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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종 목 : 국보 제205호
지정일 : 1981.03.18
총 높이 203㎝, 비면높이 144㎝, 너비 55㎝
화강암의 사면, 예서체, 1행 23자 꼴로 528자
▣탐방일자 : 2015년 3월 8일(일)
▣소 재 지 :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번지
1979년 4월 8일 충주 문화재동호인의 모임인 예성동호회의 제보를 받은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조사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4면비(四面碑)이다.
화강암의 표면에 3∼5㎝의 크기로 글자를 새겼고, 글자체는 예서(隸書)에 가까운 해서(楷書)이다. 마멸이 심해 앞면과 좌측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판독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비 자체를 4면비가 아닌 3면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제관계·영역문제를 비롯해 고구려인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3개의 고구려비 중 만주의 광개토왕비는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의 동쪽 언덕 왕릉에 세운 높이 약 6.39m, 너비 1.38∼2.00m, 측면 1.35m∼1.46m의 거대한 비로써 네 면에 예서체로 1775자를 새긴 것이고, 2012년 7월에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는 장수왕 15년(427)에 세운 것으로 밝혀졌지만, 외형이 만주의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 같은 충주 고구려비는 마모가 너무 심해서 3면에만 글자를 새겼는지 4면에 새겼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비교적 많은 앞면의 경우 10행에 각 해당 글자 수는 23자이다. 그리고 좌측면은 7행에 각 행마다 23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측면과 뒷면은 글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총 글자 수를 산정하기는 어렵다. 밝혀진 글자도 200여자에 불과해서 건립시기가 언제이며, 비문의 시작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학자들의 퍼즐 맞추기 같은 노력으로 네 면에 글자를 새긴 비로 밝혀졌지만, 건립시기는 비에 새긴 신유년(辛酉年)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341년, 421년, 481년, 541년 중 고구려가 중원 지역을 지배한 475년부터 551년까지를 감안해서 광개토대왕 때라는 설부터 장수왕(394∼491) 때 설,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491∼519) 때라는 설 등 다양하고, 또 십이월이십삼일 갑인(十二月二十三日甲寅)과 '신유년'(辛酉年)이 나오므로, 이를 단서로 추정하여 대략 421년(장수왕 9)과 481년(장수왕 69)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기록을 놓고 420년, 449년, 451년, 480년, 506년 등 많은 논란 끝에 449년 장수왕대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속민'으로 표현되던 것이 이 비에서는 '여형여제'(如兄如弟)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적어도 5세기 이후의 표현이며 그동안 양국 관계에 일단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삼국사기에 의해 고구려와 신라의 본격적인 대립이 5세기 중반 무렵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전반이 더 유력해진다.
또, 가장 많이 판독된 비문의 첫 줄 ‘고려태왕(太王) 조왕(祖王)’을 두고 즉, 비를 세울 당시 임금의 할아버지가 어느 임금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첫머리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이 있고, 대형(大兄)·주부(主簿)·대사자(大使者) 등 고구려 관등이 자주 나와 이 비가 고구려에 의해 세워졌다는 증거가 된다.
아무튼 현재까지 밝혀진 비문의 내용은
“고려태왕 조왕은 신라 매금(寐錦)과 형제처럼 지내왔는데, 회맹을 위해 동쪽으로 왔다. 신라 매금과 고구려 태자 공(共),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주부 등이 태왕을 맞이했고, 이들은 영에 꿇어앉았다.
태왕은 연회를 베풀고, 신라 매금과 그의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 6개월 뒤인 12월 23일 동이(東夷) 매금의 신하들이 우벌성에 모여서 5월의 회맹에 참여했던 고구려 관리와 회맹에서 이루어진 협약에 의하여 모인삼백(募人三百)의 주체가 되고, 이를 진행하는 실질적 책임자로 고구려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3인과 신라 측의 중인(衆人: 지방세력)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고추가(古鄒加) 공 군대와 고모루성(古牟婁城) 수사(守事)가…….“
라는 등이 요지이다.
