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한시집 <청산(靑山)>/ 양현승 역해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黙/1862~1919) 선생은 손병희 선생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한 뒤 천도교 관장직을 맡아 ‘국채보상운동’을 펼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재명의사가 이완용을 저격한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기미독립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58세로 순국한 독립지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양한묵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천도교월보>에 사설, 산문과 더불어 많은 한시(漢詩)를 기고했다. 특히 한시의 경우 문학사에서 언급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시문이 많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한자(漢字)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학교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를 혼용했으나 근자에 전산화,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한자 사용 또한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우리 어휘의 약 70%가 한자에서 비롯됐건만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 용어에 무감각해지고, 한자어에 대한 추측마저 어려워하게 되었다. 기실 광복 이전에 활자화된 글의 상당 부분이 한자로 쓰여 있기에 지금 당장 이를 역해하는 작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쓸모 있게 다듬고 만들어야 값어치가 생긴다는 뜻이다. 황진이,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허난설헌이 그랬다. 그녀는 시문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나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제한적인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없었다. 생전에 그의 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허균이 허난설헌이 27세에 요절하자 누이의 유고 200수를 모아 <蘭雪軒藁(난설헌고)>를 펴냄으로써 여류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이 한.중.일 동양삼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천도교월보에 실린 양한묵 선생의 한시(漢詩)는 누군가가 열과 성을 다하여 역해하지 않으면 자칫 주옥같은 시편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주양(梁)씨 학포공파 종중의 양현승 박사가 기꺼이 팔을 걷고 나서서 양한묵 선생님의 유고 92수를 번역, 해설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양현승 박사는 이전에도 <興武王實記(흥무왕실기)>, <鼎谷集(정곡집)> 등을 국역한 노련한 역해자다. 한시는 자칫 잘못 해석할 경우 오히려 시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양현승 박사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이기에 운문의 묘를 살려 역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다.
양현승 박사는 ‘자칫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잊혀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에 무모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출간은 국문학자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제주양씨학포공파와 화순군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작업이었다. 이 책의 표제인 <청산(靑山>은 <천도교월보>에 실린 양한묵 선생의 산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양한묵 선생의 시문과 더불어 부록에 천도교월보에 실렸던 산문, 그리고 순국 3주년을 맞아 묘소를 서울에서 향리인 화순으로 이장하면서 거행한 추도식의 만사(輓詞)들을 실었다. 총 320쪽으로 ‘나무자전거’ 출판사에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