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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9년 5월 넷째 주(5/25) 일요 정기법회일입니다.
법회일 아침, 회장님, 사무국장님, 부회장님들께서는 아침 회의 중이시고 사무국 봉사팀들은 바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멀리 진주에서 법문하시러 올라오신 원담스님을 혜담스님께서 맞이하고 계시는 사무국은 몹시 바쁩니다.
현관에서 법회보를 나누어 드리며 반갑게 형제들을 맞이하고 계신 17구 봉사팀. 27구 엘리베이터 봉사팀은 1층과 보광당을 오르내리며 안내하고 계십니다.
송파 34구, 대원 1구, 대원 2구, 대원 5구에서 떡과 생수를 보시하시고 법회 오시는 분들께 나누어 드리는 봉사도 해 주시고 계십니다.
보광당 입구의 법당안내팀, 법회팀, 새법우 안내팀, 다도팀도 법회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각자의 맡은바 일들을 열심히 하십니다.
보살님들께서 그 틈에 원담 스님과 사진도 찍으며, 또 법당에 도착하신 혜담스님을 자리로 안내하며 반갑게 맞이하고 계십니다.
현수 거사님이 천수경 독경을 하시고, 세 번의 타종을 하시니 혜안 부회장님께서 법회 시작 안내 말씀을 하십니다.
이어 마하보디 단장님은 부처님 전에 마지 뚜껑을 열고 향 올리니, 다도팀 연오행, 명조 보살님께서 차를 우려 헌다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이 많은 불광 형제들의 보광당 풍경. 우리의 간절함은 무엇일까요? 하루속히 이루고자 하는 '불광 정상화'입니다.
금주의 법사 : 진주선원 선원장 원담 스님
금주의 법어 : 보살의 윤리적 행동주의를 향하여- 탈자본주의적 수행론
잘 계셨습니까? 진주에서 온 원자 담자, 원담스님이라고 합니다.(박수) 몇 년 전에 불광가족을 뵌 이후에 오늘 처음입니다. 지금 진주 주변 산천에서는 벚꽃이 지고 하얗게 피는 이팝나무와 또 산에 가면 찔레꽃, 황매산에 가면 철쭉이 이제 피고 있어요. 한 송이 꽃이 피고 지면 또 다른 꽃이 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마음 안에는 색깔도 없고 이름도 없고 향기도 없는, 핀 적도 없고 진 적도 없는 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마음의 꽃, 심화 혹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보리심입니다. 보리심. 우리가 흔히 많이 듣던 말인데 보디싯타, 초기불교에서는 보디라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보디싯타(bodhicitta)로 흔히 보리심이라 번역합니다. 같은 불교 용어지만 불교 종파나 경전에 따라서 다른 명칭을 써요. 대승불교 인도 전통 나란다대학 전통 티벳으로 이어온 전통에서는 보리심이란 말을 많이 쓰고 그것이 중국으로 와서는 깨달음, 또 선종에서는 본래면목, 본지풍광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또 규봉 종밀 선사라든지 보조 지눌스님은 공적영지라고 했는데 명칭은 여러 가지지만 결국은 보리심으로 해당될 수 있어요.
잠깐 반성해보면 선종에서 얘기하는 깨달음, 오도의 경지 이런 걸 얘기하면 엄청 무겁고 심각해 보이면서 감히 우리가 초심자가 어떻게 그쪽으로 갈 수 있을까 망설임 내지 장벽이 느껴지는데 사실은 그렇게 심각한 용어가 아니었어요. 보리심, 처음에는 단순히 보디싯타 이렇게 말하고 깨달은 마음. 그런데 영어권 불자는 쉽게 번역을 해요. awakening mind라고. 우리가 잠자지 않고 기절하지 않는 한 다 깨어있거든요. 자기 몸과 마음을 살필 수 있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바른 길을 알 수 있다면 다 awakening mind, 보리심이 있는 겁니다.