▲1972년 이전에 대장간 기둥, 빨래판 등으로 사용되어 마모가 심해진 고구려비
원문(原文)
<前面>
1) 五月中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2)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3) 奴主簿道德□□□安□□去□□到至蛫營□太子共□」
4) 尙□上共看節賜太翟鄒□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5)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6)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7)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8)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亏桓奴主簿□」
9)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10) □□奴□□□□ 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左側面>
1) □□□中□□□□城不□□村舍□□□□□□□沙□」
2) □□□□□□□□班功□□□□□□□□節人□□□」
3) □□□□□□辛酉年□□□十□□□□□太王國土□」
4) □□□□□□□□□□□□□□□□□□□□□□□」
5) □□□□□□□□□上有□□酉□□□□東夷寐錦土」
6) □□□□□□方□桓□沙□斯色□□古鄒加共軍至于」
7)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右側面>
1) □公□□□□衆殘□□□□□□□□□不□□使□□□壬子□□伐□□□□□□□□□□□□□□□□□
이 비문을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고구려’로 알고 있는 나라가 스스로 ‘고려’라고 했으며, 신라를 ‘동이’라 낮춰 부르고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금은 신라가 22대 지증왕(503) 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전까지 마립간 혹은 이사금이라고 불렀던 별칭으로 보고 있다.
또,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시대의 관직명과 광개토왕 비문에서와 똑같은 ‘고모루성(古牟婁城)’ 등의 글자,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신라를 지칭한 문자며, 고구려왕이 신라 매금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는 등 신라의 종주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서는 고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寐錦王)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있다.
수천은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뜻하며,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백제와 신라는 옛 부터 속민(屬民)이어서 늘 조공을 바쳐왔다"라는 구절도 하나의 증거가 된다.
400년(영락 10)에 이미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받고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서 낙동강 유역에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인 적이 있었다. 비문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중화'(中華)로 여기는 의식을 전제로 하여 나온 표현으로, 당시 고구려는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 국가나 종족들을 조공국과 같이 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군사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도 비문 속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지휘관이 주둔하고 있던 신라 영토는 중원 지방이 아니라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북도지방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군의 주둔지로 우모루성과 우벌성(于伐城)이 나온다. 고모루성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고모루성에 파견된 고구려 군사지휘관)가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인 다우환노(多亏桓奴)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애서 충주에 이르는 남진로에 있었던 성으로 보인다. 우벌성은 충주나 상주, 순흥에 있었던 것으로 의견이 제기되어 있다.
궤영(跪營)은 고구려 태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영(行營)으로 보는 견해와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의 왕이 궤영에 이르러 교를 받고 의복을 하사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휴전선에 가로막힌 현실에서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북쪽에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데, 이 고구려의 비가 발견되었다.
당시까지 고구려시대의 비는 만주는 물론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서 1880년 만주 길림성 지안현 퉁구 광개토왕릉인 장군총(將軍塚)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비가 유일했다.
입석리(立石里)는 ‘비석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통일신라 38대 원성왕 때 충주가 한반도의 중심지라며 세운 ‘탑평리 7층석탑(중앙탑; 국보 제6호)’에서 개울 건너 3㎞쯤 떨어진 곳이다.
마을주민들은 높이 1.44m, 두께 0.55m의 어린애 키만 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갓도 씌워지지 않은 평범한 비를 오랫동안 주변에 흔한 선돌 중 하나로 여기고 수해로 무너지자 개울가의 빨래판으로 쓰다가 1979년 충주의 문화재 동호인 모임인 예성동호회에서 비에 한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팀의 조사로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이다.
고구려비는 이후에도 2012년 7월에 중국 길림성 지안에서 1기가 추가로 발견되었을 뿐이다.
충주 고구려비의 위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 해보면
첫째,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둘째,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3국간의 정치적 관계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다.
넷째,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다섯째,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리관 속에 보관 중인 고구려비 탁본
▲전시관 입구의 삼족오(三足烏) 조형물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고구려비는 그동안 충주시에서 비각(碑閣)을 1981년 비각을 지어서 관리해 왔고, 비가 있던 곳에는 비각을 없애고 모형 비와 안내판을 세웠다.
2010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비각을 헐고 2012년 7월19일 현재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이 개관되었고, 2013년12월에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2013년에는 전시관 일대를 ‘고구려 역사공원’이라 칭하며, 전시관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이다.
단층인 전시관 건물은 완만한 ㄹ자형으로서 마치 물류창고 컨테이너같이 투박하지만, 전시관 내부의 전시기법은 매우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역사적으로 충주 지역의 중요성을 소개하는 슬라이드들이 있고, 비좁은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가도록 설계된 내부는 고구려비와 탁본,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만주 광개토왕릉비의 모형물과 탁영(拓影), 고구려인들의 각종 생활유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중 가장 오래인 375년 조성된 ‘안악3호 고분’ 모형은 동서남북의 사신도(四神圖)의 벽화를 실감 있게 그렸고, 무덤의 내부 모형까지 만들었다.
