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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24-30
누가 높은가
(눅 22:24, 개역)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눅 22:2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개역)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7, 개역)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8, 개역)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9, 개역)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개역)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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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동생 아벨보다 잘낫다고 여겨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제사 행위를 통해서
가인의 본색을 탐색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것을
하나님이 대신 채워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나올 수 없고
오직 우리가 원하는 것만
밖으로 쏟아지게 됩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새언약’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기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희망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켰을 것입니다.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뭔가 일이 잘 된다는 것은
지배자의 맛을 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심보를
미리 읽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빙자해서
정작 얻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바와
같은 노선일 것입니다.
즉, ‘지배자 노릇’입니다.
‘높은 자’가 한 번 되어보고 싶은 겁니다.
모든 이들을 발아래 두고 싶은겁니다.
권력이란 인간의 긴 그림자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에게
아직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이 믿는다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뿜어내는 본성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억누른다는 것은
과도한 연기에 불과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인줄을 알지 못한 채
자신네들이 걷어드릴
이해득실을 따지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인간은 자진해서
자신의 권력을 버릴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권력에 휘감기면서
그 안에서 자기 약점도
같이 감추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취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오늘날에만 적용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이 말씀, 이 원칙대로
실행됩니다.
과거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합니다.
이 원칙을 이 지상에서
제대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소서 2장에 나오는
‘낮으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디 하나님의 권한과 영광을
마음껏 적용시킬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한을 발휘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노예의 인생을 자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모멸과 절망의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로의 복종’입니다.
죽음이란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절망의 자리까지 가시는 동시에
자기 사람을 그곳으로 불러 모으시는 작업도
같이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 누구도 갈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이
권력과 권력으로 형성된 세상인 것이
보입니다.
우리 개인도
그 권력이 유발한 열매입니다.
가정이 그러하고
교회가 그러하고
학교 및 사업체가 그러합니다.
높고자 하는 자들이 높아지는 과정으로
더 높은 자들에게 밟히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존재들이 신을 찾고
예수를 찾는 것은
오로지 높아지려는
그 의욕의 종교적 모습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출발은
성경의 출애굽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냥 애굽입니다.
이 애굽에서
한뭉텅이 일단의 무리가
탈출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집단에다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처럼
그런 권력단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진정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벌리시는 일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호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지 못하도록
일을 해내가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있음’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있음’을
확장시켜나가려 합니다.
그 범주의 넓혀짐 속에는
만나는 사람 족족 다 집어넣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나 예수님마저
거기에다 집어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결코 자기를 비울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존재가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되는 것이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권력체라는 양상으로
자기 만의 세계를 따로 장만하려고 하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이스라엘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굽나라와는 전혀 다른 속성으로
하나된 나라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속성이라는 것이
세상 권력자를 본받지 말고
십자가 사건처럼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속성들로서 하나되는
세계만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제대로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사무엘상 8:5-9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있음’이
도저히 자기네들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겁니다.
원인이 뭘까요?
원인은 자신이 있음 같이
하나님이 있음을 확인하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음은
날마다 죽어야 될 우리를
날마다 살려내는 식으로 계십니다.
즉 나 있음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계시는게 아니라
하나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매일같이 살려냄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땅히 더 살지 말아야 하고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야 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식으로
생명을 발휘하는 그 능력으로 인하여
천국에 속해져 있는 존재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마 위에 얹어진 물고기 마냥
날마다 십자가로
우리의 권력욕이 토막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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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강-눅22장 24-30(누가 높은가)120603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24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24-30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방금 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2012년 6월 3일에 오늘만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지막에 우리가 천국 갔을 때도 역시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에서 2012년도, 2014년도, 거기에 구애받지 맙시다. 그리고 여기가 한국이냐, 미국이냐, 독일이냐, 그런 것도 구애받지 맙시다. 이것은 이 세상 전부한테, 그리고 천국에서도 똑같이 통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냐,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입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이 말씀을 하셨다는 말은 ‘이 말에 동의 못하고 이 말에 대해서 동조 못하면 내 나라에 들어올 생각을 말라.’ 그런 취지지요. 그래서 미리 당겨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 천국 갈 거야, 말거야? 갈 거야? 간다면 이 말에 동의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이것을 어디에 써먹지?’라고 써먹는 용도로만 생각하는데 이것을 자꾸 써먹을 생각하지 말고, 써먹게 되면 벌써 우리가 주도권을 쥐니까 써먹을 생각하지 말고 ‘아, 우리 영원한 생각을 가진 주님께서 이런 취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 전부를 두고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저는 아니거든요.’라는 핑계는 대지 맙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이렇게 줬다는 말은 ‘너도 똑같아. 나도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잖아. 자꾸 아니라고 하지 마. 너도 지금 내 말을 들었으니까 그것이 잘못인줄로 알지만 만약 나 예수가 이 말 안했으면 너도 세상 권력자들 부러워서 똑같이 할 사람이야.’라는 투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에 관심두지 말고 우리 구원의 주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그것만 캐치하면 돼요.
