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나윤선씨가 나오는 기사를 발견해서 카페 회원들과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에 올려봅니다.
복사해서 붙이기 했는데 이렇게 올리면 되는건지요?
게시판에 글 올리는게 처음이라 많이 서투르네요...
결혼도 축하드리고 앞으로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출처: http://www.positive.co.kr/magazine/article.asp?id=244
내 재즈 인생엔
오늘만 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 하면, 재즈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 여길지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재즈는 담배 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끈적끈적한 블루스 리듬에 맞춰 흘러 나오는 굵고 거친 음색의 노래니까. 그러한 재즈가 ‘미국 재즈’라면, ‘유럽 재즈’는 보다 자유롭고 전위적이다. 유럽 재즈계에서 전율이 이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사랑받고 있는 나윤선. 그녀가 부르면 <강원도 아리랑>도,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도 재즈가 된다. 그녀에게 있어 재즈는 자유를 좇는 여행이자 열정을 쏟아낼 유일한 목표다.
한국에선 8월에, 유럽에선 9월말 발매한 7집 앨범 <세임 걸(same girl)>이 프랑스의 대표적 음반 판매 차트인 FNAC에서 재즈부문 1위에 올랐다. 지난 3월엔 결혼도 하고, 금년엔 좋은 일이 많다. 요즘 근황은?
독일, 프랑스 등 유럽 7개국 공연과 7집 앨범 홍보를 위한 투어 중이고, 11월 귀국해 ‘나윤선 프로젝트-워크숍&레지던스’라는 이름의 공연 프로그램을 주관한다. 작년초 프랑스리옹 오페라 극장에서 진행했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이번엔 LIG와 함께 국내에서 진행하는 셈이다. 2주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공연을 기획 하는 것이다. 여러 명의 재즈 뮤지션들을 불러서 하루 연습하고 하루 공연하며 날마다 초연을 하는 셈인데, 재즈 팬들에게 새로운 재미를선사할 수 있을거라 기대한다. 12월 중순엔 핀란드 피아니스트 이로 랜탈라와 국내에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재즈와의 운명적 만남 이야기를 좀 해보자. 원래는 선생님이 꿈이던 수줍음 많은 여고생이었다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의류회사 카피라이터로 잠시 일하다가 <지하철 1호선>의 오디션을 본 뒤 뮤지컬 배우가 됐다. 뮤지컬을 하면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게 노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음악 하는 친구에게 내가 어떤 장르의 노래를 하면 좋겠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넌 클래식하기엔 너무 늦었고 재즈를 해.”라고 하더라. “재즈가 뭐냐?”고 되물으니 “대중음악의 원조.”라는 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까짓것 한번 해 보지 뭐’라는 마음으로 프랑스 재즈학교인 CIM(Centre d’ information Musicale)으로 유학을 떠났다.15년 전 일이다.
스물일곱에 떠난 뒤늦은 유학. 문화 충돌 속에서 직접 경험한 재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나처럼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면 선뜻 하겠다고 못했을 것이다. 재즈에 대한 편견이 있으니까. 우리가 자주 접하는 것은 흑인 여자 가수들의 굵직한 목소리에, 끈적끈적한 리듬의 미국에서온 재즈지, 자유로운 유럽식 재즈가 아니니 말이다. 처음에 미국식 기초 이론을 공부할 무렵 선생님께 “제 목소리는 재즈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돌아갈래요.”라고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막 웃으시면서 “무슨 소리니, 네 목소리로도 얼마든지 재즈를 할 수 있다.”하시고는 유럽 여자 재즈 가수들의 음반들을 들려주더라. 놀랍게도 나보다 훨씬 더 가늘고 높은 소프라노 음색이 많았다. 자기 목소리로 나름대로 재즈를 하는 것이다.
그저 아름답게?
그렇다. 내 음악은 스윙 재즈는 아니다. 유럽에서 내가 만난 재즈는 나만의 개성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면 되는 음악이었다. 나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하자고 마음먹고 온 게, 지금껏 올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노마 윈스턴의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목소리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악기란 걸 깨달았다.
