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과 믿음 그리고 사람의 영광
사도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남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심판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다 안다고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판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우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지금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맞는다고 할지라도 누구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분별은 해야 하지만 심판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복음을 내가 독점할 수가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우리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의 뜻이라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인정해 주라는 말이 아니고 기다려 주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아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타협은 하지 말아야지만 나와 다르다고 잘라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분별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잘라내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 두셔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복음에 분명 함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의 대상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남을 대하는 것을 보면 남을 판단하고 잘라내기보다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자 했습니다. 복음을 몰라서 이방인과 상종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교제한 것이 아닙니다. 혹여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미 빛에 거하기에 어둠과 같이 있어도 자기 안에 빛이 있으니 어둠에 속을 일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득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관대한 것입니다. 어둠에 속지 않으니 상대가 내치지 않는 한 바울이 어둠을 내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도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만났으니 혹시 자신이 교제하는 어둠에 속한 자 중에서도 자신과 같이 빛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만난 자로서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납해 줍니다. 그들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주의 긍휼함이 임할까 봐서 참아주고 기다려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여유로움이 없습니다.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관대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 소아적입니다. 나와 다르면 무조건 잘라내고만 있으니 신앙이 가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잘라내고 붙이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 갈 길만 가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니 이 빚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는다는 자세로 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빚을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나 자신이나 다 저주를 받아야 할 자인데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천국에 가니 그들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과 다른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관대함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사도 바울과 같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런 사도 바울의 마음이 없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주 예수님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믿음만 맞고 남은 다 틀렸다고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집니다. 복음을 사랑으로 받아야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함이 나옵니다. 복음을 사랑으로 받은 사람은 절대로 교만치 않습니다. 긍휼함이 나옵니다. 긍휼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긍휼로 구원받은 자는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판단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남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3~5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계파별로 분쟁이 생겨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이 옳다!”, “게바가 옳다!”, “아볼로가 맞다!”라는 식으로 서로를 향하여 신앙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느 교단이 맞고!”, “어느 목사가 맞느냐!”라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양심상 판단 받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이라는 것에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자기도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남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모두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할 일도 아닌데 우리가 나서서 맞다 틀리다 하면서 싸우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왜,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하느냐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