보리심이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광덕스님이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입니다. 보리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요. 절대적, 진제 차원에서 보리심은 공성을 깨닫는 건데 공성을 확실히 보는 지견을, 지혜를 반야라고 했어요. 상대적 보리심, 일반적으로 초심자, 우리가 시작하는 발보리심해라 말할 때 쓰는 보리심, 일상에 잊지 않고 날로날로 되새기는 보리심은 상대적 보리심인데 그건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리심을 원력을 발해서 일상에 자주자주 반복해서 마음에 되새기는 보리심은 원(願)보리심이고, 실천했을 때 행(行)보리심.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반야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리심을 발해서 반야바라밀로 가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을 보리심을 발한 사람. 보디싯타를 갖고 실천하는 존재를 보디삿트바, 쉽게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여성 신도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우리 전체가 대승보살입니다. 물론 출가 보살, 재가 보살로 대승에 보살승으로 큰 개념으로 포섭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제를 우리 모두가 보살인데 보살이 실천할 윤리 덕목이 자본주의를 건너가는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탈자본주의 수행으로 가는, 실천하는 지침이 바로 보살의 수행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갖다 붙이면서 이것이 바로 존경하는 광덕스님께서 우리한테 메시지를 주신 길이 아닌가 해서 오늘 주제를 잡아봤어요.
그러면 한 번 반성해봅시다. 불교는 이 세상을 의식 있는 존재가 사는 세계와 상응한다고 했어요. 그 의식 수준이 그 사람이 사는 세계를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의식 識), 주(거주 住)선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우리는 지금 삼계 안에서 욕계에 있어요. 욕계 색계 무색계는 들어보셨죠. 욕계는 식욕과 성욕, 윤회계로 말하면 축생과 짐승과 인간 그리고 천신이 섞여 사는 세계를 이야기해요. 그 의식 수준이 기본적으로 오욕,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지 못해요. 식욕과 성욕이 아주 정교하게 청탁으로 나눠지면 청정한 세계로 가면 욕계의 육천이 되고 인간보다 하등한 세계로 내려가면 축생 혹은 아귀 지옥으로 나눠집니다. 색계는 식욕 성욕을 초월했기 때문에 남녀의 성이 없고 지극히 청정한 에너지로 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루빠 까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색계라고 얘기해요. 중국에서 색자를 써서 색욕이니 여성을 얘기하는 색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색계는 정신적 영역이라 시공간에 위치 시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욕계입니다. 욕계를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자본주의적 세계입니다. 옛날에 50~60년 전에 소비에트 연방이 있었을 때는 세계가 이극체제로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대극체제로 냉전체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회주의 실험이 다 실패로 끝나고 전 세계가 자본주의 일색이 되었어요. 중국이나 북한이나 러시아가 자본주의와 다른 변형된 거라 얘기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공산당이 계획하는 자본주의입니다. 전체가.
인간의 수준에 자본주의가 가장 맞아요. 그래서 자본주의적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부정해서 볼 거는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수준에 가장 맞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의 개인적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방면으로 살 때 저절로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의 원리가 돌아가면서 세계 경제가 정상적으로 균형을 맞추면서 이뤄간다는 것하고 민주적, 한 사람이 투표권 한 장씩 가지면서 정치제제를 구성하는데 다당제로 간다는 민주 질서하고 자본주의가 너무나 잘 매칭이 돼요. 인간이 지금까지 개발한 정치 경제체제 중에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질서에 살고 있어요.
그러면 욕계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고 질문 없이 산다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겠죠. 불자는 이 세계 속에서, 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순응하고 기회를 잡아서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욕망에 충실할 것이냐 과연 어떤 스탠스, 자세를 취할 것이냐 이런 질문을 각자 해보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깊이 천착한 분이 지금으로부터 60~70년 전에 헝가리 출신의 ‘칼 폴라니’란 분이 ‘악마의 맷돌이론’, 새터닉(satanic, 사탄의 형용사) 밀스(mills, 물레방아), 악마의 맷돌, 시장질서, 자본주의 질서는 그냥 놔두면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면서 모든 인간의 자원을 자연 자원까지 다 갈아서 돈으로 만들고 환산한다는 겁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노동시장, 부동산시장, 금융시장 이런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1차, 2차 세계 대전이 지나고 나서 시장에 노동력을 팔아먹는 노동시장이 생겼어요. 노동 유연성이라고 하면 말이 아주 묘하게 부드러운데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노동자로서는 불안하죠. 그다음에 토지는 옛날에 사고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토지가 시장에 나와서 부동산시장, 그리고 옛날에 돈은 단순히 돈 주고 물건 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돈 자체가 금융시장이 되고 주식 시장이 형성되면서 지금은 코인까지 엄청난 자기 몸을 불리면서 세상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데 덩달아서 이 규모가 커지니까 이 시장하고 관계가 없었던 예술, 종교, 가치를 생산했던 문학 이런 것이 다 악마의 맷돌에 갈려져요. 그림 한 장 그려도 돈이 되니 안 되니, 절을 하나 세워도, 교회를 하나 세워도 신도 수가 얼마이고 교회 연보 돈이 얼마 나오고 그 절에 연등이 몇 개 달렸냐 이런 식으로 책이 팔리냐 안 팔리냐 그리고 대학에 가도 취직이 잘 되냐 안 되냐 이 전부 다 악마의 맷돌에 갈려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 불자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맷돌을 멈출 수 없을까? 최소한 멈추지는 못해도 이것을 잠깐 치우고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당연히 불자는 해야 돼요. 이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로 갖고 가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깨어있는 보살이라고 제가 이름 붙이고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어요.
