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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댁으로 알려진 국악가수 양지은(33)은 2년 전 방송에 출연해 제주 민요 ‘너영 나영’을 불렀다. 그는 제주 민요를 현대 리듬에 맞춰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생소한 제주 민요가 친숙하게 느껴졌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제주 출신 가수가 현대적으로 부른 민요
2021년 제주도홍보대사로 위촉된 국악 가수 양지은이 위촉패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양지은은 제주 민요 '너영 나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노래했다. 사진 제주도
‘너영 나영’은 앞부분에서 편안한 리듬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뒤로 가면 사물놀이로 흥을 돋우는 반전 멜로디로 전개된다. 제주어인 ‘너영 나영’은 표준어로 ‘너랑 나랑’이란 뜻이다. ‘너영 나영’은 ‘오돌또기’ ‘이야홍 타령’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제주 민요다.
올해 초 가수로 데뷔한 전 예술의전당 대표 고학찬(75)씨 사연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고씨는 “과거 미국에서 15년 살다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는 3대 독자 아들인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는 “3일 동안 짧은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날, 혹시나 해서 어머니가 즐겨 부르셨던 제주 민요 ‘이아홍 타령’을 불렀는데, 그 순간 말도, 표정도 멈춰 있던 어머니께서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고 전했다. 이런 걸 보면 제주민요에 뭔가 강력한 ‘치유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민요의 나라 제주…척박한 환경 삶 반영
고학찬 전 예술의전당 대표가 집무실에서 영어로 서예를 쓰는 모습. 고 전 대표는 올해 가수로 데뷔해 제주민요 '이아홍 타령'을 불렀다. 중앙포토
제주는 ‘민요(民謠)의 나라’로 불린다. 바람·돌·여자 등 삼다(三多)의 섬이지만, 민요도 엄청나게 많다. 제주 민요는 대략 1200곡쯤 된다고 한다. 민요는 사상·생활·감정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민요에 스며 있는 제주 사람의 삶을 들여다봤다.
제주에 민요가 많은 배경에는 삼다가 있다. 제주는 돌·바람이 많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농사짓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여성까지 나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힘든 노동에 따른 피로와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노래를 부를 때가 많았고, 이러다 보니 민요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마을마다 말이 조금씩 다른 것도 민요가 다양해진 요인이었다. 같은 민요라 해도 지역마다 가사와 음률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주 민요에는 농사짓기 소리, 고기잡이 소리, 일할 때 부르는 소리, 의식(儀式)에서 부르는 소리, 부녀요, 동요, 잡요 등이 있다.
제주 민요, 여성이 일하며 부른 노래 많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제주지방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 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 해녀(가운데)와 동료들이 공연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민요는 노동요와 부녀요가 압도적으로 많다. 또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자주 불렀다. 여성이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노동요에는 농사지을 때 부른 ‘검질(잡초) 매는 소리’가 가장 많고 ‘밭 밟는 소리’ ‘도리깨질 소리’ ‘방아 찧는 소리’ 등이 있다. 어로 작업 때 부르는 민요로는 ‘해녀 뱃소리’가 있다. 이는 해녀가 전복을 따러 갈 때 노를 저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다. 맷돌질하면서 부르는 ‘고랫소리’ ‘가래질소리’ ‘꼴 베는 소리’ ‘톱질 소리’ ‘방앗돌 굴리는 소리’ 등도 있다. 또 말총으로 망건·탕건 등을 짜며 부르던 노래도 있다.
제주 여성은 노동요를 통해 신세를 한탄하거나 삶의 고달픔을 표현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또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말 못 할 서러움을 하소연하는 노래도 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부르는 노래도 있다.
새야! 저세상 가서 우리 부모 만나,
우리 딸 어디 앉아 울고 있더냐? 우리 부모가 묻거든,
길거리에 앉아 엄마 부르며 울고 있더라고 말해 다오.
세대 잇는 제주민요…모국어 모르는 외국 손녀에까지 전해져
지난 12일 오후 4시 제주시 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 광장에서 열린 제4회 제주일노래 상설공연 현장에서 만난 제주문화원 부혜미 민요 강사. 최충일 기자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는 지난 7월 8일부터 8월 12일까지 ‘제주 일노래(노동요)’ 공연이 열렸다. 지난 12일 공연장에서 만난 제주문화원 부혜미(44) 민요 강사는 “제주인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게 제주 민요”라고 했다. 어머니 한춘자 명창에게 제주 민요를 배운 그는 제주 민요·신화·굿을 주제로 노래하며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제주 민요는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세대 간 교감하고, 전통을 계승한다. 1988년 재일교포와 결혼해 현재 일본 나가노현 우에다시에 사는 우리 누나는 그곳에서 딸 넷을 낳았다.
