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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스크랩 <이화장>의 최초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사료상의 기록
한베러브 추천 0 조회 96 14.11.28 23: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9년 4월 28일 서울시 기념물 제6호에서 국가 사적 제497호로 승격된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초대정부의 조각본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동 유적이 누구에 의해, 언제 최초 조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유적의 원형을 복원함에 있어서는 동 유적의 최초 조성자와 조성연대, 그리고 조성 당시의 모습, 그리고 그 이후 시대별 변화상 등을 최대한 철저히 파악한 바탕 위에서 어느 시기를 동 유적의 복원시점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초의 모습 규명을 위한 사료조사는 유적 복원 논의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화장의 최초 조성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를 소개한다. 바로, 『黃溫順 - 天聲을 받들어 九十年』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출판사 <해돋이>에서  1992년 출판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회사인 대한생명보험회사를 창립한 강익하(康益夏, 1897~1954)의 부인으로 오랜기간 동안 사회사업을 활발히 해 '고아들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지고 학교법인 휘경학원 이사장과 원불교 종사(宗師)를 지낸 황온순(1903~2004)의 일대기와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회고담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황온순은 195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미남배우 록 허드슨과 안나 카슈피가 주연한 영화 <전송가(Battle Hymn, 1957년작)>의 실제 여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 황온순의 사진(왼쪽)과 영화 <전송가>의 포스터(오른쪽)

 

   이 책에는 황온순이 강익하와 결혼한 후 1931년 이화장 부지를 사들여  저택으로 조성하고 1937년 다시 이를 친척에게 맡긴 후 돈암동으로 이사하기까지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화장의 탄생 비화를 알 수 있는 기록이므로 아래와 같이 발췌하여 게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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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창에서 결혼까지 - 이화여전(梨花女專) 그리고 강익하(康益夏)

 

   1923년 온순은 이화여자전문학교 보육과[유치사범과]에 들어갔다. 엄격히 말해서 그녀는 처음에는 이화학당 대학과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학제 변경으로 이화여전을 졸업하게 된다. 당시 이화학당에는 갖가지 서클이 있어 학생활동이 활발했다. 이를 테면 십자가회·공주회(公主會)·주니어 리그·리더스 서클·문맹 퇴치와 농촌 계몽을 위한 계몽대·여학생 선교회 등이 있었는데 이문회·선교회·계몽대 등은 1922년 김활란·김필례·유각경 등에 의해서 한국 최초로 조직된 YWCA가 교내에 생기자 흡수됐다.

 

   이들 학생은 1926년 6월 10일 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인산할 때 흰 광목 상복에 검정 댕기를 드리고 돈화문 앞에 윤번으로 몰려가서 망곡을 하는 한편 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조선호텔 앞길에 도열하였다가 순종의 상여가 지나갈 때에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산발적인 만세 사건이 전국에서 일어나 1천여 명이 투옥되었는데 이를 불러 '6·10 만세사건'이라고 한다.

 

   전문학교 교사(校舍)는 이화학당 맞은편에 있던 손탁호텔을 헐고 지은 프라이 홀이었다. 새 교사는 3층 건물로서 총건평 716평에 15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 교실 10개, 실험실 3개, 회의실 1개, 식당 1개, 3명의 선교사 선생과 한국인 선생의 숙사, 부엌, 재봉실, 도서실, 응접실이 있고 수도, 전기, 스팀시설 등을 완비한 건물이었다.

 

   온순이 재학중이던 이전(梨專)의 한국인 선생으로는 한문 선생이었던 김극배·이성호 그리고 김활란·하복순·서은숙 등이 있었다.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 제5회(1918년) 졸업생으로서 1924년 미국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톤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는 도중에 교장 아펜셀러의 요청을 받고 귀국,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하복순은 대학과 제6회(1919년) 졸업생이고 서은숙은 제9회(1923년) 졸업생이었으며 이화학당 대학과는 제11회(1925년)에 마지막 졸업생을 내보냈다. 온순은 서은숙 선생과는 한동안 이웃에 살았던 연고로 한결 가깝게 지냈으며 같은 반 친구로는 훗날 교수가 된 김애마, 이전 사감을 지낸 이정애가 친한 편이었다.

