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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개
서 정 인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이 갯가로부터 불어왔다. 시내버스역 앞 정류소에는 사람들이 후줄근하게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그리로 몰려갔다. 역 앞 빈터 그늘에 지게를 눕혀 놓고 그 위에 기대 앉아 파리를 날리면서 졸고 있던 지게꾼 두엇이 그 사람들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헌 농구화를 신고 검정 쭈그럭 가방을 옆구리에 낀 한 사내가 버스 안을 기웃거리면서 문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에게 “뒷개 가는 차는 안 오요?”라고 물었다. 얼굴이 누렇게 뜨고 지진 머리카락 위에 흙먼지가 부옇게 앉은 여자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 올 것이요”라고 대답하고 사람들 틈에 끼여서 버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낡은 시내버스는 달려들 때 일으켰던 황토 먼지가 간신히 가라앉은 국기 속으로 사내의 얼굴에다가 새카만 연기를 내뿜으며 떠나갔다. 사내는 코를 벌름거렸다. 연기가 흩어져서 사라지자 그는 바람결에 묻혀 온 비릿한 소금기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었다. 그슬리고 먼지 낀 낡은 집들 너머 길 모퉁이 저쪽에서는 한없이 큰 바다의 한 끝이 쓰레기와 버린 기름으로 더럽혀진 채 찰싹거리며 선창가를 핥고 있을 터였다.
그는 버스를 타려던 생각을 버리고 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선창은 역에서 버스 정거장 두엇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 흙먼지가 풀썩풀썩 일었다. 길 왼편 역과 부두를 잇는 철길 위로 곡간차만을 연결한 기차가 슬금슬금 기어갔다. 맨 뒤칸에 차장이 매달려서 펼친 파란 기를 빨간 기와 함께 한 손에 움켜쥐고 흔들고 있었다. 철길과 길 옆 집들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바짝 붙어 있었는데, 기름 짜는 집 앞에 한 늙은 여자가 널판자 의자를 내놓고 앉아서 지나가늑 기차의 꽁무니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길이 철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면서 잔교가 차츰 가까워지자 부두는 조금씩 술렁대기 시작했다. 길은 좁아지고 양편으로 건어물 가게와 선구점과 술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다. 왼쪽 가게들 뒤가 바로 선창이었다. 건장한 인부들이 웃통들을 벗어붙이고 섬사람들이 마실 소주 큰 병들을 말구루마로부터 짝으로 떼고 있었다. 짐을 싣고 온 짐승들 이 긴 고개를 흔들면서 꼬리를 쳐들고 배설을 했다. 사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말똥을 피해서 잔교 옆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요.” 댓방 아줌마가 배추를 다듬으면서 말했다.
“날세.” 사내가 탁자 위에 쭈그러진 가방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그 앞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가게 안에 딴 손님은 없었다.
“아이고! 뭣 헐라고 또 오요?” 여자가 배추포기를 내던지고 일어서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막걸리나 한잔 주소. 서울서 지금 막 내려오는 길이네.”
“어서 가시요. 영달이가 학교 파하고 돌어올 때가 됐소. 가 오기 전에 얼렁 가시요.”
“어디서 만 원 두 개만 만들 수 없을랑가 모르겄네.”
“돈은 한 푼도 없소. 있어도 당신 줄 돈은 없소.”
“영달이 많이 컸제? 가가 지금도 나를 그렇게 미워헝가?”
“한 달에 월사금 육천 원 벌라고 신문배달허요.”
“신문배달이야 애비 있는 자석도 허네.”
“가가 애비 없는 자석이요?”
“새마을 몇 갑 살 돈도 없능가?”
“없소.”
“나, 갈라네. 막걸리나 한 사발 딸소.”
사내가 일어서서 쭈그러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여자가 치마 허리 속으로 손을 넣어 돈을 꺼내 가지고 삼천 원을 세어서 남자 앞 탁자 위에다가 내던졌다.
“술은 없능가?”
남자가 돈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비우도 좋소.”
“나헌티서 비우 빼쁠먼 무엇이 남겼능가?”
“그 돈이 무슨 돈인 줄이나 아요?”
“자네가 술 팔아서 번 돈이지 무슨 돈일라든가?”