몇 해 전 일본 도쿄에 사는 큰조카가 신랑이랑 두 살 된 딸을 데리고 외가인 우리집에 다녀간 적이 있다. 그때 어린 조카딸이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데 한국어는 고사하고 제주말을 전혀 못 하는 조카 입에서 어설프게나마 제주 민요 ‘웡이 자랑’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일종의 자장가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애기구덕 문화 모형. 과거 제주의 어머니들은 애기구덕에 아기를 넣고 흔들며 '웡이 자랑'이라는 일종의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기를 재웠다. 최충일 기자
조카는 제주말을 전혀 못 하지만 어릴 적 외할머니가 자신을 재우기 위해 불러줬던 자장가만은 원어로 기억, 딸에게 불러주고 있었다. 생전에 누나에게 “자식들 한국어 교육 안 한다”며 역정 내시던 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다면 뭐라 하셨을까?
자랑 자랑 웡이 자랑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저리로 가는 검둥개야 이리로 오는 검둥개야 우리 아기 재워 주라
검둥개야 울지 말라 암닭이랑 울지 말라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제주 여성이 즐겨 부른 ‘시집살이 노래’는 시집간 여성 생활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현실을 한탄하거나 타협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반발한다. 시집 식구와의 관계, 힘에 겨운 노동, 경제적인 설움 등이 녹아 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집안·시집살이·부부관계 등 풍성한 주제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의 한 바닷가에는 제주지방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 노래 기능보유자 김영자(85) 해녀를 모델로 만든 석상과 그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최충일 기자
요놈의 시집살이 못 살면 말지.
시누이야 잘난 척 말아. 너도 언젠가는 시집을 간다.
나도 참다 참다 못하면 이미 잔에 비운 참기름처럼
당장에 시집살이 때려치우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며느리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며느리는 나머지 시집 식구도 비난한다.
암닭 같은 시어머니 장닭 같은 시아버지 병아리 같은 시아기들
시아버지는 XX의 자식 시어머니는 잡X의 딸X
시아버지는 소라같이 이만 성깃성깃, 시어머니는 전복같이 시무룩,
시누인 고셍이(놀래기 일종)같이 이리 호로록 저리 호로록
남편은 이런 시집 식구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보호해 줘야 할 존재다. 하지만 무능력하다. 아내가 힘든 노동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껴안으려 하며 성적 욕구만 채우려 한다. 그래서 뭉개(문어)에 비유한다.
구구절절 서럽고 아픈 사연 노래로
지난 12일 오후 4시 제주시 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 광장에서 열린 제4회 제주일노래 상설공연에서 민요가수 김보람씨가 노래하고 있다. 최충일 기자
시아버지가 죽으면 긴 담뱃대도 내 차지
시어머니가 죽으면 궤방(창고) 구석도 내 차지
시누이가 죽으면 살레(찬장) 구석도 내 차지
서방님이 죽으면 동네 건달들도 내 차지
어느 때랑 시아버지 죽어 고추장 단지도 내 차지
행장 궤도 내 차지 상석도 내 차지.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으면 시부모가 죽어버렸으면 했을까. 만일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며느리 차지가 된다. 심지어 남편이 죽으면 동네 남자들도 모두 다 내 차지가 된다. 그래서 시부모가 죽자 너무 기뻐 춤을 춘다. 그런데….
시아버지 죽어 춤추다 보니
콩 씨 뿌려 놓은 생각이 난다.
시어머니 죽어 춤추며 놀다
보리 방아 물 섞어 놓으니
시어머니 생각이 다시 난다.
시아버지·시어머니와 밭이나 부엌에서 일하던 모습이 생각난다는 의미다. 그렇게 밉고, 그분들이 죽으면 세상 모두가 내 차지가 되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잠시, 매 순간 그분들 생전 모습이 떠올라 울컥한다.
‘시집살이 노래’ 중에는 처첩 간 ‘씨앗 싸움’을 다룬 노래도 있다. ‘큰 각시(본처)’는 ‘큰 각시’대로, ‘족은 각시(후처)’는 ‘족은 각시’대로 구구절절 서럽고 아픈 사연이 가득하다.
제주민요 모티브로 통기타곡까지
제주시 이호동 올레길 중간에 세워진 민속보존회의 민요공연 노래비. 주로 테우배를 타고 인근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던 해녀들이 부르던 민요가 소개돼 있다. 최충일 기자
씨앗(첩)과 싸우러 가니 산을 넘어 싸우러 가니,
동산 밭에 메밀꽃같이 번듯이 앉았는데 씨앗을 보니,
내 눈에도 저만큼 고운데 임의 눈에야 오죽하리.
