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억 이상의 인구가 사는 세계 최대의 나라 중국, 그 나라의 수도는 다 알다시피 북경(요즈음에는 현지음대로 베이징으로 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계속 북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이 될 것이다)이고, 서울에서 북경가지 가는데는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도 채 안 된다. 전 세계에 그렇게 많은 나라가 있지만 수도와 수도가 가장 가까운 게 중국이라는 얘기다. 그만큼 우리와 중국은 그야말로 한 겹밖에 안 되는 얇은 옷 한 장 차이로 맞대고 있는(우리와 중국, 혹은 중국과 일본 사이를 표현하는 말로 자주 쓰이는 一衣帶水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까?) 그런 사이라는 얘기이다.
이 북경의 관문인 수도공항을 내려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가면 공항에서 약 반시간 남짓이면 곧바로 북경시내로 들어가게 된다. 요즈음 새로운 번화가로 떠오른 국제무역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제3 순환로의 동부선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대사관이 들어가 있었던 국제무역센터에서부터 서쪽으로 제2 순환도로까지에 각국의 대사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이 신흥 외교가를 흔히 사관구(使館區)라고 부른다. 제3 순환로에 있는 국제무역센터에서 정서방향으로 난 곧은 길을 계속 가다보면 건국문(建國門)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옛날에 있었던 문 이름이지만 문은 없고 대신 육교형태로 차도와 인도를 따로 만든 다리이다. 이 다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옛날 명나라와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명나라때에 쌓은 북경성의 정문인 정양문.
건국문에 서서 서쪽으로 북경의 중심인 천안문을 바라본다고 가정하자. 서 있는 방향의 좌우로 연결되는 도로, 곧 밑으로 지나가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가 예전 북경성이 있던 자리이다. 1949년 모택동이 영도하는 신중국(新中國)이 들어선 이후, 도로를 낸다며 옛 성벽을 헐어버렸다. 그 성벽자리를 따라 난 길이 북경의 제2순환도로인 이환로(二環路)이다. 물론 그 이환로를 따라가 보면 군데군데 성문이 남아있고, 성문이 없으면 지명이라도 남아있기는 하다.
북경성의 정동문(正東門), 곧 우리 한양성의 동대문(興仁之門)에 해당하는 문이 조양문(朝陽門)이다. 조양문에서 서쪽으로 똑바로 가다보면 황제가 살고 있는 자금성(紫禁城: 일반적으로 외부에서는 그렇게 부르지만 중국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故宮이라고 부른다)이 연결되기 때문에 북경성의 정동문이 된다. 그 조양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다보면 그림에서 보듯 동직문(東直門), 안정문(安定門), 덕승문(德勝門) 등 16개의 문이 나온다. 북경성은 황성을 중심으로 한 내성과 각종 관아와 귀족, 관리들의 거주지인 외성으로 나뉘어지며 전체적인 모양은 凸字 모양이다.
이 북경성은 잘 알다시피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成祖 永樂帝)가 건국초기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부터 천도하면서 쌓은 성이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元나라의 수도 대도성(大都城)을 확대, 발전시켰다. 유럽까지 쳐들어가 유라시아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원나라 3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1) 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게 만들어, 멀리 유럽의 이탈리아에서부터 온 방문객인 마르코 폴로를 놀라게 했던 그 대도성터의 동쪽에 중심을 잡고 있다. 황성과 내성, 외성을 새로 배치하다보니 예전 대도성 보다는 동쪽으로 조금 이동을 한 상태이다.
그럼 이 대도성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 원나라사람들은 갑자기 중국의 중원을 정복한 터라 문화가 있을 수 없다. 문화뿐 아니라 이 거대한 성을 만들 재주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이전 것을 보고 활용했다. 원나라 이전에 중국북방을 다스린 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이다. 金나라는 이 北京에 수도를 정하고 백여년 간을 다스렸다. 그 금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수도를 중도(中都)라고 불렀는데, 원나라는 중도성의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해서 성벽을 옮기고 확장해서 수도인 대도(大都)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12억 중국의 수도의 기본 골격은 그것을 역으로 추적해 올라가면 금나라 때의 중도성(中都城)에 까지 소급되고 있다.
중도성
중도성의 위치는 현재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록과 유구 등을 토대로 할 때 현 북경성의 서남쪽 귀퉁이로부터 더 서남쪽으로 나가는 곳, 즉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북경시 선무구(宣武區)일대로서, 북경시 서남쪽의 제2 순환로와 제3 순환로 사이 일대에 해당한다. 중도성은 금나라의 4대 황제인 해릉왕(海陵王) 2)이 만주지방에서부터 중국북부를 점령하고 난 뒤인 서기 1151년(天德 3년)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153년(貞元 원년)에 완공한 것으로 돼 있다. 중도성은 성 면적이 18평방 킬로미터, 한 변이 4킬로미터를 넘는 장방형의 성곽이다.
이 중도성은 또 형식상으로 요(遼)나라의 남경성을 기초로 해서 동쪽과 남쪽, 서쪽을 각각 늘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성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 아니라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 京, 즉 開封)의 궁궐과 성곽형식을 차용해서 대대적으로 확장, 건설한 것이다. 성곽에는 모두 13개의 문을 내었다. 성 안은 대성(大城)과 황성(皇城),궁성(宮城)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대성의 한 가운데에 황성이 있었고, 황성 속에 또 궁성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있다. 궁성의 전각(殿閣)과 누각(樓閣), 대(臺) 등은 규모가 웅대하고 기세가 당당했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맨 처음 중도성을 만들 때에는 성 서쪽에 있는 천연호수인 서호(西湖)에서부터 세마구(洗馬溝)라고 불리는 하천을 파서, 우선 성 서쪽편으로부터 물이 흘러들어 해자(垓字:성 둘레를 보호하는 도랑이나 하천으로, 중국에서는 성을 보호하는 하천이란 뜻으로 護城河로 부른다)가 되도록 했고, 다시 그 물이 황성의 서쪽으로 들어와서 황실정원을 흐르도록 했다. 황실 정원의 이름은 동락원(同樂園)으로서, 이 정원 안에 물이 고이는 서화담(西華潭)을 만들고 그 위에 용진교(龍津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다리는 한가운데에 황제가 걷는 길과 양쪽으로 비빈(妃嬪)과 신하들이 걷는 길 등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옥으로 된 멋진 난간이 그 위에 장식돼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또한 궁궐은 장려했다. 연연히 수백, 수천 동이 이어지어진 궁궐들은 아방궁이라도 못 따라올 정도였다고 한다.
중도성은 오늘날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북경의 제2 순환로를 다녀도 그 때의 지명은 별반 남아있지 않고, 제3 순환로를 달리다보면 유일하게 옛 지명과 비슷한 것을 만난다. 여택교(麗澤橋)라는 지명. 바로 중도성의 서남쪽문인 여택문(麗澤門 도면의 ☜표)의 옛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볼 때에 여기가 중도성의 서남쪽 끝 무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
발해인들
북경성 이야기를 하다가 왜 때아닌 금나라 때의 중도성이야기를 하는가? 우리가 거의 모르고 있던 이 성의 사연 때문이다. 그 사연이란 이 성을 쌓은 공사를 총지휘한 사람, 곧 축성의 총책임자가 발해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장 호(張 浩)!
"張浩字浩然,遼陽渤海人.本姓高,東明王之後.....
장호는 자가 호연이며, 요양발해인이다. 본성은 고로서,
동명왕의 후손이다..."
중국의 정사인 25사중에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공식역사서인 <금사(金史)>는 열전(列傳)속에서 장 호 라는 인물에 관한 열전을 따로 만들어 그에 대해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금사(金史)>는 원나라 때 편찬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열전에 당당히 포함됐다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금나라 초기에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장 호는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명을 받아 금나라의 새로운 수도가 될 중도성의 건설 총책임자로 뽑혔다. 그에 의해서 금나라의 수도는 급피치로 건설돼 3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북경성의 원조가 되는 금나라의 중도성은 발해인 장 호의 책임 하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기념물인 것이다. 발해라는 한 '잊혀진 왕국'이 발해왕국의 본거지며 수도가 있던 흑룡강성이나 길림성이 아닌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그것을 주도한 삶이 발해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주 땅이 아닌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발해인의 발자취와 숨결을 처음 찾아내어 느낀다는 것은 발해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포함되는 한 보통이상의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북경에서 만나는 과거의 발해인은 발해인이 자기 나라를 이루고 살던 그 시대, 그 순간이 아니라 발해가 망한 뒤 2백 여 년이나 되는 금나라 시대의 발해인들이다. 북경성의 전신인 중도성의 건설책임자가 발해인이었다는 그 사실로부터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발해와 발해인들의 역사가 의외에도 북경이라는, 전혀 엉뚱한 곳, 아니 중국의 수도에 묻혀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거기에서 너무도 많은 발해인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4)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며 중원과 세계를 호령하던 당나라가 절도사중 하나인 주전충(朱銓忠)에 의해 멸망한 후 중국 땅은 수많은 군벌들이 날만 새면 들고일어나 황제가 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됐다. 중원의 주인이 없는 사이에 만주벌도 새 주인이 들어선다. 동북쪽 변방의 한 부족이던 거란족이 주위를 정복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자 필연적으로 당시 만주의 주인이던 발해와 충돌이 없을 수가 없다.
서기 925년 11월, 거란군은 수도인 상경 임황부(臨潢部: 오늘날의 내몽고성 林西縣)를 떠나 발해정벌에 나선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지키는 길목이며 최대의 군사거점이던 부여성이 이듬해 1월에 함락된다. 그러자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湮 )은 300여 명의 귀족, 관료와 함께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한다. 그리해서 만주벌을 200여 년간이나 호령하며 한 때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별명을 들은 정도로 강대한 나라였던 발해가 맥없이 무너져버린다. 중국북부의 주인이 발해에서 거란족으로 바뀐 것이다.
발해는 잘 알다시피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의 유장(遺將)인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한 그 유민들이 들고일어나 침략자인 당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세운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서기 698년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고구려의 유장이었을 뿐더러 그 뒤를 이은 제2대 武王은 727년 바다건너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가의 성립을 알린 국서에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발해의 풍속을 이어받고 있다)"라고 쓸 정도로 고구려를 잇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발해는 나라의 이름을 초기에는 진국(震國)이라고 했는데, 중국 측에서 발해(渤海)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조영 때부터 고구려의 부흥을 외쳤고, 스스로는 국내외적으로 공식문서 같은 데에도 보통 고려라는 옛 이름을 관습적으로 썼다는 데서 5),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당당한 역사 속에 포함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인들이 굳이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 발해 땅의 역사성과 관련해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국가의 성격은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기에 이 문제에 관한 한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6)
중국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에서 남서쪽으로 약 백 리쯤 나가면 예전 고구려 때 요동성이 있던 요양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1985년 10월, 요양시가 병원을 짓기 위해 한 오래된 우물을 파내다가 우물 속에서 윗부분이 깨어진 돌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돌비석에는 정자로 아주 잘 쓴 글씨가 남아있었다. 비석의 본체는 요양시박물관에 곧 보관조치됐다. 1995년 12월 이 비석과 비문에 대한 연구가 중국의 문화재전문 월간잡지인 [文物]지에 처음으로 나왔다. 비석이 처음 발견된 지 10년 만의 일이다.