여자가 커다란 밥사발을 내와서 막걸리를 가득 따랐다. 뱃고동 소리가 컸다가 갑자기 작아지면서 몇 번 되풀이되었다.
“지난 봄에 당신이 댕겨갔을 때 영달이가 내논 돈이요.”
“내가 댕겨갔다고 가헌티 말을 했능가?”
“당신이 나갈 때 전봇대 뒤에 숨어 있었다요.”
“내가 돈 얻으러 온 줄은 어찌 알았당가?”
“가가 어린안 줄 아요?”
“허! 이 술 어디 묵겼능가? 나, 갈라네.”
“가다가 생각난디 홀짝 마시고 가시요.”
“그럴까?”
사내는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한 손으로 사발을 집어 들고 울대 뼈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단숨에 술을 쫙 들이켰다.
“나, 가네.”
사내가 사발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는 오지 마시요.” 여자가 말했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낀 햇살을 등으로 가득히 받으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버스 정류소에서 걸음을 멈췄다. 선흥 잔교 앞이었다. 어린애를 업은 젊은 여자가 손구루마 앞에 앉아서 냉차를 팔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전봇대란 놈이 싸전가게 간판 위로 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중학생 하나가 작은 정구채를 어깨 뒤로 잦혀 가지고 날아오는 가벼운 제기 같은 것을 맞은편에 있는 더벅머리 청년을 향해서 치고 있었다. 사내는 그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때 버스가 다가와서 그들의 모습을 가려 버렸다. 그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한 쪽 갯가를 떠나서 다른 쪽 갯가를 향하여 시내 한복판을 꿰뚫고 달렸다. 역 앞 빈터를 지나고, 도심을 지나자, 길은 포장이 안 되고 갑자기 좁아졌다. 시장 모퉁이를 돌아갈 때에는 길 양쪽으로 저자가 서 있었다. 차는 슬금슬금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기어갔다. 맞은 편에서 버스가 오면 둘 중의 하나가 멎었다. 그러면 여자들이 폐품 플라스틱 제품들을 녹여서 만든 납작한 벌건 합성수지 통들을 들고 일어서서 한 쪽으로 비켰다. 노점들은 곧 없어졌다. 길 양쪽으로 길만큼이나 오래 된 먼지 낀 작은 집들이 마당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낮은 언덕을 넘자 빈 벌판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갯벌을 막아서 땅을 돋우고 있는 공사판이 보였다.
사내는 종점에서 차를 내렸다. 종점은 언덕배기를 깎아서 넓힌 빈터였다. 한쪽 구석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작은 창고 같은 시멘트 블록 집이 있었는데, ‘뒷개포구개발촉진위원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짝은 활짝 열려 있었고, 둬 평 되는 안은 널빤지 의자 하나만 멩그렇게 놓인 채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그 뒤로 돌아가서 죽은 쥐가 썩고 있는 쓰레기 더미에다가 오줌을 누었다.
포구에는 배가 떠 있었다. 작고 낡은 동력 어선들이 방파제와 화강암을 쌓아 올린 뭍의 끝에다 밧줄들을 던지고 연약한 뱃전에 와서 부딪치는 잔물결들에다가 고달픈 항해의 피로를 찰싹찰싹 씻고 있었다. 선착장 축대가 안 된 바닷가에는 돛을 내린 범선들이 물이 든 데에서는 오리처럼 한가하게 동동 떠 있었고, 물이 아직 덜 든 데에서는 갯벌에다가 닻을 내던지고 나자빠져 있었다. 물에 시달리고 물에 부대껴서 더러는 물속에 가라앉기도 하는 배가 물이 없으니 맥을 못쓰고 모로 누워서 물이 차오기를 기다렸다. 물이 배 밑을 찰랑찰랑 적셔 오면 배는 되살아나서 물을 막고 물위로 떠올라 바람 같은 이야기를 물과 주고받았다. 물은 나무토막을 물위에 띄우는 것이 아니라 나무토막에다가 넋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자빠진 배의 기운 돛대 위에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서 고물간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내는 가게로 가서 담배를 샀다. 낮은 집에다가 커다란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포구를 향해서 몇 채 서 있었다. 그는 새마을을 스무 갑 달라고 했다가 곧 청자 열 갑으로 바꿨다. 그가 신문지에 싼 담배꾸러미를 가방 속에 넣으면서 가게 안을 얼핏 들여다보니, 아는 사람이 기집애를 차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게 한쪽 구석에 의자 몇 개와 탁자를 놓고 병술과 사이1 콜라 같은 찍을 파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은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서서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언제 왔냐? 여그 와서 쇠주 한잔 혀라. 야, 이 가시네야, 니는 가거라. 내가 아까부터 가라고 안터냐? 니는 어른 말을 안 들어서 낭패여. 얼렁 가뿌러.”