 

   당시 이화학당의 학당장은 미스 아펜셀러[Miss Alice Rebecca Appenzeller]였다. 그녀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인 아펜셀러 목사와 어머니 엘라 닷지 사이에서[서울의 정동에서] 태어난 한국 최초의 백인이었으며 1922년 미스 월터에 이어 제6대 학당장으로 취임했었다. 아펜셀러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대학으로 승격시키려고 애썼으나 총독부의 식민지 탄압정책의 탓으로 1925년 4월 어쩔 수 없이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까닭에 1926년 2월에 이전(梨專)을 졸업한 황온순은 제2회 졸업생이며 졸업생수는 27명이었다. 그녀가 대학에서 보육학을 전공한 것도 '남을 도와주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버지의 교화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대학을 갓 나온 온순은 바로 일본계 정토종 불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화광교원(和光敎院)에 들어가서 관수동에 화광유치원을 신설하고 교사 일을 맡아보았다. 화광유치원의 일은 한두 해를 빼고 장차 10년 간 계속된다.

 

   그때부터 함께 일해 온 박정자[전 광화문우체국장 이범상의 모친]는 온순의 분신처럼 나중에 한국보육원에서 일을 도와주고 한보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다가1969년 세상을 떠났다. 온순과 박정자는 40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사회에 첫발을 딛는 온순은 유치원이 적성에 맞을 뿐더러 새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연안에서 만주로, 다시 이전(梨專) 시절까지 그림자처럼 강익하(康益夏)는 집요하게 뒤따르고만 있었다. 강익하는 법원 서기를 그만두고 1927년 9월에 일본이 사또(佐藤卯太郞)의 자금을 끌어 서선합동전기회사(西鮮合同電氣會社)를 설립하여 상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8년간에 걸친 강익하의 열성을 황온순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는 온순이 꺾여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은 1928년 2월 6일 온순의 직장인 화광유치원에서 교원장의 주례로 식이 올려졌다. 신랑 강익하는 황온순을 아내로 맞이했다. 결혼식은 조촐했으며 하객도 많이 부르지는 않았다. 주례는 '신부는 신랑을 지아비로 섬겨 공경할 것이며 신랑은 신부를 결코 배신하지 말도록...' 당부를 했다. 신랑도 상당한 미남이었다.

 

   신접살림은 인왕산 기슭의 사직동에서 시작했다. 남편은 서선합동전기회사에 나가고 아내는 화광유치원에 나가는 평화롭고 서로 바쁜 나날이었다. 제2의 인생을 새로 출발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강익하의 전기회사는 사리원·재령 등지에 지사를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신혼부부는 지방으로 내려갈 필요가 생겼다. 남편이 상무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929년 봄 재령 가까이에 있는 삼지강(三芝江)으로 내려가서 40원을 주고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이사를 했다.

 

   재령은 남편 강익하의 고향이다. 거기에는 시집이 있고 익하는 3남 1녀 중의 둘째 아들이었다. 남편은 사업상 출장이 잦았고 그 때마다 시집 식구들이 찾아와서 간섭이 정도 이상으로 심했다. 그럼에도 그 해(1929년) 11월 11일 장녀 운경(芸京)을 업고 금촌에 살고 있던 누이동생 집에 들러 얼마간 쉰 후에 상경하였다. 다시 사직동에 자리를 잡고 화광유치원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듬해(1931년) 7월 17일 아들 필국(弼國)이 태어났다. 동대문부인병원에서이다. 아들을 얻는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남편 강익하도 이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으며 집안은 늘 화기애애했다. 

