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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상30;16-31. 차선이 주는 문제 속에 새로운 기회 3. 2022. 8. 14.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벗어 버리고 싶지만 참고 정상까지 올라가 배낭을 열어 보면 먹을 것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짐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 자체가 짐입니다. 가난과 부유가 짐입니다. 질병과 건강도 짐입니다. 책임도 짐이고 권세도 짐입니다. 헤어짐과 만남도 짐이고 미움과 사랑도 짐입니다. 살아가는 인생의 길에서 짐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짐을 짊어지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 짐을 내려놓을 때 짐의 무게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길에서 감당해야 될 몫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 보시는데 길에서 물어 봅니다. 막8;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노중에서,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노중에서 물으시고 길에서 물으셨습니다. 노중에서의 이 물음은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의 근거가 되고, 반석인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라 빌립보로 들어가는 길에서 노중에서 물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노중과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결정과 고백을 해야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노중과 길이라는 헬라어가 호도스 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길의 의미가 호도스 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든든히 세워진 사건이 있는데 바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영어로 exodus 입니다. exodus 는 합성어로 ex (out of) + thodos 로 길 밖으로 끄집어 낸 사건입니다. 그 길이 호도스 이고 way입니다. 그러니까? 고달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의 길에서 끄집어 낸 사건이고 또 다른 길 위에 세운 사건이고 약속된 비전을 이루어 가는 길에 들어서는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늘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표현은 그러므로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길은 어떻습니까? 확실합니까? 불안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하는 확실한 로도스와 길과 way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어떤 역사를 쓰시겠습니까?
1. 문제 앞에서 다윗의 인생길입니다. 삼상 30; 8절에 네가 쫒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문제가 로도스인데 여기서 뛰고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서 쫒아 가고, 그래야 미치게 되고 도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재 오늘의 상황이 로도스이고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의 현장이 로도스이고 삶의 짐을 져야만 하는 현실이 로도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뛰고 여기서 일어나고 여기서 시작해야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생각이나 추상의 무대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어지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6절에 다윗은 크게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절망의 순간과 낙심의 상황이 다윗의 로도스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같은 상황에서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들고 짐이 되는 현장입니까? 피하고 싶은 그런 아득함이고 방법이 없습니까? 그래도 여호와를 힘입고 다시 일어나 뛰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다윗은 이 상황의 길에서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잠시 시슬락 성을 비운 사이 아말렉이 쳐 들어와서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크고 작은 모든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다 사로잡아 아말렉의 군사들이 끌고 갔습니다.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도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 돌로 다윗을 치려고 벌 떼같이 몰려듭니다. 이 현장이 다윗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입니다. 차선으로 선택한 것 때문에 되어 진 인생의 로도스입니다. 그럼에도 이 로도스에서 시작을 하고 이 로도스에서 뛰고 이 로도스에서 그 마음에 있었던 일을 시작합니다. 어떻게 시작을 합니까? 모든 회복과 되돌림은 하나님의 은혜인 헤세드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 내 자신의 회복과 나의 삶과 공동체와 자녀와 울타리의 회복이 헤세드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복시킬 수 있는 회복의 능력과 치유하심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로 용기를 얻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합니다. 18-20.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아 왔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아말렉이 탈취하였던 모든 것을, 무리의 자녀들이나 크고 작은 것을 무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아 왔더라. 양 떼와 소 떼도 모두 찾아 왔습니다. 모든 것을 찾았고, 이전으로 돌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권세에 눌려 있는 로도스입니까?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길 위에 있습니까? 어두움의 세력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로도스이고 두려움이 있고 해 받을 것 때문에 망설여지는 로도스입니까? 해결할 방법이 없는 로도스입니까? 이모든 것에서 회복시킬 능력과 권세와 방법은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이 있는 은혜 안에 있습니다.
