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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기행 14 사다트 암살 - 가장 길었던 하루
가이드 하젬은 여행 중 ‘October 6’ 즉 ‘10.6’을 자주 말합니다. ‘10월 6일’이란 이름을 가진 다리나 박물관, 그리고 도시 이름까지 있습니다. 욤키푸르 전쟁이라 부르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초기 이집트군이 이스라엘군과 대치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군을 기습하여 시나이 반도로 ‘쬐끔’ 진격한 전쟁을 말합니다. 이집트에서는 ‘승리’하고 자랑하죠. 북한에서 6.25전쟁을 승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욤키푸르(Yom Kippur)는 유대교의 속죄일이며 하루 동안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단식해야 한다군요. 이집트군은 이날 새벽 공격을 단행하여 초기에 성공을 거두나 곧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전선은 원상으로 복귀됩니다. 말 그대로 status quo ante bellum (전쟁 이전의 상태로 현상유지) 이지요. 위키에는 수에즈 운하를 건넜다(crossing the canal)로 나오고 ‘이집트군의 승리’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이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안와르 사다트(Anwar el-Sadat)입니다. 그는 수단의 누비아족 출신으로 카이로의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나세르의 후계자라기보다는 혁명의 동지였습니다. 1952년 혁명 당시 나세르와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 여러 개 있습니다.
아스완 댐에 오기 전 멀리서부터 예술적인 기념비가 보입니다. 연꽃탑(lotus tower)입니다. 연꽃의 5개 꽃잎 모양으로 높이가 70m가 넘어 멀리서도 보이는 아스완 댐의 이정표(landmark)와 같습니다. 이 탑은 소련이 아스완 댐 건설을 지원한데 감사하여 이집트와 러시아 간의 우정의 기념비로 만든 것입니다. 네츠베스트니(Ernst Neizvestny)라는 소련 조각가 가 설계한 것이라 하군요. 러시아적인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뭐 조각에 대해 조예가 깊어서가 아니라 소련 시대 기념비들은 대체로 쑥쑥 뻗어 올라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기념탑이 대표적일 겁니다. 소련과의 수교 직전 이 탑을 보면서 ‘공산주의’ 소련이 아니라 ‘러시아’적인 기백을 느꼈습니다. 연꽃탑의 공식 이름은 아직도 ‘이집트-소련 우정의 탑’입니다. 그러나 아스완 댐 건설 직후 소련 기술자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남에 따라 우정이라기보다는 아스완 댐을 완성한 사다트의 기념탑으로 변한 느낌입니다. 우리의 가이드 하젬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사다트는 나세르 아래에서 부통령이었습니다. 나세르가 급서하자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나세르와 사관학교 동기이자 가장 가까운 혁명동지였지만 나세르의 명성이 워낙 높아서 대통령 취임 당시에는 왜소해 보였습니다. 사다트 아래 부통령이었으며 그의 후임인 무바라크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비슷합니다. 사다트는 1970년10월부터 1981년 10월까지 11년간을, 무바라크는 1981년부터 2011년까지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지요. 그리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전임자를 능가할 업적(?)을 남겼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하거나 쫓겨났다는 겁니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 이슬람 형제단의 지원을 받은 무하마드 무르시( Mohamed Morsi)가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곧 군부에 의해 연금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재임기간은 2012년 6월에서 2013년 7월까지 1여년.
이집트 대통령의 재임 가간을 연속으로 언급한 것은 뭔가 연상되는 게 있어서입니다. 나세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그 대표적인 정치단체인 이슬람 형제단(Islam Brothers)과 거리를 두고 시작했습니다. 나세르는 정교일치와 같은 교조주의적 방식으로는 이집트의 중흥을 이끌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세르-사다트-무비라크 등 세속주의(secular)를 내세운 군부세력이 1952년부터 2010년까지 6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지요. 반대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합법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사다트를 암살하고 무바라크를 부패 무능이란 이름으로 몰아내고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선거를 통해 드디어 정권을 잡았으나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또 다시 군부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원리주의는 듣기에는 매력적이나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국민들이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세력의 도전이 해방 후 50년이 지나서 1998년에야 정권을 잡았지요. 그리곤 두 번 더 집권하죠.