여자는 추물이었다. 그러나 고분고분은 해서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여자가 앉았던 의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옆의 의자에 앉았다.
“신수가 훤하구나?” 사내가 말했다.
“쇠주 이거 쓰겼냐? 우리 맥주로 한잔 허꺼나?”
“마시던 병은 비워야제. 너 한 판 씰었냐?”
“뭐, 이거 말이냐? 에이, 나 그거 손 끊었다. 아줌마, 여그 맥주 두 병만 내와.”
“주색잡기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먼 어찔라고?”
“니는 그 동안에 한 본이라도 쭈았냐?”
“다시 그걸 만지먼 손가락을 짤라 쁠란다.”
“그라먼 왼손으로 쪼게? 허긴 왼손이 붙을라먼 더 잘 붙는다더라.”
“너, 지내기가 괜찮은 모양인디, 돈 있으먼 이만 원만 맨들어라.”
“이만 원이 문제냐? 이십만 원이라도 해주께.”
“장난이 아니여. 나, 지금 서울서 오는 길인디, 돈 그것 맨들라고 왔다. 내가 뭘 보고 뻘 바닥에 또 왔겄냐?”
“앉은 자리 술값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래 쌓냐. 이십만 원이라도 맹글어 주라먼 맹글어 준단 말이여.”
“너, 나 이거 다시는 안 만진다는 거 알제?”
“에잇 사람. 그건 나도 손 털었단 말이여. 니, 서울 가서 재미를 별라 못 본 모양이구나?”
“집 짓는 데 가서 흙 파주고, 벽돌 져주고, 세면 버물어 줬다.”
“그래, 집이나 한 채 지었냐?”
“한 채만 지었겼냐? 열다섯 채를 올렸다.”
“많이도 올렸다. 넘에 집만 지어 주먼 뭣 헐 것이ι꾸 나는 여그 수출회사에서 일헌다.”
“취직을 했구나?”
“취직이라니? 합자를 해서 상무를 본다.”
“서이서 허는 회사나?”
“종업원이 줄잡아 삼, 사백 명은 될 거이다.”
“너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뭣을 내놨냐?”
“너는 세 쪽이냐? 곧 우리 종업원들이 들어올 때가 됐다.”
“배 타냐?”
“갯지렁이를 줏어다가 일본에 수출헌다.”
“일본 사람들은 희한한 것을 다 묵는구나?”
“미깝이여. 한 사람이 삼, 사 키로는 줏는디, 즈그들끼리 얽혀 있는 것이 탁 엎어 놓으먼 꼭 잡채밥 당면 삶아 놓은 것 같니라. 한본 안 나가 볼래? 배가 커서 저쪽에다가 댄다. 느그 동생도 있으 거이다.”
“우리 동생이?”
“키로그람당 천팔백 원이여. 사 키로만 줏으면 얼마냐? 얼렁 계산해 봐라. 경비라고는 선가 왕복 삼백 원백이 안 들어. 아, 배가 들어온다. 오늘은 물이 일찍 들었구나.”
“어서 가바라.”
“이따 저녁때 우리집으로 오니라. 내가 술 한잔 내께. 좋은 디가 있니라. 혼은 걱정허지 마라. 그까짓 거이 문제냐?”