잃은 뒤에는 돌아옴이 있다는 확신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던지면 부메랑처럼 돌아옵니다. 버리면 돌아옵니다. 여러분, 잃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글락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자기를 지켜 줄 아름다운 성을 잃었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모든 여성을 잃었습니다. 가축을 잃었고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이 있습니다. 8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기도가 돌아 왔고, 여호와께 묻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사실 다윗은 늘 여호와께 묻고 행동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묻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살고 그 생각에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불레셋의 땅, 시글락 성까지 왔습니다. 삼상27;1-2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여러분, 다윗의 표현을 보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와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주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어 버렸더니 돌아 온 것이 기도이고 돌아 온 것이 여호와께 묻는 것이고, 돌아 온 것이 주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찾고, 에봇을 찾았습니다. 다윗의 잃어버린 현장이 로도스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뛰고 시작을 하고 춤을 출 수 있게 하는 여호와께 묻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보통 사람이 된 다윗이 여호와를 힘입었더니 바로 8절에 쫒아가라, 반드시 미치리라, 정녕 도로 찾으리라. 용기와 힘을 얻도록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제라도 낙심하지 말고 추격하면 그들에게 이르게 되고,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들 600명의 동지들은 하나가 되어 전진을 하지만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여명과 아말렉을 쫒는 400명으로 나누게 됩니다. 피곤하고 지친 200명은 브솔 시내에 쉬게 하고 400명은 다윗과 함께 아말렉 족속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런데 용기만 있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과 찾아야 하는 책임만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없고, 구체적인 답이 없습니다. 반드시 미치게 되는데 언제인지 모르고 정녕도로 찾게 되는데 어떻게 찾게 될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방법과 대책이 없고, 용기만 있고 의욕만 있습니다. 뒷 받침해줄 그 어느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로도스에서 믿음이 요구되고 노중에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400명에게 방법이 없었는데 출발하고 나니까? 그대로 순종을 하고 나니까? 방법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침 아말렉 족속들이 버린 애굽의 종을 만났습니다. 그의 안내로 아말렉 족속을 손쉽게 따라잡습니다. 용기만이 있었고 당위성만 가지고 출발을 했는데 아말렉이 버린 사람을 만납니다. 단지 병들었다는 이유로 아말렉 사람들이 버렸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옆에 두지만 짐이 되면 거추장스럽고 힘들고, 지겨우면 버립니다. 귀찮으면 버립니다. 매정하고, 냉정합니다. 지극히 계산적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마시고, 사람을 찾지 마시고, 되도록이면 주께 묻고, 주를 찾고 신앙인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려울 때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아말렉은 애굽의 종을 단지 병든 것 때문에 버렸는데 다윗에게 이 애굽의 종이 로도스사태를 해결하고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것을 도로 찾아오는 데에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아말렉은 그냥 우연히 버렸습니다. 단지 귀찮아서 짐 덩어리이가 되어서 쉽게 손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우연은 다윗에게는 가장 필연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상황을 보십시오, 3일 밤, 낮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길에 버려 진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게 공급 되어져야 할 것이 먹고 마시고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윗이 해결하여 주고 애굽의 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새로 세워야 할 일에 친히 나서게 합니다. 꽃에 꿀이 없으면 벌이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 따뜻함이 없으면 사람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꽃에 향기가 없으면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꽃이 시들어 버리면 벌과 나비가 떠나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적막하면 사람이 떠나갑니다. 항상 시들지 않고 꿀이 듬뿍 고여 있고 향기가 나는 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다윗은 상황의 해석을 신앙과 믿음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고, 주어진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회복의 시간을 줄이고 회복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약속한 말씀을 이루게 됩니다. 쫒아 가고, 반드시 미치고, 정년 도로 찾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시작을 했더니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도로 찾고 쫒아가고 미치게 되는 그래서 가지고 돌아 올 수 있는 그런 결과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버릴 수 없는 다윗의 보따리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찾은 것과 회복된 것과 되돌린 것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미 참혹한 인생의 로도스에서 시작을 했고, 그래서 결과를 가지고 돌아 왔는데, 돌아 온 이 로도스에서 또 다시 시작을 합니다. 새로운 일을 향하여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면 버릴 수 없는 다윗의 보따리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고 있던 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방나라 불레셋의 한 성 시글락에서 살아가지만 그 옛날 사무엘이 기름 부으실 때 주셨던 비전과 성령의 감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면서도 그 비전과 감동 때문에 버티었습니다. 10년 이상의 도피 속에서도 비전과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깊이 담아 놓았던 그 비전과 그 꿈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이 로도스에서 비전의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본문이 다윗에게 결론부분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다시 내 자신이 감당할 중요한 부분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다시 로도스에서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그러면 풀어 놓는 그 보따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2-1. 