이 비석은 청석(靑石)으로 만든 것으로, 장방형이며, 길이 63센티미터, 너비 60센티미터로서, 22행에 걸쳐 598자가 남아있다. 비석이라고 하지만 한 스님의 행장을 적은 글로서,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탑명(塔銘)이다. 중국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을 보고 이것을 <동경승엄사선사탑명:東京勝嚴寺禪師塔銘>이라고 편의상 부르고 있다.
윗부분이 잘려 불분명한 내용이 있지만 읽을 수 있는 부분만 가지고 파악을 해보면 이 탑명은 중국 금나라 때 동경성으로 불린 현재의 요양시에 있던 승엄사라는 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탑명에는 숭엄사라는 절이 발해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이었다고 절의 연혁을 전하면서 여기에 상주하던 절의 가장 높은 스님인 선사(속성 高씨)가 명창(明昌)원년(서기 1190년)에 입적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숭엄사라는 이 절은 금나라 때에는 동경성 요양부의 성 남쪽교외에 위치해 있었고, 그 전까지는 발해인들의 절이 없었는데, 기존의 절을 고쳐서 선찰(禪刹)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정륭(正隆)4년(서기 1159년)과 대정(大定)7년(서기 1167년) 두 차례에 운당(雲堂), 양당(凉堂), 주방(廚房), 회랑을 새로 만들었다. 이 절의 가장 높은 스님인 선사는 속성이 高씨이며, 69살에 입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스님이 발해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비문에 '동경 요양현의 발해인'이라고 분명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거란족에게 망한 것이 서기 926년인데, 명창원년, 곧 1190년이라면 발해가 망한 지 무려 260여 년이 지난 뒤이다. 그런데도 성이 고씨인 스님은 발해사람으로 불리고 있고, 발해인이라는 사실이 비문에까지 남아있다. 발해가 무엇이길래 이처럼 멸망한 지 260년이 지난 뒤에도 발해인들이 살아남아서 금나라에서 활동을 할 수가 있는가? 요양시에서 나온 한 비석은 발해 멸망 2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많은 발해사람들이 금나라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들을 위해 따로 절을 만들 정도로 큰 세력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중국사에 묻혀버린 줄 알았던 발해와 그 후손들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 통치기간을 거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알게 하는 귀중한 발견이다.
발해가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동경성에 승엄선사가 살았었다. 그는 속성이 고씨였다고 하는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발해의 지도층은 고구려인들이었기 때문에, 발해의 고씨도 고구려의 고씨이다. 고구려의 고씨는 주몽의 고씨, 곧 고구려의 왕실을 뜻하고 있다.7)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 발해의 가장 중심적인 혈족이었던 고 씨(高 氏)와 대 씨(大 氏)들이 큰 활약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공식역사서인 금사에 열전항목으로 독립해서 소개되는 발해의 후손들이 너무도 많다. 예를 들어 보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고 간(高 ), 행어사대부(行御史大夫)였던 고 정(高 楨), 호부상서(戶部尙書) 고덕기(高德基), 행대병부상서(行臺兵部尙書)와 추밀부사를 지낸 고 표(高 彪)가 있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국무총리를 지낸 장 호(張 浩)와 그의 아들 장여림(張汝霖), 장 호와 항렬이 같은 집안인 장현소(張玄素), 현소의 조카인 장여필(張汝弼)이 있었다. 또 금나라 4대 황제의 어머니와 왕비, 5대 황제의 어머니 등이 발해의 여인이었다. 중국 정사의 열전에 포함된다는 것은 단순히 장관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만큼, 이들 발해인들이 금의 조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 그것도 보통이상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서에 당당히 올라있음은 당연하다.
물론 이보다 앞선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때에도 발해인이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발해의 유장(遺將)으로서 요(遼)의 태조(太祖)인 아율아보기의 눈에 들어, 요가 중국북부로 진출할 때에 많은 전공을 세운, 그래서 태조로부터 "나라를 대표하는 용감한 장수로서, 내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이 사람의 힘 때문이다"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나중에 우상(右相)까지 오른 고모한(高模翰)이 가장 유명했고, 금나라 초기의 명장 고 표(高 彪)의 조부 안국(安國)은 요나라 때 흥(興), 진(辰),개(開) 삼진(三鎭)의 절도사를 했고, 아버지 육가(六哥)는 자사(刺史)를 지내는 등 고위관리였다.
그러나 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이고, 요에서 벼슬을 했을 때에는 시간적으로 발해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이므로 발해의 유민들이 새로 일어난 요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만주는 아직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발해라는 큰 나라에서 문자와 제도를 배운 사람들이 거란족에게도 중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금나라는 이미 발해가 망한 지 200년 뒤에 일어난 나라이다. 그 때까지도 발해인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서 발해인의 피를 보존하고 있었던가? 그들 발해인들은 어떤 연고로 다시 역사무대에 나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발해유민들이 다시 일어나 금나라 조정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여진족과 발해
발해의 유민들이 금나라 조정에서 활약을 하던 때는 만주지방에 살던 여진이라는 부족이 북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거란족의 제국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이라는 큰 나라를 형성해서 만주와 북중국의 패자로 올라설 때이다.
금나라를 세운 족속은 잘 알다시피 여진족이다. 여진족은 만주 땅을 터전으로 삼아오면서 중국 역사에서 한(漢) 이전까지는 숙신(肅愼), 읍루(邑樓), 물길(勿吉)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말갈(靺鞨)이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이후, 새로이 여진(女眞)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거란족의 요(遼)제국은 이들 여진족에 대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들에게 가혹한 탄압정책을 펴는 한편 많은 여진인들을 요동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는 방법으로 여진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여진인들은 한족(漢族)이나 거란족과 통혼을 하고 점차 한인화한다. 그러나 백두산에서부터 흑룡강 중하류 사이, 이른바 '백산흑수지간(白山黑水之間)'에 살고 있는 여진족, 이른바 '생여진(生女眞)'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생활습속을 지켜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전신은 앞에서 말했듯이 말갈족이다. 중국의 당나라 이후 우리나라의 신라말, 고려 초(羅末麗初)때 여진족이 정식으로 생겨난다. 그들의 시조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 <세기(世紀)> 조(條)에 따르면 여진인의 시조로 불리는 함보(函普)는, '최초에 고려(高麗)로부터 나와서.........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의 끝 벼랑지대에 살았다'라고 돼 있다. 결국 당나라 때의 말갈족, 그 이후의 여진족도 우리 민족에서 분화된 방계민족이라고 봐야 한다.8)
이 여진족의 몇 개의 부족 중에서 완안부(完顔部) 9)가 이들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한다. 서기 1113년 새 지도자가 된 아구타(한자로는 阿骨打, 만주식으로 아구타로 읽는다)가 더 이상의 압박과 굴레를 참을 수 없다며 요나라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각지를 잠식해 들어가자 요나라는 1115년 자칭 70만이란 대군을 편성해 아구타를 치러 나왔다가 불과 2만의 아구타 기병에게 철저하게 궤멸당한다.
아구타는 그 이듬해인 1116년에 당시 만주의 중심도시인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오늘날의 요녕성 요양시)를 점령함으로서 만주의 여진족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통일된다. 이제 만주의 주인은 요(遼)나라가 아니라 금(金)나라가 되고, 여진족의 시대가 온 것이다. 발해의 후손들은 바로 이 무렵, 즉 태조 아구타의 건국에서부터 2대 태종, 3대 희종, 4대 해릉왕(海陵王), 그리고는 금나라가 안정기에 들어가는 5대 세종과 6대 장종(章宗) 때까지 약 80여 년 간 그 이름이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금나라의 개국에서부터 전성기까지를 망라하는 시기이다.
발해의 유민들
금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발해의 유민들은 태조 아구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정책을 건의했고, 수많은 정복전쟁에 나가서 기대이상의 전공을 세웠으며, 속된 말로 무식하기만 했던 여진족들을 대신해서 법령과 제도를 새로이 정하고, 외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썼으며 장관과 재상이 되어 새로 병합한 중국인들을 다스리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금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의 유민들을 크게 분류하면 세 가지이다. 첫 째는 건국과정에서 무공을 세운 사람, 둘 째는 학식과 재주로 건국과정에 기여한 사람, 그리고 셋 째는 건국과는 상관없는 제2 세대로서 혹은 부모의 후광이나 집안의 인연으로 인정받은 사람 등 세 부류이다.
먼저 정복전에서 가장 먼저 공을 세운 사람들을 만나보자.
우선 만나 볼 사람은 大호(白 밑에 大)이다. 10)
그의 선조는 대대로 요양에 살면서 요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금나라 태조 아구타가 거란정벌에 나설 때에 요나라는 요양에서 발해유민들을 대상으로 병을 모집하고는 이름을 원군(怨軍)이라고 했다. 스무 살인 대호도 이 때에 뽑혔다. 두 군사가 맞붙어서 요나라 군사들이 패하게 되자 대호는 패주하는 거란군과 함께 거란의 동쪽 땅 영강주(寧江州)로 도망을 갔으나, 영강주마저 함락되자 다시 도망을 가다가 여진군에게 붙잡혔다. 태조 아구타는 범상하게 생긴 대호를 알아보고는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고 물어보고서 뛰어난 집안임을 확인하고서는 그의 휘하로 거두어드린다.
수국(收國) 2년(1116년) 동경(東京)에 있는 해민(奚民) 11)들을 다스리는 모극(謀克) 12)이 된다. 이 때에 비로소 발해왕국의 부흥을 표방하며 황제에 오른 발해유민 고영창 13)을 쳐서 깨트렸는데, 동경 주위의 여러 군(郡)들이 아직 복속하지 않으므로 대호에게 이들을 찾아내라고 한다. 대호는 이 때에 상당히 공을 세웠다. 정보를 충실히 모아 상부에 보고하고는 이들을 색출해 처벌하므로서 이 일대를 안정시켰다. 이 공로로 금나라 태조로부터 충성스런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猛安을 수여 받는다.
거란의 중경(中京)과 서경(西京)등 두 도시를 취하고 도마군( 馬軍)을 예속시켰다. 요나라에서 20 만의 군대가 다시 쳐들어오매, 대호는 병영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출전하겠다고 나섰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굽히지 않고 계속 나가겠다고 하였다. 누군가가 대호에게 왜 그렇게 나가서 싸우려하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대호는
" 丈夫不得一決勝負, 尙何爲. 苟臨戰不捷, 雖死猶生也
장부가 한 번 제대로 된 승부를 붙지 못하면 무엇에 쓰겠는가?.
싸움에 나가서 이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
고 말했다. 대장이 듣고는 이를 장하게 여기고 마침내 출전시켰다. 그는 여기에서 병력을 지휘해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으로 해서 군에서 큰 이름을 날리었다. 금나라의 건국 초기에 발해인으로서는 가장 초기에 공을 쌓았고, 태조 아구타로부터 귀여움을 받은 대표적인 무장이다.
북경 북해공원내의 인공섬인 경화도( 華島).금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금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인 가운데 무장으로서 대호에 못지 않는 용장이 고 표(高 彪)이다. 본명이 소화실(召和失) 14)인 고 표(高 彪)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할아버지 안국(安國)이 요나라에서 흥주(興州), 진주(辰州), 개주(開州) 등 삼진(三鎭)의 절도사였고 아버지 육가(六哥)가 자사(刺史)를 지낸 고관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남의 눈에 띄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주쟁이의 말에 따라 외가에서 신분을 숨기고 자라났다.
