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방지일 (7) 성경구락부 결성 어린이 교육 평양 주일학교까지 부흥 효과
2008. 11. 2. 18:06
정오리교회 개척뿐만 아니라 대학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성경구락부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형편이 어려워 배움의 기회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다. 당시에는 진학 적령기에 맞춰 소학교에 진학하는 아동 수는 5명 중 1명꼴에 불과했다. 그러니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 모두 더없이 소중했고, 성경구락부는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전도수단이 됐다.
성경구락부는 숭실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프란시스 킨슬러(한국명 권세열) 목사를 주축으로 꾸려졌다. 나를 포함한 학생 3명은 권 목사를 도와 '소년개척구락부'를 설립했다. 그런데 일제는 '개척'이라는 어휘가 불온하다며 대신 '성경'이란 명칭으로 고치도록 명령했다.
'아니, 이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당장 '성경구락부'로 이름을 바꿨다. 주로 숭실대 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가르쳤는데, 과목은 성경 한글 지리 역사 등이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성경구락부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이 몰리니까 자연스럽게 조직도 확대됐다. 200∼300명의 학생이 모이는 한 구락부 수십 곳이 평양에 설립됐다. 1년에 몇 차례씩 전체 구락부 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2000∼3000명씩 모이는 행사라 전도의 큰 열매가 됐다. 운동회로 모일 때는 2500명이 들어가는 숭실대 체육관에서 개최할 정도였다.
당시 성경구락부의 왕성한 활동 덕분에 평양의 주일학교까지 크게 부흥했다. 성경구락부는 지금까지 적어도 100만명 이상의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기독교를 소개하는 신앙교육의 초석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특히 6·25전쟁 중에는 교육 기회를 갖기 힘들었던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됐다. 나는 성경구락부에서 수천명이 참석하는 큰 규모의 행사들을 치러내면서 온몸으로 많은 걸 체득했다. 경험만큼 큰 스승이 없는 것 같다.
훗날 중국 선교사로 나가 있다가 해방 이후에 귀국해서 보니 성경구락부는 이미 평양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돼 있었다. 성경구락부를 처음 만들었던 권세열 목사는 평양에서 결혼식을 갖고 가정을 이뤘고, 그 아들인 아서 킨슬러(한국명 권오덕) 숭실대 교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여성과 결혼까지 했다. 그 부부는 나중에 은퇴해 본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한국 교회를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왔다. 그 공로로 한국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유언대로 유해를 한국 양화진에 안장해 드렸다. 한평생 한국교회를 위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들은 목숨을 다한 육신까지도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하고, 공부하며, 교회사역까지 맡았다. 그러던 가운데 평양노회에서 고시를 치르고 전도사 자격을 얻어 정오리교회를 개척했고, 이어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어느덧 70년 세월이 지났다.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으니 평생 교회에서 산 셈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081102180611527