최소한 불자들이 이 시대에 깨어 있으려면 자본주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똑같이 도태되라는 말이 아니고 세간과 함께 살지만 세상을 같이 따라가서는 안 된다. 뭔가 저항하고 거부하는 자세를 취해야 된다. 그것이 일찍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출리심입니다. 14세기 티벳에 나타난 유명한 스승님 쫑캇파 대사가 보리로 들어가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했어요. ‘출리심’, ‘자비심’, ‘공성에 대한 지견’인데 출리심이 먼저요. 출리심은 세상을 떠나라는 것인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은둔하라는 말이 아니고 소유에 대한 집착, 축적하려는 욕망, 세상의 집착에서 잠시 벗어나는 선택을 하라는 말이죠.
우리가 출리심한다고 하루 아침에 가정을 버리고 서울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자. 다 스님이 되자는 말이 아니고 출리심이란 거리를 두자는 거죠. 세상과 똑같이 살지 말자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은 일요일인 오늘 다른 사람이 다 놀러갈 때 여기 선택해서 오셨어요. 이 시간만큼은 세상과 떨어져서 출리한 거예요. 그리고 시간 있으면 한 달에 3박 4일, 2박 3일 불광사에 모여서 자본주의적 방식과 다르게 사는 삶을 살아야 돼요. 템플스테이에 온 명상이라고 할까. 지금 여기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인가요? 사정이 된다면 1년에 보름씩 여름에 보름, 겨울에 보름 이렇게 단체 수련을 해야 돼요. 출리심을 닦는 수행을 해야 돼요. 그 기간만이라도 세상과 자본주의 질서와 떨어져서 탈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우리가 익혀야 돼요.
욕망을 불교에서 얘기하는데 그러면 욕망은 무조건 버려야 하는 부정적인 것인가? 욕망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지? 보통 사람은 욕망을 버리라고 하면 불교에 위기가 느껴진다고 그래요. 욕망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이렇게 되거든요. 이때 욕망은 우리가 경계심을 가지고 버려야 할 것은 팔리어로 로바, 영어로 그리드, 혹은 타나, 갈애, 갈증 난 애정결핍 이런 게 되는데 벌써 갈증 난 욕구와 갈증이 떨어진 정상적인 욕구하고 달라지죠. 이걸 구별할 수 있어야죠. 긍정적인 욕구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찬다라고 용어가 달라요. 이걸 대승불교에서는 원력이라고 하죠. 욕망으로 살지 말고 원력으로 살아야 된다. 이걸 철학자들은 생명의 약동, 생명이 약동해야지 우리 욕망을 포기한다고 회색분자로 어름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상태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 원력으로 세상 속에서 활발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죠. 욕망이 아니고 원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몸을 담고 살면 바로 탐진치에 몸을 맡기고 사는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가는 악마의 맷돌에 갈리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사실은 먼저 자본주의 질서, 자본주의적인 세계 주류에서 벗어나는 단호한 태도를 지녀야 돼요. 우리가 흐리멍텅하게 살면 안 됩니다. 불자에게는 이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불자라는, 보살이라는 산뜻한 칼칼한 맛이 있어야죠.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을 벗어나야죠. 세상은 끊임없는 늪과 같고 가만히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내 주위를 온통 뺏어가요. 그래서 정신 차려야죠. 수행이란 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일단 거부하고 저항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 태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기복 불교로 부처님 잘 해주세요. 기복불교가 나쁘다고 비평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복 불교를 지나서 지향할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걸 각성해야죠.