요나라가 동경성에서 군사를 징발할 때에 육가는 이미 늙어서 나가기가 힘들자 고 표가 아버지 대신으로 나갔다. 출하점(出河店)이란 곳에서 여진군과 싸울 때에 15) 요나라 병사들이 모조리 패해서 도망치는 데도 표는 혼자서 잘 싸웠다. 요나라의 군사는 이 때에 표가 용사임을 알아보고 그를 구해내 주었다.
금나라 태조의 아들 알노(斡魯)의 군대가 요의 동경성을 공격할 때에 아버지 육가는 휘하의 사람과 군사들을 이끌고 금에 항복해서 맹안(猛安)의 지위를 받았다. 아버지가 늙어서 은퇴를 하고, 아들인 표가 대신 그 무리를 이끌었다. 금나라의 도통(都統:총사령관)인 고( )가 요(遼)의 중경(中京)을 쳐들어 갈 때에 표는 모극(謀克)을 이끌었고, 알로를 따라 고주(高州)와 혜주(惠州)의 경계지역에서 요나라 장군 합로조(合魯燥), 한경민(韓慶民) 등을 격파했다.
금나라 장군 종망(宗望)이 평주(平州)를 공략할 때에 표는 서북도를 돌아 적을 쳐부수고 석가산채(石家山寨)에서 적의 항복을 받았다. 다시 종망을 따라서 송나라를 치러 갈 때에 맹안(猛安)이 됐다. 진정(眞定)이란 곳에서 표는 병사 70명을 선발해서 성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밤중에 성안으로 갑자기 뛰쳐나오며 불을 질러 적을 격퇴했다.
고 표의 활약은 요와의 전쟁뿐 아니라 뒤이어 중국 땅으로 송나라를 처내려 갈 때에도 계속됐다.
송나라 수도 변경( 京: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을 칠 때에 기병 50기를 이끌고 동남수문을 지키다가 송나라의 대군이 쏟아져 나옴에 이를 격퇴시켰다. 공이 높아져서 태종(太宗) 때인 천회(天會) 5년, 서기 1127년 16)에 정강군(靜江軍)절도사와 수주자사(壽州刺史)가 됐다. 다음 해에는 송나라를 치기 위해 산동 땅에까지 가서 성을 깨고 송나라군대를 쳐부수어 거듭 상을 받았다. 이듬해 남경로의 자성현( )城縣)에 이르자 성안의 관리들이 항복함에 따라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들어가 이를 접수했으나 다시 남은 군사 3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쳐서 깨트리고 성안의 주민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금나라 종실인 대장군 종필(宗弼)을 따라 남으로 계속 쳐 내려가 항주에 이르렀다. 송나라 장군 한세충(韓世忠)이 양자강 북쪽을 완강하게 지키며 그중 30여 척이 선발대로 쳐들어오자 표는 군사 수십 명을 이끌고 적병 수백 명이 있는 적함대의 선두 배에 뛰어 올라가 격투 끝에 모두 섬멸하는 등 武勇이 뛰어 났다.
금사(金史)는 이렇게 적고 있다:
彪,勇健絶人,能日行三百里,身被重鎧,歷險如飛.及臨敵,身先士卒,未嘗反顧,
大小數十戰,率以少擊衆,無不勝捷.
표는 용맹스러움이 타인을 뛰어넘어 하루에 능히 삼백리를 갈 수 있고,
몸에 무거운 갑옷을 입어도 마치 날듯이 험한 곳을 다닌다.
적을 만나매, 병졸보다 앞서 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전투에서 항상 적은 사람을 이끌고 큰 적을 쳐서,
이기지 않은 적이 없다.
기주방어사(沂州防御使), 무녕군(武寧軍), 안화군(安化軍), 안국군(安國軍), 무승군(武勝軍) 등 전방의 요직인 절도사를 두루 거쳐 행대(行臺)병부상서를 지내고 경조윤(京兆尹:수도의 시장)이 됐다. 부모상을 당해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다시 무정군(武定軍) 절도사로 재기용됐다가 귀덕윤(貴德尹)으로 옮겼다. 4대 황제인 해릉왕은 그에게 원로정치인에게 주는 최대의 예우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라는 직함을 수여했다. 너무 오래 있다고 사직했다가 추밀부사로 다시 기용됐다.
그는 딱 한번 부정축제사건에 연루됐으나 원로라는 점이 참작돼 석방됐다. 그는 재주가 많아서, 음률(音律)에도 달통했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 높낮이가 없이 모두 온화한 얼굴로 대했다고 한다. '彪(표범 표)'라는 이름은 그의 이러한 용맹을 기려 황제가 내려준 이름이다.
고 표와 같은 발해 고 씨로 고 정(高 楨)이란 사람도 크게 활약했다.
고 정의 5대 할아버지인 모한(牟翰)도 고 표의 할아버지처럼 요나라에서 관리를 해서 벼슬이 태사(太師)까지 올랐다. 고 정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해서 일찍 진사가 됐다고 한다. 요나라 말기 발해의 유민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번에는 고 정의 어머니가 금나라 군대에 공을 세웠다. 고영창을 토벌하기 위해 금나라 태조의 아들인 알노(斡魯)가 대군을 이끌고 요양성을 향해 쳐내려 오면서 심주(瀋州: 오늘날의 심양)까지 내려왔을 때에 고영창은 알노군의 진군속도를 늦추기 위해 거금을 싸들고 알노를 뇌물로 매수하려고 했다.
그 때 고 정의 어머니가 심주성에 있다가 금나라 군대에게 항복하고는 고영창이 알노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속임수이며, 공격을 늦추기 위한 술책이라고 폭로한다. 이 말을 들은 알노는 공격을 늦추지 않고 쳐 내려와, 성안에 있던 발해인 장현소의 협력으로 고영창을 패주시킨다. 이에 따라 고 정은 동지동경유수사(同知東京留守使)가 되고 천호장(千戶長)인 맹안을 수여 받는다.
금 태종때인 천회(天會) 6년(1128년) 상서좌복사(尙書左僕司)로 옮기고, 광녕부(廣寧府: 요녕성 북진北鎭)의 부윤(府尹)으로 나아갔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를 덧붙여 받는다. 지방에 나가있던 8년 동안 정치와 명령이 맑고 엄숙해서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일반 사람들은 안심했다. 천회 15년 태자태사(太子太師) 17) 가 되고, 하북서로(河北西路)의 비단과 돈 등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다음 황제 희종 때인 천권(天眷: 1138년~ )초기에 회녕(會寧: 흑룡강성 아성현阿城縣 남백성南白城)의 목(牧)이 된다. 이어 금나라가 송나라로부터 연경을 빼앗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희종 황제가 연경(燕京)에 행차할 때에 대국공(戴國公)으로 봉해지는 것과 함께 동지연경유수(同知燕京留守)가 된다.
위왕(魏王) 도제(道濟)가 중경(中京: 내몽고성 영성현寧城縣 서대명성西大明城)을 지키러 나갈 때에 고 정을 동판(同判: 同知判官의 준말)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어 오래지 않아 행대평장정사(行臺平章政事) 18)가 되고 다시 서경유수(西京留守: 山西省 大同의 유수)가 되고 임국공(任國公)에 봉해진다.
이 때에 해족(奚族)을 모두 남쪽으로 옮겨놓는데, 별출(別朮)이란 자가 이에 앙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도적이 된다. 당시의 황제인 해릉왕은 이를 걱정해서 고 정에게 중경유수를 맡기며 도적을 소탕하라고 한다. 고 정은 도적을 소탕하고 하내군왕(河內郡王)으로 봉해진다. 해릉왕이 중경에 시찰하러 왔을 때 고 정은 물샐 틈 없는 경비로 칭찬을 받는다.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한 총신의 머슴이 황제를 따라 왔다가 권세를 믿고 밤에 멋대로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자 고 정은 이 머슴을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초죽음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되자 당시 권세 있고 귀한 집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고 한다.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자리를 옮겼다가 행어사대부(行御史大夫)가 되고 거왕( 王) 19)에 봉해졌으며 다시 대왕(代王) 20)으로 올라 봉해진다.
그 후 고 정은 어사대(御史臺) 21)에 오래 있으면서 관리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비판을 하고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서 모든 해당자들이 그를 겁내었다고 한다. 늙어서 병으로 쓰러지면서도 "무슨 일이 처리가 안되고 무슨 일은 아직 아뢰지 못해 죽어도 한이 남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격이 바르고 깐깐해서 집안에서는 풍악소리가 들린 적이 없었다. 또한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옷을 풀어헤치는 법이 없었으며, 집안에 하루종일 부인과 앉아 있어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등 입이 무겁고 검소했다고 한다. 69세에 죽으니, 해릉왕은 이를 애석히 여기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한 뒤 벼슬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금사(金史)를 찬한 원나라의 역사가는 이렇게 고 정을 칭찬하고 있다.22)
高楨以舊勞爲御史大夫, 剛明自任, 繩治無所避, 幾不免於怨憎之 (도)毒. 直己而行, 自古難之.
"고정은 예전의 공로로 어사대부가 됐으나 강직하고 밝으며 스스로 일을 맡고, 잘못을 바로잡는데 피하는 곳이 없어서, 원한과 증오의 쓴 독을 몇 번 피하지 못했다. 몸을 바르게 세우고 행하였는데, 자고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 정 이후 유명한 발해인으로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고 간(高 )과, 호부상서(戶部尙書) 고덕기(高德基)가 있다. 그에 관해서는 열전에 길게 나오지 않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들이 모두 상서의 지위에 까지 올랐고 열전에 별도로 항목이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역대 황제의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편 계속...
현재 : 2002/05
8 부활하는 발해인2 이동식 [기자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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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한국사 기사 성격 : 일반
최고의 발해인
금나라에서 활동한 발해인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고 영화를 누린 사람은 張 浩이다. 그의 활동은 다른 발해인들의 모범이 됐으며, 동시에 다른 발해인들이 금나라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장 호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본래 성이 高이며, 동명왕의 후예라고 역사책에 유별나게 기재돼 있다.23)
장 호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름이 패(覇)로서, 요(遼)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장(張)씨로 성을 바꾸었다. 금의 태조 아골타가 한창 힘을 키우며 일어서던 천보(天補: 1117년~ 1122년)연간에 장 호는 계책을 올려 태조를 도왔다. 태조는 승응어전문자(承應御前文字)라는 직함을 주었다. 태조의 동생으로서 형을 이어 금나라의 2대 황제가 된 태종 때인 천회(天會) 8년(서기 1130년)에 진사에 급제해서 비서랑(秘書郞)이 됐다.
태종이 동경 요양부로 가 있으려고 할 때에 장 호는 수선대내(繕修大內:황실의 음식, 옷 등의 수발책임자)를 제수 받고 이어 벼슬이 막 뛰어올라 위위경(衛尉卿), 권첨선휘원사(權簽宣徽院事), 관구어전문자(管勾御前文字)가 됐다. 그의 직책이 말해주듯이 경전과 역사에 두루 통하고 밝았기에 주요 공문서작성과 송부를 대부분 맡았으며, 태종 때 통용된 조정의 기초예의를 그가 거의 정했다. 유목민족이었다가 갑자기 대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므로 모든 것이 서툴었을텐데, 장 호는 이 때에 가장 공헌자였던 것이다.
