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진실규명과 평가
-구례사건에서 여순사건으로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2008년 7월 17일에 진상규명 결정이 내려진 ‘구례지역 여순사건’은 여순사건 발생 60년 만에 국가 차원의 위원회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간인 학살 사실을 확인하여 명예회복 조치를 촉구했다는 점에서 크고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건 발생 후 수십 년 동안 여순사건은 공론화되지 못했고, 단지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쯤으로 간주되어 민간인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빨갱이’로 간주되어 온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또한 진상규명 결정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위원회로 줄임)의 조직적 활동뿐만 아니라 수년간에 걸친 유족, 시민단체, 학계의 노력이 응집된 결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여순사건에서 민간인학살의 가해자는 주로 군.경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군경이 주민을 학살했던 경험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구례사건 진상규명이 군.경-민 관계를 제대로 확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순사건 관련 진상규명으로는 처음 결정된 구례사건은 이후 순천, 여수, 광양 등 여순사건 진상조사에 주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구례사건 보고서에 대한 검토는 필수적이다.
그것은 보고서의 성과와 미진함을 검토하는 것이고 그 미진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위원회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처음 출범할 때와는 다르다.
더욱이 조사를 전담하는 전문 인력과 조사 수단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진상조사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한정된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는 주위의 더 많은 도움일는지 모르겠다.
사건을 조사하고 작성하는 일은 주어진 결과물을 평가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평가에 임하고자 한다.
본 발표문은 [구례지역 여순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보고서)를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미진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세세한 사실 지적보다는 큰 범주에서 논의할 수 있는 몇 가지 논점에 한정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논의할 점은 조사가 지역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구례’와 ‘1948년 10월말부터 1947년 7월까지’라는 시기 문제이다.
두 번째로, 위원회는 여순사건을 직권조사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구례사건은 신청조사가 아닌 직권조사에 따라 이루어졌다.
과연 구례사건 조사에서 직권조사는 충분히 이루어졌는지 검토하겠다.
세 번째로 가해자와 피해자 진상규명 부분이 보고서에서 어떤 내용으로 서술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네 번째로 보고서에서 사용된 자료의 문제를 문헌자료와 구술자료의 측면에서 검토하겠다.
다섯 번째, 위원회의 진상규명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족, 시민단체, 학계와의 네트워크가 긴요하다는 생각 아래, 위원회와 이들 주체들간의 관계를 검토하겠다.
여섯 번째로 보고서의 서술 방식을 짤막하게 검토하겠다.
마지막으로 구례지역 여순사건 보고서가 ‘여순사건’ 보고서라기보다는 ‘구례지역’진상보고서에 머물고 있는 평가 아래, 여순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개괄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