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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 민족이 고래로부터 지켜 내려오는 추석 명절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조상들은 이 날을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날로 여기고 조상을 기리고 한가윗날에는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정담을 나누며 음식을 먹고 놀이를 하는 우리민족의 축제의 날입니다.
일전 어느 기관에서 조사한 것을 방송에서 보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추석에 시댁에 간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준비하느라고 수고했다, 어서 친정에 가봐야지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조금 더 있다 가거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더 있다 가라는 말이 사실은 좋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이기에 듣기 싫은 말이 되고, 며느리가 시댁에 잠시라도 더 있는 것이 힘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명절이 되면 꼭 며느리만 힘들게 일해야 합니까? 누구에게나 사랑이 넘치면 감사가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평이 넘칩니다. 감사가 넘치는 관계가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성경은 다른 경전과는 달리 감사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는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 그리고 입술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감사하라는 말은 아주 강한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어디에도 원망하라는 말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말하기를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복음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매를 맞고 억울한 투옥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옥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감옥에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찬송했습니다. 이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립니다. 간수가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빌립보가 변화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감사로 시작한 바울의 2차 전도는 복음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혔습니다. 고린도전서 10:30에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오.라고 말합니다. 비록 비방거리이지만 감사하면 비방거리가 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무엇이든 넘치면 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것도 과하면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습니다. 과하면 또한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넘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모자라도 안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비가 와야 하지만 넘치면 홍수가 납니다. 바람이 불어야 시원하고 좋지만 지나치면 태풍이 됩니다. 음식도 먹어야하지만 과식은 금식보다 해롭습니다. 그런데 넘쳐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은혜를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고후 9:8). 지혜와 총명이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엡 1:8). 넘치는 기쁨이라고 합니다 (고후 8:2). 영광이 넘친다고 합니다(고후 3:9) 의의 선물이 넘친다고 합니다. (롬 5:17) 이와같이 넘쳐도 괜찮은 것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감사가 넘치는 삶이 이처럼 은혜와 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의가 넘치는 삶이 되는 줄 믿으십시오.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라 합니다. 이 말은 분에 넘치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감사란 말의 헬라어는 유카리스타입니다. 카리스란 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감사는 한마디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넘치는 감사로 보답을 해야 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라면 감사가 넘쳐도 좋습니다. 감사의 조건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에 깊이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모두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이를 감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말합니다. 넘치는 감사의 조건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라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 받아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골로새 교인은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구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식당이나 어떤 영업장도 주인이 바뀌게 되면 리모델링을 하게 됩니다. 식당에 맛이 바뀝니다.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이처럼 주인이 바뀌면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바울 서신 전체에는 예수님이란 단어가 219회 나타납니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272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란 단어는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 사탄이라는 단어는 10회 나타나고, 마귀라는 단어는 6회 정도 언급됩니다. 성경은 주님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어 키리오스란 단어는 주인 혹은 위엄의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밝은 빛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그는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주라는 말은 누구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위엄스런 존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선생이여라고 합니다. 그물을 내리고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그는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 라고 하는 순간 그의 삶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전에 무엇을 따랐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누구나 다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젊은 관원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앞에 모셔놓고도 죄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율법을 행하라고 했을 때에 내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행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자세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것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마음의 주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주인은 여전히 물질이었고, 지식이었고 명예였습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헨리의 대표적인 시 인빅터스(Invictus)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내 영혼의 선장도 나다 정말 그렇습니까? 자신이 자신의 주인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자신이 조절할 수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아닙니다. 반면에 아일렌드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이 끝나 버렸다 누가 더 겸손합니까? 누가 더 확실합니까? 누가 더 지혜롭습니까? 헨리가 아니라 와일드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넘쳐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미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돈은 최상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 마십시오. 돈을 종으로 부리십시오. 여러분은 내 주인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건강이나 미모입니까? 무엇이든 내가 주인으로 섬기면 그 주인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낭패와 실망이 끊이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것을 내려놓는 순간, 내 마음속에 평안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십니다.
시편 23:5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이 절은 시편 23편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님 때문에 넘치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이시기에 다윗은 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넘치는 감사의 삶을 우리들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 모두 그 안에 뿌리를 깊게 박으면 감사함이 넘치게 됩니다.