늙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잠시 관직을 사퇴했다가 다시 들어와서 조주자사(趙州刺史)가 됐다. 관제가 행해지면서 중대부(中大夫)에서 대리경(大理卿)이 됐다. 이 때에 이미 요나라로부터 뺏은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현재의 요양시)에 금나라는 황궁을 만들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장 호를 임명했다. 이 때 직책을 잘 수행해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이것이 뒤에 보다 큰 수도를 만드는데로 이어진다.
태종의 뒤를 이은 희종(熙宗) 때인 천권(天眷) 2년(1139년), 고금의 법을 참고로 해서 내외의 의식을 두루 상세하게 정했으며, 호조(戶曹), 공조(工曹), 예조(禮曹) 등 삼 부의 시랑(侍郞: 차관)을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 오늘날로 치면 교육부와 문화체육부, 공보처장관)가 됐다. 그가 얼마나 꼼꼼하고 뛰어났는가를 알려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곡(田穀)의 당(黨)' 사(事) 24)가 일어난 것이다. 이 일로 조정이 쑥밭이 되었을 때에 장 호는 6부의 일을 거의 혼자 맡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 때에 모든 일을 일일이 장부에 기재하고 빠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 재주에 탄복했다고 한다.
몸에 병이 있다며 외직을 원해서 창덕군(彰德軍) 절도사에 보해졌다가, 금나라가 북경지방을 쳐서 얻은 뒤에는 연경로의 도전운사(燕京路都轉運使)를 맡아 북경과 수도 요양사이의 소금, 쌀 등 주요 물자의 이동을 책임졌다. 곧 평양윤(平陽尹)으로 옮겼는데, 이 지방에 도둑이 들끓어 부녀자들이 밤에 납치되는 일이 많았다. 장 호는 도둑을 잡아 매질로 때려죽이니 그 이후 도둑이 점차 줄어들었다. 또 근처에 음란스런 사당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와 경배를 하니 땅주인과 사당측과의 이권싸움이 몇 년을 끌며 해결이 되지 않았다. 장 호는 과감히 그 사당을 철거하고 사당에서 모시던 像은 강물 속에 던져 버린 뒤 사당 터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하자 더 이상 감히 나서서 사당에 가려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희종을 암살하고 등극한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 때에 외직(外職)에 다시 발탁돼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 집정관으로서 재상을 보좌한다. 부수상급)가 됐다. 천덕(天德) 2년(1150년), 모친상을 당해 사직을 하고 상을 치른 뒤에 올라와 다시 참지정사를 맡았다가 이어 상서우승(尙書右丞: 우승상을 보좌하는 위치의 부수상)을 맡았다.
이 때에 금나라는 이제 양자강 이북과 만주 땅을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형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종실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숙청작업을 벌인 뒤에 종친이 아닌 발해인과 한인들을 중용하기 시작해 장 호에게는 더욱 많은 신임을 했다. 천덕 3년(1151년), 금나라의 수도를 요양에서 연경(燕京)으로 옮기기로 결심하고, 장 호에게 연경성을 넓히고 궁궐을 지으라는 중책을 명한다. 연경유수 유 괄(劉 )과 대명윤(大名尹) 노언륜(盧彦倫)이 장 호와 함께 감호공작을 맡는다.
지독한 폭군으로 이름난 해릉왕은 1년안에 공사를 마무리지으라고 야단이다. 북경주위의 주민 80만 명이 공사에 투입됐고, 군대도 40만 명이나 동원됐다. 공기는 짧고 임무는 급해 공사 독촉이 빗발친다. 때는 여름이라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인부, 기술자들이 쓰러진다. 장 호는 연경주위 5백 리에 있는 모든 의사들을 모으도록 해 이들에게 치료를 시키며, 관에 있는 모든 약품을 풀어주었다. 많이 고친 의사에게는 그만큼 상을 많이 주었다.
궁궐은 모두 황금오채(黃金五彩)로 장식했고, 목재는 하북성 진정부(眞定府)의 담원(潭園)에서 운반해 왔으며, 송나라의 수도였던 변경( 京:개봉)에 있던 궁궐에서 빼와서 쓰기도 했다. 해릉왕은 궁궐 하나를 짓는데도 억만금을 아끼지 말라며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짓도록 했다. 26) 이윽고 햇수로 3년도 안돼 공사가 끝나자 해릉왕은 1153년 수도를 이 곳으로 옮겨 中都라고 이름을 바꾸고 연호도 정원(貞元)으로 바꾸어 정사를 이 곳에서 보기 시작한다.
이 때 장 호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임명되고 수고 많이 했다는 칭찬과 함께 황제로부터 금대(金帶)와 옥대(玉帶)를 하사 받는다. 황제는 어조지(魚藻池)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장 호는 황제에게 사방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새로 지은 중도(中都)에 살고싶어하는 자는 부역을 십 년 동안 면제해줌으로서 수도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상주해 허락을 받는다.
상서우승상 겸 시중(尙書右丞相 兼 侍中)이 됐으며, 노왕(潞王) 27)에 봉해졌다. 이 때에 그의 아들 여림(汝霖)도 진사에 급제 받았다. 얼마 있지 않아 촉왕(蜀王) 28)으로 고쳐 봉해졌고, 좌승상(左丞相)으로 올라갔다.
정륭(正隆) 2년(1157년) 노국공(魯國公)에 고쳐 봉해졌다. 장 호는 표를 올려 사의를 밝힌다. 그러자 해릉왕은 "임금이 밝지 못해 간해도 듣지 않고 말해도 듣지 않으면 재상이 사표를 내거나 혹은 재상이 늙고 병들어 정사를 맡을 수 없을 때에 사표를 내는 것인데, 경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인가?"하고 물었다. 장 호는 "신이 병을 얻어 일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재상이란 자리는 병을 간호하는 자리가 아니기에 그래서 사표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좌승상으로 있던 정륭 3년(1158년), 해릉왕은 남쪽으로 쫓겨 내려간 송나라를 아주 쓸어버리려는 생각에 송나라의 수도 변경( 京: 즉 개봉. 당시 금나라에서는 개봉을 남경이라고 불렀다)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리로 가 있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변경의 옛 궁궐에 큰 불이 나서 타버렸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다시 장 호와 참지정사(參知政事) 경사휘(敬嗣暉)에게 불탄 궁실을 다시 짓도록 명한다. 장 호는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지난 세월 중도(中都: 북경)를 닦고 세울 때에는 천하가 기쁜 마음에 따라왔습니다. 이제 백성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공사는 무거울 것이어서 이전처럼 쉽게 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으나 황제는 듣지 않는다. 결국 궁궐을 다시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송나라를 칠 군대를 일으키기 위해 그 이해득실을 물어보았다. 장 호는 감히 바른대로 간할 수가 없어서 완곡한 말로 찬성을 하고는 황제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몰래 막아보려고 황제에게 상주해서 "신이 보기에는 하늘은 조씨(趙氏: 송나라 황실)를 끊으려고 한지가 이미 오래됐습니다."라고 아뢴다. 황제가 놀라서 왜 그런가 하고 물으니 장 호는 "조 구(趙 構: 남송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먼 친척을 갖다 앉혀도 그 세력에는 필시 변고가 생길 것인 즉, 굳이 군대를 일으켜 복종시킬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기는 했지만 장 호의 말에 따르지는 않고 군대를 일으켰다. 장 호는 남경에 가서 궁궐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는데, 황제는 시시때대로 양 충(梁 )이란 사자를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며 궁전 한 간을 짓는데 만금을 아끼지 말도록 했다. 그 사자는 특히 어느 곳, 어느 곳은 법식에 맞지 않는다고 까탈을 떨며 철거하도록 했다. 장 호는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예절로서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궁전이 다 되자 황제는 중도(中都:북경)에서부터 옮겨 내려와 살았다. 장 호는 태부(太傅)에다가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진국공(秦國公)에 올려 봉해진다. 명실상부하게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제 해릉왕은 변경에 내려 온 뒤에는 몇 달 동안 정사를 보지 않고 매일 군대를 보내 남쪽의 송나라를 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장 호가 정사를 아뢰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해릉왕이 주복아(周福兒)라는 사람을 장 호 집에 보내자 장 호는 말을 전해달라며 "모든 장군들이 신진 소년들이어서 국사를 그르칠 까 두렵습니다. 의당 옛날 군사를 훈련하던 사람들을 구해서 모극(謀克)을 시켜야 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장수들의 배치가 끝난 때였기에 해릉왕은 그 말을 전해듣고 기분이 나빠 장 호에게 곤장을 치라고 한다. 그러고 해릉왕은 곧 군대를 일으켜 송나라를 치러 떠났고 황후와 태자가 궁궐에 남았다. 장 호도 같이 남경(南京: 변경)에 남아 상서성의 일을 보았다.
황제가 욕심이 너무 강한 만큼 자주 종친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를 너무 좋아해 왕비만도 10명 이상을 두는 등 탐욕적인 생활을 하자, 금나라의 옛 수도 요양에 남아있으면서 기회를 엿보던 종친인 완안옹(完顔雍)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세종으로 등극한다. 해릉왕이 남송을 치기 위해 머물던 부대내에서 장수에 의해 살해됐을 때에 장 호는 남경에 있었다. 거기에서 세종의 쿠데타와 잇따라 해릉왕의 죽음을 전해들은 장 호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자 종친으로 세종과 친한 완안모연(完顔謀衍)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등극을 축하했다.
이듬해 세종이 있던 요양으로 올라가 새로운 황제를 뵙는다. 29) 세종은 장 호에게 "황제라는 자리는 오로지 근심되고 어려운 자리이므로 경이 국가의 원로로서 힘을 다해 정치를 하고 후세에 덕정을 폈다는 소리를 듣도록 해 달라. 부디 짐의 뜻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한다. 곧 태사(太師)의 직함과 함께 상서령(尙書令: 명실공히 국정의 최고책임자이다)에 다시 임명되고 남양군왕(南陽郡王)에 봉해진다.
세종은 또한 "경은 정륭(正隆: 해릉왕의 치세)기간동안 수상이었는데, 전 황제의 잘못을 고치고 널리 세상을 구하지 못했기에 어찌 죄가 없겠는가. 궁전을 두 군데나 지으면서 백성들의 힘을 다 쇠진케 했다. 그러나 경은 일찌기 (황제에게 부당함을) 간한 적이 있기 때문에 천하는 경을 원수라고 하지 않고 오로지 해릉왕을 원망하고 있다. 경이 상서성에 십여 년을 있으면서 정무를 두루 거쳤기에 그래서 다시 경을 수상에 기용하는 것이다. 의당 스스로 힘써서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세종은 또 마음놓고 인재를 천거할 것을 부탁하자, 장 호는 전 황제 해릉왕을 섬기던 홀석열지녕(紇石列志寧) 등을 천거해서, 이들이 명신으로서 업적을 쌓도록 한다. 세종이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이었던 양방기(楊邦基)를 기용하기 위해 장 호에게 물어보자 그도 쓸만한 인재라며 천거해서 일약 형부낭중(i刑部郞中)이 되도록 한다.30)
세종이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거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많았다. 황제는 "태사(장 호)를 불러 논의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장 호가 입궐하자 황제는 "예로부터 제왕으로서 문학을 폐지한 사례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장 호가 있다고 하자 황제는 누구냐고 물었다. 진시황이라고 대답하자 황제는 좌우를 돌아보며 "어찌 나보고 시황이 되라고 하느냐"고 말해 이윽고 이 일이 가라앉았다.