‘아, 우리 발각 났네. 발각 났어. 내가 딱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들통 나시면 되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 했듯이 반창고 떼면 되듯이 반창고 떼면 돼요. 자꾸 반창고 붙이지 말고 떼버리면 주께서 반창고를 떼고 이 말씀을 집어넣을 때 이 말씀에서 지적받는 그 무리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생각을 하셔야 되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주셨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창세기부터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미리 짐작해야 돼요.
창세기 4장에 보면 거기에 가인이 나오는데 그 가인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봐주지 않습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경배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때부터 우리의 형편과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나아진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불쑥 제가 가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느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제자하고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은 하나님하고 세웠지만 열 두 제자를 언약 속에 집어넣는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우리 식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나 이제 예수님 편이야. 이제는 천국가게 되었어. 기분 좋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겠지.’ 하고 안심 푹 놓고 있는데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두목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라.’라는 식으로 불쑥 말씀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제자들은 불안한 겁니다. ‘버리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를 안 버리겠다는 겁니까?’ 사람은 자기 신상부터 먼저 챙기기 마련이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차버리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를 이미 구원 안정권에 넣어줬다는 이야기입니까? 대체 이 말씀을 왜 하시는 겁니까?’ 걱정스럽다는 거지요.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메시아를 내 품에 내가 소유했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은근히 노렸던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성공했네, 출세했네, 권력자 되었네, 너는 정치해도 되겠다, 은근히 우리가 기대하는 그 높은 자리, 이제는 본격적으로 높은 자리 갖기를 추진해도 이미 예수님은 우리 편이기에 뒤에서 팍팍 도와주지 않겠느냐 하는 노림수를 저를 비롯해서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탁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너희들 이런 생각 가지고 나 믿었지, 너희는 아닌 척을 하지만 이런 은근한 희망과 꿈과 비전, 야심과 야망을 포기 안한 채 예수 믿겠다고 나에게 덤벼들었지, 라는 그 우리의 낌새를 아시고 탁 치고 들어오신 거예요.
그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가 뭐냐, ‘내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세상 권력자나 세상 정치가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나는 내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주께서는 알려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 빌립보서 2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분은 하나님이 맞는데 그 하나님 되기를 자진해서 철회했다.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행세하지 않겠다. 하나님 아닌 것이 아니고 분명한데 하나님의 모든 권한과 모든 영광은 자진해서 전부 다 버리고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기 거북해 하고 때려죽인대도 그 짓은 못 하겠다 하는 그 짓, 내 자존심 있고 체면 있는데 내가 그 정도로 망가지기는 싫다, 하는 그 장소 그 자리, 거기에 먼저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기가 두려워서 ‘아, 하나님,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차마 그것만은, 차마 그것만은 도저히 내가 용납 못하겠습니다.’ 하는 그 차마, 바로 그것, 그 자리에 주께서 먼저 가셔서 우리를 그 자리에 집결시켜서 전세버스 태워서 천당 보내 버린다는 말이지요. 늦게 온 사람들은 할 수 없고. 천국 가는 장소가 그 장소, 십자가 장소에요. 우리는 그 장소에 딸려 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식이에요.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식으로 미련이 있어서 자꾸 뒤돌아보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 시간에 유명한 대중가요 가사를 언급했습니다.