출발할 땐 머리채 잡고 목 비틀 참으로 갔건만, 막상 메밀꽃처럼 고운 그녀 모습을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저리 고운데 남편 눈에야 오죽이나 할까’ 싶어 단념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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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남편이 ‘숨겨 놓은 그녀’를 반쯤 죽여버리려고, 명품 정장 꺼내 입고 미용실 들러 마사지받고 갔는데, 막상 ‘상간녀’ 모습을 보니 젊고 건강한 ‘그 젊은 년’에 눌려 초라해지는 아내의 심정과 비슷하다. 돌아오면서 “평생 나밖에 모르는 순둥이 내 남편이 나처럼 우아한 조강지처 놔두고 실수로 아주 잠깐, 눈 돌릴 적에야 그 정도 되니까 그랬겠지”라며 자신을 애써 합리화한다. ‘정신승리’라 할 수 있다.
우뚜릇뚜 룻뚜우 우뚜릇뚜 룻뚜우~
저 꿩이나 잡았으면 저 꿩이나 잡았으면~
살찐 날개 쪽은 시엄마나 드렸으면~
힐끔 보는 눈 쪽 일랑 씨아방을 드렸으면~
이 노래는 1970년대를 풍미한 ‘어니언스’가 첫 독집앨범에 수록한 ‘며느리’라는 통기타 곡으로, 제주 민요 ‘꿩 노래’를 모티브로 했다. 어니언스가 어떤 연유로 제주 민요를 접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노래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제주 민요가 대중가요 콘텐트로 살아 숨 쉬고 있어서다. 이 노래는 금지곡이었다가 1987년에야 해금됐다. 금지 사유는 ‘퇴폐’였다.
‘제주 집 만드는 과정’ 스토리텔링 상연
국가무형문화재 제주민요보존회 회원들이 지난 16일 오후 서귀포시 성읍리 제주민요보존회 공연장에서 2023년도 기획공연을 위한 민요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최충일 기자
지난 16일, 서귀포시 성읍리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주민요보존회에서는 회원들이 공연을 위해 제주 민요 ‘영주 십경가’ ‘달구소리’ ‘낭글세왕’ ‘성주풀이’ ‘상사소리’ ‘너영나영’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공연을 지도했던 제주 민요 전승 교육사 강문희(49·국가무형문화재)씨는 “제주 풍광을 노래하고, 그다음 집터를 다지고 돌을 굴려서, 그 돌을 밑단으로 쌓겠죠. 주춧돌도 놓은 다음 성주풀이해서 집을 완성하는 데까지의 과정을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성주풀이’였다. 성주풀이는 새로 지은 집에 가신(家神)인 성주신을 모시는 무속의례다. 제주지역 성주풀이는 집이나 건물을 다 짓고 나면 적당한 날을 택하고 심방(무당)에게 의뢰해서 진행하는 작은 굿으로, 성주신에게 안녕과 번창을 기원한다. 이때 무당이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성주풀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주민요악보집’ 발간…다양한 전승 노력
국가무형문화재 제주민요보존회 전승교육사 강문희씨(가운데)가 지난 16일 오후 서귀포시 성읍리 제주민요보존회 공연장에서 2023년도 기획공연을 교육 중이다. 최충일 기자
예전에는 새집으로 이사 가면 가장 먼저 집안 곳곳에 팥을 뿌렸다. 집을 새로 지어도 북어를 실타래로 감아 천정에 걸어놓았다. 차를 사면 차에 막걸리를 뿌리고 보닛 속에 실타래로 감은 북어를 놓아두기도 했다. 이게 다 성주풀이에서 비롯된 의식이라고 한다. 신에게 소원성취하게 해달라며 비는 것이나, 무당 한 사람이 요령을 흔들며 기원하는 ‘비념(비나리)’은 그 성격이 비슷하다.
제주민요보존회는 2020년 ‘제주민요악보집’을 발간했다. 악보집에는 노동요 등 제주민요 43곡을 담았다. 앞서 2015년에는『제주민요사전』이 발간됐다. 여기에는 기존 채록된 영상·음성·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제주 전역 창자(唱者) 노래를 수집하고 디지털화한 제주 민요 600여 편이 수록돼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에는 제주 민요를 전문으로 하거나,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 학생들도 방과 후 활동 가운데 제주 민요 부르기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강씨는 “제주 민요는 제주라는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억척같이 살아온 섬사람의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보물 같은 존재”라며 “다양한 콘텐트로 만들어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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