상무는 일어서서 술값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잠시 그대로 앉아서 술이 반쯤 남은 잔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상놈은 나이가 가르친다고, 의뭉하고 흉물스런 오색 잡놈도 철이 드니 노름판 인심 같지 않게 늙고 돈 없는 옛날 노름 동무에게 술을 샀다. 돈 몇만 원쯤은 문제도 없다거나 저녁에 술판 한번 벌이자는 얘기는 원래 있는 허풍기에다가 상무 바람까지 겹쳤으니 별로 새겨들을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동생이라는 것은 누구를 두고 하는 소릴까? 영일까 영순일까, 아니면 둘 달까. 영이는 국민학교만 나온 뒤 공장 직공으로, 관청 사환으로, 장터 행상으로, 일로만 어린 뼈를 굳히면서도 동생 제 못 다닌 학교 보낸다고 혼기까지 놓쳐 버린 노처녀였고, 영순이는 언니 뼈빠진 돈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머리가 좋아서 줄곧 일등을 하자 담임선생이 등록금은 댈 테니 대학을 가라는 바람에 귀가 솔곳했다가, 못 가게 되자, 몇 달 동안 비실비실 맥을 못 추고 옆엣사람들 속을 썩였는데,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언니가 차라리 약이라도 먹고 죽어 버리라고 하자 차츰 기신을 되찾고 조금씩 언니를 도와 집안 일을 보다가 전화국 임시직원으로 한 일 년 일해 오고 있는 철부지였다. 사내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구에는 삼백 톤도 넘어 보이는 밋밋한 배가 대추나무에 대추 열리듯 사람들을 빼꼭하게 싣고 방파제 끝에 접안하고 있었다. 배가 뭍에 닿자 사람들이 난리라도 난 듯이 부두 한쪽 끝에 있는 조그마한 창고 앞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갔다. 모두가 여자들이었는데, 노점 아낙네들의 것과 같은 커다란 합성수지 통들을 들고 있어서 달리는 것이 임의롭지 못했다. 그들은 창고 앞에 먼저 오는 대로 두 겹 세 겹 줄을 섰다. 그리고 참새떼처럼 짹짹거리면서 차지한 순서를 새치기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귀다툼들을 했다. 자리를 잡은 여인들은
합성수지 통들로 열을 세우고 줄 밖으로 빠져나와서, 가지고 온 보따리나 가방으로부터 꺼낸 치마를 머리 위로부터 뒤집어쓰고 젖은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려서 발밑으로 빼냈다. 줄 앞에서는 남자들이 창고문을 열어 놓고 저울 위에다가 갯지렁이를 달기 시작했다. 사내는 쭈그러진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도망치듯 갯가를 빠져나갔다.
집에는 사내의 아버지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가래를 돋우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은 육십을 갓 넘었는데 팔십이나 된 것처럼 주름이 깊고 머리가 세었다. 사내는 가방을 한쪽으로 미루어 놓고 노인 옆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었다.
“뭣 헐라고 왔냐? 또 동생들 외투 집어다가 팔아묵을라고 왔냐?”
“헌옷가지야 팔아 봤자 돈이나 돼간디요? 금 패물이나 있으먼 몰라도.”
“썩 나가지 못 허겼냐, 이놈아.”
“오십만 원짜리 적금 옇고 있는 것은 끝이 났는지 모르겄어요.”
“끝이 났으먼 뭣 헐래? 끝이 났으먼 니가 뭣 해?”
노인은 손톱끝을 노랗게 태우며 타들어 오는 담배 꽁초를 재떨이에 부벼서 끄고 담뱃갑에서 새놈 한 개비를 꺼냈다. 새마을이었다. 사내는 가방의 지퍼를 열고 신문지에 싼 꾸러미를 끄집어내서 구식의 낡은 반 토막 농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 돈 나오먼 얻다 쓸라간디요?”
“집 독채 전세 얻는단다. 그러고 또 적금해서 돈 합쳐 가꼬 집 짝만헌단다.”
“사람이 살고 나서 독채 전세고 집 장만이제, 사람 죽어 쁠먼 다 뭣 헐 거이요?”
“가들이 니보고 죽으라드냐? 가들 때문에 니가 못 사냐?”
“적금 열라고 챙겨 논 돈 혹시 없는가 모르겄소?”
“니는 그 동안에 애비가 똥오짐을 받아 냈는지, 어린 동생들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간에 넘에 일이고, 니만 죽을 것 겉애서 아무 돈이나 끌어다 써야 허겼냐?”