장 호는 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사직을 청한 지가 오래 됐으나 황제는 좌사랑중(左司郞中) 고 간(高 )과 장 호의 조카 여필(汝弼)을 보내어 불렀다. 장 호는 병에도 불구하고 불림을 받아 무리해서 조정에 나가게 됐는데, 입조할 때에도 배(拜)를 하지 않아도 되고 황제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도록 허락을 받았다. 혹시 의견을 아뢸 일이 있으면 그때 가서야 황제를 뵈도록 했다. 혹 몸이 나쁘면 꼭 매일 상서성에 출근하지 않도록 배려를 받았다. 장 호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지만 매 번 물러가 쉬겠다고 주청을 했다. 3년 후에 다시 신청을 해서 겨우 동경유수를 제수 받았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해서 사직을 했다.
대정(大定) 3년(1163년), 장 호가 세상을 뜨자 세종은 하루동안 정사를 보지 않고 좌선휘사(左宣徽使) 조흥상(趙興祥)을 대표로 한 백관들로 조문단을 보내고, 은(銀) 천 냥과 채색 겹비단 50단(端: 1단은 20자, 따라서 50단은 1000자가 된다), 비단 500필을 보내었다. 문강(文康)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세종이 죽자 세종의 손자인 장종은 장 호를 세종의 묘에 배향했다. 그가 죽은 지 31년이 지난 1194년, 명창(明昌) 5년 때의 일이다. 그리고 7년 뒤에는 그의 화상도 그려져 연경궁(衍慶宮)에 그려져 걸리는 등,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자식 복도 많아 여위(汝爲), 여익(汝翼), 여림(汝霖), 여능(汝能), 여방(汝方), 여유(汝猷) 등 여섯 아들을 두었고 3남인 여필은 재상반열에 오름으로서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모은 <華表山人集>이 전해져 온다.
장씨 일가들
장 호가 출세를 했기에 라는 설명은 적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장 호가 이처럼 금나라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동안 그의 일가와 자손도 출세를 했다. 그 면면을 잠시 살펴보자.
장 호와 한 증조부아래서 갈라져 나왔고 항렬로 보면 형제 뻘이 되는 장현소(張玄素)라는 사람을 먼저 만나보자. 그는 우리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발해를 되살리려고 일어선 고영창(高永昌)이란 동족을 배반하고 호사를 누리었기 때문에 반역자라 불리워져야 마땅할 것이다.
군인으로서 요나라가 발해인으로 편성한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31)을 이끌어 온 고영창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동경성의 유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 후 각지에서 몰려드는 발해유민들의 힘을 이용해 동경요양부를 점령하고 기세를 드높힌다. 고영창의 반란은 물론 요나라가 그동안 발해인들에게 가한 유형무형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망한 조국을 부흥시키자고 일어난 것으로서 고영창은 당시 만주의 중심지였던 요양부를 점령한 뒤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취임한다.
황제로 취임한 뒤에는 새로 일어나고 있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요를 쳐서 멸망시킨 뒤에 요를 반으로 나누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고영창이 금나라의 신하로 들어와 준다면 함께 요를 치겠으나 지금처럼 황제자격이라면 안 된다고 거부하고는 고영창을 치는 군사를 동원한다.
장현소는 이 때에 고영창의 휘하 장군으로서 요양성 안에 있었다. 금나라군이 처들어오자 고영창은 대군을 이끌고 성밖에 나가서 싸우다가 힘에 부쳐 성 안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장현소는 배반을 하고는 성문을 걸어 버린다. 이 때문에 뒤가 끊어진 고영창은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쳤으나 이미 근거지를 잃은 뒤라 견디지 못하고 육지를 버리고 장송도(長松島)라는 섬으로 들어갔으나 결국은 추격해 온 금나라군에게 괴멸되고 만다. 동족인 고영창을 성 안으로 못들어오게 하고 금나라 알노에게 항복한 장현소는 그 공으로 맹안(猛安)을 받아서 관리하고 있다가 희종 때에 동경로전운사(東京路轉運使)를 거쳐 흥평군(興平軍)절도사로 올랐다.
해릉왕 말기가 되자 잇달아 궁을 짓는다고 노역이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져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진족 장군들이 지키는 다른 곳에서는 무사태평인데, 장현소만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성을 높이 쌓고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머지않아 인근의 고을이 대부분 도적들에 의해 피해를 보았는데도, 장현소가 지킨 흥평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세종이 아직 황제로 오르기 전에 장현소는 당시 황제인 해릉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세종이 관의 곡식을 횡령했다는 등 좋지 않게 말을 했다. 그러나 새로 황제에 오른 세종은 자신에게 나쁜 말을 했던 장현소를 다시 불러 그전의 그러한 언행을 문제삼지 않았다. 장현소는 새로 등극한 세종에게 당시까지 머물던 동경 요양부에서 벗어나 빨리 연경으로 옮기라고 적극적으로 건의한다. 세종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 곧바로 옮겼다. 나중에 호부상서를 지내었다. 그러다가 84세가 되던 해에 고령으로 죽었다.
민족사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동족인 고영창을 금나라에 팔아먹고 금나라 초기에 네 다섯 황제(태조, 태종, 희종, 해릉왕, 세종)밑에서 오래도록 요직을 맡으며 비교적 호강을 한 셈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대호, 장 호, 고 정, 고 간, 고덕기 , 장현소 등은 모두 다 금나라 1세대들이다. 대부분 금나라 건국 때 이런 저런 사정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를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2대들이 등장한다. 정복전쟁에서와 같은 용맹함을 자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므로 이제는 문필과 실력으로 올라서야 한다. 아무래도 발해인들은 여진인들에 비해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있는 데다가 명문가출신이어서 출세도 빨랐다고 보여지는데, 장 씨 집안의 자손들이 크게 일어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장 호의 셋째아들인 장여림(張汝霖)이다.
여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해서 장 호로부터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 새끼천리마)'라는 소리를 듣고 여섯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관계로 그도 세종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해릉왕 때인 정원(貞元) 2년(1154년) 진사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여림은 승승장구해서 아버지가 돌아간 지 5년 후인 대정(大定) 8년(1168년), 세종 황제로부터 형부시랑(刑部侍郞)에 임명됐다. 한 때에는 형부랑중(刑部郞中)으로 낮춰서 임명되기도 했는데, 이 때에도 황제의 지극한 뜻이 있었다.
황제는 여림을 특별히 부른 다음에 여림에게 "형부에 마땅한 관리가 없어서 특별히 경을 임명하는 것이다. 아직 관직에 있은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만큼 잠깐 능력을 펴 보아라. 과거에 응시하는 자세로 열심히 일을 하면 응당 발탁될 것이다. 네 아버지가 태사, 호부상서를 거쳐 재상자리를 두루 거쳐 좋은 자리를 넘나든 것을 너도 잘 보아 아는 바이다. 응당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임하라"라는 말을 듣는다.
이듬해에 태자좌유덕 겸 예부랑중(太子左諭德 兼 禮部郞中)으로 옮긴다. 당초 예부랑중은 다른 사람이 임명됐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이 "예관이란 자리는 마땅히 학식과 글재주가 있는 사람가운데서 뽑혀야 하므로, 장여림같은 자가 맞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장여림이 예부랑중을 겸직하게 됐고, 먼저 임명된 자는 다른 자리로 옮기었다. 곧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올랐다. 모친의 상을 치르고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됐다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옮겼다. 어사중승은 우리로 말하면 감찰실 감찰관에 해당하는 자리로서, 세종이 그에 대해 무척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중도로도전운사(中都路 都轉運使),예부상서를 거쳐, 잠시 이부(吏部)에 가 있다가 어사대부(御史大夫), 곧 감찰총장이 된다.
그러나 세종의 치세를 맞아 나라가 태평성대로 접어들고 걱정거리가 줄어들자 여림도 일단 높은 벼슬에 오른 뒤라서 그런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 사례가 제법 나타나고 있다. 고덕온(高德溫)이라는 관리가 세금으로 내는 쌀을 너무 많이 거두어 해먹은 사건을 놓고 여림은 위에다가 다른 보고를 해서 세종의 분노를 산다.
세종은 여림에게 "경이 공정하기에 등용을 한 것이다. 고덕온은 궁의 비빈들 처소에 몰래 사람을 넣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상세한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인데, 비빈들의 처소를 어지럽혀도 이를 넘어가란 말인가?"하며 역정을 내었다. 세종은 관리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불러 "감찰관들의 부정이 이러한가?"하고 묻자 좌간의대부는 "죄가 가벼워 다른 보고를 올려 폐하가 결정토록 한 것입니다. 더구나 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더라도 재주가 있는 자를 쓰는 것이, 바르지만 어리석은 자를 쓰는 것보다도 낳지 않겠습니까?"라고 응대한다. 세종은 더욱 화를 내며 "너희들은 모두 어리석고 바르지 않은 자들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서 여림은 결국 다른 관리의 죄를 밝혀내지 못해 지방의 방어사로 쫓겨 내려가 한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태자소사(太子少師) 겸 예부상서로 복직을 하고, 이어 부수상격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맡는다. 이 때에 여림의 집안 형인 여필(汝弼:다음에 곧 이어서 설명)도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므로서, 한 집안에 두 명의 재상이 나왔다고 해서 모두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관리로서의 장여림은 때로는 적당한 보신주의의 전형적인 예를 보이고 있다. 세종이 재위한지 오래되어 천하의 일을 두루 잘 알지만 어진 인재를 새로 더 얻어 더불어 정치를 도모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여림을 비롯한 대신들이 모두 꿀먹은 벙어리였다.
세종은 대신들에게 "경들이 오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새로 추천을 하지 않는 것은 왠 일인가? 경들이 이미 연로했는데도 스스로 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누구는 어떠한가 하고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하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럴 것인가?" 하고 질타를 한 뒤에 여림에 대해서는 "右丞(우승: 여림을 지칭)도 右丞相(우승상, 우승보다 한 단계 높은, 우리로 치면 우의정)이 말해야만 아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여림은 "신들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어찌 아뢰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종은 "춘추전국시대에는 나라가 분열되고 땅이 작아도 모두 현인이라고 칭했다. 지금 천하가 넓은데 어찌 인재가 없단 말인가? 경들이 천거를 하지 않는 것뿐이리라. 지금 내가 열심히 하고 여러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하니까 그렇지 나중에 자손들은 누구와 더불어 정치를 할 것인가?"라고 말해, 여림 등 모든 재상들이 부끄러워 참담한 얼굴이 되고 만 적이 있다.
그에 대해서 金史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림은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고, 황제에게 말을 올릴 때에는 황제의 숨은 뜻을 살핀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처럼 보이게 하므로서 듣는 사람을 거스러지 않게, 충성으로 보이게 한다."
-金史 권83,열전21 張汝霖傳
대정 28년(서기 1188년) 국무총리격인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고 국사편찬위원장인 수국사(修國史)를 겸했다. 세종은 승진 발령을 내면서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단독으로가 아니라 태위(太尉), 우승상(右丞相)과 함께 임명장을 주었다.
