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미 소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돈나로 데뷔한 조수미. 카라얀으로부터 "100년에 한두명 나올까말까 한 목소리의 주인공", 주빈 메타로부터 "신이 주신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 릴때 무용, 성악, 가야금, 피아노 등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교양을 익혔고 또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에 의해, 그 유달리 뛰어난 성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성악가로 클 수 있는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동북 국민학교를 거쳐 선화 예중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그녀는 서울대 성악과를 과 개설 사상 최고의 실기점수를 받으며 수석으로 입학, 이때부터 이미 남다른 가능성을 지닌 재목으로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 크게 만족하지 못했던 그녀는 입학한지 채 1년도 못되어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의 유학을 떠나게 된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곳의 세계적인 명 성악가인 산실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 입학하면서 그녀는 비로서 그 천재성에 걸맞는 순도 높은 조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에 새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 이는 음악원의 자넬라 보넬리 여사. 비록 메조소프라노로 음역은 달랐지만 그녀는 조수미의 고음을 연마시켜주고 완벽한 테크닉을 갖추도록 큰 공헌을 했다.
음악원 유학 2년만인 1985년 그녀는 나폴리 존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 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여러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녀는 드디어 1986년 정식으로 오페라 데뷔를 갖게 된다. 이탈리아 5대 극장 중 하나인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에 <리골레토>의 질다로 출연한것이 그것. 이때 선보인 환상적인 가창으로 거장 카라얀을 감복시킨 그녀는 2년뒤 그의 오디션에 초청되어 함께 작업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후 라 스칼라(1988), 메트(1989), 코벤트 가든(1991), 빈 국립 오페라(1991), 파리 오페라(1993)등 소위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을 차례로 섭렵하며, 유럽과 미국의 음악 애호가들을 열광시킨 그녀는 이제 셰릴 스투더, 캐슬린 베틀의 뒤를 잇는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로서 당당히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소프라노 조수미에 대하여/ 글, 김정순(음악 컬럼니스트)
소프라노 조수미는 무대를 "아는" 가수다. 무대 위의 연주자와 객석의 청중들, 그 양자가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를 그녀는 안다. 거기엔 무엇보다도 "음악"이 최상의 가치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가치를 위해 비로소 무대 위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울러 그녀는 청중들이 무대 위의 오페라 스타에게 거는 기대와 꿈, 자신의 노래와 몸짓 하나하나가 미치는 힘의 파장을 안다. 무대에서의 치밀한 자기연출이 가창력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 수많은 청중들의 시선을 무대 위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시키는 비결을 그녀는 터득하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세계 청중들의 귀와 눈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라스칼라, 코벤트 가든, 바스티유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 오페라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아직 20대였던 조수미는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무대로 일컬어지는 이 다섯개 오페라 무대에 모두 서는, 한국인 소프라노로서는 하나의 "전설"이라 말해도 무방할 화려한 이력을 만들어냈다. 무슨 일이건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은 거저 얻어진 행운은 아니었다. 조수미 특유의 강한 의지력과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 물론 일찍이 카라얀이 칭찬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타고난 목소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조수미의 목소리는 세계 무대에서도 드물게 투명하고 곱다. 고음 F까지 무난하게 노래하는 고음에, 언제나 소리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싱싱함을 지녔다. 그녀의 부드러운 레가토, 종달새의 노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섬세하게 구사되는 트릴과 기민한 호흡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저음이나 고음이나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음색은 그 예쁜 트릴음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그녀의 자랑이다.
사람들은 흔희 조수미의 기교를 말한다. 저절로 숨죽여 듣게 만드는 절묘한 수준의 기교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녀가 아닌가. 그 때문인지 이제껏 그녀의 이력은 어렵기로 소문난 역할들과 더불어 쌓여왔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고, 한동안은 거의 그녀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던 "밤의 여왕"역만 해도 그렇다.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단 두차례 등장하는 역이지만, 밤의 여왕은 소프라노들이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하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리아들을 불러야 한다. 이 어려운 역으로 그녀는 게오르그 솔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오페라 지휘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의 타이틀롤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몽유병의 여인>에서의 아미나, 부르기가 너무 어려워 좀처럼 공연되지 않는 오페라 <테몬테>에서의 행운의 여신 역에서도 그녀의 화려한 기교는 단연 빛을 뿜는다.