우리가 이 자본주의 질서를 고해라고 하는데 우리가 몸 담아서 섬과 같은 귀의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가 섬을 찾아왔듯이. 불광법회가 섬이라. 법등명 자등명할 때 빨리어로 아따 디파, 담마 디파로 디파(dipa)가 등불이라 해석했는데 또 다른 해석에서는 섬도 됩니다. 자기라는 섬에 귀의하고 다른 사람, 세상을 섬으로 살지 말라. 부처님 법을 섬으로 삼지, 다른 대상에 섬을 삼아서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불광법회 같은 곳이 우리가 귀의해야 할 섬이에요.
그런데 이게 좀 부족해요. 공동생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만 여기서 30분이나 한 시간이나 명상을 같이 하고 특히 주말에, 한 달에 몇 번 같이 밥을 먹고 같이 공동식사하고 같은 규율에 의해서 같이 잠을 자고 생활해야 돼요. 그래야 이게 공동체이고 부처님이 꿈꾸었던 승가예요. 커뮤니티,comunity) 그것이 원시 공산사회, 공동생산하고 공동분배하는 원시 공산사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려고 하시던 분이 아니고 모범적인, 세상이 본 받을 수 있는 세상 안에 하나의 섬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게 승가예요. 승가 안에서는 2500년 전에 계급 평등, 남녀평등을 실현하셨죠. 그 가치가 세상에 퍼져나가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죠. 그러나 오늘날까지 모든 종교 단체가, 창시자가 했던 단체가 변질했지만 아직은 승가는 그대로 남아 있잖아요. 한국이 좀 변질됐지만. 이것도 놀라운 사실이죠.
(보리광 보살님 녹취)
그 승가 공동체 모임을 광덕스님이 서울에 대각사 불광법회 세우고 우리가 아직까지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섬이라 이 고해의 섬, 그 보살의 길을 이제 다 아는데 정리해 봅시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의식적으로 놓아버리려고 훈련을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꾸 불안하니까 뭔가 가지고 있는 걸 잃어버릴 것 같고 그러니까 더 지키려고 노력을 해요. 나이가 있으면 더 그래요. 그걸 의식적으로 그렇다고 진짜로 돈을 하루아침에 다 빼가지고 빈털터리가 되도록 기부하고 보시하라는 말이 아니고 마음의 훈련을 하자는 거에요. 마음의 훈련, 내가 가진 것 내 몸과 마음조차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해요.
소신을 내려놓는다. 완전히 내 자산이 천억만 돼도 나는 산다 이거지 그저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광덕스님 말씀하셨잖아요..
공중에 나는 새를 불러 노동하지 않아도 누가 저렇게 명랑하게 활발하게 날면서 노래하는가 예수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란 이 집착에서 벗어난 놓아버리는 자유를 가지라 그리고 자기가 계속 놓아야 된다. 쓰면 손해다. 안 쓰고 계속 모아야 한다. 축적에 대한 빈곤의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면 내가 비운 자리에 모든 것이 무아라고 이야기하는 공성, 그것이 중요한 것은 내 것을 내려놓으면 그 텅 빈 장소에서 모든 것이 다 만나기 때문에 그 빈자리가 모든 일체 중생하고 나누는 공유하는 자리가 된다 말이죠.
그래서 이제 연기, 모두가 함께 살아간다. 이렇게 되는, 이제 마지막으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프랑스의 ‘데리다’라든지 ‘푸코’ 혹은 ‘들뢰즈’ 이런 사람들이 모든 기존의 동일성 연속성 자아 경영 체제 이런 부정했던 해체주의 철학자가 있어요.
그 해체주의 철학자 다 해체하고 나니까 그럼 어떻게 살아야지 갑자기 윤리적 허무주의에 빠진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가지고 푸코 같은 사람은 갑자기 자살하고 또 들뢰즈도 자살하고 왜? 그렇게 훌륭한 철학을 하시는 분들이 자살 하냐? 이거지.
그래서 그것에 대한 반성으로 ‘알랭 바디우(Allan Badiou)’ 같은 사람은 새로운 철학을 찾아서 신합리주의 내세웠어요. 그분 말씀하기로 배울 게 있어요.
진리라는 것은 저 혼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 찾아서 그 시대에 사람이 발원을 해야 진리가 생산되고 창조된다고 우리가 우리한테 제공 되면 불교의 진리성을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부처님의 진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 시대에 매력이 없냐 이거죠.
누군가 적극적으로 자기 인생을 바쳐서 부처님의 진리의 샘물을 파 가지고 사람에개 선물하지 않은 거야. 내 존재 자체가 새로운 물이 아니더라도 내 존재 자체가 샘물이 돼가지고 이 세상 가정에 사회에 새로운 물을 선포해야 되는데, 내가 흐리멍텅하게 살았기 때문에 똑같이 혼탁한 물이 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물맛을 못 본 거예요.