‘주께서 보고 계십니까, 저의 가련한 사랑을 아시지요, 벌을 내리신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만 허나 저 여자만은 나에게 허락하소서. 어찌합니까~’ 계속 뭔가 세상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것을 권력이라고 합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짐으로서 나라는 것을 새삼 재구성하겠다는 시도, 그 여자가 없는 상태의 나는 내가 싫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갖고 싶은 여인을 가지는 그 상태에서의 나의 인생을 새롭게 꾸려보겠다는 그 심사, 그게 바로 인간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가까이 해도 자꾸 멀어지기만 하는 예수의 발언, 분명이 이 정도 따라왔으면 얼추 주의 말씀을 알아듣는다고 자신만만했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동안 저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여기서 그만 헤어집시다.’ 하고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는 것,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은 주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감당 못하는 몸을 우리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겁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몸을 자기가 감당합니까? 자기 몸에서 피어나는 욕정과 욕망과 갈구와 탐심, 이런 것을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를 않았습니다.
구태여 하늘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뛰어내릴 필요도 없어요. 교회가 뭡니까? 하늘에서 뛰어내려 오신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믿는 거잖아요. 믿을 때의 마음은 뭐냐, 자기 쪽에서 해결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 아닙니까? 내 힘으로 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도 그 조치가 어떤 처방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는 그 고백이 바로 예수 믿음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회고적으로, 사후적으로 파악할 것은 뭐냐 하면, ‘도대체 내 몸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내 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기껏 끌고 가 봐야 우리를 지옥의 입구로까지밖에 더 끌고 가겠습니까? 지옥에까지 끌고 갈 수는 없겠지만. 기껏 데려가 봐야 ‘아, 여기가 지옥인가.’ 그 정도 데려갈 거예요. 그 지옥을 구경하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지옥 보이나?’ ‘보입니다.’ ‘불구덩이 보이지?’ ‘보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너를 내 피로 건져냈느니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괜찮은 사람을 내 스승으로 모셨기에 앞으로 내 인생은 펼 것이다. 앞으로 아쉬운 것이 있고 힘든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기도하면 주께서 내 소원대로 들어줄 것이다.’라는 심보로서 예수를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를 같이 나누면서 그것을 확신 했거든요. 그렇다면 이제 무슨 일을 해도 주께서 팍팍 밀어주니 내 인생 이제 폈다, 한 그 시점에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너는 세상 권력자를 본받지 마라.’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하겠다, 그 말이에요. 주관적으로 어설프게 나는 죄인이다, 라고 알던 그것이 이제는 몸을 객관적으로 한번 굴려봐라, 해서 객관적으로 나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스스로 죄인이라고 나발을 부는 것은 일종의 엄살일수가 있고 겸손일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짓들처럼 ‘나 부족합니다, 나 겸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연기고 연출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맞습니다. 당신 죄인입니다.’ 하고 어깨 밀면 기분 나빠요. 주관적으로 죄인이라고 아무리 되풀이를 하다가도 객관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면 그 인간 때려죽이려고 들 겁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너무 주관적으로만 엄살을 피워왔습니다. 이제 그것이 객관화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정말 객관적으로 우리가 모든 것이 노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객관적으로 죄수취급 받았던 그 현장에 도달되고 참여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축복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베드로 입에서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는 말을 발설했다는 사실, 그것이 객관적으로 베드로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는 상황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아니 말을 잘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했었겠지요. 그러나 너무나 얄궂게도 우리는 차마 그 상황이 안 왔으면 하는 그 상황을 오게 만들어서 예수님의 피가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 유일하게 믿을 것은 그 피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베드로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했던 모든 종교는 다 오락이었어요. 취미였습니다. 사실은 추가적인 권력이 자기에게 더 안겨질까 싶어서 은근히 재롱을 부린 거예요. 좀 봐줄 줄 알고. 그래서 가인이야기를 끄집어 낸 겁니다. 가인이 자진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렸습니다. 하나님, 봐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섬긴다고 봐주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주님의 취지가 우리를 하나의 껍데기로 만들어서 알맹이가 온통 주님의 취지와 주님의 생각으로만 가득차서 출렁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작업을 하려면 우리 것은 빼내서 다 빠져나가야 되지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괄호열고 합동, 괄호 닫고. 상당히 이름이 긴 교단들이 많아요. 한국침례회도 있고 많습니다. 그런 것을 전부 다 묶어서 개신교라고 합니다. 개신교도 줄인 말이에요.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종파를 일컫는 말이지요. 개신교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나왔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언급하는가하면, 자기 부모도 모르고 자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깝죽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부모에게서 자식이 나왔으면 그 자식은 동의하든 안하든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거예요. 천주교를 욕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얼굴에 침 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나왔기 때문에 개신교 안에 천주교 요소가 이미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주교가 어떤 기독교인지를 알아야 돼요. 이것은 목사들 같으면 신학교에서 배우는데, 물론 신학교에서도 대리출석이나 하면서 딴 짓들만 해서 언제 공부를 했어야지요, 어쨌든 신학교에서는 가르치는데 일반 평신도한테는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이야기를 안 하는 겁니다.
