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을 고치기 위한 세 번째 말씀
열왕기하 5:7-14
나아만은 아람의 큰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노력하였습니다. 그 중에 아람 왕은 많은 예물과 편지를 쓰서 나아만을 이스라엘 왕에게로 보냈습니다. 아람 왕은 자신이 존귀하게 여기는 나아만 장관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기보다는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고 크게 분노하게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불행해 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성도는 잘 믿으려고 하지 말고 말씀대로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어찌하여 옷을 찢어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면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8) 이 말씀은 어린 여종의 말대로 하지 않았으니 여종의 말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나아만은 많은 예물 실은 병거들과 모든 군대(15)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에 섰 습니다.(9)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가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10)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만도 합니다. 엘리사가 왜 이렇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이렇게 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보다도 나아만 자신입니다. 나아만은 여종의 말대로 엘리사의 집 문 앞에까지 왔습니다. 엘리사가 전해 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말하는 대로 요단 강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그가 네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11)
여기서 우리가 잠깐 생각할 것은 나아만이 말한 ‘내 생각’은 자기 주관으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발전에 매우 중요합니다. ‘내 생각’이 없는 사람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나름대로 자기 주관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가까이 하지만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버려야 할 때 내 생각도 내려놓고 버리는 것이 더욱 지혜롭습니다.
나아만이 군대 장관으로서 대적과 싸울 때 자기 생각에서 나온 전술로 이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종들의 권하는 말을 듣고 ‘내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내가 누군데’ 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람 왕으로부터 존귀함을 받는 군대 장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예물과(5)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9) 많은 군대(14)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아만의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가 친히 나와 서서 마치 주술쟁이가 하는 것처럼 장엄한 종교 의식을 베풀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단 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자기의 생각과 전혀 다른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치료 방법을 말하자 결국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요단강 보다 더 깨끗한 강이 아람에도 세 개나 있는데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냐’(12) 반박했습니다.
이것이 나아만의 교만입니다. 오히려 왕의 편지나 많은 예물, 그리고 큰 용사로 존귀함을 받는 것이 나아만을 교만하게 만든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전에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했습니다.
나아만이 집 문 앞까지 찾아 왔지만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영접하기 않은 것은 나아만의 교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많은 예물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한 나아만에게 그 모든 것으로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있고 많은 돈을 가지면 자연히 교만해집니다.
나아만이 왕으로부터 존귀하게 여기는 군대 장관이 아니고 나병으로 부모로부터 버려져 길 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였다면 그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 보게 되었습니다.(요9:1-12) 만약 그 맹인이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고 나아만처럼 명예가 있고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에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하며 화를 내고 실로암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아주 냉정하게 대한 것은 나아만의 두 가지의 잘 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주술하는 것처럼 주문을 하며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 나아만의 ‘내 생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말씀으로 고치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분노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돌아가면 나병을 고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도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돌아가면 나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렇게 분노하여 돌아가는 나아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도와 준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종들입니다. 종들은 나아만에게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라는 말은 종들이 분노하여 돌아가려고 하는 나아만을 아주 적극적으로 붙들고 강권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 이상 나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종들이 알았기 때문에 아주 적극적으로 나아만을 권한 것입니다.
종들이 ‘내 아버지여’라고 부른 것은 종들이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장관의 병을 고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라고 말한 것은 지금 나아만의 나병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고 해야 할 처지라는 것을 종들은 알았습니다.
종들은 선지자가 말한 것은 오랜 치료 기간을 요하는 것도 아니요, 고통스러운 치료 방법도 요구되는 것도 아닌 단지 요단 강 물에 씻으면 병이 낫게 된다고 하니, 그 말대로 순종하는 것을 강력하게 권 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이 권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전해 준 말대로 요단 강으로 갔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4) 나아만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했습니다. ‘내려가서’란 낮아지고 겸손해졌다는 말입니다.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큰 용사라는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물에 잠기기 위해서 옷을 벗었습니다. 겉은 권위가 있는 장관의 옷이지만 옷을 벗으니까 살은 썪어 고름이 나고 냄새가 났습니다. 종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숨겨진 부끄러운 수치를 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몸을 물 속에 잠갔습니다. 물속에 몸을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나아만이 물에 잠겼다가 나온 것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는 죄로 인하여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신 무덤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아만이 몸을 물속에 잠긴 것은 마치 예수님이 무덤 속에 묻히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을 물에 잠기어야 했습니다. 일곱 번을 물에 잠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가감하지 않고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섯 번을 물에 잠겨도 나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을 몸을 물에 잠갔다가 나왔을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14)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나아만은 물속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처럼, 마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되었습니다.(14)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순종했더니 새롭게 태어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중생한 몸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게도 자신을 괴롭히던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침을 받은 이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고치고 살리는 곳 입니다. 교회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죄인들의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도록 하는 곳 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순종하므로 나병을 고쳤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나아만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협력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사로 잡혀 온 어린 아이는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나아만을 불쌍히 여겨 여주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여주인은 그 말을 남편 나아만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아만도 아내가 전해 주는 여종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왕에게 전했습니다.
아람 왕은 여종의 말을 듣고 많은 예물과 편지와 함께 이스라엘 왕에게로 보내며 나아만을 고쳐 달라고 하므로 오히려 이스라엘 왕을 분노케 하는 불행하는 잘못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에게 강력하게 권하므로 결국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물에 몸을 잠기므로 나병을 고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병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죄 사함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고치고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였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구원하는 곳 입니다. 한 사람을 고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온 교회가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온 교회가 한 사람을 고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온 교회가 다 같이 협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아만 자신입니다. 나아만은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종들의 권면을 듣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병고침을 받았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나병환자 나아만은 나와 여러분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죄인들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온 몸을 물에 잠가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물속에서 나온 나아만처럼 거듭나고 중생해야 합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고 어린 아이의 살 같이 거듭난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처럼 우리도 어린 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납시다. 나아만이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낙원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