다만, 고구려비 전시실 앞에 세워진 말을 탄 고구려 무사의 모습은 당시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고구려 무사들은 말과 무사에게 철갑을 입힌 개마무사(鎧馬武士)가 특징인데도, 말에 철갑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사도 고구려의 전통적인 조우관(鳥羽冠)이 아니라 마치 왜군 모습과 같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고구려비가 발견 이야기
“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어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지목한 사람들은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뿐인가.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잖아.”
예성동호회라. 이 모임은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예성예성(蘂城)동호회의 개가
향토연구회인 ‘예성동호회’가 기념사진이나 찍으려고 모여 중원 가금면을 답사하던 중 발견한 중원 고구려비.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1979년 9월5일 답사팀이 어느 식당에서 디딤돌로 사용하던 돌에서 연꽃무늬를 발견했다. 답사팀은 “고려 충렬왕 3년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이 연꽃을 조각했다 해서 꽃술 예(蘂)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고려사 기록을 떠올렸다. 이 돌은 충렬왕 당시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신방석(信防石·일종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마침 지역 언론에서 ‘도대체 모임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 때였어요. 그래서 이 디딤돌 발견을 떠올려 예성동호회로 이름을 붙인 겁니다.”(장준식 교수)
이듬해인 79년 2월24일.
예성동호회는 ‘아주 특별한’ 답사길에 올랐다. 동호회 창립의 산파역을 맡은 유창종 검사가 3월2일자로 의정부지청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십 수 차례 답사를 다녔어도 우리끼리 사진 한 장 못 찍었어요. 유물, 유적 사진 찍기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랬죠. 그래서 이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해서 모였습니다.”
기념사진만 찍을 수는 없는 일.
중앙탑(국보 6호) 부근을 답사하면서 기념촬영을 했고, 내친김에 중원 가금면 하구암리 묘곡에 있는 석불입상과 석재부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답사단을 태운 차가 중앙탑을 지나 입석(立石)마을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충북도청 소속 공무원이었던 김예식씨(작고)가 자동차를 세웠다.
“잠깐만요. 저기 (입석마을의) 저 돌 보이시죠. 저 돌 때문에 입석마을이라 하는데 한번 보고 가시죠. 일전에 제가 보았을 때는 백비(白碑·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은 비석) 같았는데….”
일행이 우르르 내려 비석을 살펴보았다. 눈을 비벼가며 비석을 살펴보는 순간 “아!”하는 감탄사들이 일제히 터졌다. 눈에 불을 켜고 손으로 더듬어보니 삼면에 글자가 빽빽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분명 國, 守, 土, 大자 같은 글자는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안성(安城)이라는 글자를 읽었는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충북에 무슨 경기도 안성? 그런데 이 ‘안성(安城)’은 나중에 고모루성(古牟婁城·고구려성)이었는데, 당시엔 안성으로 읽었던 거죠.”(장준식 교수)
▲예성동호회 회원들의 발견 당시 관찰하는 사진
■칠전팔기의 상징
하지만 동호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대한 두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즉, 먼저 조선 숙종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에 사는 전의(全義) 이씨 문중에게 두 개의 돌기둥(石柱)을 기준으로 그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 마을 사람의 18대 조상(15세기)이 경상감사를 하다가 순직해서 유해를 남한강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이곳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이곳 하구암리 통점산에 산소를 정하고 그 분의 공적을 기려 땅을 하사하면서 이 문제의 입석을 포함해서 3개의 돌기둥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이다.
1972년 대홍수 때는 입석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고 이 비석도 쓰러졌다. 그러나 마을청년들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마을’이라는 구호비를 세우고는 바로 그 옆에 쓰러졌던 비석을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러니 비석은 그저 토지경계비일 뿐이고, 그래봤자 조선시대 비석인데,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김예식 등 일부 회원들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혹시 진흥왕순수비류의 중요한 비석일 수도 있다는…. 김예식은 그 해(1979년) ‘예성문화(蘂城文化)’ 창간호에 ‘중원고구려비 발견경위’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발견과 관련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께서 충주를 방문하셨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 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황 교수는 충주 일대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에서 진흥왕순수비 같은 비석이 나올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역시 그의 예견대로 1년 뒤인 1978년 단양에서 진흥왕대에 세워진 신라 적성비가 발견된다.(경향신문 9월6일자 참조)
이는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1년 전의 일이다.
