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6:1~12)
1.
며칠 헤매고 묵상을 skip한 사이,
바울이 어느 새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와 있다.
세상 최고 권력 앞에 왔으니
죽느냐, 사느냐 절대절명의 순간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하면 무죄를 받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 과오를 들추면서
똑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의 변화와 복음의 회심을 꾀하고 있다.
내 안위만을 생각하는 한계를 넘어
복음의 시선으로 삶을 사는 바울의 위대한 상태를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2.
하용조 목사님은
전도를 위해서
때로는 극장을 빌리기도 하고,
카페를 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이트 클럽을 빌리기도 하며
청년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근본은 그대로 지키되, 오래 교회 다닌 사람
입장이 아닌 그들 입장에서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하고 전도'를 했다.
만약 어떻게 나이트 클럽?, 카페?, 그런 곳에서 예배? 라는 태도와 말을 한다면,
현실과 수용력의 발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는 '사랑' 외에
양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양보하지 못하는 것의
가지 수가 가장 많은 이가 크리스천인 것 같아
마음 아프다.
3.
어제(23.8.21) 영화, '오펜하이머' 관람으로 비롯된
다소의 충격이 있다.
일본에게 투하된 원자탄의 개발 책임자로서
오펜하이머의 했던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평가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나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본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지만
독일이 개발에 근접했던 것,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통해 끈질기게 저항했던 현실 등을 고려하면
누군가가 십자가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투하는 실행되었고,
광풍보다 더한 현실적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핵폭탄의 굉음 같이
도저히 그 상황을 해석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다소 느껴진다.
거기에 뜬금 없이 등장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영화에서는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핵폭탄은 양자역학의 일부로서 연결된다.
양자역학은 가히 충격적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지경의 밖에 있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고 명백한 현상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우리의 언어와 인식으로서는 '정상'이 아니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그 영역.
설명하는 전문가들을 설렁설렁 바라보면
마치 사기를 치는, 저 전문가가 하는 말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또한 말하는 전문가조차도 모르겠음을 인정해야
그것이 사실이며 맞는 말인...
그런 영역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인지하는 수단인
눈과 인식의 영역에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눈과 두뇌, 이해의 지경 밖에 있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조금 접근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일부분일뿐이지만
그 한가닥 연결선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핵폭탄에 얽힌
스토리에 정신을 못차리는 모습처럼
양자역학은 우리의 근본을 흔드는 지경에 있다.
그래서 영화와 양자역학은 묘하게 연결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저 어렴풋이
내가 오펜하이머의 입장이라면
개발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단 하나의 경우에서만 참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절대 선을 행하시는 절대자가 명령하면
무지성 지지의 태도로 응하겠다고.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선을 추구하는 존재가
지시하신 것이니 하는 것이 맞는 것이므로.
그런 절대 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은 should be humble 해야 함이 자명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