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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계4:8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알파와 오메가란 시작과 끝을 말씀합니다. 세상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또한 끝도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시90:2입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만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히13:8에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고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변함이 없으시고 한결같은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변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어도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만 남아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알지 못하나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행1:11입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진실로 속히 오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만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표현이 네 번 나옵니다. 계3:11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셨고 계시록 마지막 장인 22:7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2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20절에도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마지막은 예수님이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이 약속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결코 종말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재림이 있음을 기억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본문에 “나는 ... 전능한 자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자입니다. ‘전능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판토크라토르’인데 단어 의미는 ‘전부 억제하다’, ‘모든 것을 통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전능하다’는 것이 단지 능치 못함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제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저항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 통제를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실 때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창17:1에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창28:3)라고 하셨고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 라고 하셨습니다. 이후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도 이 말씀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출6:2,3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히브리어로는 ‘엘 솨다이’입니다. ‘엘’은 ‘하나님’을 뜻하고 ‘솨다이’는 ‘강하다, 능력 있다, 충족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이 강하다는 것과 모든 것에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스스로 충족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다는 말이 이렇게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엘 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성경은 이처럼 시작과 끝을 일관되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그가 듣고도 믿지 못하자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네 아내가 임신할 것이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이미 경수가 끊어진 아내 사라가 듣고 웃으니까 하나님께서 반문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열매가 아니고 ‘웃음’을 뜻합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잉태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자 마리아는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때 천사도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러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눅1:37).
이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간질병 걸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가 당신이 할 수만 있으면 고쳐달라고 하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할렐루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 그 일들도 전능자로서 하신 일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베푸신 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요즘 세계 과학자들의 이목이 초전도체라는 물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구의 이효철이라는 중학생이 일명 슬릭백 춤, 발이 땅에 닫지 않은 채로 뛰어다니는 공중부양 춤 영상을 유투뷰에 올렸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이 영상이 3일 만에 일억 육천만 명이 시청해서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친구하고 돼지국밥 먹다가 갑자기 찍은 영상을 올렸더니 공중부양 춤이 된 것입니다. 만약 초전도성 물질이 개발되면 공중부양을 가능케 하고 진공상태에서 움직이는 자기부상열차가 나오고 양자컴퓨터가 나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0분만에 도착하게 되고 우리나라에서 미국까지 세 시간이면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공중부양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겠지만 이제는 과학이 이 원리도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작 뉴튼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기 전에도 지구는 당기는 힘이 있었고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기 전에도 지구는 돌고 있었습니다. 단지 인간이 깨닫고 이해하고 발견하여 자연의 법칙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초전도체 물질이 개발되기 전에도 물 위를 걷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 9:6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사람으로 오셨기에 인성과 하나님이시기에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제제를 받지만 자연은 예수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법칙에 제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정하신 분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초월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자연을 초월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연 안에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자연 위에 존재하십니다. 자연을 그분의 섭리대로 운행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세우신 섭리대로 운행하시고 끝도 맺게 될 것입니다. 사46:10입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종말은 언제 옵니까?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이 다 이루어질 때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읽는 책입니다만 그래도 참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믿어지기 힘든 사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라고 할 때 성경이 전제하고 있는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니까!’ 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볼 때마다 ‘저가 누구시기에?’라고 했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저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에!’ 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실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히4:2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음을 합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나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입니다(약2:2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듣고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믿고 그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분량, 크기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분량이 곧 믿음의 분량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분량이 곧 믿음의 분량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분량, 즉 행함과 순종의 분량을 더 키우시길 축복합니다.
끝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즉 강한 하나님이시고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 어떤 제제나 통제를 받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나에게는 어떠한 분인가요? 내게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능히 이기고 계십니까. 아직도 혹 내가 하나님을 이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인데 내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능력을 막고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나를 통제하고 제제하고 계십니까. 즉 나는 하나님의 통제와 제제를 어제도 오늘도 수용하고 살아가십니까... 그래야 나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길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주, 나의 하나님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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