7절입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뿌리를 잘 내리면 감사함이 넘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란 말은 식물을 비유한 말로서 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일이야말로 단번에 그리고 영구적으로 되어 진 것임을 시사합니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절대로 옮기거나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움을 받아라는 말은 굳건한 터 위에 건물을 지어 올라가는 형상을 비유한 것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이 잘 세워집니다. 이런 삶이 될 때 감사가 넘칩니다. 나무는 뿌리를 통하여서 수분이나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나무를 지탱하게 합니다. 나무의 잎과 줄기와 가지는 각자의 교류와 작용을 통하여 나무가 잘 살게 합니다. 뿌리는 나무가 자라기 위한 기본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뽑히지 않고, 또 물을 잘 빨아들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위로 잘 자랍니다. 땅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들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뿌리입니다. 깊은 뿌리가 높은 나무를 지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뿌리 깊은 신앙의 사람이 됩시다.
로마서 11:18에는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나무 가지가 아무리 멋있게 뻗었고, 잎이 푸르고, 줄기가 든든해도 뿌리가 약하면 태풍에 뽑히고 맙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 돌밭에 떨어진 씨앗을 보세요. 마태복음 13:6에는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뿌리가 마르면 절대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뿌리가 없다거나 뿌리가 말랐다거나 뿌리가 썩었다면 그 나무의 잎이나 줄기나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다음 날 지나가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로서의 생명이 끝납니다.
중국에는모소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자라는 식물 중 가장 특이한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으면 5년 동안은 어린 싹밖에 볼 수 없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물을 주고 가꾸어도 고작 3센티밖에 자라지 않습니다. 5년이 지나면 모소 대나무는 기절할 정도로 빨리 자랍니다. 90일 만에 약 27미터나 자랍니다. 모소 대나무가 실제로 자란 건 언제입니까? 처음 5년입니까? 마지막 90일입니까? 90일 동안 자란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5년 동안 자란 것입니다. 나무는 보이지 않는 부분 즉 땅 밑의 뿌리 체계가 나무를 결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라고 있습니다. 땅속에서 뿌리를 잘 내리게 되면 보이는 부분이 자라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박으면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뿌리를 박으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미혹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굳게 서 있으면 미혹하는 것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분별력이 없이 너무도 쉽게 거짓된 말이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는 찬송처럼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입니다. 그 위에 뿌리를 내리면 든든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미혹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까지도 의심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게 되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깊이 박고있으면 이런 모든 미혹이 겁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반석위에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호세아 14:5에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합니다. 백향목은 종종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시편》80편 10절에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였고, 92편 12절에는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의인의 성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왕 백향목은 그 뿌리가 깊고 튼튼합니다. 하나님께 뿌리박힌 삶은 견고합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릴 때 감사하는 삶을 영위합니다. 감사를 하되 넘치게 하라고 합니다. 든든한 뿌리로 믿음에 굳게 설 때에 우리의 삶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업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에게 업히시기를 원하고, 당신에게 뿌리를 내리시기를 또한 원하십니다.
캘리포니아의 세코이아라는 큰 나무는 거센 바람에도 뿌리가 얼기설기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다른 나무들이 다 쓰러져도 쓰러지지를 않습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선인장은 그 뿌리가 200미터까지 뻗어서 물을 찾아갑니다. 연못의 연꽃은 더러운 물에 살지만 뿌리는 맑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뻗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뿌리 때문에 연꽃은 깨끗이 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굳건히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뿌리를 깊이 내려 흔들리지 않게 합시다. 주님을 찾아 뿌리를 내립시다. 주님을 향해 멀리멀리 뿌리가 뻗게 합시다. 이런 든든한 뿌리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스텐리 존스는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감사가 넘치면 자신에게 유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자에게 넘치게 주십니다. 매일의 삶이 잔이 넘치는 삶입니다. 은혜에 보답하면서 감사를 넘치게 하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 사람의 감사의 정도와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는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감사하므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으시면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으면 감사가 넘칩니다. 이런 넘치는 감사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추석을 맞아 감사함으로 더욱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누리는 귀한 가정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번 추석을 통해 받은 은혜 감사하며 더욱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더욱 더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