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클라이번 (Van Cliburn)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B flat minor, op 23.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이후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진 카네기 홀 녹음. 키릴 콘드라신 지휘, RCA symphony orchestra 협연.
내가 가지고 있는 CD는 이곡외에도 클라이번이 나중에 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녹음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이 같이 커플링되어있다.
1악장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20분 41초 분량의 대형 악장)부터 몰아치는 맛이 일품이다. 오케스트라 관악기들이 풀 파워로 악장을 열어놓으면 건반이 부서져라 파워풀하게 등장하는 피아노. 힘차게 두들기지만 음악을 "흐르게" 하기위해 강약 조절을 잊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을 줄도 안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지루하게 늘어지지도 않는다 (콘드라신의 완숙한 조절 능력).
아무래도 기술적인 완성도보다는 젊은 연주자의 거칠것 없는 기백에 주목하게 된다. 차이코프스키를 잘 연주한 사람들로 리히터, 아르헤리치 등도 꼽는다지만 이 곡은 노련미와 성숙미로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도 기백과 파워만으로도 잘 어울릴 수 있는 곡이다. 그리고 클라이번은 거기에 정말 잘 어울리는 연주 능력을 보여준다.
1악장만큼 압도적이진 못하지만 서정적인 2악장 Andantino simplice (7:01)을 거쳐 3악장 Allegro con fuoco (6:44)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젊은 폭발력을 보여준다. 평론가들로 부터는 적절한 패시징과 19세기 정통 피아니스트 스타일을 이어받은 루바토를 구사할 줄 아는 힘있고 멋있는 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콩쿠르 우승직후 모스크바 공연 실황이다. 협연으로 찰떡 궁합을 과시한 키릴 콘드라신(1914-1981)은 이로부터 한동안 클라이번과 함께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연주투어를 갖게된다.
추후의 레코딩과 비교하면 기백과 파워는 여전하나 우승직후의 피곤과 흥분탓인지 연주의 기교는 약간 더 떨어져 있는 상태다 (하기야 저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나...꿈인지 생시인지 하고있을 때인데...).
비디오를 보자면, 애늙은이스러운 장영주 스타일의 생 오버하는 감정 연기가 없는 점이 더욱 차분하면서도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차이코프스키 연주를 돋보이게 해준다. 스토코프스키, 카라얀 이후 요즘 연주자들은 지나치게 무게잡고 난리치는 감정 연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므라빈스키, 리히터, 오이스트라흐 등을 보라. 연주자의 오버 액션은 오히려 음악감상과 몰입을 방해하고 (눈쌀이 지푸려진다) 연주 수준을 싸구려로 격하시킨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개인적 의견일 뿐 오해하지 말자...)
반 클라이번 (Van Cliburn, 1934~).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출생하여 텍사스 주 킬고어로 이주. 3살에 피아노를 배우기시작해 12세에 주립 경연대회 우승, 줄리아드 입학, 그리고 20살에 카네기홀에 데뷰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음. 23세의 나이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일약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된 피아니스트.
고수머리 텍사스 촌놈(?)이 얼마나 대단했길래 약관의 나이에 자생적이고 광범위한 팬클럽이 조직될 정도로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시민들을 흔들고, 미국 최고영웅이 되어 뉴욕에서 카페레이드를 하고, 순식간에 전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칭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일개 국제 콩쿠르 우승자가 전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면, 그의 연주실력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 미소간의 냉전 - 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2차 대전으로 일본과 독일이 제거되고 아시아와 유럽은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새로운 양대 강대국으로 선명성 경쟁에 들어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표자로서 "누가 더 센지" 붙어보는 일종의 힘겨루기식 "cold war"가 시작된 것이다. 625 동란 등 국지적인 충돌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두 강자가 파국(핵전쟁)은 피하되, 어떻게든 상대방을 굴복시키기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형태의 경쟁이 되어갔다.
1958년은 냉전 초기에 소련이 미국에게 "승리"를 선언한 해다. 2차대전 종료후 나찌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 2/3이상을 미국에게 빼았겼음에도 1957년 10월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를 발사한다. 우주 진출 경쟁에서 방심하고 있던 미국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부랴부랴 스푸트니크호보다 휠씬 작은 익스플로러 1호를 1958년 1월에 발사했지만 이미 양키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소련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을 완전 그로기상태로 몰고 가기위해, 이번엔 소비에트 문화의 우월성을 과시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개최하게 된 것이 바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여기서 최고의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소비에트 연주자와 이를 수준높게 받아들이고 감상할 줄 아는 소비에트 문화 시민들을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 우승 후 타임지 표지로 등장한 23살의 반 클라이번
이 계획은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후기 낭만주의- 러시아 민족주의 사이에 있는 작곡가이고, 당시 소련(소비에트 연방) 국민들의 문화, 특히 고전 음악에 대한 감상수준은 매우 높았다.