조수미의 레퍼토리는 유명 오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희귀 레퍼토리를 자신의 것으로 개발하는 데도 적잖은 욕심을 부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시해야 할 사실은 그녀가 "벨칸토" 노래들에게 적역이라는 것이다.
폭 넓은 성역에 걸쳐 구사되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목소리, 화려한 기교와 가창력을 지닌 그녀에게 벨칸토 아리아들은 가장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레퍼토리일 수 있다. "벨칸토"를 타이틀로 레코딩을 완성한 그녀는 이제 이것을 리사이틀 테마로 삼았다. 롯시니, 밸리니, 도니제티 등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벨칸토 음악의 매력과 함께, 감탄을 넘어선 감동의 순간을 그녀의 이번 무대에서 기대해 본다.
나의 음악 나의 예술/ 글, 조수미
겨울치고는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볕을 받으며 산타 바바라 해변의 작은 카페에서 친구와 차 한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창 밖에는 짙푸른 바다가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고, 웨이트레스가 놓고 간 찻잔에서는 진한 커피향이 지친 몸을 아늑하게 감싸안았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한가한 오후였다.
창 밖 풍경과 커피향에 한참을 취하다가 문득 전날 LA에서 있었던 독창회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늘 하는 습관대로 어제 불렀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스스로 그것을 리뷰하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 카렌이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네 연주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넌 꼭 시장보러 가는 새색시 같은 거 있지..."
난데없이 뱉어놓은 친구의 뚱딴지 같은 말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시장보러 가는 새색시?"라는 친구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도대체 나완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내게 해주었던 칭찬들과는 너무나 다른 표현이라 친구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공연을 대할 때마다 노래라는 것이 네게는 너무 자연스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모든 게 쉽게 보이구... 하지만 10년 넘게 네 공연을 지켜보면서 문득 문득 느끼는 건데, 막 시집온 새색시처럼 늘 설레고 흥분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거야. 마치 새색시가 애정과 정성을 듬뿍 담아 사랑하는 남편에게 최고의 저녁을 준비하려고 매일 시장을 몇 바퀴를 돌며 이것저것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야. 늘 싱그럽고 새로운 느낌으로 와닿은 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갑자기 "시장보러 가는 새색시"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지. 어때? 이런 표현, 아무한테도 들어본 적 없지?"
★ 나는 매일 밤 프리마돈나 조수미로 변신한다
친구의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그의 표현이 굉장히 독특하긴 했지만, 무대에서의 내 모습을 너무나도 적절히 묘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듯, 해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는 소위 "무대체질"이라고.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고 청중들의 박수소리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할 때 나는 프리마돈나 조수미로 변신한다. 하지만 13년째 세계 안 서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무대경력을 갖고 있지만, 크든 작든 무대에 설 때마다 매번 설레고 흥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때마다 이렇게 기도한다. "제 목소리가 이왕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라면 그 축복을 모든 사람들과 골고루 나눌 수 있도록,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는 무대 위에 올라 노래로써 나의 모든 감정과 혼을 표현한다.
무대는 나와 청중사이의 "연애"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아름다움과 지성으로써 그이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때문에 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늘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 무대를 준비한다.
해가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하는 기쁨도 커진다. 그만큼 노래에 대한 나의 애착과 열정은 무르익고 있다. 노래라는 것이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음 하나하나, 프레이즈 한 소절 한 소절에 깊은 연구와 또 철학까지도 필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1학년 시절, 레슨받기 5분 전에 대강 악보를 훑어보고 노래하던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가끔 쓴웃음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더 성숙하고, 늘 노력하고 공부하는 오늘의 내가 있지 않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꽤 조숙했고, 남들이 말하는 "끼"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짝짝이 고무신"이란 동화를 갖고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중고등학생들까지 제치고 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사건은 음성학자들에게 꽤 화제가 됐었다. 음성연구소라는 곳에서 부모님께 "이 아이 목소리가 너무나 독특하니 연구를 하고 싶다"라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물론 부모님께서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긴 했지만, 나는 이렇듯 어렸을 때부터 매우 짱짱하고 독특한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다. 나는 언제부턴가 나의 이런 목소리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악가의 길은 "하늘의 지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나의 목소리는 전적으로 어머님의 유산이다. 웬만한 아마추어 성악가를 능가하는 좋은 소리를 갖고 있던 어머니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 실현하려 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노래 못지않게 다른 예능방면에서도 관심이 많았고 웬만큼 소질을 보였었다. 피아노, 발레, 고전무용, 가야금, 심지어 그림까지도 잘 그렸다. 특히 그림에는 꽤 소질이 있었던 모양으로, 동남아시아 사생대회에 나가 상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이끌고 선화예중 유병무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성악가로의 길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고, 또 합창단의 리더로서 내게 책임감과 리더십을 갖게 해주었다.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만난 이경숙 교수님은 아직도 내가 추구하는 아티스트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 도도하지만 한편으론 여리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인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아카데믹하고 순수한 정열은 아직도 내게 채찍이 되고 있다. 대학시절 방황하던 내게 "세계"라는 더 큰 곳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분이기도 하다.