금나라를 번성시킨 세종도 연로해지자 후사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원로인 여림과 여진사람 도단극녕(徒單克寧)에게 손자를 잘 돌봐달라는 고명(顧命)을 내린다(마치 후대 조선시대의 김종서와 황보인이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잘 돌봐달라는 고명을 받는 것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세종의 적자(適子)인 헌종(憲宗:나중에 추서한 이름이다)은 세종의 생전에 죽어 손자인 장종을 세자(즉 세손)으로 정해 놓았는데, 세종의 큰 아들인 윤중(允中: 여림과 같은 항렬인 여필의 여동생 원비元妃 장씨張氏가 낳은 왕자)을 둘러싸고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들이 버티고 있어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여림은 이런 상황에서 세종의 고명을 받아 손자인 장종(章宗)이 즉위하도록 적극 협조했다. 장종이 즉위한 후에 그에게는 은청영록대부(銀靑榮綠大夫)라는 영예가 더 얹어졌다. 그는 자신이 즉위하도록 도운 장종을 위해서 궁전을 더욱 휘황하게 치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장종이 즉위한 후 궁전의 설치물들을 바꾸도록 했는데, 자수를 놓는 사람들을 하루에 천 2백 명이나 동원하고 2년이나 작업을 했지만 끝나지 않는 큰 일이 되어버렸다. 황제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이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여림은 "이것이 황제가 입고 버리는 것이 아닐진데 결코 사치가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장차 외국에서 사신이 와서 조회를 하게되면 궁전의 건물이 장엄하고 볼만한 것도 역시 국가의 체면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며 계속하도록 했다. 여림이 죽은 후에도 이 공사는 계속됐다. 황제가 여림의 주장을 사후에라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세에 사치의 풍조가 넓게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이 모두가 여림이 부추긴 때문이라고 말을 하곤 했다.
세종의 고명을 받아 장종을 즉위시킨 공로로 장종은 여림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희종 때인 1147년 억울하게 죽은 전 곡(田 穀)에 대해서 장종은 신원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일당으로 알려진 맹 호(孟 浩)를 세종이 우승(右丞)에 기용한 점을 들어 전 곡의 신원문제를 신하들에게 의논을 해 보라고 하명했다.
이 때에 여림은 "전 곡은 붕당을 만들어 전권을 휘둘렀기에 이미 전번 조정에서 죄명을 받은 것으로 이를 틀리다고 할 수가 없다. 만약에 지금 관작을 추증한다면 권선징악이 안 될까 두렵다" 며 반대를 했다. 여림이 반대하니 장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여림으로서는 아버지인 장 호가 전 각을 박해한 채송년(蔡松年)과 친했기 때문에 전곡의 복권을 막은 것이다. 여림이 죽고난 뒤에야 장종은 상서성에 조서를 내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켰다.
명창(明昌) 원년(1190년) 3월에 사직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에 별세했다(요양 승엄사에 있던 속 성이 고 씨인 발해출신의 승엄선사가 열반한 것도 이 해이다). 마침 사냥을 하러 요양(遼陽)에 나가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백관을 보내어 문상하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시호를 내리니 문양(文襄 양은 돕다,盛하다의 뜻)이었다.
여림과 같은 항렬의 형제뻘로 장현소의 조카인 여필(汝弼)도 장 씨 집안을 빛 내었다.
여필의 아버지는 현징(玄徵)으로서, 창신군(彰信軍)절도사를 지냈으며, 현소(玄素)의 형이다. 그러므로 여필은 장현소의 조카이다. 아버지 덕택에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리로 임명된다. 해릉군 때인 정륭 2년(1157년) 진사시험에 들어 현(縣)의 한 주부(主簿)를 하다가 벼슬이 계속 올랐다. 태종 때 이래 궁중에서는 궁중에서 쓰는 물건을 함부로 빼내가거나 물건을 살 때에 비용을 엉터리로 계상해 예산 낭비가 심했다.
여필은 궁적직장(宮籍直長)인 고공목(高公穆) 등과 함께 일일이 서류를 대조해서 물품을 정리한 뒤에 이를 창고에 집어넣고 잘못을 시정해 그 공로로 승진을 했다. 우사원외랑(右司員外郞)을 하다가 모친의 상을 당해 잠시 관직을 떠난 뒤 복직돼 이부랑중(吏部郞中)으로 기용됐고, 계속 벼슬이 올라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상서우승(尙書右丞)을 했다.
그의 벼슬이 승승장구한 것은 그가 당시 황제인 세종의 처남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32) 여필의 어머니 高씨가 세종의 어머니인 정의황후(貞懿皇后)와 친척이었고, 여필의 여동생이 세종에게 출가해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그는 훈신(勳臣)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는 또한 그의 친척 동생인 여림처럼 무척 말을 조심하면서 보신주의로 관직을 보내었다. 세종이 여필과 역시 발해출신의 관리인 좌사랑중(左司郞中) 고 간에게 "신하들의 여론이 어떤가, 고칠 것이 있으면 응당 고칠 것이니 숨기지 말고 얘기하라"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곧바로 황제에게 간하는 법이 없었다. 황제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순응하고 이를 조용히 이끌어준다. 황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교묘한 말로 그 뜻을 살핀다. 황제가 책망하면 완곡한 말로 물러서며 끝내 거스르지 않는다. 황제도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를 아끼고 정사를 맡겼다.
좌승상이 정무를 떠나서 추밀사(樞密使)가 되자 여필도 황제에게 사직하겠다고 청한다. 황제는 그에게 아직 늙지 않았으니 물러갈 수 없다고 말리며 좌승(左丞)으로 올려준다.33)
당시는 나이 육십이 넘지 않으면 사직을 허가하지 않았다. 여림이 (60이 넘어서서) 다시 사직의사를 밝히며 "황제께서 60에 사직을 허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묻자 황제는 이를 책망하며 "내가 60에 사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말렸다. 그러나 황실 자손에 대해 멋대로 식량을 늘여준 일이 터져 당시 참지정사이던 동생 여림이 한 계급 강등됐다. 병석에 있던 여필도 황제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여필은 오래 정치를 해서 궁중을 일을 모두 잘 알고 사람들도 능히 가려 쓰고 헤아릴 줄 알 터인데, 마음이 바르지 못했다"며 해직시키고 광녕부(廣寧府:요녕성 북진) 부윤으로 내려보낸다.
여필은 다른 발해유민출신 고위관리 중에서는 자기 능력에 비해서 과대하게 높은 벼슬을 한 것 같다. 그가 동생인 여림보다 3년 앞선 대정 27년(1187년)에 죽었지만 그에 대해 황제가 문상을 했거나 장례를 후하게 치뤄주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후에 한가지 사건이 생겼다. 세종이 살아있을 때 태자인 헌종(憲宗)이 죽자 세종은 남은 큰 아들 윤중(允中: 여필의 여동생인 元妃 張氏가 낳은 왕자)을 태자로 봉하지 않고 손자인 장종을 세자(즉 세손)로 정한다.
세종이 죽고 장종이 즉위했는데, 여필의 처인 고 씨는 자기 조카가 황제가 안된데 분통에 치받힌 나머지 시누인 원비 장씨의 화상을 그려 놓고 조카가 잘 되라고 화상에 빌며 푸닥거리를 하다가 적발돼 주살되고 만다. 이 때 여필도 연루가 됐으나 이미 죽고 난 뒤라 삭탈관직은 면했다. 시누가 낳은 조카 윤중(允中)도 34) 조카뻘이 되는 장종에게 결국 죽임을 당한다. 이것이 금나라 황실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외척의 화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실 금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인들의 정점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는 열전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곧바로 원나라에 의해 금이 망하면서 이들 발해인들도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35)
발해의 여인들
지금까지 남자들을 중심으로 발해인들의 흐름을 조명했지만 이들 발해남자들의 성공 뒤에는 발해여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어머니들이었다. 그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정식으로 발해여인으로 나오는 것이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인 대씨였다. 대씨는 망나니같은 아들 해릉왕을 지극하게 키워, 아들이 황제가 된 뒤 전횡을 일삼고 종친들을 많이 죽일 때에도 어머니의 말만큼은 무서워했다고 한다.
당시 여진족은 백산흑수의 산골자기에 있다가 막 넓은 벌판으로 나와서 문명된 도시에서 살게 됐는데, 이 때에 중국인들과 곧바로 혼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고 용모가 출중한 발해여인들이 왕자들의 배필로 다수 선택이 된 듯하다. 더구나 발해 여인들은 대 씨나 고 씨의 경우 자신들의 선조들이 갈려져 나온 고구려의 왕족이라는 점이 이들에게는 더욱 어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릉왕의 어머니 대 씨는 자신이 정식 황후가 아니어서 살아있는 정식 황후인 도단(徒單)씨를 모시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해릉왕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정식 황후가 되지 못하는가 하는 불만이 늘 있어 어떻게 하면 정식 황후(공식적인 어머니)를 죽일까 궁리를 했으나 번번히 어머니 대 씨의 간청으로 실패를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먼저 죽자 후하게 장사지낸 뒤에 기어코 정식황후도 손을 보고야 만다.
그러나 해릉왕은 자기를 나아준 어머니가 발해인이어서 그런지 동족이나 친척보다는 발해인을 더 믿은 것 같고 그것이 장 호나 고 정 등 발해유민들에 대한 특별한 대우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분석할 수 있겠다.
쿠데타를 통해 해릉왕을 물리치고 제위에 오른 세종에게도 발해인의 피가 잔뜩 섞여 있다. 그의 어머니 정의황후 이 씨도 발해인으로서, 여필의 어머니 고 씨와 친척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동생인, 그러므로 세종에게는 외삼촌인 이 석(李 石)은 세종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그 외삼촌이 제위에 오른 세종에게 전 황제 때의 중신이던 장 호를 받아들이도록 천거했고 그럼으로서 장 씨와 발해인들은 계속 금나라 조정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여필의 여동생인 원빈 장 씨도 세종에게 출가해서 큰 아들 윤중을 나았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어떻게 보면 장 씨 가문의 위세와 발해인들의 시대는 더 계속될 수도 있었다. 장 씨가 낳은 큰 아들 윤중이 세종의 뒤를 이은 황제가 됐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종도 여진족의 입김을 무시하지는 못해서 큰 아들 윤중보다는 정식으로 결혼한 여진족 여자로부터 난 헌종 윤공을 태자로 봉했고, 그 태자가 죽자 손자인 장종에게 대를 잇도록 하고 그 일을 여림에게 부탁한 것이다.
여필과 여림이 비슷하게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여필이 자기 조카를 옹립하려 할 것이 뻔한 만큼 그것을 여림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장종이 즉위에 성공한 이후 여필 일가는 수난을 당하며, 여림은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다. 같은 집안끼리 황제위 상속을 놓고 암투를 한 셈이 된다.
이처럼 해릉왕과 세종을 둘러 싼 발해여인 외에도 많은 발해여인들의 사연이 금사 곳곳에 숨어있어서 앞으로의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중국의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역사에서 우리와 관련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많이 보기가 어려운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발해사는 여성사에서도 보고가 될 것이다.