“아무 돈이나 끌어다 댈람사 여그까지 뭘라고 오꺼이요? 길 가는 사람 모가지에다가 칼이라도 들여다 대야 헐 형편이요.”
“아무래도 그래야 헐랑갑다.”
“현장 감독놈 멱살을 거머쥐고 박지기를 해뿌렀어요. 뚜드러 맞기는 나가 직사게 뚜드러 맞았는디, 배깥으로 볼가진 거이 없어서 그놈헌티 고소를 당했그만이요.”
“나는 니 말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온다.”
“나가 뭘라고 거짓말헐 꺼이요? 옆엣사람들이 보도시 화해를 부쳐가꼬 오만 원만 주먼 고소를 취하허기로 합의를 봤는디, 돈이 쬐깜 모지래그만이요.”
“누가 니보고 거짓말헌다고 그냐? 니 말이 당췌 안 들려. 모르겄다, 니가 어디서 비명에 목심이나 잃었다먼 그 말이나 귀에 들어올랑가.”
노인은 두어 개비 남은 담뱃갑과 성냥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그래도 역시 아버지밖에 없구나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방을 비워 준 것은 방 안을 뒤져서 쓸 만한 물건을 가지고 가라는 말과 같았다. 아들자식만 자식이 아니라 딸자식도 자식인데, 아무리 “느그 동생 반지 여그 있다. 가들 오기 전에 얼렁 가지고 가거라,”라고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는 눈알을 번득이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이간 장방의 가운데를 막은 미닫이의 저쪽은 동생들의 거처였다. 그의 눈이 낡은 농 한복판의 네모난 자물통에 가서 멎었다. 동생들이 갯가에서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내고 집을 빠져나가자면 서둘러야 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자물통이 잠겨 있었다. 농안 옷보따리 밑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물통을 붙잡은 채 눈으로 열쇠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혹시 아버지가 늙어서 열쇠를 놔두고 나가는 것을 깜빡 잊었으면 낭패였다. 구식 농의 자물통 정도야 확 나꿔채면 열리겠지만, 만일 그 속에 아무것도 안 들었으면 일이 우습게 될 판이었다. 무엇이 들어 있기만 한다면 쇠를 부수고 농문을 여는 것이 아버지의 선간은 더 편하겠지만. 그는 건성으로 열쇠를 찾았다. 열쇠는 아버지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서 손쉽게 나왔다. 그는 죽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농짝의 문을 부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납작하고 길죽한 백동 열쇠로 농문을 땄다. 헌옷가지들을 헤치고 농바닥을 더듬었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옷 보따리가 있었다. 그 밑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서 방바닥에다 풀었다. 돈반짜리 반지나 목걸이를 찾았었는데, 맨 밑에서 신문지로 차곡차곡 싼 두툼한 돈뭉치가 나왔다. 천 원짜리 다발이 다섯 개였다.
사내는 쭈그러진 검정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골목 어귀에서 침침한 눈으로 천기라도 살피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부지, 나, 갑니다. 오늘 밤차로 서울 올라가야겄어요.”
“몸조심 해라. 넘허고 싸와 쌓지 말고.”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등뒤로 들으면서 허둥지둥 구멍가게 모퉁이로 사라졌다. 그가 갯가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제딴에는 잽싸게 내뺀다고 버스 종점께로 달아나고 있는데, 어디서 “오빠아,” 하고 날카뇨운 소리가 들려 왔다. 영이가 합성수지 통을 땅에 끌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지쳐 빠진 몰골로 서 있었다.
“아이고, 웬수. 뭘라고 왔소?”
“그라네도 지금 간다.”
“이본에는 무슨 재앙을 떨었소?”
“아부지가 집 안에는 발도 못 딛게 허두라. 영순이는 지렁이 줏으러 안 갔냐?”
“영순이 어디 갔다는 말도 안 합디요?”
“어디 갔냐?”
“외가에 갔다요.”
“외가에는 왜 가?”
“청댄지 윤탠지, 자식새끼들이 우글우글헌 것이 징글맞게 찾아와 싸서 집에 놔둘 수 있간디요?”
“나도 없는디 윤태가 뭘라고 집에 온다냐?”
“아부지한덴 문안드릴라고 오겄소.”
“집에 들어가거라.”
