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낙하산
옛날에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공주가 있었다는데
나는 새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하루는 하늘에서 새까많게 쏟아져 내리는 것이 있어
옆에 있는 궁녀에게 무엇이냐 물은즉
마마 저것은 병사들이 훈련하는 낙하산이옵니다
낙하산? 그때부터 공주는 낙하산을 타고 싶어했는데
무장 출신인 부왕에게 그 말을 했다가
지집아가 무슨 낙하산 타령인고 차라
그래서 공주는 꿈으로만 간직하고 살았다는데
여왕이 된 공주 고민이 한 가지 있었으니
자기가 왕이 될 때 온몸을 바치면서 애쓴 사람들에게
정승 판서 참판 승지 등 다 주면서 논공행상을 하고 있는데
관찰사를 주려고 하니 모두 백성들이 직접 뽑는다고 하지
하다 못해 고을 현감까지 백성이 뽑는다니
아직 줄 사람은 많이 남았는데 자리가 없는지라
내시에게 물으니 그저 황송하옵니다만 연발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밟히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하나는 공주를 위해 막말을 서슴지 않던 막말의 여제이고
또 하나는 오랫동안 공주의 편에서 일해온 고향 선비고
나머지 하나는 고을 관리와 사또만 주구장창하면서 충성을 바치다가
지난 번 관찰사 뽑기에서 물 먹은 인간인데
늙은 도승지에게 물으니 좋은 수가 있다고 한다
백성들 구휼하는 기구인 활인서가 국제적 기구가 되었는데
막말의 여제는 거기 대장으로 하면 좋을 듯하다고 한다
그거 참 괜찮은 생각이로구나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폼도 잡을 수 있으니
그럴 듯한 자리로 보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도 한 번 조사는 해봐야겠기에
내시더러 문제는 없냐고 물으니
내시 왈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을 앞에 붙이고
우선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백성이면 누구나 내는 활인서 회비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공주 갸우뚱했는데
늙은 도승지 다시 나서서 말하길
그 자리는 원래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앉는 곳이란다
그리고 그까짓 회비야 한꺼번에 내면 된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하여 일단 통과시켰지만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다
내가 여왕인데 그 사람은 왜 여제인고
나보다 더 높단 말인가
내시는 황공하옵니다만 연발하면서 바들바들 떤다
역시 노련한 건 늙은 도승지
전하 여제라 함은 황제 할 때 쓰는 임금 제(帝) 자가 아니오라
동생을 가리키는 아우 제(弟) 자이옵니다.
말하자면 여자로서 전하보다 그 방면에서는 한 수 아래인 아우란 뜻이온즉
공주는 이 말에 흐뭇해지면서 손을 젓고는
다음 고향 선비는 어찌할꼬
이번에도 도승지 기막힌 안이 있다면서
요즘은 피아르 시대라 나라도 피아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는 기구의 대장이 비어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자리에 앉히기로 했는데
내시에게 물으니
그 자는 의금부의 세작으로 움직였다는 말이 있다는 거라
이 역시 늙은 도승지가 나서서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부왕께서도 그런 경력이 있으셨다면서
역적을 소탕하려면 그런 일도 해야 한다는 거라
이 대목에서 공주의 눈썹이 치켜 세워졌다
부왕이 어째요? 부왕이 세작이었단 말이요
도승지 잠시 주춤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하길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부왕께서는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서슴지 않으시고
안 되면 되게 하라를 좌우명으로 삼고 사셨사온 바
오늘날 만백성이 우러르는 성군으로 기억되는 것이옵니다
이럴 때면 도승지가 무섭기도 하다.
부왕을 들먹여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그렇지. 안 되면 되게 하라
문득 낙하산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려 오던 낙하산
그러면 시골 사또는 어찌할꼬
이번에는 도승지가 잠자코 있는다
자기가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도가 지나치면 주군이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아서
절제에도 도가 통한 노회한 권신이다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승지 하나가
지금 비행장 대장이 없어서 미룬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우리 비행장이 세계에서 제일 가는 비행장인데
지금 몇 달째 대장 자리가 비어 있단다
시골 사또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내시에게 물으니
그런 것을 낙하산이라고 부른다고
아마 국내외에서 비난이 많을 거라고 한다
그것도 낙하산인가 공주는 갑자기 황홀해졌다
낙하산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얼마나 좋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낙하산
그런데 내시가 또 초를 친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가 그런 것을 코드 인사라고 비판했다면서
유생들이 말이 많사옵니다
이때 늙은 도승지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던지
전하 네가 하면 코드 인사 내가 하면 국정 철학 공유자란 말도 있사옵니다.
전하의 숭고하신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자라면
전문성이든 도덕성이든 다 소용없는 것이옵니다
역시 늙은 도승지는 공주의 하루를 흐뭇하게 해준다
오랜 숙제를 해결한 듯 공주는 모두를 내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상에 올랐는데
저게 무엇인가 창 밖을 보라
대궐 뜨락에 새까맣게 떨어지는 낙한산
그런데 검은 베레가 아니라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배가 침몰해 바다에 빠져 죽은 애들의 애미, 애비들 아닌가
대궐 앞 길가에 천막 치고 죽치던 자들 아닌가
꿈에 볼까 두려운 그들이 낙하산 타고 대궐로 들어오다니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소리쳐도 소리가 나지를 않는데
이번에는 또 역마차를 모는 자들, 수리하는 자들이 쏟아진다
어디 그뿐인가 하얀 옷을 입은 의원들, 의녀들
내시 내시는 어디 갔느냐
도승지는 어디 갔소
어영대장은 무엇 하는 거요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아무도 대답이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창 밖만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이건 또 웬일인가 마침내 용상까지 낙하산 타고 누군가 내려온다.
이건 아닌데 이건 진짜 아닌데
역모다 모반이다 반역이다 안 나오는 목소리로 외치다가
다급한 김에 베개를 낙하산 삼아 등에 지고 뛰어내렸는데
쿵 하는 소리에 침상 밑으로 떨어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지
부왕을 불렀다고도 하고
또 다른 사내를 불렀다고도 하던데
그야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옛날에 옛날에 있었던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