에필로그
어느 나라 역사건 흥함이 있으면 쇠망이 있다. 금나라도 흥함이 있다가 곧바로 쇠함이 왔다. 그 쇠망은 또한 너무도 빨랐다. 거란족인 요를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 1115년, 10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고 그 2년 뒤에는 송나라까지 멸망시켜 양자강 이북의 전 중국과 만주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만든 금은 초기의 정복전쟁과 왕권강화를 위한 다툼을 지나고 세종 조와 장종 조의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 불과 몇 십 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이 몽고족이 급속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멸망의 씨앗은 잘 알다시피 유목민족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중도라고 하는 수도를 북경에다 만들고 중국의 발달한 문화와 문명을 흡수하기 시작하다가 곧바로 동화되어 유목민 특유의 강건한 기상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으며, 그것이 몽고족의 출현을 막지 못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고려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고금상정예문을 인쇄하던 1234년에 금제국은 새로이 일어난 몽고족, 아니 원제국에 바톤을 넘기고 역사의 뒷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 속에, 여진족이라는 만주의 한 부족의 흥망성쇠 속에 망국의 유민 발해인들의 역사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조국이 망한 지 두 세기가 지난 뒤 다시 일어난 발해인들, 그들은 여진족이라는, 우리 민족의 또 다른 갈래와 힘을 합치고 그들의 역사에 편승해서 금나라 역사를 창조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때로는 용기로 때로는 문필로, 때로는 지혜로 각각 여진의 건국과 중흥에 크게 기여한 발해인들, 개인적으로 자질 면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나라 역사에서 우리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해낸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우리의 역사가 다시 살아났으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들이 그처럼 불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진 것도 역사는 역사이다. 그러한 역사들이 이제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금나라의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건국과정에서 뛰어난 무공으로, 세종과 장종의 황금시절에는 우수한 머리로 각각 금나라를 떠받치었다. 물론 이들도 한족화하는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발해족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점차 한족화해 갔고,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연스레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는 우리 민족의 또다른 방계역사로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인 금나라에 의해 송의 휘종과 흠종이 잡혀가고 남송이 세워진 뒤에도 명장 악비가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고 울분의 죽음을 당한 과정 등을 상당한 울분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북송과 남송이 금나라와 맺은 화친조약을 굴욕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그러한 표현을 알게 모르게 배워왔다. 그리해서 우리는 여진족같은 "야만인"들이 중국문명을 훼손한 것에 대해 적지 아니 울분을 느끼도록 배워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는 여진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자주 북방을 침범했고, 그래서 우리의 윤 관 장군이 6진을 개척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주 골치를 썩인 변방민족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거기에는 알게 모르게 중화적인 역사관에 젖었던 우리들 역사의식의 문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찍 우리가 쓸데없는 소중화의식이 아니라 당당한 주체국가로서의 생각을 가졌다면 여진족과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세기, 13세기 당시 만주와 한반도에는 양쪽 다 고구려를 잇는다고 주장하는 두 개의 나라가 있었다. 북쪽에는 발해에서부터 여진족의 금나라, 남쪽은 고려가 모두 고구려를 잇는다고 표방했다. 36) 만일 그러한 고구려의 후예, 공동의 자손이라는 역사의식이 일찌기 조금만이라도 형성됐다면 우리는 여진과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발해 멸망이후 만주의 역사를 일부러 우리 역사에서 버렸고, 그 속에서 활약하던 우리 선조들의 면면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기야 백제와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 한 뒤 60년 후에 당나라 안에서 대제후국을 형성하며 반세기동안 중국 동부지방을 호령했던 이정기 정권에 대해서도 우리 역사가 외면하는 상황에서 독립도 아니고 여진족이라는 이른바 오랑캐 밑에서 장수를 하고 재상을 한 것을 누가 주목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 안에서 좁은, 서로 헐뜯고 치고 받기만 하는 그런 작은 국민성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평화를 사랑한다며 외적의 침입에는 속수무책이고 안에서만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상한 평화민족이 우리가 아닌가?
북경에 가면 금나라 당시의 성을 다시 볼 수는 없다. 너무 오래되었고, 새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 몽고족이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기존의 중도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여택교(麗澤橋)라는 지명만이 그 때를 회상케 해 준다.
그러나 한창 때의 중도성은 휘황찬란했었다. 맨 앞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황성의 정문인 선양문(宣陽門)내에는 두 개의 문루(門樓)가 있어서 동쪽은 문루(文樓), 서 쪽은 무루(武樓)라고 했다고 한다. 문과 무를 조화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중간으로는 넓은 길이 만들어졌고, 길 옆으로는 물이 흐르는 도랑을 파고 그 옆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끝이 궁성의 정문인 응천문(應天門)인데 높이가 8장이나 되고 유리로 된 기와를 덮었다. 궁성에 들어서면 황제가 등극하고 사신을 접견하는 등의 대전을 거행하는 대안전(大安殿)이 있었고 바로 뒤에는 황제가 정무를 보는 인정전(仁政殿)이 있었다. 궁 안의 전각과 정자, 누각 들은 모두 휘황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황제가 앉아있는 대안전에서부터 앞으로 곧바로 성 밖에까지 일직선으로 넓은 길이 나 있었다. 오늘날 북경의 고궁에서부터 천안문으로 이어지는 곧은 길은 바로 금나라 때의 수도의 형상 그대로이다.
금나라를 번성시킨 세종황제는 대정 19년인 1179년에 요 나라 황실의 이궁(離宮:별장)인 요여궁(瑤嶼宮)이 있던 곳에 대녕궁(大寧宮)을 지었다. 그 가운데에는 큰 호수를 파고 경화도( 華島)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기화요초를 심었다. 자리가 지금은 북해공원으로 남아 있고, 그 공원 안에는 그 때의 섬 자리에 몇백 년 된 백송이 남아서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북경의 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이화원( 和園)도 원래 4대 황제 해릉왕의 별궁지였다. 향산(香山)과 옥천산(玉泉山)에도 모두 금나라 때의 이궁이 있었다. 심지어는 중국의 국빈관으로 사랑을 받는 조어대(釣魚臺)도 금나라 황제 별궁의 정원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다리라고 해서 유명한 북경 서쪽의 그 아름다운 노구교(盧溝橋)도 금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 때에 이미 연경팔경(燕京八景)이란 말이 생겨나서 사람들이 그 말을 아직도 쓰고 있다.
이렇게 볼 때에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성은 오늘날 중국 수도의 터전이었다. 금나라 선종(宣宗) 때인 1215년 몽고군에 넘어간 뒤 파괴됐지만 그 뿌리가 7백년이상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의 수도인 북경 곳곳에 그대로 살아있다. 오히려 북경의 큰 틀은 이미 중도성이 처음 만들어 질 때에 형성됐으며, 지금의 북경은 그것을 발전시킨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우리는 북경 37) 을 여행하면서, 그 많은 유적을 보면서 중국 사람들, 참으로 건물은 대단하게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는 말아버린다. 많은 유적들을 보면서 감탄만 할뿐이지 그 이상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면을 조금만 들쳐보면 그 성을 지휘감독한 발해인 장 호가 있었고, 그런 문화를 쌓을 수 있었던 발해인 사회가 있었고 그러한 기여가 가능하게 끔 된 발해와 여진의 합쳐진 역사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발해는 망했지만 발해인들의 가무는 현대에까지 중국인들의 생활에 이어져 오고 있다. 북경을 가보면 주민들이 우리의 괭과리같은 악기를 치면서 돌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흡사 우리의 풍물(흔히 농악이라고 부르는 것)와 이것이 발해의 영향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인정하고 있다. 금나라는 망했지만 그 속에서 뛰어난 머리로 일대를 풍미했던 발해인들은 중국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단순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남의 것, 남의 역사로만 놓여 있던 중국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이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그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역사의식을 주고 있다. 우리도 큰 나라에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우리도 언제까지나 작은 틀 속에만 갇혀 있지 말고 더 큰 것을 보고 더 큰 나라를 만들어 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토를 넓히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더 큰 문화를 배우고 더 큰 지식을 쌓고 더 큰 마음을 기르는,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미주
1) 황제였지만 그 뒤를 이어 쿠데타로 즉위한 세종에 의해 황제에서 왕으로 깎여 내려왔기 때문에 왕으로 불린다. 우리 조선역사에서 왕으로 등극해 통치를 하다가 반정에 의해 밀려난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王에서 君으로 강등당한 것과 같이 중국에서도 황제가 강등당하면 왕이 된다. 금나라에서는 海陵王과 衛紹王 두 명이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당해서 복권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왕으로 남아있다.
2) 북경에 갈 기회가 있는 분들은 북경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눈썰매장을 물어 보라. 서울 수유리에 있는 용마산업이 경영하는 이 눈썰매장은 북경의 서남쪽 제3 순환도로 변에 있는데, 이 썰매장의 정문에서 곧바로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여택교(麗澤橋에) 이른다.
3) 발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신비의 왕국'이니,'수수께끼의 왕국 '이니, 하는 이상한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다. 그만큼 중국 동북부를 수백년동안 지배하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 기록이 적다는 뜻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삼국사기등에 몇 줄이 남아있고, 역대 중국의 역사책에 고구려전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민족으로서의 관심정도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나마 그러한 중국책밖에는 참고할 역사서가 드물기 때문에 우리의 북사(南史, 곧 한반도 남쪽의 역사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고구려에서 발해를 잇는 우리나라 북부지역의 역사라는 뜻으로 쓴 용어임)는 빈약할 수 밖에 없다.
4) 서기 758년 발해의 3대 文王은 일본왕에 보내는 국서에서 자신을 '高麗國王 大欽武'라고 표현했다. 일본사람들도 이에 대한 답서에서 '고려국왕에 보낸다'라는 표현을 썼다. 예전에는 고려와 고구려를 함께 썼으며, 지금도 중국의 역사책은 고구려를 고려라고만 쓰는 경우가 더 많다.
5) 발해의 종족구성은 지도층인 고구려의 유민들보다 지배층인 말갈족이 더 많다는 데서,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말갈족이 주체가 되는 당 제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그 국가의 지도층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국가의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볼 때에, 지도층이 누구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 때에도 말갈족이 없지 않았다. 발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을 보면 발해의 주민들 중에서 土人(곧 주인)은 고구려인이라고 명시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구의 장인 도독과 자사는 모두 고구려인 만이 임명됐다는 데서, 발해는 고구려인들이 주도하는 다종족국가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앞으로 보겠지만 금나라 때에 활약하던 발해인들도 모두 고구려후손이라는 데서, 발해의 성격이 더욱 명확해 지고 있다.
6) 발해사람으로서 금나라 조정에서 큰 활약을 한 張 浩도 원래 성은 고씨였으며, 그는 동명왕의 후예라고 중국의 공식역사서인 金史(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 쓰여있다. 따라서 발해의 고씨는 고구려의 왕족인 고씨임이 확인된다.장호에 관해서는 뒤에 상세히 설명된다.
7)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이라는 것이어서, 고려인 함보가 시조라고 한 금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만주원류고에는 "신라왕 성을 따라서 국호를 금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대해 당시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던 때이므로 혼동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만약에 신라인이라면 그는 누구일까?
고려사에 보면 금의 조상이 된 사람은 평주의 중으로 그 이름은 김준 혹은 김극수라는 것이다. 김준 혹은 김극수가 여진 여자와 결혼해 고을태사를 낳고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았다. 금사에 나오는 함보라는 이름은 이 중의 법명이거나 자(字)일수 있다는 것이다.