 

   2년 후인 1933년에는 둘째딸 혜경(惠京)이도 태어났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아이 어머니 황온순의 오정이 본능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위한 인생설계에 나섰다. 온순에겐 아버지 원준(元俊)이 남기고 간 유산도 있었지만 남편의 사업도 잘 되어 돈은 넉넉한 편이었다.

 

   먼저 통의동에 널따란 한옥을 사들여 밭을 정원으로 꾸며나갔다. 당시로서는 희귀한 나무들을 심고 금강산에서 날라온 돌로 단장을 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야산 개발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제1차로 사들인 것이 이화동(梨花洞) 야산 기슭에 있는 3,000평의 땅이었다. 1931년의 일로 값은 3천원을 치렀다.

 

 

▲ 이화장 최초 조성 무렵의 황온순과 강익하

 

 

   온순에겐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셈이다. 음력 1월부터 열달 동안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날마다 목수·석공·미장이 등을 손수 지휘하면서 양주(楊州) 산에서 나무와 돌을 옮겨다 놓았다. 그리하여 이 해의 추석에 도배도 하지 못한 채 입주했는데 그 집이 바로 이화장(梨花莊)이다.

 

   이화장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여러 해가 걸렸으며 집주인 온순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비탈을 깎아내고 물이 나올 수 있는 자리에는 우물을 파고 쉴 새 없이 나무를 심었다. 밤나무·앵두나무·복숭아나무·살구나무 등등 양주에 사놓은 산에서 갖가지 나무를 날라다 심었는데 온순은 일찍이 유실수를 심는 일에 눈뜨고 있었다.

 

   이화장 공사가 한창이던 1931년의 9월, 밖에서는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휘몰아쳤던 1930년대 초에 일본 역시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만주에 있던 일본의 관동군은 만주의 실권자 장작림(張作霖)을 폭사시키고 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 장악하려는 음모였다.

 

   이 전쟁으로 일본의 경제 경기는 얼마간 회복되고 가까운 한반도에서는 훨씬 민감하게 전쟁 경기가 상승세를 치닫고 있었다. 이 무렵인 1932년 8월 강익하는 인천에 조선거래소(朝鮮去來所) 미두취인(米豆取引) 사무소를 개설했고 서울에서는 금익증권(金益證券) 회사의 전무로 취임했다. 서울의 조선거래소는 전부터 있었던 인천미두취인소와 나중에 생긴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합병한 것으로 대판곡물시장(大阪穀物市場)을 상대로 한 일종의 증권거래소이다. 미두취인원의 자격은 엄격하여 공증인 자격을 필요로 했으며 사회적 신망이 보증되어야만 했다.

 

   35살의 나이로 증권계에 나타난 강익하는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운도 따랐다. 손을 대는 일마다 척척 들어맞아 오성물산(五星物産)·오성산업 등도 창립, 경영하는 청년 실업가로서 장안에서도 이름이 났다. 저녁이면 손님을 대접하느라, 대접을 받느라 돈을 물쓰듯이 했다. 당시 국일관(國一館)·명월관(明月館) 등 요정은 그의 막후 사업장이기도 했다.

 

   강익하는 호경기를 타고 무척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서울의 북아현동에 집 다섯채를 사서 형제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온순은 돈이 생기는대로 야산을 사들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길잡이는 부동산 거간꾼 이소해(李小海)였다. 이소해는 황온순이라는 사람이 야산의 비탈을 사서 훌륭한 주택을 가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화장을 찾아와서 경기도 양주군의 야산을 사라고 집요하게 권했다.

 

   거간꾼은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의 양쪽에서 구전을 먹으니까 사업치고는 입맛이 당기는 사업이다. 온순은 산이 평당 3전 하는 당시부터 사들이기 시작하여 오늘날 한국보육원(韓國保育院)이 차지하고 있는 양주군 장흥면 심상리의 땅도 1934년 평당 30전씩 주고 사들인 것이었다.