우리한테 책임이 있어요. 진리는 진리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시대에 증명을 해야 된다고 진리를 못 봤지만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불교가 진리라면 당당히 내 삶으로 증명을 해야 됩니다. 자기 삶을 말을 몰라 분명한 살아 있지 않느냐 그냥 우리의 스승 광덕 대선사님이 1974년 당당히 서울 한복판에서 진리를 전언하려고 하셨어요. 불광법회를 내세워가지고 그 새로운 물이 우리한테 아직도 필요한데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돼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가 소명감을 지녀야 돼요. 그게 아니니까 우리가 불자의 사명감이 없는 거예요. 왜? 불교가 이렇지 다른 사람은 다 종단이 왜 이러지 한국 불교가 이렇지 내가 한다고 생각하고 진리는 그가 진리에 충성하라.
그래서 진리를 만드는 사람을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알랭바디우와 레벤노는 너 자신이 불교를 만난 것이 세계 변형시킨 사건이다.
이렇게 사건은 네 가지로 정치로 나타나면 혁명이 되고, 과학이 나타나면 패러다임 전환이 되고, 예술이 나타나면 예술 사정을 바꾸는 그런 게 되고 사람끼리 만나면 연인이 된다는 거잖아요. 똑같이 살아가는데 갑자기 사랑이 불탄다. 이거는 연인이 된다.
우리는 운명의 사람을 만난 사람도 있겠지만 못 만난 사람이 태반일 텐데 스승을 만났다.
불교를 만나면서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사건, 그게 사건이에요.
오늘 우리가 만난 것 불광법회에 만나게 된 것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건, 곡괭이로 마른 땅을 파 가지고 샘물을 파서 그 샘물을 내가 먼저 맛 봐야 돼.
진리를 알아야겠구나. 내가 먼저 흔쾌히 맛을 봐야 사랑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진리를 전언하라고 불광 법주스님 광덕 대선사님이 뭐라고 했어요?
법회를 하라 이렇게 했어요. 법회를 하라. 오늘날 문제가 뭡니까? 절에 가면 법회 안 해요. 법회를 안 해요. 우리는 이 법회부터 안 해요. 핵심이 빠진 거죠. 여기 불광법회는 일요일마다 합니까? 얼마나 자랑스러워 법회가 있는 곳에 불교가 있는 거에요. 법회가 없는 불교가 어디 있어요?
돌아가 가지고 원사지가 있는데 듣고 깊이 귀의했다가 사유해가지고 집에 가서 가족한테 부드럽게 다양하게 이웃에 몸과 마음 서로 에너지로 불교 메시지를 전해야 돼요. 우리는 사명감을 지녀야 해요.
우리가 비유하자면 저는 이렇게, 일제시대 때 단지(斷指) 동맹을 세웠던 안중근 열사 일제의 독립군들 완전히 ‘피’로서 맹세했잖아요. 그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소명감을 지니고 살았죠. 마침내 한국은 독립한다. 내 한 몸 희생해서 독립에 바치겠다. 내 인생의 영광을 못 보더라도 불자가 바로 그렇게 해야 돼요. 우리는 이제 욕계 여기 식민지예요. 마을의 식민지 여기가 욕망을 채우고 부자 번민하고 출세하는 곳이 아니에요. 잠시 이 단지(斷指)에서 보살로 보살 독립군으로 살아가라고 여기에 부름을 받아서 온 거예요.
독립군처럼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불교가 지켜가죠. 특히 한국이 그렇습니다.
지금 점점 불심이 떨어지고 타 종교가 카돌릭 천주교 올라가는 것 같잖아요. 또 스님들도 믿을 수가 없어요. 승려가 주인 노릇을 못해 그럼 누가 주인을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각성한 자가 선각자, 선각자가 보살인데 바로 우리인데 우리가 부처님 편을 들고 진리에 편을 들고 내가 부처님을 증거 하려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일생에 내 한 몸 던져서 불교가 진리로서 빛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인생이에요. 그것이 보살 이예요. 그래서 그런 말 하지 않습니까? 이 사바세계 지구 곳곳에 보살이 피어지나 않은 곳이 있을까 그런 말씀이 있어요.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 피 흘리지 않은 곳이 있을까 그렇게 말하면 약간 전투적인 데,
마지막으로 보살의 길을 가기 위해서 ‘자타 상환법’이라고 하는 통내수련법을 해보겠습니다. 이제 가만히 편안하게 눈을 감고 들숨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앉으셨어요.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시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 쉬고에 이제 약간의 마음을 담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들이쉽니다. 세상의 고통이 내 콧구멍으로 다 들어온다고 생각하게, 또 내쉴 때는 나의 행복을 그들에게 따뜻한 빛이 되어 줍니다.
