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이 가려지고 검은 하늘이 세상을 뒤덮었다. 검은 하늘이 석 달 열흘 동안 땅을 뒤덮어서 살아 있는 모든 식물이 죽어갔다. 그뿐이랴.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도 먹을 것이 없어 굶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어두운 밤만 계속되는 세상에서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한 채 헤맸다. 서로 부딪쳐도 누가 누군지 알 수조차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흉흉하게 변해갔다. 세상이 망한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돌고 돌았다. 장길손은 신이 나서 며칠 동안 춤을 추었을 뿐이었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느새 봄과 여름이 지나갔다. 그래서 마침내 장길손이 춤을 추던 남쪽 평야지대에 흉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장길손이 흉년을 몰고 오다니!” “이제 무얼 먹고 사나!” 사람들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껏 먹여주고 옷 해 입혀줬더니….” “에잇! 하는 짓이라고는!” 사람들이 농사짓던 연장을 손에 들고 무리 지어 장길손에게로 달려들었다. 장길손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장면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거인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상을 창조한 거인들은 워낙 크기 때문에 ‘우주’와 어울려야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거인족들과 전쟁을 벌여 거인족들을 사람들 세상에서 몰아낸다. 그래서 일부 살아남은 거인족들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산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끼리 사는 것이다. 우리 신화에 나오는 옥황이라는 하늘신은 제우스와 신격이 비슷하다. 단군신화의 환인이나 탐라신화의 천지왕과 같은 신격이다. 여신 마고가 옥황과 다툰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나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는 우리 신화에서 거인 장길손은 사람들 세상을 스스로 떠났다.
<< 장길손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북쪽으로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북쪽은 인심도 좋지 않고 먹을 것도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굶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걸을 힘조차 없다. 장길손은 너무 배가 고파 돌이든 나무든 흙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그제야 비로소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몇 발자국 더 가지 못했다. 배가 아파서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뒹굴다가 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고 설사까지 했다. 입 속에서 나무, 흙, 돌, 바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그가 토해놓은 것이 쌓이고 쌓여 큰 산이 되었다. 그게 바로 백두산이다. 그리고 설사가 흘러 내려간 것이 태백산맥을 이루었고, 똥덩어리가 튀어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 탐라, 곧 지금의 제주도가 되었다. >>
독특한 설정 재미있는 상상력
참으로 재미있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뒹굴다가 토하고 설사하는데, 웬 똥덩어리가 멀리 튀어나가 제주도까지 만들었는가 말이다. 물론 제주도가 만들어진 이유까지 설명하려고 상상력을 펼쳤겠지만. 장길손의 똥 이야기는 물론 마고의 똥 이야기가 전승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고가 똥오줌을 누는 일도 새 땅과 새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궂질이라는 땅이름이 생긴 이유를 들어보자.
<< 저 부북(府北面) 무전에 산만댕이(山頂) 등은 한 등이라도 바우(바위)가 있는데, 그러이 저 부북 쪽을 보고설랑 앉아서 그 똥을 누었다고 카이끼네, 그 바우 이름이 통시방우(통시는 ‘화장실’이라는 뜻의 우리말, 방우는 바위)라. 저쪽 산 이쪽 산에 바우가 크다. 먼 데서 봐도 큰 바우인데, 마 덩그래 보이거든. 그게 통시방우라 카이끼네. 이짝 것도 통시방우고 저짝 것도 통시방우인데. 거리가 이래 멀어. 그래 산을 지고 댕기는 마고가 거기서 그 돌에 이래 걸치고 앉아 오줌을 누기를, 이 부북 쪽을 보고 누니 마 산이 무너졌다카이. 오줌에 마 산이 무너져가 동네가 생겼어. 그 동네 이름은 무전리야. 그 반대쪽, 그러니까 똥이 떨어진 데는 저 상동면인디 저리 널쪄 놔놓으니 그 궂질이라카는 동네가 생겼어. 똥이 내려가니 궂다고 그래 동네 이름을 궂 질이라카고.[일동 웃음] (밀양군 삼랑진읍, 설삼출, 남·67)
나무와 돌 바위 따위를 다 쏟아낸 장길손은 남쪽이 그립고 자기 처지가 한심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가 흘린 눈물은 한없이 흘러 동서 양쪽의 두 줄기로 갈라져 내려갔는데 한 줄기는 압록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두만강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강들의 지류도 생겨났다. 마음껏 울고 난 장길손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를 돌아보며 길게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소리가 거친 바람이 되어 주변에 있는 것을 다 날려보내는 바람에 이번에는 만주벌판이 생겨났다.>>
| 그제야 정신이 든 장길손은 자기를 후대한 남쪽 농민들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는 남쪽 사람들에게 거름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가 토해놓은 백두산 위에 서서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 그것이 장길손의 생각과는 달리 홍수를 이루어 북쪽 사람들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고, 남쪽 사람들은 더 아래로 떠내려가서 그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 사람의 시조가 되었고, 북쪽에서 떠내려온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장길손신화는 마지막까지 거인이 인간과 어울려 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인이 인간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거름이 되라고 오줌을 누었는데, 그만 홍수가 져서 인간 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이다. 이런,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거인신으로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닌가? 애걔걔… 신이 그것밖에 안 돼? 그래서 민중들은 그야말로 ‘단순’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착하디 착한’ (너무 착해서 바보 같다!) 장길손을 이야기하는 재미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야기해온 것이다. 단순하고 착하디 착한 것! 그것이 민중의 본마음이기 때문일까?