저는 궁금했지요. ‘우리는 성당하고 다릅니다. 우리는 참된 기독교입니다.’라고 했다면 ‘천주교는 이렇게 하고 우리는 이렇게 하기에 우리는 참됩니다.’라는 것을 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상당히 그동안 궁금했었어요.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 이유가 나타나네요. 이미 개신교가 천주교화 되고 말았습니다. 떨어져 나와 놓고는 그쪽 선배를 어느새 닮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들이 아버지가 술 먹는다고 그렇게 욕해 놓고는 자신이 점점 나이 들어 성장해 가면서 그렇게 욕했던 그 아버지를 닮아가는 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를 마구 두들겨 팬 그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아들이 자기가 술만 먹으면 자기 마누라를 개 패듯이 패는 것, 갑자기 왜들 그렇게 숙연해 지십니까?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그 반쪽의 어두운 구석이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골육이라는 자신의 긴 그림자에요. 권력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가 가만있는 자유가 아니고 남을 지배하는 자유로 바뀔 거예요. 자기는 기존 권력에서 그것이 싫다고 튀어나와 놓고 그 권력 가지고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남을 지배해야 나는 내 나름대로의 권력 있음이 증명이 된다고요. 나한테 지배받는 자가 있어야 내가 높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확인이 된다니까요. 서기 약 400년부터 서기 약 1000년에 이르기까지, 레오 1세부터 레오 9세까지 전무후무한, 있지도 않았던 오늘날 천주교의 모양새가 그 시기에 형성됩니다.
이시도르라는 가짜 법령집 문서를 조작해서 만들었습니다. 동방교회하고 갈라지고 난 뒤에 서방의 세속 권력한테 아부하다가 세상권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중구난방 되어서는 안 되겠다, 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확 잡아야 되겠다.’ 해서 그 때 나온 것이 교황이고 그 교황을 떠받치는 중간보스 조직이 필요했어요. 그것이 카디널, 추기경이라는 거예요. 추기경이라는 것은 그 원뜻이 문 열 때의 돌쩌귀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뭐냐, 밑에서부터 권력을 하나의 정점으로 집대성하는 그 과정에서 중간계층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게 권력위주로 나가놓고는 거기서부터 천주교의 모든 일들이 형식화되기 시작한 겁니다. 원래 성경에는 제사라는 것이 끝났어요. 제사가 끝났으니 제사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실천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로 집결하려는 시도를 모색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성경말씀 보면 잠이나 오고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 역사 같은 것 들여다보면 짜증나잖아요. 그럴 때 만약에 목사가 찬양을 인도한다 합시다. 원래 찬양인도도 말이 안돼요. 가락 다 나와 있는데 보면 그만 입니다.
인도한다는 말은 뭐냐, 인도할 때 사람들은 더 호감도 가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찬양 할 때 박수를 치거든요. 그냥 노래를 부를 때는 그것을 몰라요. 인도하는 목사나 전도사가 ‘자 박수 치면서 기쁨으로 찬양합시다. 시편에 나옵니다. 성전에 박수치면서 올라가는데 우리도 박수치면서 올라갑시다.’ 했을 때 뭘 느끼느냐하면, 나도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박수는 칠 수 있잖아요, 내가 시키는 대로 박수를 칠 수 있다면 그것을 시킨 목사는 구원의 사자고 신의 사자인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개자이기 때문에 저분이 박수치며 노래할 때 나도 따라가 함께 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 이런 확신이 드는 겁니다.
