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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4 / 이영숙 베드로 수녀,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입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랬어요. 수녀들은 뭐 하러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만나러 다니고, 냄새나서 가족들도 만지기 꺼리는 환자들의 손을 주물러 주고 말동무까지 해 주는 건가? 특히 무더운 날에도, 치렁치렁 머리까지 긴 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기도를 해 주는 걸 볼 때면, 자식도 남편도 없이 사는 수녀들 인생이 참으로 딱했어요.”
이 자매는 십자가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나 자선, 단식과 같은 가치를 조금씩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사순 동안 단식이나 단주, 혹은 금연을 하면 괜한 것을 한다고 딱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예수님 등 뒤 십자가를 거부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의 욕구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가치 있는 길입니다.
수녀님은 수술을 거부하는 자매에게 이렇게 현실적으로 설득을 했습니다. “맞아요. 저희 같은 딱한 사람들도 이렇게 기쁘게 사는데, 자매님은 더더욱 사셔야죠. 수술도 한번 못 해 보고 포기하면 가족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자매님이 싫어도 가족을 위해 수술을 받아보셔야 해요. 수술 결과가 나빠도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전히 다른 병원에서는 다 소용없다는데 이 병원에서만 유난히 수술하라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의 설득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신과 같은 암 환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웃기도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을 받을 때 자신의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김흥순 데레사 자매는 고통을 불행으로만 여겼습니다. 수녀님을 보면서도 쓸데없이 고통만 받는다고 여겼고, 자신이 수술을 받는 것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생겼을 때 치유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용기 없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닌 허황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후에 비로소 영광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전삼용 신부님 강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