이야기가 샛길로 빠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사다트의 암살입니다. 사다트는 욤키푸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집트에서 인기가 크게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1차(1948), 2차(1956), 3차(1967) 중동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자만심에 빠졌던 겁니다. 주변이 모두 적들인 국가들에 포위당한 이스라엘은 ‘포위된 상태로 성안에 갇힌 사람들의 심리상태(besieged mentality)’ 지녔다고 합니다. 사상 최장기간 포위라는 2차 대전 중 레닌그라드(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도 1941년 9월에서 1944년 1월까지 2년 반(872일)에 불과하죠. 이스라엘인들은 실제 전투상황은 아니지만 항상 적들로부터 포위되어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건드리는 건 바로 벌집을 쑤시는 것과 같지요. 신경이 날카로워 있기 때문에 공격할 기미가 보이면 곧 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이스라엘의 전략에서 공격적 방어 혹은 선제공격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이런 심리상태를 말해 주는 겁니다. 이 전략은 사실 근대사에서 독일의 전매품입니다. 모스크바에서 폴란드-북독일-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까지 북유럽은 평원의 연속입니다. 나폴레옹과 같이 잘 조직되고 훈련된 군대가 진격하면 막을 수 있는 자연적 방어물이 없습니다. 북중부 유럽은 강들의 폭도 넓지 않아 방어용으로 가치가 낮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항상 군사적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 적이 도발할 가능성을 보이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시 시리아가 도발할 것 같은 징조가 보이면 골란 고원에서 먼저 공세를 퍼붓고, 레바논을 침공하고, 이락의 핵시설을 공격하여 파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독일이나 이스라엘이 침략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the state)’라는 관점에서 과거에는 이같은 행위는 용인되었습니다. 지금은 전쟁의 정당성(just war)이 중요시되면서 예방전쟁(preventive war)과 선제 타격(preemptive strike)을 엄격한 기준으로 구분합니다.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 이전 이스라엘은 연속적인 승리를 만끽했지요. 아랍국들은 덩치만 크고 군대 수도 많았지만 조직과 훈련이 부족하여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 소련의 최신 전투기들은 성능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미군에서 제대한 유대인이거나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반면 아랍공군은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기본 훈련정도 마친 수준이니 공중전에서 만나면 떨어지는 게 아랍 공군기들이었지요. 게다가 이스라엘은 1967년전쟁에서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요르단 강 서안을 점령하여 방어가 한층 용이해졌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언제든지 카이로로 진격할 수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시나이 반도의 석유를 개발하여 사용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다트는 시리아와 연합하여 유태교의 욤키푸르이자 이슬람의 라마단에 해당하는 10월 6일 기습을 가합니다. 이집트군과 시리아는 초기에 승리를 거두지만 3일 후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교외까지 밀립니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 일부를 장악하지만 이스라엘군이 반격에 나서자 운하의 남부도시인 수에즈는 포위당하고 카이로에서 100km 까지 접근을 허용하죠.
그러나 이집트는 운하를 건너 주요한 전략 지점을 잠시나마 차지함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앞으로 평화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장악했다고 믿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반격에 성공했고 또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시간은 이집트 편이고 앞으로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전선의 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죠. 이제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겁니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8년 9월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다음 해 정식 평화협정에 서명합니다. 사다트와 이스라엘 수상 베긴은 이해 노벨 평화상을 받지요.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평화, 그리고 사다트가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한 데 대해 아랍사회 전체가 분노하면 3년 후 그의 암살로 이어지는 겁니다.