 

   "저 산의 평수는 얼마나 됩니까?"

 

   온순이 물으면 이소해는 대답하기를,

 

   "평수가 다 무엇입니까? 새끼줄로 치면 50 타래는 될 거요."

 

   라고 말하면서 수 10만 평이 될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야산에는 으례 논과 밭이 곁들어 있는 법이다. 산을 보러 가려면 아침 일찍이 서울을 나서도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는 때가 많았다. 자전거마저 통할 수 없는 길, 샛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하는 길, 길이 전혀 없는 길 등 1930년대 초반 북한산 뒷기슭의 샛길은 의정부까지 여간 험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온순은 젊음을 지렛대로 삼아 이소해를 안동하고 하루 종일 야산을 현장 답사하곤 했다. 당시는 서울로 돌아와서 발이 퉁퉁 부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 애쓰면서 온순은 구파발에서 송추 너머 효자리까지 웬만한 야산은 다 사들여서 등기를 해 두었다.

 

   그러나 온순은 생(生)의 일로 여간 괴롭지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은 아니지만 당시 아직 젊은 나이의 아내로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1)

 

1) 『朝鮮人事興信錄(1935)』에 따르면 이 때 강익하는 김선녀(金善女)라는 이름의 본부인이 있는 상태였고 광화문통(光和門通) 111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2. 원불교와의 인연(1935~1950) -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

 

   무엇인가 새로운 활로를 찾아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온순은 1935년 7월 다섯살이 된 아들 필국을 데리고 훌쩍 금강산으로 떠났다. 금강산의 아름다움도 그녀의 괴로움을 식혀주지 못했다. 모자는 다시 발길을 원산으로 돌려 바다를 찾아갔다. 앞이 툭 트인 훤칠한 동해의 푸른 물도 온순의 헝크러진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다. 자고로 산은 고상하고 바다는 인자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들 필국은 산의 계곡이 좋아선지 금강산으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온순은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한 여름의 폭포수 물줄기도 별로 시원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장안사 영원암에서 우연히 이천륜(李天倫)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개성에서 온 불법연구회 교도라고 했다.  흰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곱게 빗은 이 여인에게 어쩐지 호감이 갔다. 그 몸가짐이 단정했기 때문이었을까. 온순은 그 산사에 함께 묵으면서 서로 오가는 동안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얼마간 털어놓게 됐다.

 

   "세상 일이란 모두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의 뜻에 따르시오."

  

   월타원(月陀圓) 이천륜 정사는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녀와 대담하고 있을 때 온순의 머리를 번득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스포츠 식으로 말하자만 룰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박애정신'을 강조하는데 불교에서는 '전생의 인연'을 강조하는 게 아닌가.

 

   온순은 내금강의 장안사 유점사를 넘어 마하연이라는 선원(禪院)에서 다시 이천륜과 만나게 됐다. 주지스님은 『初發心修行章』이라는 책자를 온순에게 주었다. 온순은 한달음에 읽어내려면서 크게 감명을 받는 대목에 부딪쳤다. 그것은 '世樂後苦인데 何貪善哉요 何不修哉리오'라는 귀절이었다. 세상의 모든 락(樂) 뒤에는 고해가 있는데 무엇을 탐할 것이며 어찌 불도를 닦지 않으리오라는 내용이었다.

 

   온순은 그 순간 머리를 휘감고 있던 무거운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천륜은 뿐 아니라 서울에는 불법연구회라는 단체가 있다고 일러 주면서 거기에서 정신을 수양하면 편안해지리라고 간곡히 입문하기를 권했다.

 

   서울로 돌아온 온순은 돈암동에 있는 불법연구회를 찾아가서 교무(敎務)인 응산(應山) 이완철 종사와 육타원(六陀圓) 이동진화 종사를 뵙게 됐다. 온순의 나이 33살 때의 일이다.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박중빈]가 1916년 4월 창시한 것으로 당시부터 불법연구회의 기초과정을 8년간 거쳐 1924년 6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불법연구회 본관 기지를 마련하여 출가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7개 부서를 설정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구상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의식주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소박한 공동체에 지나지 않았다.