재능 하나만으로는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유학 첫 해였다. 나 역시 프리마돈나를 꿈꾸며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학생들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뛰어난 존재로 우뚝 서려면 그들보다 몇 갑절의 노력이 필요했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감내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테크닉을 공부하고, 또 많은 레퍼토리를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학교시험이다 콩쿠르다 해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일과는 독서였다. 그렇게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늘 책을 읽으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은 자연히 우리 3남매에게로 배어들었다. 지금처럼 비디오나 컴퓨터가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책은 그 시절 내게 오락적인 도구이자 안식처였다. 책 속에 빠져들어 마치 주인공인 양 울고 웃었고, 새벽 두세시까지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지금 눈이 나빠 렌즈를 껴야 하는 것도 그때의 잘못된 책읽기 습관이 원인이 되었다). 그 습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 당시 순수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감수성은 어른이 되어 내가 하는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의 성격 및 개성,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으로 무대에 서 있는지까지 이제는 거의 파악이 된다. 악기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노래하는 이들은 어차피 자신의 모든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야만이 진솔하게 관객들과의 의사전달이 된다고 믿는다. 자신이 부르는 말, 언어에 따른 뜻뿐만 아니라 내면에 담긴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그 사람의 음악이 남보다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 테크닉과 음악성을 자랑하기 위한 노래들은 이젠 하고 싶지 않다. 내 목소리를 통해 내가 느끼는 여러 종류의 필링(기쁨, 슬픔과 인생의 모든 것)을 전달하는 성악가가 되도록 늘 노력한다.
옛날에는 내가 느끼는 대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연습할 때마다 작은 녹음기에 연습한 것을 담아 다시 들어보고 또 불러보고 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음 하나도 대강 스쳐가는 법이 없다. 작곡가의 의향을 충분히 이해한 후, 그 다음에 음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한다. 씌어진 악보 위에 나만의 개성과 느낌, 철학과 혼을 담는 작업이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때문에 난 늘 새로운 레퍼토리, 음악을 찾아 헤매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 세계 최고의 콜로라투라, 오페라계의 밤의 여왕
1990년대 초, 내 이름이 서서히 세계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이 되어 살았다. 오페라 요청이 들어왔다 하면 밤의 여왕 역이었다. 꿈도 조수미가 아니라 밤의 여왕이 되어 꾸었다. 그때부터 내겐 조수미라는 이름 앞에 "세계 최고의 콜로라투라, 밤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것 같은 아질리티, 폐부를 찌를 듯한 고음..." 등의 찬사가 이어졌고, 도이치 그라모폰, 에라도, 데카 등에서 "마술피리" 녹음을 요청해왔다. 결국 나는 3년 안에 3개의 다른 레이블로 "마술피리" 녹음을 했다. 이것은 얼마간 깨지기 힘든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고정된 이미지는 가수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놀라운 콜로라투라와 테크닉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화가 났고, 오페라 극장 측에서도 그런 종류의 레퍼토리만을 제의해 왔을 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주로 이탈리아 음악을 하고, 바바라 보니가 독일가곡 위주로 하는 것처럼 소위 "한 분야에 자기 목소리를 맞추어 가는 것" "자기 목소리에 맞는 분야에 완벽을 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음악세계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다. 물론 나라고 장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음과 아질리티 등을 요구하는 벨칸토를 제일로 칠 수는 있지만 내 음악이 꼭 벨칸토 하나로만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첫 오페라 레코딩인 로시니의 "오리백작"을 선두로 지금까지 수많은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는데, 내가 녹음하고 싶었던 많은 오페라湧?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카라얀 지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비롯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검은 망토" "투우사"에 이르기까지 언어도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다양하고, 스타일과 표현도 천차만별이다. 그게 나의 진실된 모습이다.
