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가평 태봉리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胎封里)에는 조선조의 중종 또는 영창대군의 태가 묻혀 있다는 태비(胎碑)가 있다. 이 태비 때문에 마을이름 태봉리가 되었다. 태를 봉안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태비는 명문(銘文)이 희미해서 읽을 수 없는 탓에 태의 주인공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현재는 영창대군의 태비라 사람들은 알고 있다.
경기도 상면 태봉리는 중종 또는 영창대군의 태를 봉안했다는 태비(胎碑)와 태봉산(胎封山)이 있다.
이 때문에 마을이름을 태봉골[胎封谷] 또는 태봉리(胎封里)라 한다. 태비(胎碑)의 글자를 새긴 제목은 아지비(阿只碑)라 한다. 이 비는 현재 마을 어귀 500여m 아래에 있는데, 원래 위치에서 옮긴 것이다.
태비는 일반적인 태실비(胎室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좌의 앞면에는 2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잎이 새겨져 있다. 비각의 높이는 94cm이며 두께는 18cm이다.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4.5cm이다. 그 내용은 “아지비(阿只碑) 앞면: 황명만력삼십(皇明(萬)曆 三十…). 뒷면: 만력삼십사년칠월이십팔일립(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立)”이라 했다. 중간에 글자가 보이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비의 주인공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가평의 자연과 역사]에 의하면, 태비에 새겨진 연도가 1606년(선조39)이므로 이때 태어난 사람은 영창대군이 확실하다고 했다. 연도가 일치하므로 선조의 정비(正妃) 소생 영창대군이라고 했다. 한편,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의하면 이 태비가 영창대군의 태를 묻은 비라 단정할 수 없으므로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했다. 주민들에 의하면 1970년대 아지비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면서 앞뒤가 바뀌었다고 한다. 아지비의 경우 앞면은 출생일시를 뒷면은 태를 묻은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가평군 상색리에도 태실이 있는데, 이는 태봉리의 것보다 114년 전인 1492년 9월 7일에 태를 묻었다. 그래서 태봉리의 태는 영창대군의 것이고, 상색리의 태는 중종의 태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태봉리의 태비 명문(銘文)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태비가 있는 것은 분명하므로 태봉리의 명칭은 태비에서 유래하였다. 태봉이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있다. 이는 왕실에서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여겨 전국의 길지(吉地)를 택해서 묻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경우 관상감(觀象監)과 선공감(繕工監)에서 이를 맡아 처리했는데, 장소의 선택과 일자와 관리까지 철저히 하였다. 이 때문에 태를 묻은 곳은 길지로 알려졌고, 그 지역을 태를 봉한 곳이라 하여 태봉이라고 이름하였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도 왕실의 태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자료
단행본
가평문화원. 가평의 지명과 유래. 가평:가평문화원, 2001.
집필자
이학주
시대/연대
· 시대 : 조선-조선 후기(1593~1863)
· 연대 : 1600 년대
|
첫댓글 감사합니다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