“오빠가 변변찮은께 별 얄궂은 것들이 다 사람을 우습게 보고 안 그러요?”
“내가 변변찮애도 집에만 있으먼 안 그럴 틴디, 내가 없어서 그렇다. 어서 집에 들어가거라.”
사내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시내차 정류소로 갔다. 차 한 대가 막 들어와서 방향을 돌리고 몇 안 되는 손님들을 풀고 있었다. 사내는 차를 탔다.
그는 시장통에서 차를 내렸다. 저자 바닥에 땅거미가 기어오고 있었다. 그는 양은가게로 가서 끝이 뾰족하게 선 과도를 샀다. 그리고 대폿집에 들어가서 막걸리 두 사발을 들이켜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윤태는 집에 들어와 있었다.
“야, 어서 오니라. 나는 안 올 줄 알았는디. 고맙다, 야. 들어와. 그럴 거이 아니라 그냥 나가꺼나? 잠깐 들어오니라.”
“아짐씨는 어디 가셨냐?”
“즈그 친정에 갔는갑다. 들어오니라. 느그들은 저 방에 가서 공부해라. 테레비 볼래? 그러먼 느그들이 큰방으로 가거라. 이리 들어와.”
윤태는 올망졸망한 새끼들을 안방으로 몰아넣고 사내를 데리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응접 세트가 빼꼭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앉어라.”
“책이 많구나?”
사내가 의자에 앉으면서 책장에 잘 정돈된 같은 크기의 깨끗하고 큰 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끼들 커서 보라고. 나야 언제 보겄냐?”
“저 술도 새끼들 커서 묵으라고 담아 놨냐?”
“그건 내 꺼이다. 한잘 헐래?”
“여기서부터 마시거이냐?”
“술은 나가서 묵자. 술 묵기 전에, 아까 니 무슨 돈이 필요허다고 헌 것 같은디, 참말이냐?”
“있으면 줘봐라.”
윤태가 일어서서 책상 서랍을 열고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돈다발 두 개를 꺼내서 탁자 위에 던졌다.
“아까 니가 말헌 돈 열 곱절이다.”
“이십 만 원이냐?”
“그래.”
사내는 옆 자리에 놓아 두었던 쭈그러진 검정 가방을 끌어당겨서 지퍼를 열었다.
“종이 주꺼나? 쌀래?”
윤태가 신문지를 가져왔다. 사내는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 가지고 신문지 가닥을 벗겼다. 그리고 돈다발 다섯 개를 가지런히 소리를 내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십만 원이다.” 사내가 말했다.
“야, 치사허다. 누 돈이냐?”
“그건 알아서 뭣 헐래?”
“곰팽이 돈이지야? 니, 나 돈 안 받고 곰팽이 돈 받을 것이냐? 더런 자식.”
“곤평이허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좋다. 나도 다섯 개 준다.”
“같은 돈이면 니 돈 안 받겄어.”
윤태가 눈알이 뒤집혀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내는 의자 등에다 몸을 깊숙이 묻고 탁자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피곤했다. 그는 고개를 잦히고 눈을 감았다. 삼십 분쯤 기다리고 있자, 윤태가 돌아왔다. 그는 돈뭉치 세 개를 탁자 위가 아니라 사내의 가슴과 배 위에다 내팽개쳤다.
“십만 원은, 내일, 주마. 인자 술이나, 한잔, 흐꺼나?”
윤태가 숨을 쌔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사내는 의자 등에서 몸을 떼고 흩어진 돈다발을 주웠다. 하나는 끈이 떨어져서 한장 한장 주워야 했다. 그는 주운 돈다발을 탁자 위에 윤태가 던져 놓은 돈과 합쳐서 그의 돈 옆에다가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높이가 같았다.
“곰펭이 돈은 오늘 저녁에 당장 갖다 줘뿌러야 헐 꺼이다. 이 더러운 놈아. 나머지기 돈마저 받고 갖다 줄래?” 윤태가 서서 돈을 만지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내는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다. 그리고 일어서서 윤태의 가슴에다가 칼을 내밀었다.
“너, 이것이 뭣인지 알겄제? 소리를 질러라. 사람들이 니 송장 칠라고 쫓아올 거이다.”
