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way - 주님을 만나는 길
정채봉씨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시가 잇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손수건 같은 만남을 많이 갖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이 전부 만남으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만남을 서로에게 축복이 되지만 어떤 만남은 서로에게 불행이 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만남을 축복으로 만들어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만남의 기본은 진심입니다. 서로의 진심이 서로에게 전해지는 만남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우리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은 한번으로 족한 만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 초기 교인 중에 서상륜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13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살길이 없어 개성에서 나는 고려인삼을 만주에 가서 파는 인삼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다 31살에 장티푸스에 걸려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코트랜드에서 선교사 메킨타이어를 만나서 정성어린 치료덕분에 살았습니다. 서상륜에게는 메킨타이어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전한 예수님을 만났고, 일년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서상륜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인 로스 성경을 로스 선교사님과 함께 번역했습니다.
황해도 장면에 있는 송천(솔내, 소래)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여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새문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처음 14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황해도, 평안도 할 것 없이 부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평생 평신도로 살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가정이 바뀌며 사회가 바뀝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소아시아와 유럽이 변화되었고, 이레니우스가 예수님을 만나자 프랑스가 복음화 되었고 영국에서 건너온 보니페이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독일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패트릭이라는 16살 난 포로 소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아일랜드가 복음화되었으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예수님을 만나자 한국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미얀마가, 허드슨 테일러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중국이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는 예수를 만난 그 한사람에게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는데 그것은 그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적 감화력 때문이었습니다. 황제의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이름을 모를 한 하녀로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름 모를 하인도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40년을 가르쳤고, 플라톤은 50년, 아리스토텔레스는 40년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년을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이 세상이 끼친 영향력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알려진 세 사람의 영향력을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만남보다 가장 고귀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번 여름성경축제 우리 예신교회 가족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만남의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첫 번째 만남은 나다나엘(바돌로매)의 만남입니다. 요1장 43절이하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그가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 분이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이 말에서 우리는 나다나엘이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성경 미가서에 의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한 빌립이 “와서 보라, 그를 만나라”고 하자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있던 나다나엘은 친구를 따라서 예수님에게 나옵니다. 나다나엘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1: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누워있는 것을 어떻게 하셨을까? 망원경을 갖고 계셨을까? 그런데 나다나엘을 감격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도 나다나엘을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바라봐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항상 바라봐주시고 있었던 것에 놀란 것입니다. 이 여름 우리가 만날 예수님은 나를 아시고 바라보시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깊은 관심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어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큰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 번째 만남은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예수님을 만나러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는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네, 뭐 다음에 오지. 그랬더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꼭 예수님을 만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도 꼭 주님 만나서 은혜방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9: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면 중풍병에 걸린 친구가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들이에요. 여러분도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친구를 예수님앞으로 이끌어오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기의 감정을 완벽하게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고, 소리도 지르고, 심지어 벽을 주먹으로 꽝 치기도 해요. 성질이 나서... 또 욕심이나 집착을 완벽하게 버리고 사는 사람도 없어요. 어제까지 저녁 금식을 하고 나니까 아침부터 배가고파서 어제 남겨둔 빵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먹었어요. 돈에 대한 욕심/ 힘에 대한 욕심/ 게임을 더하고 싶은 집착! 이걸 다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살면 죄를 지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마음과 몸을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죄사함의 은총, 용서입니다. 몸을 씻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죄도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늘 씻어야 우리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만나야 합니다. 여리고에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살았습니다. 바디매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 기뻐했는데 앞을 못보는 맹인이라 너무 실망해서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으로 바디매오라고 불렸습니다. 이 시대에 맹인은 거지가 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살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소리쳐불렀습니다. 주변에서 이 거지야 시끄러워 하는데도 예수님 나를 만나주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소리치며 더욱 크게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멈추어 서서 바디매오를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예수님을 큰 소리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큰 소리로 찬양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주님이 나를 보실 수 있도록...
바디매오가 얼마나 기뻤는지 겉옷을 던져 버리고 예수님께 뛰어갔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어요. 그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뜻이었습니다. 카톨릭안내서에 예수님은 인생의 고치라고 소개되었고, 이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에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구원자입니다. 바디매오는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해줄까? 했을 때 먹을 것, 돈을 달라고 하지 않고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은 자신을 고치실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눈이 가려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때에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여름 우리가 만날 주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구원자되신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지금도 나를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워지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던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 믿음인지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흰옷과 같아서 세상을 살다보면 때가 뭍고, 욕심이 뭍고, 거짓도 따라붙고 그래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고대 중국의 우왕이라는 아주 훌륭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세수대야에 이런 글귀를 새겨두고 아침마다 얼굴을 씻을 때마다 그 글을 읽었습니다. “일신 일신 우일신”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또 새롭게. 우리에게도 이런 결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날마나 새로워져야 겠다.
왜 우리가 예배생활, 말씀생활,기도생활,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생활을 합니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시51:10절에 다윗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이 큰 죄를 짓고보니까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노력을 해도 샤로워진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기로 작정을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워져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변화되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는 일,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변화되고 새로워질줄 믿습니다. 이 여름에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기대하며 우리도 예수님 만나주세요.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