레닌그라드에는 예프게니 므라빈스키라는 걸출한 지휘자가, 모스크바에서는 키릴 콘드라신이 서로 경쟁하며 (사실 경쟁한다는 생각은 콘드라신만 했겠지만....워낙 수준차이가 커서...) 소련 고전 음악계를 키웠고 볼쇼이 발레와 오페라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를 건전한 소비에트 정신의 함양이라는 명목으로 적극 장려/ 육성한 소련 정부 덕택에 최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발레단, 오페라단을 보유한 소련 국민들의 음악 감상 수준은 낮을래야 낮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싼 값에 최고 수준의 연주표를 자주 구할 수 있었고, 다른 엔터테인먼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팝은 자본주의 상징으로 규제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청자들의 수준때문에 소련정부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적성국가의 심장 미국 텍사스 출신 연주자가 우승해 버린것.
준결선때부터 퍼져나간 클라이번에 대한 놀라움, 칭송, 감탄들은 결선무대로 연결되어 반 클라이번이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모스크바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1번과 라흐마니노프 3번의 충격은 밤사이 모스크바 전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클라이번이 연주를 마치자 소련 청중들은 무려 8분동안의 standing ovation (기립 박수)를 보냈다. "바니츠카 (소련 청중이 붙인 반의 애칭)에게 우승을" 이란 함성이 연주회장을 뒤엎었다.
▶ 우승직후 모스크바 연주모습...구름같이 몰려 황홀한 표정을 짓는 러시아 오빠부대에 주목...
심사위원으로 초빙받은 세기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역시 기립박수에 합류했을뿐아니라 다른 연주자에게는 모두 0점을, 클라이번에게는 만점을 주는 과격한 채점으로 미국 출신의 이 연주자를 반드시 우승시키려했다. 그는 다른 심사위원들이 과연 미국 출신 연주자를 우승시키겠느냐는 의구심때문에 이런 과격한 채점을 넣었다고 믿어진다. 리히터는 이후에 다시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피아노 연주에서 기백과 힘하면 리히터를 절대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데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저사람 악력은 얼마나 대단할까 생각해보곤 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 모양이다....
청중과 리히터의 압력에 심사위원장이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에게 까지 전화를 해서 확인한 후에야 확정된 우승. 모스크바 시민들은 열광하고, 뉴스는 전세계로 타전되고, 미국은 단숨에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클라이번은 국가 영웅 대접을 받으며 뉴욕에서 성대한 카퍼레이드까지 갖기 이른다. 바야흐로 아이돌 스타가 되어 버린 것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너무나 엄청난 스타덤에 오른 클라이번. 이후 아마도 리히터가 기대했을, 젊어서의 패기와 파워에 기교와 연륜을 갖추어 음악적으로 더욱 완성시킬 겨를도 없이, 그는 그만 자신이 23세까지 쌓아올린 것을 오히려 깎아먹으며 세월을 보내고 만다....
그의 연주와 레코딩 중 최고는 콩쿠르 우승 직후인 58-59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고, 이후 급격한 쇠퇴를 겪는다. 평도 좋지 않았고, 지금 남아있는 음반들을 들어봐도 콩쿠르에서의 클라이번같지 않다... 스트레스와 상실감이 엄청났을 것이고, 이로인한 연주 수준의 악화가 계속 반복되었으리라. 결국 은둔 수준까지 몰리고 최근에야 가까스로 복귀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내가 클래식음악 감상에 입문하는 동기를 만들어 준 곡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마루가 떵떵 울리도록 크게 이곡을 몇 번이나 듣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아쉬케나지/마젤 반). 나중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 때 그곡이 뭐였을까라는 호기심으로 다시 찾아 듣게 된 것이 처음 고전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75년에 한스 폰 뷜로에 의해 보스턴에서 초연된 곡인데, 원래 초연 대상이었던 니콜라스 루벤스타인이 연주가 불가능하고 짜임새가 전혀없다는 악평을 하며 던져버려서 뷜로에게로 갔다고 전해진다.
글 출처: Mostly Cloudy With A Chance OF Rain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