“이, 이것이 뭣이다냐?”
“나는 눈이 뒤집힌 놈이다. 자식헌티 애비 노릇 못 허고, 부모헌티 자식 노릇 못 헌 놈이다. 니 또 우리 동생 건딜래, 안 건딜래?”
사내는 탁자 옆으로 비켜서서 윤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윤태의 멱살을 꽉 조여서 다그쳐 틀어쥐고 칼 끝을 그의 울대뼈에다 댔다.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는 니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어쩔래. 말해 봐라. 니 또 우리 동생을 귀찮게 헐래, 안 헐래?”
“알었다, 알었어. 알었단 말이여.”
“말을 해라. 잘라서 말을 해라.”
사내는 멱살 틀어쥔 손을 비틀었다.
“다신 안 그럴란다.”
사내는 윤태의 멱살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난폭하게 그를 밀어서 의자에 앉혔다.
“내가 헌 말을 잊지 말어라. 나는 언제든지 니를 죽일 수 있다. 사람이 넘을 못 죽이는 것은 지 목심이 아깝기 때문이다. 지 한 목심만 베리기로 작정을 허먼, 언제 어치케 죽여도 한 사람 골로 보내는 것은 에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오늘 니를 죽이러 왔다가 그냥 간다. 고맙게 생각해라.”
사내는 의자에 올려놓았던 한쪽 발을 내리고 칼끝을 윤태한데 겨눈 채 탁자 위의 돈을 모조리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가만히 앉아 있거라. 곰팽이는 내 말을 안 들었다. 그래서 이 칼에 피가 묻었다.”
사내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뒷걸음질쳐서 방문을 연 다음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대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안방에서 텔레비전 소리만 났을 뿐, 건넌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는 집 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역의 벽시계는 여덟시 이십오분을 조금 지나고 있었다. 제일 빠른 기차가 삼십 분 후에 떠나는 서울행 완행열차였다. 그는 그 차의 표를 끊었다. 그가 매표구를 막 돌아섰을 때 누가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오빠, 어쩔라고 그요? 오빠도 사람이요?”
“깜짝 놀랬다. 니는 언제 나왔냐?”
“집에다가 그릇만 던져 놓고 바로 나와서 두 시간을 기다렸소.”
“잘 나왔다, 우리 억순이. 이리 오니라. 한쪽에 가서 이야기 좀 허자.”
“이야기헐 거이 뭣이 있소? 얼렁 내놓시요. 오빠도 되겄지만, 나도 배도 고프고 하로 종일 갯지렁이 줍니라고 허리도 뿌러져 뿔라그요.”
“일이 벅차지야? 오늘은 많이 잡았냐?”
“이 키로 전표 받았소.”
사내는 동생을 데리고 대합실 밖으로 나가서 으슥한 한쪽 구석으로 갔다.
“여그 돈이 있다. 보따리는 가져왔냐?”
“정신없이 나오니라고 그냥 왔소.”
“그럼 헐 수 없다. 가방째 가져가거라. 내 입던 헌 속옷이 들었다만 그냥 가져가거라. 가만, 뭐 하나만 빼내자.”
사내는 과도를 슬그머니 꺼내 가지고 바지 호주머니에 찔렀다.
“뭣이요?”
“칫솔이다. 참, 그러고 보니 노자가 없구나. 나 십만 원 하나만 줄 수 없겄냐?”
“후유. 어쩔 것이요, 다 뺏긴 셈쳐야제.”
영이는 오빠에게 십만 원 한 다발을 빼내가게 했다.
“고맙다. 조심해서 잘 가지고 들어가거라.”
“오빠, 영순이는 어쩌면 좋다요?”
“외가에 기별해서 집으로 오라고 해라. 아무 일 없을 거이다.”
“윤탠가 뭔가 허는 놈을 잡아 죽여야 헌단 말이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가 있냐?”
“미친년. 영순이가 죽어야 헐 거이요.”
“어서 들어가 봐라. 독채 큰 놈 얻어라. 그리고 영달이가 놀러 오면 고모가 책값이나 좀 줘라.”
사내는 영이가 대합실에서 홀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밖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벌판』, 나남, 1993. 1995년 부분 수정)
2016년 5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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