같이 살수 없는 거인 흔적만 남길 뿐
탐라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들. 이들은 어부들을 숨겨준 여신 영등을 찢어 죽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472E435113083A27)
거인 장길손의 이야기 마디들은 참으로 ‘재미있고 웃기는 이야기’로 전해 내려왔다. 장길손의 볼기를 치려다 치지 못하고 지쳐 죽었다는 또 다른 이야기 마디도 있다.
<< <앞부분 생략> 그만 흉년이 들고 말았다. 백성들이 흉년이 들게 한 장길손을 불러다 벌을 내리라고 청하여 왕이 그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길손을 잡으러 갈 것도 없이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렸더니 머리가 대궐 마당에 닿았다. 볼기 오십 대를 치라고 했는데, 볼기짝이 하도 멀어서 하인들이 볼기짝 쪽으로 가다가 지쳐 죽었다. >>
원래는 장길손이 웃기는 주체였는데, 여기서는 되레 왕과 하인이 웃기는 주체가 되었다. 거인 장길손은 겉으로는 우습게 보인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인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인의 행동은 거인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거인 장길손은 그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의외의 결과에 늘 당황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미 거인의 시대는 가고 인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같이 살 수는 없다. 거인이 인간이 될 수는 없다. 화해할 수 없는 거인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홍수다. 결국 거인이 인간을 도와주려고 눈 오줌이 홍수를 몰고 온다.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한 세계가 끝나는 것이다. 거인은 인간에게 세상을 창조해주었지만, 또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신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그것이 신화적 사고다. 거인신이 시작했으므로 거인신이 끝낸다. 그러므로 거인신은 멀리해야 할 신이다. 가까이할 수 없다. 그래서 죽어서 산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에 그 흔적을 남길 뿐…. 우리 신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들고 있는 ‘장군’으로, 혹은 멀리 떨어진 섬에 사는 외눈박이 거인으로 위험한 거인신은 유폐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속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둔다. 중원의 우주거인 반고는 해체된다. 반고의 몸으로 세상을 창조하니, 그 기운은 바람과 구름이, 소리는 우레가, 왼쪽 눈은 해가, 오른쪽 눈은 달이, 팔다리와 몸통은 사방 끝과 오악이, 피는 강이, 힘줄은 지형이, 살은 논밭이, 머리털은 별이, 솜털은 초목이, 이와 뼈는 쇠와 돌이, 정액은 보석이, 땀은 비와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의 거인신 위미르의 몸도 해체되어 미드가르드라는 땅이 되고, 피는 바다와 호수, 뼈는 산맥, 이와 부서진 뼈는 바위와 자갈, 뇌수는 구름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인간은 여전히 살아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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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 발행일 : 2003 년 11 월 13 일 (409 호) | 쪽수 : 68 ~ 70 쪽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onga.com%2Fdocs%2Fmagazine%2Fweekly%2F2003%2F11%2F06%2F200311060500025%2Fimg%2Fblank.g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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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 들어보는 얘기인데 재밌습니다.^^
머물러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