행동의 일치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교리 혹은 성경의 이야기를 해 버리게 되면, 성경은 머리를 써야 되니까 사상의 일치를 꾀하려면 골치가 아픈데 그냥 시키는 대로 ‘자, 박수칩시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치는) 해병대 박수, 해병대 박수,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기도원 박수, 기도원 박수……’ 이렇게 할 때 저 행동을 모방, 인간은 모방의 도사들이니까, 모방하게 되면 구원받은 백성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천주교에서 좀 세련되고 만든 것은 뭐냐, 성체성사라 해서 예수님의 몸과 잔을 떼 주는 의식이에요.
줄 때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권력을 위주로 해서 떼 주기 때문에 ‘어딜 더러운 손으로 주의 살(카스테라)을 먹는가, 안 돼.’ 해서 천주교에서는 참새처럼 입만 벌리고 있으면 깨끗한 손이 등장합니다. 깨끗한 손이 뭐냐, 신부의 손입니다. 나이와 관계없어요. 나이가 서른이든 더 많든지 상관없이 입에 집어넣어 줍니다. 그럴 때 일반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이 기쁘다니까요. ‘아, 구원받는 것은 이렇게 행동만, 껍데기만 흉내 내면 구원 되는구나.’ 창세기니, 레위기니 이런 것을 볼 필요가 없다니까요.
레오 1세부터 레오 9세까지 그것을 연구한 거예요. 거의 600여 년간, 서기 약 400년경부터 1040년까지. 거기에 등장한 것이 게르만 족의 풍습인 향 뿌리는 것, 촛불 켜놓는 것,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신부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고 뒤돌아섭니다. 그리고 라틴어, 지금의 이태리어와 달라요,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저쪽에서는 침묵을 하는 거예요. 일종의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제사지낼 때 그 성스런 연극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성스런 연극에 참여해서 보기만 하면 그것으로 구원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보는 미사가 굉장히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참석을 못할 때는 돈으로 넣으면 되는데 돈의 액수가 많을 때는 하나님을 모르고 이미 죽은 조상들까지 빽을 써서 연옥에서 구원할 수 있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뒷돈과 더불어서 계속해서 천주교에 들어온 거예요. 천주교회는 그 돈으로 땅을 사서 부동산 투기 등을 해서 거기서 자본주의가 최초로 형성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주교급과 사제들은 생사여탈권까지는 아니지만 모든 것이 관여해서 십 퍼센트의 십일조를 거기서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사설교회라는 것도 있었어요. 영주가 그 지방의 사상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개인적인 교회를 세워놓고 돈을 거기에 흡수하기 위해서는 자기 일가친척들을 거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교회세습제지요. 자기 아들을 신학교 보내서 세습시키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으면 그 돈 밑에서 모든 사람은 농노가 되고 장원봉건제도가 확립되는 겁니다. 물론 그 전부터 있었지만. 이게 바로 뭐냐, 하나님이 한 분인 것처럼 이 땅에서도 모든 권력은 하나이어야 한다, 중구난방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교리와 사상은 하나로 나와야 된다, 그겁니다.
이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나오니까 처음에는 이 개신교가 하나로 모아지는 분위기가 안 되었어요. 왜, 그동안 워낙 그 ‘하나’에 시달렸으니까. 우리는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하자, 이것이 개신교의 첫 번째 모토였습니다. 만인제사장,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이다, 그것이 개신교의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들어본지 상당히 오래되었지요. 그들이 그 당시 현재의 기존 권력이 너무 답답해서 다 뛰쳐나왔습니다. 그럴 때 천주교에서는 팔짱 끼면서 싱긋이 웃지요. 왜, 우리도 다 처음에는 그렇게 개혁 분위기를 냈다, 아마 얼마 안가서 똑같이 될 걸. 정말로 얼마 안가서 똑같이 되어 버렸어요.