어떻든 김예식은 황 교수의 이야기가 늘 귓전을 맴돌았다. 그랬기에 입석마을 비문을 예사롭게 보지 않은 것이다.
“진홍섭 박사의 논문 등을 보고 삼국시대 고비(古碑)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있었다. 그런 지식을 토대로 이 비석이 고식(古式)의 풍취를 안고 있었다. 또 조선시대 것이면 어떠랴. 비문을 읽을 수 있다면 당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3월말.
황수영 교수가 일본학자들과 함께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역시 1978년 예성동호회가 찾았다)을 답사하러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문화재관리국이 중원군 문화공보실장이던 김예식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정말 잘된 일이네. 이 참에 문제의 비석을 한번 보여드려야지.”
예성동호회 차원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풀 절호의 기회였으니…. 약속날짜는 4월5일 식목일이었다.
▲현 전시관 앞 마당에 있는 '칠전팔기의 마을'비
■진흥대왕의 현신?
4월5일 낮 12시.
황수영 교수는 일본인 학자 2명, 그리고 정영호 단국대 교수와 동행했다. 황 교수가 석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제자인 정영호 교수에게 연락하여 “함께 가보자”고 한 것이다.
황수영 교수의 원래 방문 목적은 일본인 학자와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답사하는 것. 하지만 김예식은 마음이 급했다.
“황 박사님을 우선 가금면 입석마을로 모시고 갔어요. 비석을 한 바퀴 돌아보시는 그 분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군요.”
친견이 끝나자 김예식은 황수영 교수와 일인 학자들을 안내, 원래의 목적지인 마애불상군이 있는 봉황리로 떠났다. 문제의 비석은 정영호 교수와 예성동호회의 이노영 회원 등이 남아 탁본하기로 했다. 김예식이 봉황리 답사 도중에 황수영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 선생님, 석비 어떻게 보셨나요.”
“글쎄요. 진흥왕순수비류의 고비(古碑) 같은데…. 아무튼 내 마음은 온통 그 편에 가 있군요.”
황수영 교수 역시 일본인 학자와의 봉황리 답사는 뒷전이고, 온통 그 비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따라 일본학자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봉황리 마애불상을 조사하던지…. 마음은 콩밭에 가있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김예식)
그날 오후, 예성동호회는 황수영 교수 일행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충주의 ‘山다실’에 들렀다.
“우리는 다방에서 정영호 교수가 입석리 비석에서 해온 탁본 1장을 펴서 다방 실내 장식용 병풍에 걸었습니다. 정영호 교수는 탁본 1장을 일행에게 주고는 친지를 만난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 글쎄,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 같은 글자가 읽히지 않는가. 황수영 교수와 일인학자 둘, 예성동호회 김풍식, 장기덕, 최영익, 이노영, 허인욱과 김예식 등 9명은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어! 진흥대왕(眞興大王)?”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오독한 것이다.
“그랬을 거야.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모두들 선입견을 갖고 있었으니 진흥으로 볼 수밖에 없었겠지.”(조유전 관장)
어떻든 당시 황수영 교수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 나는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 되는데….”
황 교수는 거듭 차를 청했다.
“이 석비는 분명 진흥왕순수비의 유(類)가 틀림없다!”
일행이 나름대로의 식견으로 석비를 읽고 있는데, 친지를 만나러 간 정영호 교수가 다방에 들어섰다. 그날 석비를 탁본한 정 교수는 이미 이 석비의 글자와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정 선생(정영호 교수), 바로 조사에 착수해야지.”(황수영 교수)
“아니 선생님께서….”(정영호 교수)
“아니야. 충청북도는 정 선생(단국대)이 계속 조사했으니까. 정 선생이 해!”
“예, 그럼 선생님 하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충청북도 조사를 전담하다시피한 것을 알고 단국대가 조사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웬 고구려 지명·관직?
그때가 1979년 4월5일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조사는 시급을 다퉜다. 7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석비의 이끼를 걷어냈다.
이윽고 이튿날인 8일 아침, 정식조사를 위한 고유제가 끝날 무렵 한 여인이 달려와 “예배를 해야 한다”고 거듭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순택(당시 57)이라는 여인이었다. 시할아버지부터 3대째 이 석비에 기도해왔는데, 그 여인도 여기서 기도한 뒤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당시 영남대 졸업반이었다.