타인의 고통을 들이쉽니다. 내쉬면서 나의 행복을 그들에게 줍니다. 세상의 고통을 들이쉽니다. 내쉬면서 나의 즐거움을 그들에게 줍니다.
우리 사회의 혐오와 갈등을 모든 고통을 들이쉽니다. 내쉬면서 내가 닦은 공, 공덕을 그들에게 줍니다. 또 우리나라의 고통을 다 들이쉽니다. 내쉬면서 내가 닦은 공덕을 그들에게 줍니다. 이제 우리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보리심의 서원이 있는데 제가 여러분을 따라하려고 하면 좀 길기 때문에 우리 진주선원 학생들한테 하는 마지막 읊고 여러분들은 뒤에 사두 사두 세번하고 법회 법문을 마치도록 합시다.
‘나와 몸에 가득한 모든 중생이 지금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삼세 일체불의 공덕을 한 몸에 구현하고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팔만 사천 다르마에 귀의합니다. 성스러운 승가에 귀의합니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부처를 이루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전하여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행복으로 인도하겠습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 업과 번뇌가 다 할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과 함께하면서 보살의 원행을 완성하겠습니다.
사 두 사 두 사 두 감사합니다.(월광화보살 녹취)
♬ 찬탄곡 : 당신의 미소 ( 손정윤 작사. 최영철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당신의 따스한 눈길을 우러르고 있노라면 천만가지 근심걱정 모두 사라집니다.
당신의 맑은 눈길을 우러르고 있노라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구슬로 빛납니다.
당신의 따스한 눈길을 우러르고 있노라면 천만가지 근심걱정 모두 사라집니다.
당신의 신비론 미소에 내 인생을 맡깁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영생을 맡깁니다.
포근한 당신 가슴에 이 몸 안겨 들어가면 극락정토 연화세계 여긴 듯 싶습니다.
지친 몸 아픈 영혼도 당신의 품 안에서 법열에 넘쳐 흐르는 눈물이 방울방울 집니다
포근한 당신 가슴에 이 몸 안겨 들어가면 극락정토 연화세계 여긴 듯 싶습니다
당신의 따스한 눈길을 우러르고 있노라면 천만가지 근심걱정 모두 사라집니다.
당신의 신비론 미소에 내 인생을 맡깁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영생을 맡깁니다.
발원문 낭독 : 보현 3구 명등 향봉거사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오늘도 세분의 새 법우께서 법회에 참석하셔서 불광형제들의 환영을 받고 법회장님과 사진도 남겼습니다. 보광당 매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법회가 끝나고 각 구, 법등마다 준비해 오신 먹거리를 나누며 반갑게 법등모임을 하시고 다음 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법회팀의 배웅을 받고 가정으로 돌아가시는 불광 바라밀 형제들.
흩어진 신발 정리까지 하고 계신 법당 안내팀의 활약은 언제나 떠난 자리도 아름답게 합니다.
법회가 끝난 후 법당 쓰레기 처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계신 모습. 정말 마지막까지 빈틈없이 봉사하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 담아 찬탄 드립니다.
보광당의 법회를 마치고 대웅전에서는 염송팀의 집전으로 금강경 독송 기도가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청정팀 4조 보현행자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고, 또한 현수 거사님과 자행 보살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4조의 막내 지견화 보살님이 준비해 오신 쑥떡. 빵. 샐러드. 단호박에 냉커피. 정성 가득한 간식을 먹으며 나누던 대화도, 함께한 봉사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불광 형제들은 지난 주에도 봉은사에서 1인 시위 정진 기도, 불광사에서 토요 시위 정진을 진행했습니다.
|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불광불자들에게 보살의 원행을 알려주신 원담스님 감사합니다_()()()_
법회 일지 작성하신 마음님, 많은 사진 찍어 정리하신 원각화보살님, 법문 녹취하신 월광화보살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_()()()_
보살님께서 수고하셨지요. 군부대에 다녀오셔서 힘드셨을 텐데 녹취도 해 주셨으니.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