칼빈이 죽자 칼빈교회가 천주교회와 똑같이 되었고 루터가 죽자 말자 루터교회가 천주교회와 똑같이 되고 말았어요. 날짜 맞춰서 뒤에 커튼 색깔이 다 바뀌고 심지어 목사 복장이 다 바뀌고 오늘날 감리교회에서는 목사의 복장이 넥타이대신 천주교신부들의 로만칼라로 달라지게 했어요. 왜 그렇게 하는가, 손님들이, 고객들이 그렇게 원하는 겁니다. 돈 들고 오는 고객들이 그것을 요구하거든요. 고객들은 교리니 뭐니 그런 것 다 귀찮아해요. 우리가 쇼를 볼 수 있고 구경할 수 있고 우리가 흉내 낼 수 있고 모방할 수 있는 것만 제공하게 되면,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목사가 하는 짓을 우리도 그대로 흉내 내면 우리도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하자, 골치 아프게 가지 말고 편하게 가자, 쉽게 가자, 그래서 보이는 식으로 커튼 바꾸고 이런 저런 절기 지키고 다 한 겁니다.
울산에서 강의하면서 무심코 물었어요. 맥추절이 언제지? 뒤에 계신 목사님에게서 딱 나오데. ‘칠월 셋째 주입니다.’ 그 분은 아직 기존 교회에 계시니까. ‘아, 칠월 셋째 주였지.’ 예산 펑크 난 것을 그 때 보충하는 거예요. 절기라는 것이 그 때 봉투를 돌리는 거예요. 그 때 돈 들어올 것 예상해서 미리 일을 벌이기도 하고. 그런데 교인들한테는 그것이 편하다니까요. 돈 주고 구원받는 것이 편해요. 믿으라, 이런 것은 골치 아파, 쉽게 가자는 거예요. 돈 내라면 돈 주고,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 하고, 찬양 인도하면 찬양하고, 그것이 쉽다니까요.
제발 그런 식으로 그 권력을, 천주교 권력을 용인하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산업을 벌인 거예요. 인더스트리얼 오브 지저스, 영어 잘 안되지만, 하여튼 예수산업을 벌인 겁니다. 그것은 결국 권력이 되고. 추기경이요? 그 추기경이라는 말 자체가 용납될 수도 없고 그게 경악스러운 용어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한다고 해서 제가 정신이 약간 어질어질 했어요. 제 책에 나오지요. 중이 머리 깎는 것도 권력이라고요. 법정스님을 존경한다고요? 법정스님이 진짜 존경받으려고 한다면 머리를 길러야 돼요. 머리 깎는 이것이 권력으로 행사된다니까요. 중들이 머리 깎는 것도 다 돈 되기 때문에 머리 깎는 거예요.
머리 기르면 중이 돈이 안돼요. 아, 깎아야 돈 되는구나, 그래서 깎는 거예요. 지금 중들 머리 기르고 싶어서 얼마나 애 닳겠습니까? 다 먹고 살려고 깎은 것뿐이에요. 문제는 왜 그런 것을 용인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권력 체를 용인받기 위해서 저쪽의 종교라는 단체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해 주는 겁니다. 너는 네가 먹을 것 먹고 떨어지고 그 대신 내 먹을 것 내가 먹고 떨어질 테니 터치하지 말라, 이런 보이지 않는 묵계, 보이지 않는 약속 때문에.
내가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줄 테니까 교회는 내 사업체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게 대해서 쓸데없이 말씀으로 관여하지 말라, 노터치, 딱 끊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몸의 권력을 감당 못하는 겁니다. 옛날에 가족은 그 가족 단위가 권력이었습니다. 거기에 시집온 새댁은 그 권력이 무서워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인간은 자기 몸이 있는 모든 곳에 권력이 있고 또 자기가 권력에서 자유를 외쳐봐야 또 그 자기 몸을 가지고 새로운 권력의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그것이 인간 몸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성경은 가만둘 리가 있습니까? 바로 출애굽입니다. 애굽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닙니다. 빠져나온 그들을 나중에 이스라엘로 부른 거예요. 여기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한 덩어리 떼어내서 이스라엘 나라 만들었습니다. 사전에 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이 없어요.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지은 것은 그 사람들의 공동회의를 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빼내주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름을 부른 거예요. 이 말은 ‘네가 빠져나올 때의 그 심보를 내가(하나님) 용납 못하겠다.’ 그 말입니다.