“바로 이렇게 이 석비가 마을의 표상으로 치성을 드리는 대상이었으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 입석마을 사람들의 공이다.”(정영호 교수)
본격적인 석문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몇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前部大使者’ ‘諸位’ ‘下部’ ‘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특히 처음에 안성(安城)으로 오독했던 글자가 자세히 보니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분명했다. 고모루성이면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에 보이는 바로 그 성의 이름이 아닌가.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때 서울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김광수 당시 건국대 교수가 탁본을 보더니 대번에 말했다.
“이건 고려(高麗)네.”
이것이 선입견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진흥왕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었던 것이었는데…. 선입견이 없던 김 교수가 그걸 고려(高麗)로 바로잡은 것이다.
“지방의 향토연구모임이 발견한 고구려 비 때문에 학계가 난리가 났지. 충북지역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한 고구려 석비가 발견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조유전 관장)
[출처 : 경향신문]
▲발견 당시 입석리에 화단에 있던 고구려비의 모습
▲1972년~1976년까지의 고구려비의 수난
▲고구려비 발견 당시의 기록
▲2012년 전시관이 생기기전에 있던 고구려비 비각
▲1981년~ 2012년까지 비각이 있었던 자리에 세운 고구려비의 모형
[관련참고자료]
▲지안 고구려비(사진 -검색인용)
中 지안 고구려비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에서 작년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라고 중국 학계가 잠정 결론을 내렸다.
지안 고구려비 연구에 참여한 장푸여우(張福有) 지린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은 10일 중국문물신식(정보)망에 '지안 고구려비 비문에 관한 보충 설명'이라는 보고서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중국 연구팀은 지안 고구려비의 건립 연도가 장수왕 15년 때인 427년 정묘년이라고 결론지었다.
한국 학계 일각에서 지안 고구려비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 앞서 건립된 현전(現傳)하는 고구려 최고(最古) 비라는 분석이 나온 것과는 다른 견해다.
중국 연구팀은 최초 발표 때에 비해 열여섯 글자를 추가로 판독해냈다.
이에 따라 비석에 새겨진 218자 가운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에서 156자로 늘어났다.
추가로 판독된 글자는 첫 번째 행 7번째 글자인 '授'(수), 두 번째 행 10∼13번째 글자인 '靈祐護蔽'(영우호폐), 세 번째 행 10번째 글자인 '此'(차) 등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초기 발표 때처럼 지안 고구려비와 중원 문화와의 연계성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비문의 '繼古人之慷慨'(고인의 강개함을 이어받아)라는 표현이 동진(東晋) 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에 나오는 '伊古人之慷慨'와 첫 글자만 다르다거나, '四時祭祀'(사시에 제사를 거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기원했다는 점 등을 강조하면서 "비문 자체가 곧 중국 고대 비문"이라고 해석했다.
중국은 지난 1월 중국문물보를 통해 지안 고구려비의 존재를 처음 밝히면서도 이 비석의 여러 특징이 "고구려와 중원과의 문화적 연결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한편 보고서는 지안 고구려비가 현재 지안시에 위치한 고구려박물관 1층 로비에 유리에 싸여 보관 중이라고 설명했다.
지안 고구려비는 작년 7월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발견된 고구려비다.
중국은 그간 '지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 소조'를 구성해 지안 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여기에는 웨이춘청(魏存成) 지린대 교수,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 등 과거 역사 왜곡 논란을 촉발시킨 동북공정 관여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한국 학계의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지안 고구려비에 대한 기본 연구를 마친 중국 문화재 당국은 내달 1일부터 지안 고구려박물관에서 이 비석을 일반에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고대사학회 추가 판독 내용 공개
지난해 7월 중국에서 발견된 '제2의 광개토대왕비'인 지안(集安) 고구려비는 총 10행으로, 모두 218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발행하는 '중국문물보'는 이달 초 비석에 적힌 글자 가운데 140자를 판독해 공개했다.
한국고대사학회는 중국문물보가 보도한 판독 내용과 탁본 사진을 토대로 비문을 추가로 판독해 30일 발표했다. 또 비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점(標點) 작업을 통해 쉼표, 마침표 등 문장 문호를 달았다.
지안 고구려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담은 이른바 수묘비(守墓碑)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국고대사학회 총무이사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는 "비문은 크게 고구려의 개국(開國)과 왕위 전승을 기술한 서두와 수묘제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본문으로 나눠진다"고 설명했다.
