 익히고 적용하며 길들여져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고 빗나가는 육의 속성을 자르고 깨뜨리고 불살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과정이며 십자가의 길이다. 이 멍에를 메고 십자가 길을 가는 것은 죽기 위함이다. 내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생명 안에서 영생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말씀을 먹고 먹으면 비뚤어진 하나님을 믿게 되어 샤머니즘으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음식도 맛있게 먹으면 내 안에서 태워져서 열량으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으면 올바른 에너지로 바뀌어져 올바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난 곳이 짐승이 머무는 마구간인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여관에 사람이 많이 투숙하여 만원사례가 되어 도저히 몸을 풀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방 한쪽 구석에서 출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에 따른 계획이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누울 곳이 지푸라기를 펴서 뉘어도 되는데 짐승들이 먹는 먹이통인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아기 예수를 우리가 먹어야 된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시편 49:12절과 20절에는 사람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짐승이다. 그래서 짐승의 띠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짐승인 우리가 아기 예수를 잡아먹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 예수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였다고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 안에 거해야만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만찬의 정신이며 철학이다. 그런데 그런 목적으로 성만찬이기보다 오랫동안 흘러온 전통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57절에“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말씀 속에 퐁당 빠지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 침례를 의미하는 것이다.
침례가 맞느냐? 세례가 맞느냐? 가 아니라 그 본질과 원형을 모르면 탁상공론만 하게 되어 있다. 이제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알게 되었다면 그 사실을 널리 전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영적 식인종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셔라. 알 때까지 미안한 마음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
내 속에 숨어있는 짐승의 속성이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육의 본능을 죽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하기를 원하시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쏟아지는 설교로는 제대로 공급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설교는 음식으로 비유하면 스프에 불과하다. 그 스프로 일주일을 버텨내고 있다면 아프리카나 볼 수 있는 영적 기아가 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신천지를 비롯하여 기타 여러 이단들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난리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려고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말씀의 본질과 원형을 찾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난 다른 것을 가르쳤는지 성찰의 시간을 갖고 올바른 성경공부를 전개해야 한다.
마치 부자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어먹었으니 얼마나 세상 거지보다 못하게 요즘 노숙자들이 우리들보다 더 잘 먹는데 교회의 성도들은 난민들 속에나 볼 수 있는 영적 기아처럼 허덕이고 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이고 마시게 하여 영적으로 토실토실 살찌게 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해야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