특히 "가면무도회"가 카라얀이 지휘한 마지막 오페라 레코딩이 된 것.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첫번째 버전인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세계 최초의 녹음이라는 것, 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페라 "검은 망토"와 "투우사" 등을 녹음해 음악역사 속의 작지만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리차드 보닝 지휘로 첫 솔로 앨범 "카르나발"을 녹음한 것을 선두로 지금까지 여러 장의 솔로 앨범을 녹음했다. 특히 에라토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음악을 녹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도 큰 행운이다. 음반은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무대에 서는 것과는 달리, 음반은 영원히 남는 기록물이기 때문에 연주자들에게도 그 의미는 남다르다. 때문에 나는 늘 수많은 판본 등을 잘 검토한 후 결정을 내리곤 한다.
올 가을에 발매될 "이탈리안 송 북"(Italian song book)은 처음으로 피아노 반주로 녹음한 것인데, 우연히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곡들이 많아 참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5월에는 아주 잘 알려진 프랑스 오페라 아리아들을 모아 녹음할 예정이며, 내년 요한 슈트라우스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오는 9월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곡들을 모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할 것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가곡에 대한 나의 애착이다. 1994년 "새야 새야"가 나온 후 계속해 "아리아리랑" "카네기 홀 라이브 앨범"을 삼성 나이세스를 통해 발매했다. 특히 보람있었던 것은 편곡작업과 음악적인 센스를 불어넣어 우리가 곡에 새옷을 입힌 것이다. 그 일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한국 가곡에 대한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가슴뿌듯한 일이다. 11월에 있을 호주의 시드니, 멜버른 공연 및 싱가포르 음악회 때에도 한국가곡을 프로그램에 넣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노력한만큼 조금씩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느낌이다.
내년에는 벼르고 벼르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전곡 녹음에(파리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들어간다. 루치아는 "리골레토" 못지않게 내게 잘 맞는 역인 만큼 나로서도 기대가 크다. 또한 지휘자 보닝과 마이어베어의 "디노라" 전곡도 녹음할 예정이다. 또 다른 내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 화려한 무대 뒤의 고독
일전에 한 음악팬을 만났는데,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조수미 씨는 '끼'를 어떤 식으로 발산하느냐"라고. 사실 '끼'라는 것은 무대에 서는 예술가들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그 예술적 '끼'는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가꾸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노래에, 행동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 때 그 사람의 캐릭터로 특징지어진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내 노래를 듣고 "저것은 조수미 거야"라고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노래 속에 나의 끼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노래를 들어보라, 가급적이면 공연장에서. 내게 묻는 것보다 스스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해 주었다.
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이다. 나는 어린이들을 참 좋아하는데, 오래 전부터 그들을 위해 내가 도움될 수 있는 것이 뭔가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만든 것이 "피터와 늑대" "사계" "청소년을 위한 오케스트라 입문"이다. 내 영역과는 전혀 별개인 나레이터를 맡은 것이다. 그것이 비록 나의 커리어에는 도움이 안되겠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살아가면서 진솔한 삶이 담긴 책 한 권 냈으면 하는 소망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낸 것이 평소에 써놓았던 일기장을 정리해 엮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책이다. 물론 시간이 남아서 한 것은 아니다. 바쁜 연주 일정 사이사이에 스스로에게 한 진솔한 고백이다. 때문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겐 정말 소중한 과거가 담겨 있다.
완벽성을 기하는 성격 탓일까? 내 음반을 들으면서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책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가끔 가다가는 자기 칭찬도 해가면서 살아가는 법도 이제는 배운 것 같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 뒤에는 반드시 고독이 뒤따른다. 열광하는 청중들의 환호도 순간일 뿐이다. 그 순간의 희열과 기쁨을 위해 수많은 연습을 해야 하고, 지긋지긋한 여행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노래이고, 그 길이 나의 길인 것을! 속이 후련해지도록 가슴을 울리는 그런 노래를 부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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