 

   1927년에 이르러 불법연구회는 5개 부서를 설정하고 ㉠규약·경전을 연습하기 위한 교무부 ㉡일과 이치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부 ㉢모든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서무부 ㉣공부인이 공부하는 비용과 회원의 자녀 교육비와 본회를 창립하는 비용에 충용하기 위한 저축조합부 등을 설립, 정성을 다하여 노든 사람의 모범이 되고 모든 일에 표준이 되도록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일반 회원을 위한 선원제에 병행하여 청소년을 위한 학원제를 신설, 당시 배재고보생이던 박길진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동양대학 철학과에 이수시키는 등 학원의 기관 운영, 전문인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당시 영광에서 실시된 학원의 첫 교무는 이완철이었으며 서울에 불법연구회가 개설됨에 따라 이완철이 서울로 진출하여 교무를 맡게 됐다.

 

   원불교와 불법연구회의 이러한 내력을 황온순이 알 리가 없다. 그저 흔히 있는 시골 사람들의 수양단체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래도 돈암동의 법회에는 자주 나갔다.

 

   그러던 1936년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여 돈암동의 서울 교당에 들렀다.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의 초가집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중생을 보다 옳은 생활로 이끌려고 원불교를 창시해 낸 교조(敎祖)이다. 그는 1928년 4월 '약자가 강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되 우리 민족이 쇠망하게 된 원인을 세가지로 진단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개명인이 되는 길 ㉡경제적인 실력을 양성하는 길 ㉢편심(片心)을 놓고 원심(圓心)을 갖는 길을 지향해야 된다고 제시하여 훗날의 '새마을운동'을 이미 꿰뚫어 본 위인이다. 그는 당시 45살의 나이에 온순과 만나게 됐다.

 

   다음은 온순의 회고담이다.

 

   <그 당시 서울에 처음으로 교당을 설립했던 돈암동에서 상경하신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담임 교무이셨던 응산님과 육타원님이 함께 계셨다. 나는 대종사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인사할 줄도 모르고 그냥 있었다. 대종사님께서는 무명 바지 저고리를 입으셨고 육차원님은 옥색 치마 저고리를 입으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처음 뵙는 대종사님은 안광이 부셨다. 겁없이 들어선 나는 대종사님의 그 위풍에 눌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종사님의 첫말씀이셨다. 나는 천륜씨의 소개로 왔다고 대답하고는 물었다.

 

   "여기는 부처님 공부하는 곳이라던데요?"

 

   "그렇지라우."

 

  처음 듣는 전라도 사투리였다. 나는 촌사람들이 하는 곳인가 싶어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방자해졌다.

 

   "어떻게 부처 되는 공부를 합니까?"

 

   대종사님은 나의 당돌한 질문에,

 

   "내가 그러쳐주지" 하시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시며,

 

   "이 시계가 어디로 돕니까?"

 

   "오른쪽으로 돌지요."

 

   "몇 번 돌면 하루가 됩니까?"

 

   "스물 네 번입니다."

 

   "며칠 돌아야 한 달이지요?"

 

   "30일 돌면 한 달입니다."

 

   "몇 달 돌면 1년이지죠?"

 

   "열두 달 되면 1년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쉬운 것을 물으시니까 잠시 위축되었던 내 어깨가 펴지면서 말씨도 약간 거칠어졌다. 어린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왜 물으실까 하고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사람이 얼마나 살아야 많이 사는 것입니까?"

 

   "일흔 살을 살면 많이 살지요."

 

   "그렇지라우. 부처되는 것은 내가 가르쳐줄테니 이완철 선생만 만나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선 나의 법명을 황정신행(黃淨信行)이라고 지어주셨다. 나는 내심으로 응산님보다는 육타원님이 좋을 것 같았다.