1999년 생모르 재즈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며 재즈 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나윤선은 2001년 ‘나윤선퀸텟’이라는 재즈 밴드를 만들었다. 2008년엔 국내 음악인으로서는 최초로 유럽을 대표하는 재즈 레이블인 ACT와 계약하고, 재즈 기타의 거장인 울프 바케니우스와 작업한 6집 <부아야주>로 2주만에 ACT가 발매한 음반중 판매1위에오른다. 뿐만아니라2009년 3월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인 ‘슈발리에장’을 수훈하며,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서 인정받는 재즈 가수로 자리 매김했다.
재즈를 시작하고 15년 동안 한발 한발 걸어온 발자취가 눈부시다. 그 빛나는 자취 뒤엔 눈물도 많았을 터.
모든 음악이 다 그렇겠지만, 재즈는 정말 인내와 노력 없이는 할 수 없다. 나는 뜨거운 맛을 많이 봤다. 이 세상엔 정말 잘하는재즈 뮤지션이 많고, 그들은 쉬지 않고 연습한다. 또 새로운 뮤지션은 계속 생겨난다. 재즈 기타의 거장이라 불리는 울프 바케니우스는 나와 100번 넘게 연습했던 곡을 아직도 혼자 연습한다. CIM 시절, 나를 비롯한 동기들 모두 하루 15시간씩 연습했다. 스톱 워치로 시간 재 가면서 말이다. 지독한 연습 벌레가 되어야 했다.
언어의 벽, 아시아인으로서의 벽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다.
동양인이라는 점은 오히려 희소성을 갖게 하고, 많은 관심을 받게 했다. 그보다는 내 스스로 느끼는 절망감이 더 큰 장벽이었다. 훌륭한 재즈 뮤지션의 공연을 보고오면, ‘그만 둬야지.’ ‘난 아무리 해도 저렇게 안 될 텐데.’라며 절망했다. 하지만 무대에 서면 관객들의 호응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그러면서 성장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나. 어디나 우러러 볼 대상은 있으니까. 사실 ‘얼마나 더 해야하나.’라는 불안감도 컸다. 손에 잡히는 게 아니니까.
위기는없었나.
나윤선퀸텟이 해체될 때 무척 힘들었다. 음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는 우연히 음악을 시작했고, 복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멈춘다고해도 여한은 없다.
여한이 없다. 그말은 열정이 없다고 오해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재즈를 시작하면서 나는 한번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 적 없다. 오늘, 여기서 끝이다. 그만큼 순간 순간최선을 다했다. 공연 모니터를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내일 있을 공연을 위해 연습한다. 한데 그렇게 오늘만을 살다보니, 내일의 길도열리더라. 나윤선퀸텟이 해체된 뒤 음악을 못할 줄만 알았는데, 한국 작곡가의 곡을가지고 외국 재즈 뮤지션들에게 연주를 부탁하자는 생각이 들더라. 곧장 덴마크로 날아갔고 울프바케니우스를 비롯한 북유럽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새로운 공연을 시작했다.
취재 박헤나기자 사진 최연창기자
사진 제공 허브뮤직·나승렬 작가
*다음 내용은 <행복한동행> 11월호에서 만나보세요.
출처: http://www.positive.co.kr/magazine/article.asp?id=244
첫댓글 퀸텟 해체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은 멋진 모습을 우리가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살앙해용~^^하트뿅뿅!
15시간을 어떻게 팀 연습을 하지? 대단합니다. 진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재즈를... 이 부분은 오해를 갖지 마시길 바래요. 음악하시려는 분들요^^
윤선누나는 어려서 클래식부터 라디오 끼고 사신 분이거든요. ㅋㅋ 전공만 불어에요. 걍 ㅋ
아무나 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전공 안했음 욜라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전공해도 더 욜라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 이제야 실토하시네요. 열심히 하셨다고 ㅋㅋ
맨날 행운이라고 하시더니만. 그바 그바.. 죽도록해야 성공하지. 왕도가 있나 무식하게 공부해야 되는거지..
에라이.. 이제 나 어뜨케에... ㅠ.ㅠ
아, 멋집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대단하세요. 오늘만을 사시는 언니,,,오늘도 화이팅~!!!
레이첼님,잘 읽었습니다.
윤선님 지난 3월에 결혼하셨네요.늦게나마 축하합니다,행복하게 잘 사시길 바랍니다 !!!
우잉? 결혼 얘기도 있었네요??.. ^_^::
와 멋집니다. ^&^
레이첼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ㅎㅎㅎ
감 사 함 미 다 ( 도 시 라 솔 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