아말렉을 보면서 또 다시 뛰고 또 다시 시작을 합니다. 아말렉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 트리고 너무 일찍 축하를 하고 너무 일찍 영광에 취하여 갖추어야 할 대열에서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다윗 군대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일찍 터트린 샴페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아말렉 입니다. 아말렉을 통하여 주는 교훈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진멸하고 사로 잡혔던 가족들과 잃어버린 모든 물품들을 되찾은 것은 물론, 그 동안 그들이 강도질하며 탈취했던 가축들까지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이전 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일찍 터트린 영광은 적들이 틈타고 경쟁 상대에게 쓸데없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데 다윗은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인생 로도스에서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을 통해서 보고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사람들과 축배를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될 때는 여러 가지 실수를 합니다. 아말렉은 애굽의 종을 버렸고 일찍 승리에 젖었습니다. 헛점을 노출하고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로도스에서 이 것을 다짐합니다. 승리 후에 시험이 오고 선 줄로 생각될 때 넘어질까 조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수가 연결되고 헛점이 노출이 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주님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계속해서 앞만 보고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버릴 수 없는 보따리를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줄이는 다윗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마음에 품고 있는 비전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야기가 될 말을 줄이고 문제가 될 행동도 줄입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줄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행복과 공동체의 일치됨은 낙오된 사람들의 삶을 챙겨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법이고, 거룩한 방법입니다. 고난의 로도스에서 뛴 승리의 전리품이 있습니다. 전리품은 전투에 참가한 용사들과 지휘관들의 몫입니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다윗과 400명입니다. 나머지 200명은 브솔 시내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실과 수고도 없고, 얻는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용기주시는 하나님의 세 마디 약속 앞에서도 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명은 브솔 시내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400명이 승리와 함께 전리품을 어마어마하게 가져 오는데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승리와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몫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고 합당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모든 전리품을 힘에 겨워 대열에서 낙오한 200명에게도 똑같이 분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실적 위주와 결과와 공적에 따라서, 뭐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다윗의 이런 결정에 400명의 용사들 중 일부 용사들이 반발을 하고 안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요구는 당연한 권리 아닙니까? 당연한 요구이고 마땅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문제를 줄이고, 불평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행동을 줄입니다. 이 때 다윗은 23-25,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문제를 줄이고 문제 될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보따리가 있는 사람은 문제를 줄여야 합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이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고 묻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하신 주님께 묻고, 그렇게 한 다윗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때 마다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라고 합니다. 지금과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됩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을 설득했고, 문제를 줄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분배의 원칙은 이스라엘 대대로 이어가는 법이 됩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고 비전과 꿈을 이루는 복이 됩니다.
2-3. 마음속에 깊이 품었던 비전의 보따리를 위하여 빈틈이 없습니다. 그 것은 동역과 동참입니다. 반대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로도스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당연하고 말이 맞고 경우에 합당하더라도 순종을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다윗의 결정에 순종을 했는데 이 순종을 하고 따라간 사람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용사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악한사람이나 비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22절은 악인이나 비류라고 표현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악인이고, 합당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비류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에게 순종하고 따라 갔더니 악인이나 비류가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의 용사가 됩니다. 불평을 하고 이유를 묻고, 왜냐고 했던 사람들이 순종하고 따라 갔습니다.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다윗은 600명의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시글락 성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마음의 보따리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말에 견물생심이라는 4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실물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 그래서 조금 전 까지도 마음에 없었는데 실물을 보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비일 배재 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장을 보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을 보면 달라지는 것이 견물생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베풀 때는 세상의 기준을 들이대고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같이 있고 손해보고 낙마할 것 같으면 같이 안 가잖아요? 