 

   그때는 대종사님이라는 호칭도 몰라 그저 '시골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시골선생님만 오시면 가서 뵈었고 그때마다 나는 점점 부끄러운 생각과 잘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법회날이면 빠지지 않고 돈암동으로 가게 되었다.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몇 명 안되었다. 육타원님을 비롯, 성성원씨와 지환선씨 그리고 몇 분이 모여서 설법을 들었다.>

 

   온순은 이렇게 불법연구회에 들어가서 응산 이완철 종사로부터 『금강경』 강의를 하루에 1시간씩 배우게 됐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교당으로 가면 응산 종사는 이미 우물가에 나와 있었고 법당으로 들어가 좌복을 깔고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척 답답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배우다 보니 진리에 대한 새로운 터득이 있게 되고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일기 시작했다.

 

   수유리 화계사에서 그후 지도법사 이행원 스님과도 알게 되어 달마회 법문을 듣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온순에게는 육안의 경망스러움이 자꾸 송구스러워지고 혜안의 열림이 알쏭달쏭하게 비치며 스스로 그 무엇인가 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음 속에서도 모나고 비어있던 부분이 조금씩 원만하게 채워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교당 살림살이에도 관심이 생기고 부족한 것을 알았을 때는 집에서 먹을 것이나 살림 도구를 싸 가지고 교당의 부엌에 살짝 가져다 놓곤 했으며 가을의 추수기에 들어오는 곡물을 수레로 실어나르다 보면 어쩐지 신명이 났다. 초발심이란 이 무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온순은 이듬해(1937년) 이화장을 친척에게 맡기고 아예 돈암동으로 이사오고 말았다. 

 

2. 원불교와의 인연(1935~1950) -  해방 후 보화원(普和園) 설립

 

   해방이 되자 해외에 나가있던 한인들이 광복된 조국을 찾아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국에는 식량도 부족하고 원료난으로 공장이 가동되고 있지 않아 일터도 모자라고 혼란은 극심했다. 일인(日人)들은 하루바삐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日本人世話會'를 조직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황온순은 이해의 9월 서울 역전의 세브란스병원 맞은 편에 구호소를 차려 귀환동포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원불교의 주산 송도성 종사와 류산 류허일 대봉도가 밤낮으로 구호사업을 도왔다. 구호사업은 이듬해(1946년) 3월까지 계속됐다. 당시 온순은 동대문부인병원 주택에 살면서 순천상회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장녀 운경은 경기여중에, 아들 필국은 경기중에, 차녀 혜경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은 드넓어서 학생들에겐 낙원이었다.

 

   이 무렵 온순은 성의경과 함께 한남동의 약초관음사를 찾아갔다. 주지는 딱한 사정을 온순에게 호소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노자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절을 맡아주시고 저희 부부를 도와주십쇼.'하는 청이었다. 사찰을 비워주고 이어받는 데 흥정이란 있을 수 없는 법. 온순은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선뜻 1천원을 내어주니 부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했다.

 

   온순은 약초관음사를 인수, 그곳에 1946년 4월 '보화원(普和園)'을 만들어 원장을 맡아보면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전국에는 고아원이 4군데 밖에 없었다. 보화원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가 장티푸스 등 각종 질환으로 숨진 노숙자들의 자녀를 수용했으며 처음에는 고아·영아 18명 정도였은데 나중에는 원생이 40명으로 불어났다.

 

   그동안 이화장은 이승만 박사의 거처로 내주고 홍성기 감독과 신상옥 조감독이 제작, 주증녀·황정순이 출연한 우리나라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 '여성일기'를 위해서 제작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남편 강익하는 어릴 적에 재령의 학교에서 김구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운 연고로 환국에서 경교장에 자리잡은 김구 선새을 돕게 됐다. 당시(1946.9) 그는 대한생명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을 맡고 있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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