그 이유를 그들은 몰랐지요. 왜 우리 이름이 이스라엘일까, 하고 많은 이름가운데 왜 이스라엘일까,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이름에 대해서 망할 때에야 비로소 알았어요. ‘아, 애굽에서 빠져나온 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사실은 애굽의 하나의 부분이었고 애굽의 대표격이었’던 거예요. 그 하나가 권력체였던 겁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또 하나의 애굽덩어리가 떨어져 나온 거예요.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빠져나왔다고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고 이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죽어야 되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 9절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동참을 해야 구원받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있다는 그 자체로 구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사라든지 번제 드리기, 헌금하기, 인간들이 할 수 있습니다. 나라도 모자 씌워주고 복장 갖춰주면 다 합니다. 못할 것 뭐 있습니까? 요새 영어 수학보다 훨씬 쉬운데. 그때는 과외도 없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양 잡고 하면 되지요.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하다보면 다 쉬워지잖아요. 그러면 그게 구원이냐 그 말입니다. 그것으로 천국갈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사도바울이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4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니 따라서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고 그 은혜를 받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소리를 하니까 사람들은 행함으로 믿음을 또 만들어내요. 아주 환장할 지경입니다. 은혜를 받은 믿음하고 자기 행함으로 자기가 조작해낸 믿음과의 차이점을 우리들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은혜로 받은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은 죄인이고 잘난 놈도 없고 못난 놈도 없고 사람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익히 아는 믿음을 말하거든요. 기존의 세상권세와 권력을 부러워할 건더기가 없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바로 믿음이에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권력자한테 추방당한 그 권력이 오히려 이 권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다, 사실 추방당한 것이 아니고 탈출한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야,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영을 받은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시험받은 것이 뭐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거예요, 권력 그런 것 때려치우고 현재 있는 권력가지고 우리끼리 잘 해 봅시다, 이러한 속삭임에 비단 예수님에게만 주는 속삭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매일같이 이런 속삭임이 우리의 소원처럼, 우리의 꿈처럼, 꿈속에서조차 피어오르는 우리의 할 일에 해당됩니다. 매일의 우리의 스케줄이 그걸로 전부 다 차 있잖아요.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시험을 줬습니다. 그게 뭐냐, ‘모세 있음과 하나님 있음의 차이를 너희가 알 수 있느냐.’
하나님 있음이 모세 있는 것처럼 있는 그 있음이 하나님 있음이냐,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좀 힘들면 하나님의 종으로 있는 모세한테 닦달내고 달려들었습니다. 왜,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어요.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이 없으니까 ‘옳다.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는 저 인간에게 대들자.’ 있는지 없는지 미흡한 상태니까 일단 모세한테 닦달 내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알아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 시내 산에서 만나본 그 하나님에게 연락을 취해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겠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의 백성들의 믿음은 어디까지냐 하면, 모세 있음까지만 스톱이고 그 다음부터는 모세부터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서는 참여 못하고 있는 상태까지만 들어간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모세를 믿는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그대로 잡아당겨서 모세 여기 있다고 본 거예요. 만약 방안에 부부가 있다면 ‘내가 여기 있지. 그런데 또 없나? 아무도 없네.’ 하면 듣는 부인이 기분 나빠서 ‘나 여기 있잖아.’ 하잖아요.
‘옳지. 내가 여기 있는 것 하나, 내가 있는 것처럼 있는 당신, 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있는 것처럼 있다고 헤아리는 그 숫자에 하나님을 집어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딜레마에요, 딜레마. 그 딜레마는 어디서 해결되는가,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이것이 확실하지 않고 이것은 반칙이고 오류라는 것을 느낄 때만 나는 주님이 있음으로서 있다, 그러니까 저쪽 주님 쪽에서 새로 출발할 경우에만 나는 있어야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매일 같이 만나를 준 겁니다.