본문에는 "왕릉 수묘제와 제사 제도의 정비, 문란해진 수묘제에 대한 대응책, 수묘제와 관련된 율령을 제정하고 수묘비를 건립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비문 일곱 번째 행의 "戊□(□는 훼손된 글자)는 무자(戊子)년으로 판독될 수 있다"면서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이 부왕인 고국양왕이 (무자년인) 388년 제정한 율(律)에 입각해 건립한 수묘비의 하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분석했다.
수묘인을 두고 제사 등 왕릉을 관리하게 했는데 수묘 제도가 문란해지자 부유한 사람이라도 수묘인을 사고팔 수 없게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죄과(罪過)를 부여한다는 게 비석의 주요 내용이다.
여 교수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 개국과 광개토대왕의 공적 내용이 차례로 나오고 비문 마지막 부분에 수묘제 내용이 나온다"면서 "지안 고구려비에는 광개토대왕비보다 수묘제 내용이 상세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의 수묘제 내용은 지안 고구려비 내용을 축약해 재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한국고대사학회가 추가로 판독해 공개한 비문 전문과 비문을 해석한 것이다. (□는 훼손된 글자, < *>는 판독 가능성이 높은 글자, < ?>는 판독 여지가 있는 글자, [ ]는 추독 가능한 글자)
□□□□世, 必<振*>天道, 自承元王, 始祖趨牟王之創基也.
(□□□□世, 필연적으로 천도를 떨쳐 일으키고, 스스로 원왕(천왕=천제)을 계승하여,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셨도다.)
[天帝之] 또는 [日月之]子, 河伯之孫, 神□□□□蔭, 開國闢土, 繼胤相承.
([천제지 또는 일월지]자, 하백지손(하백의 손자)으로서 神□□□□蔭, 나라를 개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였고, 후사로 이어져 서로 계승하였다.)
□□□□□□烟戶, 以□河流, 四時祭祀.
(□□□□□□烟戶, 以□河流, 사시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然<而*>□備長, 烟 [戶]□□□烟[戶]□□□□富足□轉賣
(그렇지만 <수묘제가> 갖추어진지 오래되어 연 [戶]□□□烟[戶]□□□□富足□轉賣)
□□守墓者, 以銘 □□□□□□□□□太□□□□□王神□□與東西 □□□□□□, 追述先聖功勛, 彌高悠烈, 繼古人之慷慨, □□□□□□□□<曰?>
(□□守墓者, 以銘(새기고) □□□□□□□□□太□□□□□王神□□與東西□□□□□□, 선성(선성왕)의 공훈이 아주 높고 매우 빛남을 추술하고, 고인의 강개함을 이어받아, □□□□□□□□)
自戊<子*>定律, 敎<內?>發令□修復.
(戊<子*>年에 율을 제정한 이래로 영을 내리시어 수복하게 하셨다.)
各於 [祖先王墓], 立碑, 銘其烟戶頭卄人名, □示后世.
(각 [조선왕의 묘]에 비를 건립하여, 그 연호의 호장 20인의 이름을 새겨서, 후세에 □示하도록 하셨다.)
自今以后, 守墓之民, 不得□□更相轉賣, 雖富足之者亦不得, 其買 賣□□違令者,后世□嗣□□, 看其碑文, 與其罪過.
(지금 이후로 수묘지민은 □□ 다시 서로 전매할 수 없고, 비록 부유한 자라도 또한 (매매를) 할 수 없다. 매매하여 □□ 영을 어긴 자는 후세까지 □嗣□□, 그 비문을 보아 죄과를 부여한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1.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2. 해석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 나성(莫 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 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 佳城), 성( 城) 성(城)을 파하였다.
20년(410) 경술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 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하략)
3. 설명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 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니혼쇼키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 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한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정밀한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한편,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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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래지(跚跚來遲)
글/청현
꿈속에 너를 보고
밤마다 그리워하였다
지난 세월 50년에
경국(傾國)이라한들
무엇이 두려웠으랴
절세가인은 너를 두고 한말
나비 같은 춤사위에
넋이 사라지고
어여뿐 섬섬옥수(纖纖玉手)
그 옥비녀 손길 그립구나
어이하여
안아보려 하나 안기지 않고
잡아보려 하나 잡히지 않으니
더디고도 더딘 너의 모습
허공만 부여잡고
한숨으로 밤을 가르고 있느니...
**산산래지(跚跚來遲: 더디고 더디다란 뜻)란 말은 중국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받던
이부인(李夫人)이 죽고 난 다음 그녀를 그리워하며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자료출처-淸顯書齋 http://blog.daum.net/cheongpa580601/1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