살기 위해서 다른 생각하잖아요? 힘이 없어질 것 같으면 재빠르게 발을 빼잖아요? 계산하며 사는 세상입니다. 이득이 있나? 손해가 있나? 계산해서 삽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할 수 있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200명을 포함한 600명의 용사가 다윗을 평생 떠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다윗이 명령하면 그 어느 곳이든지 갑니다. 다윗을 위해서 적진에 솔선하여, 자원하여 다윗이 마셔야 할 생수를 떠 옵니다. 죽음의 현장에서 죽으라고 해도 죽는 자리에 까지 갑니다. 전쟁터의 맨 앞에 서라면 섭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용병 우리아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다윗에게 충성 맹세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모든 사람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속을 때도 있지만 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속이는 사람의 몫입니다. 속은 것 때문에 단념하지 말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보따리가 있습니까? 비전을 이루시는 그날 까지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곁에 많이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다윗이 전리품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26절에 이스라엘, 전국에 있는 유다 장로에게 전리품을 보냅니다. 유다 장로를 친구로 표현합니다. 전리품을 분배할 때에 용사들의 가족들과 시글락의 백성들과 모든 사람에게 배분하되 유다 장로들을 다윗이 기억하고 그들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보냅니다. 왜 그럴까요? 버릴 수 없는 보따리 때문입니다. 비전의 짐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계산하고 살았습니다. 자기의 人生의 순간을 마구 소비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하여 살았습니다. 꿈과 비전까지도 人生의 계산속에 넣었습니다. 인생 로도스에서 비전을 생각하고 실천을 했습니다. 꿈과 비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나라의 망명 생활 중에도 내려놓지 않았고 회복과 전리품의 분배 중에도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분위기 가운데서도 그의 꿈과 비전을 잊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고 흐린 때도 비가 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마음의 보따리와 짐을 내려놓으면 아니 됩니다. 다윗은 계산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에 찬성표를 던질 장로들을 곁에 두고 장로들을 생각하고 장로들에게 관심을 갖고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치밀하게 자기의 인생의 길을 갑니다. 특별히 장로를 생각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통치는 이원화 되어 있었는데 왕권 퉁치의 사울 왕과 민간 지도자 장로들입니다. 백성들 사이에 장로들이 있습니다. 사울왕은 끝나갑니다. 사울왕의 통치가 끝나면 사람들은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두 손 놓고 들어오는 떡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손 놓고 있잖아요. 그런데 들어오는 그 순간의 로도스에서, 다윗은 장로들에게 잘 보이고 진심으로 친구처럼 대합니다.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이 일이 지금까지 의아해 하던 장로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장차 다윗이 왕이 될 때에 다윗의 자격을 논 할 때에 시비하지 않습니다. 역시 다윗 이였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위하여 그 꿈과 소망을 이루는 그 순간 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유다의 장로뿐이 아닙니다. 각 지역과 다윗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전리품을 분배합니다. 기쁨의 로도스에서 이 일을 합니다. 참으로 대단 합니다. 27-30, 도망 다녔던 모든 곳과 인기 끌었던 모든 곳과 관심 가졌던 모든 곳과 가장 중요한 곳 헤브론까지 분배를 합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왕이 기름부음 받고 왕이 등극할 때 이곳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갈렙이 요구했던 유다의 한가운데 입니다. 이렇게 세세한 곳 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계획적으로 세밀하게 살아가는 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은 막살지 않았고 막무가내로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건성건성, 대충 대충으로 살잖아요. 오늘 안 되면 내일 하지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미래를 위해서 하루 이틀 하다가 한 달 두 달 하다가 일 년 이년 하다가 그만 두잖아요. 아, 내 몫이 아니고 나는 이룰 수가 없구나. 이곳도 괜찮은데 하면서 시글락에서 편히 살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부르신 그 호도스에서 미투리 신을 신고 자신의 생의 역사를 써 내려 갑니다. 한 순간도 이 것을 잊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비전은 받은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 그 비전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뚜벅 뚜벅 다가갔습니다. 사는 것이 지금 now과 현재 present였습니다. 매 순간을 생애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의 비를 위하여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고 합니다. 어제의 태양으로 오늘의 옷을 말릴 수 없고, 오늘 밤 달빛으로 어젯밤 그림자를 비출 수 없습니다. now and here 오늘 지금의 로도스와 내가 서 있는 로도스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보따리와 비전의 짐을 위해서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누가 이렇게 하셨을까요? 다윗의 시간이 다가오는 일 앞에서 절대적으로 다윗을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다윗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어 가시지만 자기의 몫은 자기가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은 초역전의 시대입니다. 초역전시대를 맞아 리버스 멘토링이 다시 떠오릅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배워야 하는 세상이고 신세대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노인이 청년에게 길을 묻는 세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경험이 많은 노인도 네비게이션을 쓰는 청년보다 길을 더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 한 분은 도서관 한 개라는 덕담도 있지만 신세대들은 앉은 자리에서 전 세계 도서관 수백 개를 검색하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세밀하게 계획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실천 하시되 로도스에서 길에서, way에서 세밀하게, 계획적으로 감당하시기를 그래서 문제의 로도스에서 역전을 만들어 내고 가슴에 닮은 비전을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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