만주로 올라간 함보의 행적에 관해서 찾아보자. 금사에 의하면 당시 두 부족간에는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함보가 지금으로 치면 법규에 해당하는 조항들을 만들어 부족간의 싸움을 끝맺게 했다는 것이다. 시조(함보)는 스스로 나아가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10쌍과 암소 10두와 황금 5량을 살상된 집에 주도록 하였다. 이후 함보는 여진족의 신망을 받으며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김준, 곧 함보의 후손이 200여 년이 흐른 뒤 만주를 통일하고 나라이름을 금(金)으로 이름을 정한 것이 된다.
8) 이들 여진족들은 나중에 북중국을 통일하고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완안(完顔)이라는 부족이름을 자신들의 성으로 그대로 썼다.
9) 호(白+大)라는 글자는 보통의 옥편에 잘 나오지 않는 글자이다. 글자는 밝은 빛이 큰 연못에 반사돼 환하게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10) 거란과 함께 요서지방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들. 돌궐족과 풍속이 비슷하다. 남북조시대 이후 부족의 형태로 나타나 수나라 때에 해(奚)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에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데 당나라가 애를 먹었다. 나중에 거란족과 섞이다가 결국은 없어졌다.
11) 금의 태조 아골타는 여진족 내부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또한 전쟁에서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서 원래 혈맹관계로 조직돼 있던 猛安과 謀克이란 부락조직을 戶단위로 새로 조직해 행정 겸 군사조직으로 재편했다. 삼백 호를 1모극으로 하고, 십모극을 1맹안으로 했다. 따라서 맹안은 3천 호를 관할하는 큰 지휘관이다. 그래서 모극은 흔히 百夫長, 맹안은 千夫長, 또는 千戶長이라 부른다. 지방 행정기구와 생산단위, 군대조직이 결합한 형태로서, 전쟁 때에는 이 단위에서 군대를 뽑아 내보내기도 한다
12)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발해유민으로서 발해의 동경성 요양부에 옮겨져 살던 고영창(高永昌)은 당시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의 지휘관이란 신분을 십분 활용해서 동경성의 유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고영창은 반란 후 각지에서 몰려드는 발해유민들의 힘을 이용해 동경 요양부를 점령하고 기세를 드높힌다. 요양부를 점령한 뒤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취임한다. 황제로 취임한 뒤에는 새로 일어나고 있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요를 쳐서 멸망시킨 뒤에 요를 반으로 나누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고영창이 황제로서가 아니라 금나라의 신하로 들어와 준다면 함께 요를 치겠으나 지금처럼 황제자격이라면 안 된다고 거부한다. 그리고는 대장 斡魯(알로)에게 군사를 주어 고영창을 치라고 한다.
금나라군이 쳐들어오자 고영창은 대군을 이끌고 성밖에 나가서 싸운다. 한 참 싸우다 힘에 부쳐 성안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성안에 있던 그의 휘하 장현소라는 장수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발해군이 되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할 수 없이 고영창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장송도(長松島)라는 섬으로 들어갔으나 결국은 금나라군에게 괴멸되고 만다. 결국 동족인 장현소에게 배신당해 그의 발해부흥의 꿈은 깨지고 만다. 뒤에 장현소를 다룰 때에 다시 언급이 될 것이다.
13) 역사기록에 나오는 초기의 고구려인들은 姓보다는 이름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름만 가지고는 姓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남쪽에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가 召西奴로 알려져 있는 만큼 召씨가 성이라면 고구려의 중요한 성씨였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고 표의 원래성인 召씨도 고구려의 大姓으로 봐야한다.
14) 1114년 9월 금태조 아골타는 드디어 反遼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일으킨다. 한 달뒤에 현 길림성 부여현 동남에 해당하는 寧江州를 쳐 이기고 나아가다 흑룡강성 肇原縣 茂興店에 해당하는 出河店에서 요나라 대군을 만나 대승을 기록한다. 이 전투는 요와의 전쟁에서 첫 대승으로 기록된다. 고 표가 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직 무척 젊을 때였다.
15) 이 해에 금나라는 개봉을 공략해 송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송 나라의 잔존세력은 황족인 조 구를 옹립하고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해서 남 송을 세운다. 이 정복 전쟁의 일진일퇴 속에 발해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 때 금나라 군에게 잡힌 송나라 흠종황제는 북경의 법원사에 끌려가 있었다. 그 법원사는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숨진 병사들을 위로해 준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16) 중국 황실에서는 태자를 교육시키고 이끌어주는 관리를 많이 두었다. 西晉이후에 확립된 태자 교육담당관의 職階는 태자太師가 가장 높고 그 밑으로 太傅, 太保, 少師, 少傅, 少保가 있다. 이를 흔히 三師三少라고 한다. 황제가 특별히 자녀의 교육을 맡기는 것이므로 총애하는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
17) 금나라 때에는 지방의 중요도시에 서울의 행정조직을 차용해 지방의 행정기구에 해당하는 行臺省을 만들고 여기에 중앙의 관직명과 같은 관직을 두었다. 그러므로 行臺平章政事는 지방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18) 여진족은 중원을 차지하고 난 뒤 뛰어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한 지방의 명칭을 붙여주며 왕의 칭호를 주었다. 원래 왕은 주나라 때부터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붙여준 칭호로서 이 때에는 통치권이 있었다. 그러나 뒤에 이민족이 중원을 차지하면서부터 꼭 특정지역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명예의 의미로 왕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따라서 이 때의 왕은 별도의 행정구역이나 행정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높은 관리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뿐이었다.
거( )는 춘추시대에는 齊나라 땅을 의미했고, 보통은 산동성 거현을 의미한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멀지 않다. 금나라는 먼저 이 곳에 성양군(城陽軍)이란 군사주둔지의 명칭을 두었다가 나중에 주로 승격시키면서 거주( 州)라고 했다.
19) 산서성 대현(代縣) 일대를 가리킨다.
20) 관리들의 감찰을 맡는 부서. 가장 높은 사람이 어사대부이다
21) 列傳 22권 張景仁 條
22) 다른 발해출신 고씨들은 그냥 '어느지방 발해인'이라고만 적고 있는 金史가 유독 장호에 대해서만 '동명왕의 후예'라고 적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가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고구려왕실의 후예라는 점을 평소에 무척 강조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지만, 아뭏든 이를 통해서 발해의 고씨가 고구려의 왕실인 고씨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해국의 지도층의 출신을 명확히 밝혀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3) 3대 황제인 희종 때에는 종실들의 권력다툼이 심했다. 종실의 하나인 완안종필(完顔宗弼)이 궁중에서 전권을 잡은 뒤 종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수도나 북경에 있던 한족출신 관리들을 대규모로 처형했다. 처음 황통(黃統)6년(1146년) 우문허중(宇文虛中), 고사담(高士談)을 죽인데 이어 다음 해에는 전 곡(田穀), 해 의(奚 毅), 형구첨(邢具瞻), 왕 식(王 植), 고봉정(高鳳廷) 등을 죽이고 여진귀족들이 독점적인 정권을 형성했다. 이를 '田穀의 黨'事라고 한다.
24) 오늘날의 북경이다. 원래 요나라의 남경이었으나 요나라가 망하면서 금나라와 송나라와의 연합작전 이후 한 때 송나라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연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5) 여려상(余 裳) 北京通俗史話 p36 北京燕山出版社 1993년.
26) 산서성 노성현(潞城縣)
27) 이 때의 촉은 유비가 머물던 촉한의 촉, 곧 사천지방이 아니라 춘추시대의 노나라 땅, 현재는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서쪽을 의미한다. 유명한 태산이 이 곳에 있다.
28) 금나라의 세종은 우리 조선시대의 세종처럼 약 30여 년 간 어진 정치를 폈다. 그래서 후세역사가들은 세종이 통치한 이 때와 세종의 손자로서 즉위한 장종(章宗)시대를 합쳐셔 작은 요순시대(小堯舜時代)라고 부른다.
29) 卷19 楊邦基 列傳
30) 요나라의 天祚帝는 동방의 여진세력의 팽창을 막기위해 국내 여러 州에 무용마군이라는 기마병부대를 만들었으며, 그 중에 특별히 발해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동경성 요양부에는 발해인들로만 무용군을 만들었다. 병력은 보통 2천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3천명이라는 설도 있다.
31) 세종은 현징의 딸, 곧 여필의 누이동생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이 부인이 곧 元妃 張氏로서, 장씨는 趙王 允中을 나았다.
32) 이 때에 동생인 여림이 같은 날짜에 참지정사가 됨으로서, 한 집안의 두 형제가 나란히 재상이 된 큰 영예로 세간에 화제와 부러움을 샀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33) 세종의 아들은 원래 모두 允자를 돌림자로 썼다. 여필의 누이가 낳은 아들도 원래 이름은 윤중이었으나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의 손자 章宗이 죽은 자기 아버지 允恭의 이름자 允을 피하라고 해서 모두 永자로 바꾼다. 그래서 金史에서는 永中전을 찾아야 한다. 金史 列傳 永中傳 참조.
34) 그러나 발해에서 활약한 장씨들의 그 뒤의 역사는 1995년 한국에 다시 부활한다. 고구려연구소가 찾아낸 것처럼(고구려연구소 제1차 국제학술회의, 만주에 거주하는 고구려 장수왕 후손에 관한 연구. 1995.2.14) 중국에서 발해 고씨, 또는 장씨들의 족보가 밝혀진 것이다. 장수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 고씨들의 족보를 보면 장 호의 장씨도 고 씨와 같은 일족이라고 포함하고 있고, 이들 고씨들은 금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에서는 고략(高 掠), 고망갈아(高忙葛兒), 명나라 때에는 고설고(高雪古),고봉은(高奉恩), 그리고는 다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때에 고성미(高成美)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금나라 때와 같은 융성함은 찾을 수 없다
35) 물론 고려라는 나라 전체의 성격을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영향이 더 컸었고, 그 뒤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신라세력이 요직을 점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 태조 왕건에서부터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이라는 이념을 갖고 있었고, 그 것이 나중에 묘청의 난 때에 극대화된다.
36) 중국을 우리의 친척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중국은 중국이 아니라 그들 발음대로 쭝구오이며, 북경은 북경이 아니라 베이징이며, 공자가 아니라 쿵츠일 뿐이다. 그런 객관적인 인식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한자독음에 의한 지식과 의식도 중요하다.
또한 외국어는 현지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가급적 원음대로 표기하는 것이 최근 추세지만 그럴 경우 예를 들어 연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이름은 어찌 할 것인가? 그들이 중국인이라고 해서 중국식으로 불러주고 그렇게 쓰는 것이 옳은가? 그들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한자음을 읽고 우리 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맞지 않겠는가?
그래서 북경을 굳이 베이징으로 표기하지 않았고, 다른 지명이나 인명도 중국 원명으로 표기하지 않았다.
현재 : 2002/05
첫댓글 중국북부의 주인이 발해에서 거란족으로 바뀐 것이다. <= 만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북부라고 하니 좀 거슬리네요. 요즘 중국이 만주라는 말을 금하고 중국북부라 칭한다는데 중국북부라 하니 완전히 중국땅 같아서요. 펌글이긴 하지만 ..;;;
네..만주라고 부르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중화주의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거죠. 중화인민공화국의 줄임말..중화국中華國..또는 화국華國이란 용어도 나쁘지 않지만..서토의 오랑캐인 진秦나라에서 유래된 지나支那가 대륙 본토를 뜻하는 말로 가장 안성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