저는 1981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담당 분야는 중동이었습니다. 원래 전공은 아니었지만 전임자의 분야를 이어받아 중동지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간 뒤에도 기업체에서 중동관계 강연을 하고 정부기관에서 외무부, 정보부 중동 담당관들과 함께 한국의 중동정책을 두고 비공식 간담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사이비 중동전문가였지요. 중동관계 책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았으니까요. 주변에서는 1년 8개월 동안 중동문제만 전담했으면 중동전문가라고 추겨 세우더군요. 한국의 얄팍한 지적(知的) 풍토에서나 나올 법한 말입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엄중한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 상무성은 중동, 동유럽, 중국 등 세계 각 지역의 신문, 잡지, 방송 보도를 요약하여 100-200 페이지 정도 자료집을 ‘매일’ 발간합니다. <Foreign Broadcasting Information Service>, 줄여서 <FBIS>라고 하죠. 한 달만 모으면 좀 과장해서 산 같이 쌓입니다. 이 자료들을 충실히 따라가지 않으면 시사 전문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중동을 저의 전공에서 몰아내고 중동학회에도 가입하지 않았지요.
1981년 10월 6일. 이날은 이집트에서 욤키푸르 전쟁의 승리 기념일이죠. 이날 사다트 대통령은 전승 기념 퍼레이드를 참관하다가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Egyptian Islamic Jihad) 소속 군인들에게 암살당합니다. 제가 연구원 생활 3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중동과의 시차가 6시간이니 이 사건을 정리한 것은 다음날 출근해서 입니다. 신문사라면 당장 나오라고 아우성을 칠 것인데, 연구원은 좋더군요. 아침부터 청와대와 외무부에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점심은 걸렀던 것 같습니다.
신문사 외신 텔렉스가 빠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사건을 관찰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현지 대사관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재외공관이 현재 164개인데 외무부는 국내 어느 기관, 재벌보다 신속 정확한 보고서를 받지요. 이들 보고서는 3급 혹은 1, 2 비밀문서로 분류되었다는 핑계로 외무부에서 독점하고 연구원 교수들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연구원 교수들이 오직과거의 지식을 동원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합니다. 외무부도 편협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같은 식구인 연구원과 정보를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3급 비밀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보시하듯 나누어 주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보면서 교수들의 보고서가 형편없다고 깔아뭉개는 게 그렇게 좋던가요? 이게 교수들이 연구원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하여튼 점심도 걸은 채 보고서를 만들어 보내고 나니 친정이라고 한국일보에서 동기 박찬식 형이 전화로 원고를 부탁하더군요. 이미 보고서를 쓴 게 있으니 요구하는 매수에 맞추어 보냈습니다. 곧 이어 KBS-TV에서 저녁 9시 뉴스에 나갈 것이라고 해설 인터뷰를 요청해 왔습니다. 갱상도 사투리에 천식 기침이 있어 방송은 질색이라 했지만 원장이 3분이니 간단히 하라고 하더군요. 방송 3분이 그렇게 긴 시간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저녁 뉴스를 보니 1분 30초 정도 나갔더군요. 이렇게 나의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냈지요.
문제는 그 다음날 이었습니다. 부산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별로 알지도 못하는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전화가 쇄도하더군요. KBS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1960년대 말 한국일보에 기명기사를 쓰면 우스갯말로 전국에 명함 50만장을 뿌렸다고 했습지요. 초짜 기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말이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뒤에는 TV가 이를 이어받은 것 같더군요.(2018.5.12.)
사진 1, 이집트-소련 우호 연꽃탑
사진 2, 카르나크에서 마차를 타고
사진 3, 룩소를 신전에서. 오벨리스크 하나는 외국에 선물했다.
첫댓글 나기브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4인의 이집트 군사독재자들은 그들의 떠들썩한 성가와는 달리 이집트를 현대화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오늘날 이집트는 산업화가 요원한 저개발가입니다. 우리나라의 부하의 흉탄에 죽은 모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