매일 같이 없다, 만나 있나, 먹어라, 그리고 있다. 다음날 되면 만나 없다, 또 만나 생겼네, 있다. 양식 없다. 만나 줄게, 나 있는 것을 아느냐. 그러니까 내가 있는 것은 나 있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확실하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같이 있게 된 겁니다. 무슨 말인지 들어도 잘 모르겠지요? 내가 있는 것은 나보다 주님이 먼저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안 죽고 살아남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무엘 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다 참다 못해서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유명한 구절인데 사무엘에게 이야기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이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사무엘 여기 있네. 그런데 사무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난 몰라, 난 몰라, 난 그냥 사무엘을 흉내 낼 뿐이니까. 사무엘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행하면 되니까. (오늘날 천주교나 교회처럼) 그대로 하면 되니까.’ 그들이 결국 참다 참다 하는 말이 ‘사무엘님!’ ‘왜?’ ‘우리에게 왕을 주세요.’ ‘왜?’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남들은 보이는 지도자, 교황이죠 교황, 목사지요, 기름 부은 사자님, 목사님, 교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중재자가 있으니까 그들은 잘 믿던데……, 사실 그들이 잘 믿는 것이 아니고 흉내를 잘 내고 연기를 잘하고 연극을 잘 본 거지요, 내가 아침마다 거울 보면 내가 여기 있듯이 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안보이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못 본다 하니까 그러면 보이는 식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은 제켜두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이 있으면 왕한테 잘하면 하나님께 잘한 것이 되겠지, 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사울 왕 줘놓고 사울 망할 때 나라가 같이 망하는 겁니다. 주께서 망하라고 준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너희들이 왕을 찾는 것은 나를 얼마나 평소에 얼마나 안 믿었는가를 티내기 위해서 왕을 찾는데 그래, 그래, 줄게, 줄게, 주고 그 왕이 얼마나 너희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지, 지옥으로 인도하는지를 똑똑히 보여줄게.’ 하고 왕을 줘버립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뭐가 잘못되면 왕을 탓합니다. 자기 탓 하는 것이 아니고 왕을 탓해요. 왕을 탓한다는 것은 왕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제대로 된 왕, 교회 같으면 ‘제대로 된 당회장 없나.’ 그런 거지요. 대통령 같으면 ‘제대로 된 대통령 없나. 독재자의 달은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뭔가 내가 여기 있음을 확장시켜서 그 안에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마저 담아두는 식으로 믿기라는 그것은 행함입니다. 그 행함을 가지고 두자로 뭐냐, 권력이고 그 권력의 특징은 높아지는데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낮아지는데서 주의 뜻을 이뤘지만 인간들은 높아지는데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간단하게 실험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승진하시고 높아질 때 기분이 좋던가요? 기분 좋으면 여러분들은 자기주제파악을 제대로 하신 겁니다. 더 나쁜 것은 높아지는데도 기분 안 좋은 척 하는 것, 아, 밉상입니다. 그거 아주 밉상이에요.
남편이 승진하는데도 ‘주여, 저 시험을 용서하소서.’ 이런 식은 뭔가 지금 너무 오버하는 거예요. ‘교인이 많아질 때 기분 좋다, 그래! 기분 좋다.’ 이래야지 ‘교인 많으면 시험드니 교인 줄어들게 하옵소서.’ 어느 미친 인간이 그런 기도합니까? 또 이렇게 통박을 구립니다. ‘교인 적게 하되 돈 되는 교인은 남도록, 사업 잘되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남고 얻어만 먹는 사람이나 아픈 사람은 좀 가줘. 아, 좀 빠져라. 정말 귀찮다.’ 어쨌든 가장 난해한 문제점은 예수 십자가지기전에 ‘나는 섬기는 자’라는 이 말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못 알아듣는 자를 위해서 주께서는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못 알아듣는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문제는 웬 기적인지 이 말을 지금 알아듣게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이것은 미쳤어요. 공자가 하는 말이나 부처가 하는 말보다도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을 심판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모든 말씀이, 전에 던져놓았던 모든 말씀이 다 십자가 안에서 뭔가 윤곽이 드러나면서 조각조각 떨어져나갔던 말씀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겁니다.
‘아, 내가 인간이 아니었구나.’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이런 주께 반항하는 주의 원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의인되었다는 로마서 5장의 말씀, ‘원수 된 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피를 흘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법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 세계가 허물어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이 우리 속에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자, 괴물입니다. 주여! 이 괴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도마 위에 생선처럼 얹어 놓았으니까 주께서 어떻게 도려내고 발라내든지 잘라낼 때마다 우리 죄는 퍽퍽 터져 나오고 그 죄마저 용서하신 주님의 피만, 주님의 용서하심만, 사랑만 가득한 분위기로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